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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 목사님의 제자이자 에스라성경신학대학원 총장을 지냈던
김북경 목사님께서 정리하신 국제장로교의 정신입니다.
국내에 국제장로회(IPC) 소속 교회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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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장로교(International Presbyterian Church)의 정신
서론
누가 국제장로교 정신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당황해지지 일수였다. 그래서 필자는 라브리와 국제장로교에서 훈련받으며 목회해 왔던 과거를 생각하면서 몇자 적어보았다. 물론 내 생각이 국제장로교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또 불변한 것도 아니다. 살아있는 공동체라면 그 정신 자체가 변할 수 있다. 한 공동체의 정신은 공동체회원들이 함께 살면서 만들어가는 지혜의 결정체이다. 국제장로교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사는 교회와 세상에 남겨준 쉐퍼 목사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쉐퍼전집 다섯 권을 읽으면 이해가 갈 것이다.)
1. 인간관계를 중요시한다.(마22장 37-39절)
인간관계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살아라” 한 것같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이웃과도 화목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특히 다양한 민족, 다양한 종교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그들과 화목하게 사는 관용과 아량이 필요하다.(선한 사마리아인의 태도) 물론 그들이 믿는 종교는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지어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안 할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서 전도의 길도 열리는 것이다. 복음은 적대관계에서는 먹혀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공동광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 은총을 인정하는 믿음이다.
2. 투명성이 중요하다. “정직이 제일 좋은 정책이다”
마5장 33-37절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 라는 말만 하여라“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고 살라는 의미이다. 인간관계에서 투명성이 없으면 피상적이거나 율법적인 관계로 전략한다. 나의 진상을 타인에게 보인다는 것은 나의 약점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약세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가장과 거짓으로 살기 쉽다. 정직함은 경쟁적인 세상살이 법칙에 반한다.
타락 전에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움을 타지 않았다. 타락 후에야 나무 잎으로 부끄러움을 감쌌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무 잎이 그들의 추함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동물 가죽으로 감싸주셨다(하나님의 은혜). 인간은 자기의 죄와 허물을 감추기 위해서 온갖 인간적인 연막을 치지만 주님 앞에서는 감출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의의 두루마기로 우리를 감싸주신 하나님 앞에 그리고 공동체 앞에 적나라하게 설 수 있다. 그렇지 안으면 벌거벗은 황제가 될 수 있다.
정직은 신뢰와 직결된다. 거짓은 사회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신뢰가 없는 사회는 사회적 경비가 많이 든다. 신뢰도가 높은 사회(북 유럽)는 경제효과가 높다. 다시 말해서 신뢰와 경제는 정비례 한다. 반대로 법(규제)은 경제와 반비례 한다. 즉 신뢰가 떨어지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규제)이 많이 생기는데 그 결과는 사회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난다(프란시스 후쿠야마의 “트러스트”(신뢰)에서.
“ 정직”이 가장 좋은 정책이다.
3. 협동정진(복수지도 목회)이 중요하다.
인간은 섬에서 혼자 살 수 없듯이 목회 역시 혼자서 할 수 없다. 그래서 장로교는 장로단(당회)를 만들어 협동사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천주교나 성공회같이 주교나 신부의 감독에 강조점을 두거나(이것을 감독제라고 한다), 회중교회와 같이 회중의 의사에 많은 비중을 두는 회중제도가 있다. 장로교는 장로들(목사를 포함한)이 함께 협동목회를 하되 회중의 의사도 존중하는 제도로서 가장 형평성이 있는 목회 형태이다.
하여간 장로교의 특징 중 하나는 복수지도체제로 장로들이(목사를 포함하여) 서로 도울 뿐 아니라 서로 견제하여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동시에 회중들이 공동의회를 통하여 교회운영에 참여하는 “민주적인” 요소를 갖고 있어서 가장 형평성 있고 성서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17세기의 엘리자벳 여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너무 민주적이라고 판다하고 장로교 대신에 성공회 제도를 국교로 채택했다고 한다.
