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곡선사(香谷禪師) 혜림(蕙林)- 1912~1978
[ 향곡선사 진영 ]
* 향곡선사(香谷禪師 1912~1978)-- 혜림(蕙林),
향곡스님은 경북 영일군에서 출생하여 1928년(16세) 천성산 내원사에 서월스님을
은사로 득도.
1932년(20세) 범어사에서 운봉화상에게 구족계를 받고 그 문하에서 용맹정진.
1941년((30세) 깨달음을 얻음.
그후 운봉스님은 깨달음을 인가하여 경허, 혜월, 운봉으로 이어지는 선맥을 이음.
1947년(36세) 성철스님과 함께 봉암사에서 함께 수도.
이후 향곡선사는 월내에 있는 묘관음선원을 개설하고 조실로 지냈음.
1978년 12월 세수 67세 법랍 50세로 입적.
법제자로는 진제스님(해운정사 조실)이 있음.
해방 직후인 1947년 봉암사에는 성철스님을 중심으로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
암, 법전스님등을 포함한 20여명의 스님들이 조선 500년, 일제 36년간 짓밟히고 망
가진 불교의 제모습을 찾기 위해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고 다짐하고스
스로 밥하고 농사짓고 나무하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청규
를 철저히 지켜나가면서 수행정진을 하였다.
성철스님과 향곡스님은 이곳 봉암사 결사에서 서로를 탁마하면서 확철대오 하게
된다. 이 두 분의 깨달음으로부터 한국 선종사(禪宗史)에 임제(臨濟) 골수의 안목
(眼目)이 재현(再現)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선종사에 있어서 향곡스님께서 향상일
로(向上一路)의 정안(正眼)의 장(章)을 여신 것이다.
- 출가 -
16세때 이미 출가를 하여 승려가 된 둘째 형의 옷을 전하기 위해 천성산 내원사로
찾아갔다가 산천경계의 빼어남이 완연히 전생에도 머물렀던 곳과 같음을 느끼고 환
희하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어 버리고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여 성월(性月)선사
를 은사로 득도하였으며 법명을 혜림(蕙林)이라 하였다.
- 수행 -
내원사에서 출가할 당시에 조실 스님이셨던 운봉(雲峰)선사의 법문을 접하고 도무
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한 시도 의심
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과를 마치고 나면 밤잠을 물리치고 정진하곤 하였다. 어린 나이에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신심(大信心)을 가지고 정진에 몰두하여 화두공
부를 지어나갔다
- 오도와 인가 -
깊은 의심 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늦가을 어느 날 정진하던 중 갑자기 산골짝 돌풍
이 몰아쳐서 문짝을 때리는 소리에 홀연히 마음의 눈이 열렸다. 그 때는 아직 삭발
도 하지 않은 행자시절이었는데, 행자는 곧장 조실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
서는 행자의 거동이 사뭇 다름으로, 운봉선사께서는 간파(看破)하시고 대뜸 목침을
가리키시며, "한 마디 일러라." 하시니 행자는 즉시 발로 목침을 차버렸다.
"다시 한 번 일러라." "천 마디 만 마디가 모두 꿈속에 꿈을 설(說)한 것이니 모
든 불조께서 나를 속이신 것입니다."
이에 운봉선사께서 크게 기뻐하셨다. 이때부터 향곡스님은 줄곧 운봉선사를 시봉
(侍奉)하면서 탁마(琢磨)받으며 정진하셨다. 운봉선사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향
곡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려서 임제정맥을 부촉하셨다.
付 香 谷 蕙 林 丈 室 西 來 無 文 印 無 傳 亦 無 受 若 離 無 傳 受 烏 兎不 同 行
향곡혜림 장실에 부치노라 서쪽에서 건너온 문자 없는 법인은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 만일 전하고 받음 없는 것조차 뚝 떠나면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리느니라.
그 후 향곡스님은 봉암사(鳳岩寺)에서 몇몇 도반들과 정진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를 하여 안 것은 모두 다 접어두고 참으로 부처님과 조사의 경지에 이
르도록 다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을 내어 멋지게 공부하여보자.' 하면서 용맹정
진에 들어갔다.
