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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고차 1,000m의 샤르도네 고개에서 탈진하다 샤모니~아르장티에르 빙하~콜 뒤 샤르도네~트리엥 산장 간 답사 | |||
오랫동안 그리워한 끝에 만났으나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어리둥절, 혼란 속으로 나를 밀어넣었던 어느 여인에 대한 회한-. 뭐, 그런 것과 비슷한 감정으로 나는 알프스 오트루트에서 보냈던 일주일여를 되돌이켜 본다. 알프스 최고의 산악스키 루트 오트루트는 듣던대로 역시 아름다웠지만, 그저 아름답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황홀할 만큼 빼어난 미모였으나, 앙칼지고 매서웠다. 취한 듯 그 루트 한 가운데에서 나는 행복했지만, 한편 두렵고 힘들었다. 우리가 선 곳은 어디든 절경의 한가운데였다. 특별히 버리고 취할 것이 따로 없는 준봉과 희디흰 설릉의 기막힌 조화 속에 우리는 늘 서 있곤 했다. 때 아니게 150cm나 새로이 쌓인 신설에서의 스키 활강은 짧으나마 강렬한 황홀경이었다. 하지만, 오트루트는 간혹 느닷없는 눈보라나 혹한풍, 아니면 심연같은 크레바스로 얼을 빼놓았다. 11시간을 거의 한 번도 앉아서 쉬지 못하고 줄곧 걷기만 한 경험도 이 오트루트에서가 처음이다. 한국과 7시간인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은 첫날의 구간이 그렇게 길고 험했다. 알프스 산악가이드 경력 20년이라는 드니(Denis Eienne·47)는 하필이면 이날 저녁 눈보라 속에서 길마저 잃고 말았다. 결국 나는 몇 걸음 걷다가 허리를 꺾고 숨고르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전에 없이 힘이 들었던 것은 '아주 센' 사람들과 더불어 갔던 때문이기도 하다. 동행한 이는 대산련 산악스키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거의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는 유한규씨(49)를 비롯해 지난번 제1회 강원도지사배 산악스키대회에서 4위를 한 용환득씨(44), 이 대회에서 차도 슬로프를 가장 먼저 올라왔던 이상록씨(43), 알프스 스키강사 자격 취득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김광선씨(45) 등이다. 이들은 늘 가이드 드니와 더불어 저 앞의 가마득히 먼 설릉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심한 날은 간혹 그들의 족적이 눈보라에 뒤덮이며 사라져 당황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김광선씨의 스키 스킨(skin)이 너무 낡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탓에 그도 나처럼 뒤로 처지는 일이 잦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항상 알프스의 설원 한가운데 혼자 남겨지곤 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가이드 드니가 항상 서둘렀다는 점이다. 5월2일 첫날 이외엔 산행 후 언제나 시간이 넘치도록 남았다. 거의 쉬지 않고 걷는 그의 뒤를 부지런히 따르다 보면 대개 오후 2시 이전, 심하면 정오 이전에 산장에 다다랐다.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라고 그는 말했지만, 산장 도착 이후 날씨가 더 좋아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5월의 이 지역은 위도가 높아서 오후 8시가 넘도록 훤했다. 아무리 마음이 바빠도 도중에 한숨 돌리며 앉아 주위 풍광을 구경할 잠시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 방식으로 일관한 것은 지나치지 않았나 싶다. 간간이 쉬었다고 해야 고작 1시간 정도 차이가 났을 것이다. 아무튼 오트루트 관련 자료들의, 체력이나 스키기술이 'excellent(뛰어난)' 라거나 'expert(능숙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언급을 서양인들 특유의 과장된 엄포쯤으로 간과했던 것은 실수였다. 날씨가 나빠진 경우를 가정하면 특히 그렇다. 