4. 겸손한 사람 : 빌 2장, 마 5:3
협동에 절대 필요한 태도는 겸손이다. 겸손은 모든 권력을 내려놓은 상태를 말한다.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살고 남자는 권력(Power, Control)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남자들이 직장을 잃으면 시들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보다 겸손해지기 힘든가 보다. 영국의 역사가 액튼이 말한 것 같이 “모든 권력은 부패하기 쉽다. 그리고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예수님은 그 큰 권력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다(빌2장). 그 권력을 십자가에서도 쓰시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낮은 데로 오라고 하신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매일 매사에 죽는 것일 것이다. 죄에 물들어있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안이숙 여사가 말했듯이 우리는 “죽어도 살아 있네요” 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아이러니는 내가 겸손하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이미 교만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5. 교회는 국제적이다. 갈 3장 28절, 행 2장 8-11절
교회는 우주적(catholic)이다.(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러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집합을 뜻한다)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도 국제적이고 또한 국제적이어야 한다. 세계 복음화를 부르짖으면서 어찌 국제적이 안될 수 있으랴. 유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는가? 자기네들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국제적이지 못함으로서(비유대인은 개로 취급함) 장자의 직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885년에 한국에 온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인 호레스 언더우드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인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한 말이 있다. “한국 형제들이여 외국인들에게 마음 문을 좀 더 여시오” 하나님이 왜 한국교회를 축복하셨을까? 하나님은 왜 우리를 해외에 보내셨을까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우주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을 믿는다면 이단이 아닌 이상, 타교단과 마음 문을 열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6.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 한다. 기독교는 역사적 해프닝이기 때문이다.
전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절대적인 전통과 인간이 만들어낸 가변적 전통이다. 절대적 전통은 성경이다(고전 11장 2절, 23절) 성경에 없는 전통도 아름답고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전통을 절대화 시킬 때에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 예로서 천주교의 외경과 성경에 없는 전통을 만들어 고집하는 것이다. 다른 예로서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해서 예수와 거의 동격으로 추앙하고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전통이다. 심지어 마리아가 승천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 장로의 전통을 지키려다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다.(마 15장 1-9절) 그래서 우리는 꼭 지켜야 할 절대적인 전통(성경)은 고수하되 비절대적이고 가변적인 전통은 창의성과 융통성을 발휘하여 취사선택하는 지혜와 용단이 필요하다.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오순절 이후에 세워진 예루살렘교회에서 시작된다.(물론 교회의 시작을 구약에서 찾을 수도 있다) 장로교의 역사는 16세기 종교개혁가의 개혁주의(특히 칼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제장로교의 역사는 쉐퍼 목사의 특이한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쉐퍼신학의 특이성은 아주 새롭다기 보다는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20세기-21세기 교회가 들어야 할 선지자적이고 참신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장로교는 개혁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7. 통일성과 다양성
쉐퍼 목사가 자주 강조했던 말은 통일성(Unity)과 다양성(Diversity)이다. 절대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연합하고 비진리적인 부분에서는 다양성을 인정한다. 예로서 노회에 속한 여러 지교회에서 예배드리는 형태를 보면 다양하지만 진리와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교단도 절대적인 전통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성경 자체는 절대적인 전통이지만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론이 분분하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서 다양한 교단이 생긴 역사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속한 장로교도 절대저인 전통이라고 자부할 수 없다.
즉 국제장로교만이 제일 좋은 교단이고 우리가 성경을 해석한 것이 가장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이고 2천년 교회역사를 모르는 생각이다. 국제장로교가 세워지고 또 우리가 이 교단을 택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필자 개인적인 이유는 나의 인생 행로를 인도해오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다. 필자가 처음 국제장로교를 택할 때 세상의 모든 교회를 조사해 보고 성경적인지 심사숙고한 끝에 택한 것이 아니다(독자중에 그렇게 한 사람이 있는가?).