어느 날 성철스님이 청담스님에게 묻기를, "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살려 다 하여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본다[殺盡死人
方見活人 活盡死人方見死人].'는 법문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
이때 향곡스님이 옆에서 듣고 있었는데 향곡스님 스스로도 역시 확연한 대답이 나
오지 않아서 의심삼매(疑心三昧)에 들어갔다. 그래서 화두일념(話頭一念)으로 밤이
가는지 낮이 가는지를 모르고 정진하셨는데 어떤 날은 탑 난간에 기대어 참구(參究)
하시던 중에 장대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는데도 모르고 서 계셨다.
그렇게 삼칠일 동안을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빠져 자신의 몸뚱이까지도 잊어버리셨
다가 도량(道場)을 걷는 중에 문득 자신의 양손이 흔들리는 것을 보시고 활연대오
(豁然大悟)하셨던 것이다.
활연대오하신 후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시기를,
忽 見 兩 手 全 體 活 三 世 諸 佛 眼 中 花 千 經 萬 論 是 何 物 從 此 佛 祖 總
喪 身 鳳 岩 一 笑 千 古 喜 曦 陽 數 曲 萬 劫 閑 來 年 更 有 一 輪 月 金 風 吹
處 鶴 新
홀연히 두 손 보고 전체가 드러나니 삼세의 불조가 다 눈병에 헛꽃일세 천 경전과
무수 법문, 다 무슨 물건인가 이로 좇아 불조사가 다 상신실명하였도다 봉암사에서
한 번 웃늠 천고에 기쁨이요 희양산 구비구비 만겁에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수레같이 둥근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도다.
이로부터 천하 노화상(老和尙)들의 공안(公案) 법문에 속지 않고 걸림없이 임의자
재(任意自在)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하셨다.
- 행적 -
이렇게 봉암사에서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진리를 깨치신 후, 그 당시 질문을 던졌
던 성철스님께서도 역시 그 공안을 확실히 아시는 것이 아님을 아시고 산문 밖으로
내쫓고 "확연하게 바른 답을 할 때까지 들어오지 마라."고 말하고는 대문을 걸어잠
궜다.
그 후 삼일 후 한밤중이 되어서 대문을 부술 것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성철스님께서 그 대목을 깨닫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사중 대중들은 공비가 내
려와서 절에 찾아온 것으로 생각하고 경계하며 대문 앞으로 갔는데 다름 아닌 성철
스님이었다. 향곡스님이, "제대로 알아가지고 왔으면 일러보아라." 성철스님이 대답
을 바르게 척 답을하니, 이에 향곡스님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이 때 성철스님이 큰
돌맹이를 들고 향곡스님에게 내리쳤는데, 향곡스님은 재빨리 피하셨다. 이렇게 두
분이 서로 주고 받으시면서 힘을 얻게 되고 깨닫게 되셨다. 그리하여 이 두 분의 깨
달음으로부터 한국 선종사(禪宗史)에 임제(臨濟) 골수의 안목(眼目)이 재현(再現)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선종사에 있어서 향곡스님께서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정안(正眼)의 장
(章)을 여신 것이다. 우리나라에 선종(禪宗)이 들어온 이후로 역대로 많은 도인이
출현했지만, 마조(馬祖)*백장(百丈) 재참(再參) 인연법문과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
암내인 부지암외사(庵內人不知庵外事)와 같은 이러한 고준(高峻)한 법문들을 대중에
게 제창(提唱)한 선지식이 없었다. 유일하게 향곡선사께서 대중들에게 이러한 법문
을 들어 설법하시고 점검을 하셨다.
제방선원의 조실초청을 받아 각 곳에서 납자를 지도하시고 또, 동해안 월내(月內)
묘관음사(妙觀音寺)에 선원을 개설하여 주(住)하시면서 향상일로의 종풍(宗風)을 크
게 선양하셨다.
- 전법과 열반 -
향곡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11년전 눈밝은 납자인 진제스님에게 면면히 내려온 임
제정맥의 법을 부촉하시고 세수 67세 법랍 52세로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
하셨다.
木 人 嶺 上 吹 玉 笛 石 女 溪 邊 示 作 舞 威 音 那 畔 進 一 步 歷 劫 不 昧 常
受 用
목인(木人)은 산마루 위에서 피리를 불고 석녀(石女)는 계곡에서 춤을 춘다, 위음나
반 이전에 한 걸음 나아가니 억겁에 매(昧)하지 않고 항상 수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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