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를 다듬으며
손진숙
초라한 아침 식탁 앞에 앉은 남편이 수저를 들다 말고 한마디 던졌다.
“멸치라도 좀 볶지 그래. 멸치가 영양이 좋은데….”
한가해진 낮에 그 말이 생각나 냉동실 문을 연다. 멸치상자를 꺼내 적당한 양을 덜어낸다. 식탁 위에 멸치가 수북하다. 다듬어서 볶음도 하고, 두었다가 맛국물도 내고….
굵기가 아기의 엄지손가락만한 것도 있고, 새끼손가락만한 것도 있다. 모두가 바다 물살을 자유롭게 가르며 유영하던 것들이 지금은 완전 동작 멈춤 상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부 흰 눈동자만은 또렷하다. 뭘 꿈꾸다가 잡혔기에 전신이 말라비틀어진 지금도 눈을 감지 못하는 걸까. 멀뚱하게 뜨고 있는 멸치의 눈이 젊은 꿈을 채 피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삼촌의 눈을 불러낸다.
사진으로도 보지 못한 삼촌이다.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삼촌 이야기를 들었을 따름이다. 아버지 혈육이라고는 고모 한 분뿐이어서 삼촌과 사촌이 있는 친구들을 늘 부러워하며 지냈다. 뜻밖의 삼촌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더욱 안타까움에 젖게 했다.
내가 태어나기 십 년 전, 육이오전쟁 때라 했다. 안강전투에서 우리 마을이 위태로워지자 온 식구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모아리 고모네 집으로 피난을 갔단다. 하루는 고모가 반찬을 만들려고 그동안 아껴 두었던 멸치를 꺼내 다듬었다. 옆에 있던 삼촌이 멸치를 몇 마리 집어먹었다. 그러자 고모가 귀한 멸치를 군입정으로 먹으면 되느냐고 야단을 쳤다.
멸치의 머리를 떼고 반으로 갈라 내장을 빼낸다. '멸치도 창자는 있다.'는 우리 속담이 기억난다. 창자가 작아서 그런가. 까만 부분의 어디가 창자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삼촌도 어쩌면 멸치같이 창자가 작았는지도 모른다.
야단을 맞은 삼촌은 그 길로 밖으로 나가 또래들과 어울려 강변으로 갔다. 강변에는 조약돌에 섞여 전쟁이 흩어 놓은 흔적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탄피, 총알, 수류탄…. 삼촌 일행은 수류탄을 주워 들여다보고, 만져보다가 한 친구가 돌로 두드리자 그만 폭발해 버렸다. 떼를 지어 헤엄쳐 다니던 멸치가 완전 동작 멈춤이 되었듯 젊은이 몇이 한꺼번에 화를 입었다. 멸치 몇 마리를 먹고 나간 삼촌이 마른 멸치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다듬은 멸치 한 마리를 입에 넣는다. 씹기도 전에 싸한 바다 냄새가 입 안에 감돈다. 자근자근 씹기 시작한다. 비릿하면서 간간하고, 구수하면서 달금하다. 목구멍에 넘기고 나서도 맛의 여운은 짙고 길다. 멸치에서 발산되는 맛의 지배력과 지속력이 놀랍다. 짙푸른 바다의 깊고 넓은 기운이 조그만 멸치의 몸에 이토록 진하게 배어 있다니.
멸치는 다른 생선에 비해 볼품없고 좀스럽다. 멸치도 생선이냐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생선에 못지않은 진가를 발휘한다. 커다란 상어나 고래가 할 수 없는 그만의 특유한 역할을 해낸다.
작은 체구로도 넓은 바다를 호흡하며 신명나게 앞길을 헤쳐 가는 길목에 드리운 그물에 걸려 지금 식탁 위에 빳빳이 마른 몸으로 쌓여 있는 멸치. 무슨 원한인가 품고 있는 듯 희멀겋게 뜬 멸치의 눈에서 짧은 생애를 전쟁이 남긴 그물에 앗겨 버린 삼촌의 하소연을 들으려 귀를 모은다.
해쓱한 모습의 삼촌이 상기된 얼굴로 무어라곤가 부르짖고 있다. 젊으나 젊은 목숨을 허망하게 빼앗아간 전쟁을 원망하고 있는 걸까, 넓으나 넓은 세상에 나가 맘껏 펼칠 꿈을 송두리째 잃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걸까, 윤곽도 뚜렷하지 않은 삼촌이 눈앞에서 소리치고 있다.
살아 있다면 팔순이 가까워 눈은 침침하고 허리는 구부정할 것이다. 몸이 노쇠하면 어떠랴. 작은아버지가 있다는 자체만으로 가슴 한편이 따뜻할 텐데…. 그리고 사촌들이 있어 가까이 지낸다면 내 삶이 한결 풍성할는지도 모른다.
멸치 다듬기가 끝나 간다. 큰 것은 국이나 찌개를 끓일 때 쓸 요량으로 보관하고 작은 것은 프라이팬에 볶아 낸다. 붉은 양념으로 버무린 멸치볶음이 그릇에 오보록하다. 이만하면 한동안 밑반찬 걱정이 줄어들겠다.
지금은 멸치가 흔전만전한 세상이다. 멸치상자를 통째 내다 먹은들 그걸 탓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촌의 죽음이 멸치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고모가 살던 동네 앞 강가에는 지금도 결 좋은 조약돌이 지천이겠지. 그리고 남쪽 어느 해역에서는 그물을 피한 멸치 떼가 지느러미를 세우고 꼬리를 흔들며 기세 좋게 헤엄치고 있으리라.
푸른 셔츠를 걸친 젊은이가 자그락자그락 조약돌을 밟으며 강가를 거니는 모습이 창밖 햇살 너머에서 아른거린다.
《계간수필》2015 여름호 통권 8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