단지 필자가 지금 확신하는 바는 국제장로교도 다른 모든 교회와 같이 죄인들이 모여사는 병원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개혁주의, 장로제도, 쉐퍼사상 등)와 정신을 현 시점에서 볼 때 가장 성서적이라고 믿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제장로교도 장차 변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개혁가들이 주장한 것 같이 항상 성경으로 되돌아가서 계속 교회개혁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8. 우리는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
“진리”라는 단어 자체가 무의미해진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예수가 유일한 진리라는 말을 하기조차 힘든 상대주의 철학에 맞서 싸우고 있다. 특히 다양한 민족과 종교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일수록 더욱 그렇다. 2천년전에 살았던 본디오 빌라도도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예수님에게 회의의 질문을 던졌다.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있는 많은 교회를 향해서 쉐퍼 목사는 외쳤다. “크리스챤은 기독교가 아무 혜택을 주지 않는다 해도 단지 진리라는 이유만으로 기독교를 믿는다.”라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진리라고 하셨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였다.
9. 두 기둥 진리 : 문화명령과 선교명령을 둘다 믿는다.
문화명령은 창세기 1장 27-28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창조된 세계를 다스리라는 명령이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선교명령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교명령은 많이 듣고 또 세계선교를 위해서 힘쓰는 반면에 문화명령은 선교명령으로 대치된 듯이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선교명령에 말했듯이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듣게 되면 주님이 다시 돌아오실 터이니 주님이 빨리 오시게 하려면 복음을 전세계에 빨리 전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면 이 세상은 불로 태워져서 없어지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신다고 하였고 믿는 자들은 새로 창조된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성경해석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활동(문화명령에 따라서)은 할 가치가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도 전해야하지만 지금 하나님의 좋은 세계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좋은 선물들, 즉 자연을 잘 가꾸고 감사히 즐기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즐기는 삶이 될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문답 제 1문 사람의 최고 목적은 무엇인가? 답: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며 그를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
이 문화명령을 기반으로 하여 환경운동을 할 수 있고, 생명운동(의학의 발전, 인간 생명존중, 태아보호 등)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점점 더 악화되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이 문화명령을 무시하면 우리는 세상과 등지고 살 수 밖에 없고 우리의 삶이 무미건조해 질 수밖에 없다. 한 예로 라브리에 온 한국학생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왜 농업에 대해서 강의 하느냐고 질문한적이 있다. 또 다른 예로서 옥스퍼드 대학생이 음악을 전공하려고 하자 예수 믿는 친구의 권면이 “기독교인이 신학을 공부해야지 세상적인 음악 같은 것을 공부해서 뭘 하냐”였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의 확증을 얻고 나서부터 음악 감상하는 것을 꺼려했다는 애기가 있는데 기독교인도 이원론(영혼만이 구원할 가치가 있고 물질로 형성된 육체는 악한 것이니 함부로 취급해도 된다고 믿는 이론: 초대교회시대에 영지주의가 이런 이원론을 주장했다)을 믿으면 우리의 삶이 무미건조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원론은 위험한 생각일 뿐 아니라 우리자신들과 후손들에게 해가 되는 생각이다.
또 문화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국지적, 그리고 국제적으로 사회참여를 하게 한다. 이제는 세계가 한 지구촌으로 축소되어 싫건좋건 인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세계적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변화에 눈감을 수 없게 되었다. 환경문제가 그렇고 특히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관심을 갖고 멀고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와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오늘 밤에 주님이 돌아오신다 해도 오늘 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는 “주님이 이 세상에서 이 부문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물론 악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선교는 삶(문화명령)안에서 해야하는 것이 성경적 순리이다. 문화명령을 무시한 선교를 하는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성프란시스의 말인가? “삶으로 전도하라. 정 필요하면 말로 하라“
선교명령은 문화명령안에서 지켜져야 한다.
