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자 "긍정의 힘" 저자 '조엘 오스틴'은 이단입니다
신학이 얄팍한 현실교회의 목사나 신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일 중의 하나가 좋은 말이라면 무조건 인용한다는 점이다.
책치고 좋은 말 하지않는 책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저자를 가려서 권장하고 인용하기를 바라지만
그건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격이라 스스로 알아갈 수 밖에...
요즘 우리나라 기독교서적의 베스트 셀러가 긍정의 힘이라고 한다.
제목만 그럴듯 하고 내용에 예수라는 이름만 나와도 신학과는 무관하게 인용한다.
바보들의 행진이 지금도 한국교회에서는 백주에 버젓이 활개친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저자 조엘 오스틴이 '이단'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조엘 오스틴이 이단이라는 것은 사실이며 얼마든지 증명가능하다.
조엘 오스틴은 미국의 유명한 이단 집단인 'Word of Faith' 소속이다.
그의 아버지 존 오스틴도 이 집단 소속이었다. 베니 힌, 오랄 로버츠도 이 집단 소속이다.
'긍정의 힘'은 바로 이 집단의 교리이다.
이 집단은 사람들이 올바른 '말'(긍정적인 말)을 하고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떤 결심을 하든지 거기에 보답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한다.
'믿음'을 그들이 믿기 때문에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는 힘이라고 보는 것이다.
믿음을 인간이 믿어온 것을 인간을 위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는 것으로 본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이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을 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의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에게는 '주권'이 없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서 떠나있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중요하다.
Word of Faith가 주장하는 바, 정통적 입장과 대치되는 주된 메시지를 보면,
1) 우리는 작은 신들이다.
2)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모두 치루지 못하셨고, 지옥에 가서야 가능했다.
3)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입술로 요구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고 부유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병약하거나 가난하면 그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기 떄문이다.
4)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로 우리의 상황을 조정할 수 있다.
우리가 축복하고 치유를 말하면 우리는 그렇게 된다.
[ 출처 ]
http://cafe.daum.net/soongsari/8yIR/7458?q=%C1%B6%BF%A4%20%BF%C0%BD%BA%C6%BE%20%C0%CC%B4%DC&re=1
신사도운동의 대부 - 조엘 오스틴
조엘 오스틴
이러한 신비주의의 은사 은동이 세계를 향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또 다른 붐을 일으키는 기독교 경향이 나타났다. 바로 믿음 신학(Theology of Faith) 또는 (Word of Faith)믿음의 말 운동이다. 이 운동은 노만 빈센트 및 그에게 수학한 로버트 슐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믿는 대로 된다)’과 연결된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이 성령운동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고 있다. 특히 조용기 목사 같은 경우, 전형적인 성령 운동 및 믿음 신학의 핵심 멤버이다. 믿음 신학은 일종의 세뇌이다. 긍적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마저도 이 원칙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말의 힘”이다. 언어의 힘이다. 발설된 말의 힘이다. 따라서 어떤 말을 하느냐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통 신학과 믿음 신학은 같은 노선에 서게 된다. 특히 밖으로 나오는 말의 힘은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세뇌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적극적인 말, 좋은 말, 형통의 말을 한다. 인간적 차원에서 볼때 나쁠 것이 없겠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은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기 때문이다.
조엘 오스틴의 가르침은 일종의 최면이다. 적극적인 생각과 말로 사람들의 마음이 세뇌된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명상과 자기 최면에 빠지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된다.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며 "뭐가 잘못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얻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을 주지할 수 있어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허다하며 뉴에지 운동도 이러한 가르침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언제나 자기 자신이란 점이 기독교와 다르다.
이들 믿음 신학에 속한 자들의 책들을 보면 제목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네 안에 잠재 되어 있는 거인을 잠 깨워라” "우리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예언이다" “믿는 대로 된다” “긍적적인 말의 힘” “형통의 원리와 말의 원리” “우리 속에 잠자는 거대한 거인을 깨우라.”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가르침은 자기최면과 긍정적인 명상일 뿐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나아가 범신론적인 뉴에이지와 연결되는 첫 단계이다. 그 이유는 긍정의 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뇌이며 나아가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는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발생하는 힘과 능력이라고 하니, 뉴 에이지가 추구하는 사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기독교신앙은 언제나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있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십자가를 피하여 만나는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하신 길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길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로서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십자가는 우리에게 가장 깊은 비밀들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이 땅의 고난의 문제를 그 누구도 풀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신비는 이 땅에서 죄의 저주로 인한 고난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비한 축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거룩하여지며 고난을 통과한 이후의 영원한 영광을 바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주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7-18).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 1:5-6).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속에 잠재된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면 죄 가운데 영원히 멸망 받는다는 의식을 깨우는 것이다. 그래야 영벌을 받지 않는다. 그래야 멸망하지 않는다. 믿음 신학을 믿으며 이 땅에서 잠깐 형통을 누린다고 착각하며 복의 하나님, 마치 알라딘의 지니와 같은 하나님, 나아가 온 종일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어떤 영에 속는 것이 아니라, 회개로부터 시작하여 날마다 자신과 싸우며 죄에 죽는 과정이 이 땅의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치열한 싸움 과정에 자신도 모르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형통할 것이라는 말을 입으로 반복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무슨 상관인가? 이러한 긍정의 힘 신학, 믿음 신학, 형통 주의 신학은 기복주의를 부르짖는 샤머니즘적 주문을 외우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 출처 ]
http://cafe.daum.net/AmenComeJesus/VaL/14712?q=%C1%B6%BF%A4%20%BF%C0%BD%BA%C6%BE%20%C0%CC%B4%DC&r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