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泮 宮 偶 吟 (성균관에서 우연히 읊음)
龍 首 正 東 傾 短 墻 (용수정동경단장) 용수산 동쪽 기슭 나직한 담장 기울고
水 芹 田 畔 有 重 陽 (수근전반유중양) 미나리 논가에 버들가지가 늘어졌구나
身 雖 從 衆 無 奇 特 (신수종중무기특) 이 몸 비록 남들보다 뛰어난 것 없지만
志 卽 夷 齊 餓 首 陽 (지즉이제아수양) 뜻인 즉 주려 죽은 백이와 숙제 같다네
다음의 시는 선생께서 말년에 지은 은둔자의 노래입니다.
五 更 殘 月 窓 前 白 (오경잔월창전백) 새벽에 지는 달빛은 창문 앞 밝게 비추고
十 里 松 風 枕 上 淸 (십리송풍침상청) 십리에서 부는 솔바람 베게 위를 시원케
富 貴 多 勞 貧 賤 苦 (부귀다로빈천고) 부귀얻기는 힘들고 빈천 또한 괴로운 것
隱 居 滋 味 與 誰 評 (은거자미여수평) 조용히 살아가는 이 재미 누구와 말하랴
<지은 이>
吉再 <길재, 1353 - 1419>, 자는 再父, 호는 冶隱(야은), 시호는 忠節이며, 이색과 정몽주 등의 문하
에서 수학하다.
1386년 문과에 급제하고 2년후에 성균관의 博士가 되었고, 성균관에서 후진 양성에 진력하다가, 새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키려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善山)으로 낙향(落鄕),
후학 양성에 여생을 바침치다.
조선 태종이 太常博士(태상박사)의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여생을 금오산에서 은거
하면서 지냈다. 선생이 남긴 고시조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선생은 특별히 한국유학사에 높은 평가를 받으실만 한 분이다. 이 분의 문하에서 장차 영남 유학의
거봉들이 대를 이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직제자 김숙자(金叔滋), 뒤를 이은 김종직(金宗直), 그 다음이
김굉필(金宏弼), 그 다음이 조광조(趙光祖)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마침내 퇴계 이황(李滉)
선생으로 이어지는 영남(嶺南) 유학의 뿌리가 되는 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