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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 입구 | 칠장사 대웅전 | 칠장사 전경 |
1) 알미산
알미산은 지금은 논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예전에는 안성천 한 가운데 있었던 섬이었다 한다. 원래는 죽산 고을에 있던 것이었는데. 대홍수 때 떠내려와 안성고을 남서쪽 안성천 한 가운데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죽산 고을과 안성 사람들이 이 산을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다가 급기야는 동아줄로 알미산을 동여매고 줄다리기를 했다. 안성 고을 사람들이 이겨서 현재의 위치까지 끌어 왔다.
=> 대홍수와 관련된 산 이동 설화이다. 산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를 겪는 과정에 사람이 개입했다고 해서, 자연사와 인간사를 연결시킨다.
2) 칠장사
칠장사는 초창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선덕여왕 연간 혹은 진덕여왕 연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고려시대 문종의 왕사이며 국사였던 혜소국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가 있다. 1671년에는 인목대비가 친부인 김제남과 태자 영창대군을 위해 칠장사를 원당으로 하여 사우를 중수하였으므로, 현재 여기에는 인목대비가 친필로 베껴쓴 <금광명승최승왕경> 1질과 자신의 심정을 한시로 쓴 친필족자 1축이 있다.
궁예가 죽임을 피해 신라를 도망 나왔을 때 유모가 궁예를 데리고 온 곳이 바로 칠장사라고 한다.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혜소국사가 칠장사에 돌아와 가르침을 펼 때 일곱 명의 악인이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니 국사가 이들을 거두어 현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하여 아미산에서 칠현산으로 고쳐 부르고, 사찰의 이름도 칠장사(漆長寺)에서 칠장사(七長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동강난 비석에도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난입해 만행을 저지르자 노승이 나타나 꾸짖었다. 노한 가토가 칼로 내려치자 노승은 간 곳이 없고 동강난 비석만 서 있었다고 한다.
칠장사에 거처하던 갖바치를 찾아온 임꺽정에게, 절의 승려가 말타는 법을 가르치고 자신의 말을 주었는데, 꺽정이 그 말 이름을 칠장마라 불렀다고 한다.
목천에 살던 박문수가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그의 어머니가 조청으로 만든 유과를 나한전에 바치고 가라 했다. 그날 밤 꿈에 과거시험 시제가 그대로 나타나 그것을 보고 가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현재에도 이 나한전에는 시험합격을 비는 사람들이 와 기원하고 있다.
=> 칠장사가 경이로운 곳임을 갖가지 서로 다른 일화를 들어 말한다.
3) 안성장
허생은 만 냥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안성(安城)으로 내려갔다.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三南)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 밤, 감, 배, 석류, 귤, 유자 등속의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못 지낼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許生傳)에서 안성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행위의 중심지에서 독점이 생기면 나라가 흔들린다고 경고했다.
4) 안성맞춤
예전에 널리 애용되던 놋그릇 가운데 안성지방에서 만든 안성유기(安城鍮器)가 가장 유명했다. 유기그릇은 '장내기'라 하여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보통의 그릇, 맞춤으로 특별히 주문하는 '모춤' 등 두 종류로 제작되었다. 안성유기는 '모춤유기' 가운데 최상품이어서, 안성에서 주문해 만든 유기를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그 뜻이 확대되어, 자로 잰 듯 꼭 맞는 물건이나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을 통칭해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 전통사회에서 존중되던 대인(對人) 관계 윤리에서 멀어지고, 산업사회에서 필요한 대물(對物) 관계 가치로 나아가는 사고의 형태를 말해준다.
안성 남사당놀이 줄타기 | 안성 남사당놀이 마당풍물놀이 | 마당풍물놀이 잡색 |
5) 남사당놀이
남사당놀이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지만, 안성 서운면 청룡리가 본거지이고 집결지였다. 남사당패는 우두머리인 꼭두쇠, 기획담당자격인 곰뱅이쇠, 각 연희종목의 연희자 중 선임자격인 뜬쇠, 각 뜬쇠 밑에 있는 기능자들인 가열, 초보자인 삐리, 기능을 잃은 노인들인 저승패, 등짐꾼인 나귀쇠 등 40∼5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다시 상무동님, 회덕님(선소리꾼 중 우두머리), 버나쇠(대접돌리기 중 우두머리), 얼른쇠(요술쟁이 중 우두머리), 덜미쇠(꼭두각시놀음 조종자 중 대잡이), 살판쇠(땅재주꾼 중 우두머리), 어름산이(줄꾼 중 우두머리) 등으로 나누어졌다.
남사당놀이는 여섯 마당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마당풍물놀이’라는 농악이다. 둘째는 ‘버나놀이’로 대접을 돌리면서 양반을 희롱하는 재담과 소리가 곁들이는 놀이이다. 셋째는 ‘살판놀이’라고 하는 땅재주이다. 넷째는 ‘어름놀이’라 불리는 줄타기놀이에다 재담과 소리를 곁들인 놀이이다. 다섯째는 ‘덧뵈기놀이’인 탈놀음이며, 마당씻이ㆍ옴탈잡이ㆍ샌님잡이ㆍ먹중잡이의 네 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섯째는 ‘덜미’라는 꼭두각시놀이이며, 박첨지마당, 평안감사마당 등 일곱 거리로 되어 있다.
바우덕이(박우덕 또는 김암덕)라는 남사당의 꼭두쇠가 놀이를 잘 해 널리 알려졌다. 바우덕이는 아기일 때 서운면 청룡사 근처의 바위틈에 버려졌는데, 지나가던 사당패가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자색 및 예기가 뛰어나 경복궁 중건시 대원군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재주를 보였더니, 대원군이 직접 옥관자를 하사했다고 한다.
유일무이한 여자꼭두쇠로 활동하다가 23-4세에 요절했다, 남편 박모는 넋을 잃고 큰 바위에 올라가 나팔 등을 부르며 슬퍼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하고, 그래서 그 바위를 나팔바위라고 한다. 바우덕이가 머리카락을 잘라 섞어 짚신을 삼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 적이 있어, 많은 여자가 따른다고 한다.
=> 사회 최하층에서 경이로운 창조가 이루어져 세상이 달라지게 했다.
한국, 신명나라
韓國, 別有天地
Korea, Wonder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