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필의 성격
“에세이는 그 자체가 원래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이미지로 되어진 문학” 이라고 한 알베레스(R. M. Alberes)의 말은 수필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이미 수필의 내력에서 그 형성과정을 살펴본 바와 같이 수필은 원래가 학문인 · 지식인의 글이다. 그러므로 수필이 지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정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소설이든 시든 그 어느 것이건, 문학은 감정의 소산이다. 그리고 시나 소설은 그 출발이 감정이니만치 소박한 감정의 노출이나 값싼 애상哀傷을 지양하기 위해서도, 또는 현대인의 고도로 성장한 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지성을 고창高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수필은 그 출발이 지성이요, 기반이 지성이니만치 정서적인 낭만과 신비적인 환상의 세계를 고조함으로써만 그 예술성을 독립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시나 소설은 원래 대중을 상대로 해 왔다. 최초의 서사시가 영웅을 과장적으로 노래한 것이랄지, 소설이 18세기 이후 서민계급의 각성과 더불어 등장했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수필은 원래 같은 수준의 지식인끼리의 심사心事의 교류였던 것이다. 사색적인 내용, 비통속적인 사고, 시화詩話 , 아취雅趣 등이 초기의 수필로 알려져 왔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시 · 소설이 점점 대중과 멀어져 가는 경향이 있음에 반하여 수필이 대중적인 듯한 상황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하여간 정서적이란 것은 문학수필의 중요한 속성이다. 아니, 어쩌면 본질일지도 모른다.
문학이 예술이요, 수필이 문학이라면 수필은 하나의 기술적인 표현일 수 밖에 없다. 내용이 아무리 좋고, 심오한 사상이 축적되어 있어도 표현의 기술이 없으면 문학은 될 수 없다. 문학은 결국 표현형식이다. 여기서 신비적 이미지로 되어졌다는 말이 수긍된다. 수필적 표현기교의 묘는 실로 신비적 이미지라는 데 있다.
좋은 수필에 나타난 서경敍景의 아름다움은 꽃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한 겹 놀 속에 비치는 꽃과 같은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태양 아래의 세계라기보다 달밤의 세계다. 코를 찌르는 향기가 아니요,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종소리 같은 향기다. 그것은 경물景物이 정서로 곱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주자청의 「달밤의 연못〔荷塘月色〕」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그들의 회상과 서사는 가끔 환상적인 세계에서 신비의 안개를 피우기도 한다. 램의 「꿈속의 어린이」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우리는 그들의 슬픔에서 오히려 행복 같은 기쁨을 맛봐야 했고, 웃음 속에서도 슬픈 애수哀愁를 느껴야 한다. 이것은 그윽한 표현이 실어다 주는 기환奇幻이다. 그리고 램의 「고도자기」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수필은 정신의 운동이다” “마음의 움직임의 그림자다” 하는 말도 이해될 것이요, “붓 가는 대로 써진 글” “누에가 실을 뽑듯 써진 글” 이란 말도 그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솜씨를 찬탄한 말인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수필의 내용은 서경敍景 · 회고 · 서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심정이 부딪히는 곳마다 수필의 꽃은 핀다. 서사敍事 · 논리論理는 가장 비중이 큰 것으로 수필은 “불만과 격정과 관용의 유로流露” 라고 한다. 그런데 이 유로한 점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사물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면 운다物不 得其平則鳴’ 라고 했다. 단애가 없으면 폭포가 없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극히 고요하고 평온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바닥에 무수한 자갈과 경사가 없으면 물소리는 없다. 시냇물이 맑고, 그 리듬이 아름다운 것은 아는 이가 많지만 폭포의 내리찧는 물이 더욱 맑고, 그 리듬이 더욱 고른 것은 생각하는 이가 적다. 그들의 서사는 단순한 서사가 아니다. 먼 데서 몰려 오는 조수潮水와 같은 감정이 말없이 전편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박지원의 「백영숙白永淑을 보내는 글」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긴 인생을 체험하며 겹겹이 싸인 회포가 간단한 두어 마디 엷은 웃음으로 처리된다는 것은 비상한 수법이 아닐 수 없다. 장대의 「호심정기湖心亭記」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범연한 독자는 흔히 이것을 살피지 못하고, 남의 글을 가볍게 지나쳐, 그 함축과 진미를 모른다. 익살과 웃음으로 능사를 삼고, 잡박한 지식과 천박한 재치로 없는 내용을 다 기울여 노출시키는 속문俗文이 많이 읽히는 소이다.
