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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굿과 제의(祭儀)와 샤머니즘에 나타난 원형 이미지
【1】
시의 기능 중 예언은 주술성의 언어로 존재한다.
주술성은 영매작용 즉 영혼을 불러내는 소리로 이루진다는 뜻이다. 시각 이미지는 길들여진 언어지만 청각 즉 소리 이미지는 영매를 수반한다. 샤니에서 몽골의 버(수무당)나 허크(암무당)는 소리 즉 주술의 언어(呪文)로서 혼을 부른다. 영이 맑은 시절에 인디언들은 백리 밖에서 우는 늑대 울음소리를 듣고 냄새를 구별했다고 한다. 즉 허멍(영매를 부르는 소리)으로 영을 불러냈다.
그래서 길들여진 언어는 시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 넣지 못한다. 이 주술성의 언어도 곡선을 타고 흐르는 언어다.
시에서 말하는 록 언어와 발라드 언어 중 주술을 부르는 것은 록 언어가 아니라 발라드 댄스의 언어에서 나온다. 그 언어는 한밤중 반딧불처럼 떠서 흐르고 동굴 속의 박쥐 울음처럼 자연의 소리에서 온다. 색깔로 보면 원색으로 타오르는 색깔이고 이 색깔 속에서 영매자의 춤과 울음으로 온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오는 몸의 언어고 무병(無病)으로 오는 비논리적 언어다. 마치 땅꾼이 뱀을 부르는 옹알이와 같은 언어다. 그러므로 시의 언어는 무가(巫歌)의 성격을 지니며 굿과 제의에 헌신한다. 그건 광기(狂氣)의 언어고 엑시터시로 타오를 때 판(서사)을 짜며 오는 언어다.
이런 시야말로 원형 이미지를 형성하고 카타르시스를 주는 최상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형 이미지는 신화 속에 잠들어 왔다 ‘활과 리라’에서 한 손에 활을 들고 한 손에 리라를 든 올페우스 언어가 곧 주술성의 언어다. 저승 문턱에서 리라를 타면 지옥문을 지키는 케르베르 개의 울음도 멎고 죽은 애인까지도 불러온다. 에로스가 차고 다니는 화살은 세 개다. 그 중 금화살을 쏘면 사랑에 미쳐서 뱀이 개구리를 사랑하게 되고 눈에 콩꺼풀이 씌워 천사가 악마를 사랑하는 힘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런 원형 심상에서 흘러나오는 시는 최상의 시라 할 것이다. 그것은 시 속에 투입되는 영혼과 가락으로 영매작용을 일으킨다. 보다 쉬운 말로 하면 삶과 죽음을 뒤집어 경계를 지우는 커다란 떨림판으로 다가온다는 뜻이다.
적벽가에 나오는 군사 설움을 토해내는 새소리나 민요의 새타령, 나비 타령이나 뱃노래인 술비(생조기) 타령 등은 현실이나 노동 이전에 영매로서 작용하는 소리다. 예기에 소리는 하늘에서 나와 자연(땅)에 깃들고 그 품격은 인간에서 완성된다는 뜻은 깊이 새겨 볼 말이다. 때문에 기계음으로 조작되는 일회용의 록이 아니라 원형의 뮤즈 속에 있는 원형감각이 곧 시며 시 또한 하늘과 땅, 사람을 잇는 영매로서의 매개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를 읽을 때는 이런 주술적 가락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며 언어의 파괴와 실험성으로 읽는다. 그러나 주술성의 언어는 온몸을 떨림판으로 만든다.
이 경우 피뢰침은 마치 빙의가 들린 영혼을 지니고 서 있는 시인처럼 보인다.
이런 언어를 우리는 원시시대 동굴 속의 언어라고 부른다. 무가시인 게리스나이더를 ‘문명을 치유하는 시인’이라 찬양함도 이 때문이다.
왜 그런가? 유전자의 게놈지도를 호주머니에 넣고 시를 쓰는 ‘High Grace Reustane'의 시간과 공간이 아닌 때문이다. 즉 영혼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직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곡선에서 나오는 공간이기에 그렇다. 이 휴식의 공간 속에 우리가 잠들 수 있는 시간이 머물고 명상과 추억이 있다. 그래서 애니미즘이야말로 미신이 아닌 생명 자비사상의 구원으로 사상의 거처가 된다. 이 원형적인 삶이 곧 곡선에서 흘러나온 느림(Slow Life)의 삶이며 나는 아직도 이 느림 속에서 선(線) 조직의 공간을 찾고 신들린 언어의 상징을 찾는다.