실로 뛰어난 체력과 능숙한 스키 기술이 없고서는 제대로 즐길 수 없으며, 즐거움보다는 고통과 위험이 더 큰 투어가 되는 오트루트임을 절감해야 했다. 그러나, 언젠가 이 오트루트를 다시 한 번 갈 것이다. 기술이나 체력, 장비 등속을 조금만 보완하면 빙하지대의 그 길고도 넓은 자연 설면을 그림 같이 S자를 그리며 활강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또한 나는 눈치챘기 때문이다. 첫날, 깊은 신설 스키 맛보기 4월30일 12시35분 발 네델란드항공편으로 11시간 걸려 암스테르담 공항으로 가서 2시간 머무르다 스위스 제네바행 항공기로 갈아탔다. 1시간30분만에 제네바에 도착, 마중나와 있던 샤모니(Chamonix)의 한국 교포인 조문행씨(48), 그리고 과거 한국에서 여러 해 살며 악우회에도 가입, 유한규씨와 암벽등반도 여러 번 함께 한 한편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반 한국사람' 올리비에 조르다노(46)와 더불어 샤모니로 달렸다. 계속 해를 좇아 서쪽으로 달려왔기에, 이곳 유럽은 여전히 4월30일이고, 훤한 저녁이다. 샤모니 중심가는 숙박료가 비싸서 변두리의 샬레(chalet)인 글라시에 뒤 몽블랑에 여장을 풀었다. 샬레는 비누도, 수건도, 슬리퍼도 주지 않으며, 공동샤워장과 화장실을 써야 하는, 영락없는 우리의 싸구려 민박집 수준이다. 조식 제공 1인당 하루 약 3만 원선인데, 그나마 스키 시즌이 끝나 값이 내린 편이라고 한다. 조문행씨 말을 빌면, 샤모니는 12~4월, 그리고 7~8월이 성수기이며 5~6월, 9~10월이 중간 정도의 시즌, 11월은 샤모니의 거의 모든 업소들이 문을 닫고 주민들이 휴가를 떠나는 완전한 비시즌이다. 빵과 잼, 버터, 우유, 주스 등속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사전 적응훈련 겸하여 샤모니 북쪽의 아르장티에르(Argentiere)로 갔다. 마침 이곳 스키장에서는 유명한 스키제조업체인 다이나스타 주관의 '프리 라이드 데이즈(Free Ride Days)' 축제가 한창으로, 다이나스타 아시아지역 영업부장인 올리비에가 하루 패스권을 마련해 주었다. 굳이 핑계를 댄다면, 이날 스키의 본고장 알프스에 왔다는 감흥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다리가 풀리도록 무리하게 탄 것이 또한 이튿날 산행 첫 구간에서 고전한 큰 이유이기도 하다. 저녁때 다이나스타 만찬장에 가서 맥주도 마시며 놀다가 샬레로 돌아가자 마침 가이드 드니가 와 기다리고 있다. 그는 우리의 복장과 장비를 일일이 체크하는 한편 눈사태로 매몰되었을 때 위치확인이 가능한 전파발신기(alpine beacon)를 비롯해 접이식 탐침(探針), 눈삽 등 구급 장비를 나누어주었다. "뭐, 이런 게 필요하겠어?" 라며 우리는 탐탁찮아 했다. 프런트포인트가 달린 아이젠까지 이미 챙겨 넣은 배낭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우리는 난감해 하며 구급장비를 받았지만, 나중에 없어선 안되는 생명 장비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다음날도 봄비가 추적거렸다. 알프스 지역이 지난 보름간 계속 나빴으므로 이제는 좋아질 때도 되었다는 여러 사람의 말이었지만, 아닌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안전벨트를 차고 있는데 가이드 드니가 우리를 태우러 왔다. 올리비에 또한 이틀간 우리와 더불어 함께 가겠다며 길을 나섰다. 아침 9시, 아르장티에르에서 이번 시즌 마지막으로 운행하는 그랑몽테(Aig. des G. Montets)행 케이블카를 탔다. 5분여 올라간 중간역에서 곧바로 다른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10분 올라가면 해발 3,225m인 그랑몽테 케이블카 종점이다. 수많은 스키어들과 더불어 기존 슬로프를 따라 내려가다가 우리는 곧 슬로프 경계 라인을 벗어나 곧장 아래의 빙하를 향해 활강했다. 어제 샤모니에 내린 비는 이곳 고지대에선 눈이었다. 무릎 넘게 신설이 쌓였고, 스키어들은 신나게 활강해 내려갔다. 난생 처음의 심설 스키는 쉽지 않았다.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분설 속에 울퉁불퉁한 기존의 설면이 숨어 있어, 툭하면 거기에 걸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등에 멘 배낭의 무게가 10kg 정도나 되어 더더욱 폼나는 활강은 어려웠다. 