다른 문학은 마음 속에 얻은 것을 밖으로 펴지만, 수필은 밖에서 얻은 것을 안으로 삼킨다. 그러므로 수필의 대상은 자기다. 결국 수필은 외로운 독백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독자를 더욱 잡아 흔드는 것이다. 필자는 노신의 글에서도 가끔 이런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좋은 수필은 독자의 앞에서 자기를 말없이 부각시킨다. 우리는 시나 소설에서는 그대로 그 시나 그 소설에 경도되고 만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항상 작가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또한 수필의 중요한 특색이다. 이상에서 수필문학의 성격을 대충 생각해 본 셈이다.
수필문학의 유행은 관념문학의 유행이라고 비난된 적도 있었다. 그것은 서구에서 근래 수필이 도덕문제 · 인간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데서 온 비난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그 의미를 잃었다. 오늘날 모든 문학이 인간의 본질, 인간의 조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명은 족하다. 그보다는 소설과 수필의 비교라는 문제가 차차 새로운 화제로 등장해 가고 있다. 또 하나 새로운 문제는 20세기 이후에 단행본으로 나온 장편 에세이 즉 철학적 비판적 색채가 강한 소위 난해의 문장으로 알려진 마를로 · 카뮈 · 사르트르 등의 에세이를 수필문학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주되는 대상에서도 그렇고,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작품이 없다. 여기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잠깐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R. M. 알베르스의 말을 인용하여 두고, 아울러 필자가 위에서 장자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고전수필로 지적한 것을 상기시키는 데 그치려 한다.
“그들 작가의 우주도 문학인 이상 지적이기보다는 정서적인 것이다. 다만 너무 새로운 정서에 호소하는 까닭에 대중이 당황할 뿐이다.”
“문학이 아무리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해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연적 감정이 아닌 이상, 계몽이나 준비지식이 없이 읽혀지고 감상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복잡한 사리를 단적으로 제시하려 할 때 흔히 비유를 사용한다. 이것은 독자의 직감에 호소하여 한 모서리를 들어서 세 귀퉁이를 보이려는 것이요, 전체적으로 부합되는 타당성은 아니다. 필자는 수필의 성격을 또 다른 각도에서 말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하려 한다. 이것은 앞으로 수필의 수법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桃〕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柿〕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북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 못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 글이 유창하고, 재미있고, 미려해도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잡문이다. 이 말이 거슬리게 들린다면, 문장 혹은 일반수필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든 문학작품은 아니다.
밤은 복잡한 가시로 송이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껍질이 있고, 또 보늬가 있고 나서 알맹이가 있다. 소설은 복잡한 이야기와 다양한 변화 속에 테마〔主題〕가 들어 있다. 복숭아는 살이다. 이 살 자체가 천년반도千年蟠桃의 신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시는 시어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조성되어 있다. 그러면 곶감은 어떠한가.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열매가. 그러나 그 푸른 열매는 풋감이 아니다. 늦은 가을 풍상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하늘 찬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문장이다. 문장은 원래 문체란 뜻이니 청적색靑赤色이 문文이요, 적백색赤白色이 장章이다. 그 글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文章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袁中郞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의 시설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수필 특유의 것이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수필에 있어서 스타일이 될 것이다. 즉 그 수필, 그 수필마다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곶감의 시설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서적 · 신비적 이미지가 아닐까. 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비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놀과 같은 무드다.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싸인 신비로운 정서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