대들이 휘인다
휘이면서 소리한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우듬지들은 흰 눈을 털면서 소리하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어떤 대들은 맑은 가락을 지상地上에 그려내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눈뭉치들이 힘겹게 우듬지를 흘러내리는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삼베 입은 검은 두건을 들친 백제 젊은 수사修士들이 지나가고
풋풋한 망아지 떼 울음들이 찍혀 있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방중 암수 무당들의 댓가지를 흔드는 붉은 쾌자자락이 보이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넘는
미친 불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눈 내리는 대숲 가에서」전문
제11회 정지용(1999, 5)문학상 수상작품이다. 이 시의 공간은 엑시터시로 가득차 있는 공간이다. 서늘한 대숲에서 묻어나는 원형의 심상은 다름아닌 무당의 붉은 괘자자락이고 이 원색 이미지는 흰 눈의 이미지와 대비되어 엑시터시로 발산한다. 그러니까 차가움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이미지다.
이 원형감각은 원래부터 남도적인 황토 빛깔의 울음이다. 손에 댓가지를 들고 흔드는 것은 북도무당이 아니라 남도무당이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넘는 미친 불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신들린 굿판이 그렇지 않던가, 손에 댓가지를 쥐고 흔들면 영낙 없는 남도무당이고 마당에 신내림대(竹)가 세워지면 그건 남도 굿판이다. 대신칼이 울고 작둣날을 타면 강신무(降神巫)고 젓대가 한밤을 울면 그건 남도의 세습무다. 북무남창(北舞南唱)이란 말이 생겨난 까닭도 여기 있다. 이 경우 원형 이미지는 ’대와 모닥불‘이고 원형의 삶은 ’굿과 제의’에 있다. 또한 여기에서 흘러나온 것이 남도 풍류고 밥상이다.
어느 고샅길에 자꾸만 대를 휘며
눈이 온다
그러니 오려거든 삼동三冬을 다 넘겨서 오라
대밭에 죽순이 총총할 무렵에 오라
손에 부채를 들면 너는 남도 한량
죽부인竹夫人을 껴안고 오면 너는 남도 잡놈이란다
댓가지를 흔들고 오면 남도 무당이지
올 때는 대도롱태*를 굴리고 오너라
그러면 너는 남도의 어린애란다
그러니 올 때에는
저 대밭머리 연鳶을 날리며 오너라
네가 자란 다음 죽창을 들면 남도 의병義兵
붓을 들면 그때 너는 남도 시인詩人이란다
대숲 마을 해 어스름 녘
저 휘어드는 저녁연기 보아라
오래 잊힌 진양조 설움 한 자락
저기 피었구나
시장기에 젖은 남도의 밤 식탁
낯선 거집**이 지나는지 동네 개
컹컹 짖고
그새 함박눈도 쌓였구나
그러니 올 때는
남도 산천에 눈이 녹고 참꽃 피면 오라
불발기 창 아래 너와 곁두리*** 소반상을 들면
아 맵고도 지린 홍어의 맛
그처럼 밤도 깊은 남도의 식탁
어느 고샅길에 자꾸만 대를 휘며
눈이 온다.
* 대도롱태:대(竹)쪽으로 만든 굴렁쇠
**거집: 마을을 지나가는 큰 손님(과잭過客)
*** 곁두리 : 두 사람이 받는 상(셋두리 : 세 사람이 받는 상).
― 「남도의 밤 식탁」전문
위의 시는 ‘부채―남도한량’ ‘죽(竹)부인―남도잡놈’ ‘댓가지―남도무당’ ‘대도롱태―남도어린애’ ‘죽창―남도의병’ ‘붓(대붓)―남도시인’ ‘곁두리(겸상)―지린홍어’ 들로 이미지들이 동일성 회복을 꾀하고 있다. 남도식탁의 원형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고샅길에 대를 휘며 눈이 오는 밤이다. 미친 불개들이 모닥불을 넘는 굿판의 제의 속에 남도의 밤 식탁(한정식)이 있다. 이런 원형식탁 문화는 타지방과 구별되고 시적 아우라 또한 남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정서다.