10. 모든 권위는(목회자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목회자(장로와 목사)의 권위는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마 28장 18-20절) 목회자는 화목의 직분을 받고 하나님의 대사로 파송을 받았다.(고후 5장 18-20절) 한 나라의 대사는 파송한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할뿐 자기생각을 말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목회자의 권위는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에 정비례 한다.(바7장 24-26절, 마 28장 20절)
인도의 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간디에게 데리고 와서 아들이 설탕에 중독 들었으니 좀 엄하게 훈계해 달라고 간청했다. 간디는 2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2주후에 모자가 간디를 다시 찾아갔다. 그때 간디는 아들에게 설탕을 줄여 먹으라고 훈계했다. 어머니가 의아해서 물었다. 왜 2주전에 그 말을 안 해주었느냐고 간디의 말 “그 때는 나도 설탕을 너무 많이 먹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에 평신도라도 말씀이 있으면 목회자의 잘못된 권위에 도전할 수 있다.
11. 그리스도인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서울의 어떤 목사님은 설교하기 전에 성도들에게 주일아침에 교회올 때 머리를 가지고 오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가끔 전도할 때 “성경을 따지고 믿으려면 복잡하니까 우선 (성경을) 덮어놓고 믿어보라”고 하는 것을 듣는다. 믿는 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가는 것이 상식이다.
최근에 들어 젊은이들이 교회를 많이 떠나는 이유가 세상의 과학과 철학은 많이 듣는데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의 질문과 의문에 아랑곳 없다는 듯이 일방적인 복음선포만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많은 지식으로 머리만 커져있는 것도 문제지만 이성을 건너뛰어서 감정에만 치우치는 것도 문제다. 이렇게 되면 “병신도가 되기 쉽다. 예로서 설교 중에 설교자가 회중에게 자기가 말하는 것에(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멘“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성도를 바보로 만드는 행위다.
그래서 목회자는 성도들이 냉정한 머리로 판단할 수 있도록 평상시에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판단력이 없는 성도들이 많으면 이단이 쳐들어오기 십상이다.
라브리가 시작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60년대 서구에서 히피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젊은 지성인들이 기성세대와 기성교회의 위선에 신물이나서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은 대학과 직장 그리고 교회를 떠나서 나름대로 자유와 다른 종교, 특히 동양종교를 찾아 나섰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라브리를 세웠다고 믿는다. 의심과 질문이 많은 젊은이들이 쉐퍼목사의 소문을 듣고 스위스 라브리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쉐퍼는 그들의 심각한 질문에 정직하게 그리고 정성껏 응답해 주었다. 지금도 라브리의 모토는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이다.
쉐퍼목사의 “이성에서의 도피”라는 책은 이미 포스트모던시대를 내다보고 쓴 책인 것 같다. 생각하는 활자문화에서 느끼는 영상문화, 절대적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는 상대주의 문화, 그래서 세계적으로 책을 읽지 않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생각은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형상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12.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교회다.
사랑의 교회가 사랑하는 성도들만 모인 교회라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남을 용서하기 힘들어하는 죄인들이고 사랑에 인색한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롬 5장)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주기도문). 쉐퍼 목사가 가장 많이 강조했던 것은 사랑이다. 특히 교회가 싸우고 갈라지는 현상을 안타까워하면서 성도들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전도에 우선해야 하고 또 전도에 첩경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성도들은 죄를 안 짓는 사람들이 아니고 죄를 질 때 고백하고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국제장로교는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전통과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에 버금가는 기준으로 믿고, 마지막으로 쉐퍼 목사의 사상과 정신에 영향을 받은 교회이다.
* 김북경목사 : 프란시스 쉐페의 제자이자 국제장로교(IPC) 소속 영국 최초 한인 목사로 1978년부터 2000년까지 런던한인교회를 담임하고, 다시 2004년까지 레딩한인교회를 담임한 후 국내에 들어와 4년간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 다시 영국에 건너가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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