알다시피 음식의 3요소는 맛과 멋(정서)과 메시지로 이루어진다. 이 맛과 멋과 정서는 각 지방마다 다르고 특히 메시지는 고유의 역사성의 향토성과 민족성을 드러낸다. 우리나라 3대 밥상은 해주반, 나주반, 통영반으로 대표성을 띠지만 나주반은 남도의 향토성을 드러내면서 개다리 소반상(막치소반)과 호족반으로 나누어 진다. 위의 시에서 ‘홍어의 지린맛’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는 호족반으로서의 세뚜리가 아닌 곁두리가 된다. 눈이 내리는데 먼 데서 온 거접(巨接)을 접대하는 모양이다. 거집은 선비의 별칭으로 과거를 보러 서울까지 먼 길을 가면서 하룻밤 유숙이라도 청해 들었을 법하다.
나는 어렸을 때 이 모습을 자주 보았고 할아버지가 거처하는 사랑방 말쿠지에는 짚신이 늘 한 죽거리씩 걸려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융숭한 대접 끝에 과객의 괴나리봇짐에 짚신과 노잣돈을 채워 주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남도 밤 식탁이라면 밤 이슥하도록 먹는 식탁을 말한다. 품위 넘치는 안주인이 치맛자락을 흔들며 구운 것은 구운 것대로 찐것은 찐것대로 따순 김나는 밑반찬을 한 접시씩 날라오면서 푸짐한 솜씨 자랑을 늘어놓는다. 여기에 맵씨와 마음씨까지 동하면 가야금을 틀고 서상대에 놓인 문방사우를 내려 치마폭에다 남화나 시 한 수를 받아 연명으로 사인을 한다. 지금 이런 소장품이 나온다면 아마 부르는 것이 값일 터이다. 또 서화가 끝나면 보답으로 안주인은 왱병 모가지 비트는 소리일지라도 쑥대머리 한 가락쯤 휘어 넘기지 않겠는가? 나는 1987년도 금호문화 예술상을 수상하고 그날 밤 서울서 내려온 박정구 회장님과 호족반을 깔고 앉아서 안주인과 함께 밤을 샌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남도의 한정식이 푸짐한 것이 아니라 ‘검약과 절제의 정신’으로 다스려진 밥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맹자가 말하는 함포고복이며 풍류정신임도 알았다. 이 후로『남도의 맛과 멋. 창공사, 1995』을 썼고 <주간동아>, 에『풍류맛기행 .고요아침, 2003』을 연재했었다. 동화,『옹달샘 꽃누름. 문학사상, 2008』그리고 음식詩를 썼다. 음식詩를 써 온 까닭은 음식에 스민 유감주술(類感呪術)과 금기식 그 자체가 집단무의식을 형성하는 원형감각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령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낸다거나 신인공식(神人供食)이나 폐백음식에는 오방색(五方色), 다식에는 은은한 간색, 보강식은 장고기를 먹는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또 앞에서 보인 시「그늘」에서 기러기 고기를 먹으면 그릇을 잘 깬다든가 참새 고기를 먹으면 잘 까먹는다는 것 등이다.
나는 남도음식의 멋과 맛을 강의하면서 위와 같은 일단을 피력한 적이 있다 〈광주 민속 박물관 발행. 우리음식, 2009〉〈서울 민속박물관 특강. 풍류맛기행 2010〉등이 그것이다.
대숲바람 소리 소소할 때 불발기 창을 반만 열면 남으로 비껴가는 기러기 떼 그림자가 보이는 늦가을 밤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반가운 사람이 오지 않나 싶어 이따금 마른 국화향이 뜬 창호문을 열기도 했으리라. 도시속의 밀폐된 창문과 달리 사각사각 눈 오는 소리도 그 창호문을 통해 들었으리라. 혹은 달빛이 흘러들면 절로 그 창호문발에서 서권문기(書卷文氣)의 향이 돌고 가야금을 타는 여인의 다소곳한 그림자도 떠올랐으리라.
위의 글에서 대숲바람 소리만 빼면 서울의 인왕산 그늘에 감춰진 한정식집일 수도 있지만 대숲바람 소리가 끼어든 것으로 보아 이는 남도의 한정식집이다. 자연원림으로 대표되는 소쇄원 48영(詠)에서 하서 김인후(金麟厚)는 매(梅), 죽(竹), 석(石)을 찬양하면서 매화는 차가워도 빼어나고, 대나무는 여위어도 오래 살고, 돌은 기기묘묘해도 문기(文氣)가 있으니 이것을 삼익우(三益友)라고 했다. 그래서 한정식집 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하고 창호 미닫이를 열고 들어가면 벽에서부터 묵향이 묻어난다. 병풍 아래 서상대가 있고 그 위에 하다못해 문방사우(文房四友)인 지필묵이 놓인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교양 있는 안주인의 품위만 갖추었다면 밤새워 한정식을 먹을 만하다. 하기사 `춘향이 늙어 월매 된다'고 하지 않던가. 음식에도 이처럼 격이 있다. 이것이 맛과 멋과 메시지로 해석되는 선풍(仙風)이다. 남도가 아니면 이런 정서를 어디에 가서 누릴 수 있으랴. 이처럼 선풍을 타는 것을 선취(仙趣)라 하는데 선취를 타는 음식도 따로 있다. 이것이 남도 음식이다.
남도의 음식은 막힐 데 없는 멋과 여유로 어우러져 격을 이루며 정신을 낳는다. 이것이 풍류정신이다. 이 풍류정신이 곧 남도풍(南道風)의 원류가 되며, 여기에서 나온 것이 검약과 절제로 다스려진 토착민의 정서고 남도정신이며 남도가락이다. 한국적인 멋의 특질을 `풀이'의 문화 내지 한(恨)과 멋으로 규정하려는 견해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립민속박물관(2009. 9 , 9. 특강)「남도 음식문화 어떻게 읽고 갈 것인가, 162쪽」
뿐만 아니라 단군신화에서 아키타입으로 쑥과 마늘이 나오기도 한다. 쑥은 구황식으로 대표되며 히로시마 원폭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강인함을 자랑하는 식물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에게 들꽃의 이미지를 붙여 ‘쑥부쟁이꽃’이라고 나의 시를 평한 평론가도 있었다. 남도의 기질적인 시정신과 토속적인 언어를 두고 한 말일터이다.
이에 비해 청빈을 자랑하는 선비골 안동 식탁은 어떠한가. ‘얼간재비’와 ‘건지기 막국수’ ‘돔배고기(상어포, 제사음식)’로 또는 ‘안동식혜’로 유명한 그쪽 식탁을 시로 쓴다면 어떨까.
접대接對란 말 아셔요, 주인이 손님을 깍지게 접어 모시는 것을 말하지요, 접대나 대접이나 그게 그거 아녀요, 그런데 이 틈새를 파고드는 말이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안동 가서 들은 얘기인데요, 도산서원 사랑방 툇마루에서 내 친구 권오삼과 함께 깍지베개하고 누워 배고픈 뻐꾸기 소리를 듣다 들은 이야기인데요, 서원書院 앞을 휘돌아 나가는 돌 머리河廻 물빛이 왜 저토록 아득한고 했더니 그것이 선비골에만 있는 백비탕白沸湯 때문이라는 군요, 오죽 가난했으면 상床위에 펄펄 끓는 물 한 대접이라니요, 돌계단 앞 모란꽃이 뚝뚝 지고 있는 그 사이 뻐꾸기 울음소리가 간간히 끊기고 있는 그 사이, 친구로부터 점심은 뭘 들거냐고 해서 서원 입구에 있는 ‘영계백숙집’하려다 말고 영계와 백숙집 그 사이에서 입 꽉 틀어 막았지요.
―「돌머리 물빛」전문
『주간동아』에 2년간 음식기행을 연재하면서 쓰게 된 詩다. 안동의 청빈한 음식을 ‘돌머리 물빛(河廻)’에 비유했다. 청빈하다 못해 맹물이 돼 버린 백비탕(白沸湯)을 소재로 삼았다. ‘얼간재비’ 상표로는 안동시청에서 개발해 놓은 캐릭터가 재미있다. 갓쟁이 노인이 장에라도 갔다 오는지 고등어 한 손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모습이 귀엽다. 어찌 갓은 삐뚤어지게 써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