유한규, 김광선 두 사람만이 심설 스키를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좁고 긴 50m 급경사 쿨와르 스키 착용한 채 하강 멈추어서서 알프스의 대산록을 활강하는 스키어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서너 번 반복하자 어느새 아르장티에르 빙하다. 가이드 드니는 이미 스키 스킨을 부착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근데 우리가 올라가야 하는 데가 어디야? 아니, 저기 저 앞에 있는 콜이란 말이지? 아이구 저거, 아예 벽인데 그래. 언제 저걸 쳐오르나." 드니는 우리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그는 "노 프로블럼"이라며 앞장서 나아갔다. 빙하를 가로지른 뒤 드니는 갈짓자로 꺾으며 가파른 설면을 쳐오르기 시작했다. 빙하에서 저 위의 고개인 샤르도네 고개(Col du Chardonnet)까지는 고도차가 무려 1,000m. 배낭은 무겁고, 따가운 햇살에 몹시 무더웠다. 1리터쯤 준비해간 물은 금방 바닥이 났다. 눈을 먹으면 갈증이 더 심해진다지만 목이 타들어가는 데야 도리 없었다. 헐떡이며 2시간쯤 올랐을까. 경사가 서서히 눕기 시작해 이제 고갯마루인가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완경사 설면 저기 저 멀리 아마득한 곳에 프랑스 스위스 간 국경선 상의 고개인 샤르도네가 있었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본 것은 아르장티에르 빙하 저편에 장벽으로 선 에귀 베르트(Aig. Verte)와 그 주변의 수많은 침봉들이 이룬 절경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 되돌아서면 오늘 저물기 전에 샤모니까지 되돌아갈 수 있을까를 가늠해보기 위해서였다. 아까 저 아래 빙하에 보였는데 오래지 않아 우리를 훌쩍 추월해 나아간 유럽 스키어 몇 명은 어느새 샤르도네 고개 밑까지 갔다가 되돌아서서 신나게 활강해 내려갔다. 콜까지는 다시 짧으나마 급경사 설벽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샤르도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혹한풍이 몰아쳐왔다. 고갯마루 위 바위 밑둥에 두른 여러 겹의 낡은 슬링이 보였다. 맙소사. 60도쯤 되는 급경사의 좁고 긴 50m 쿨와르 하강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키를 착용하고 사이드 슬립 방식으로 가이드 드니가 로프를 풀어주는 대로 슬슬 미끄러져 내려가야 했는데, 녹고 얼기를 반복해 거의 얼음벽이나 마찬가지인 쿨와르의 중간 일부는 폭이 165cm밖에 되지 않아 스키의 앞뒤가 걸릴 만큼 좁은 데다 뭉툭 벽이 끊어져버린 상태였다. 이 지점을 지날 즈음 결국 한쪽 스키가 걸리며 몸이 뒤집히고 말았다. '차라리 두 겹으로 로프를 내리고 정식 하강을 할 것을'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몸은 뒤집히고 스키도 한 쪽이 벗겨져 버린 뒤였다. 깊은 눈 속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스키를 착용한 뒤 조금 내려가자 다시 아까와 같은 긴 완경사 오르막이 시작된다. 이미 오후 3시가 넘고 있었다. 어느새 7시간이 후딱 지나버린 것이다. 다시 저 앞 암릉 중간 어딘가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가이드 말을 듣자 허기와 갈증이 한결 심해졌다. 아침을 빵 두어 조각으로 때운 뒤 먹은 것이라곤 초컬릿 몇 토막뿐이었다. 이제는 정녕코 되돌아가기도 불가능한 지점에 와 있었다. 혹 스키 스킨이 중간에 떨어지기라도 해서 전진이 어려워진다면…. 수건을 꺼내어 정성 들여 플레이트를 닦은 다음 조심스레 스킨을 붙였다. 지치고 지쳐 몇 걸음마다 허리 꺾고 심호흡 고개는 가팔랐다. 아까의 샤르도네 고개보다 훨씬 더-. 갈증과 허기로 유발된 현기증에 휘청 몸이 넘어지려 했다. 서늘한 공포가 등줄기를 훑고 내려갔다. 다들 지친 상태라, 누군가 굴러 떨어지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실족하여 저 아래로 구르면 다치지는 않더라도 이 고개를 다시 오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내가 맨 뒤다. 추락해도 오랫동안 아무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로프를 내려달라는 외침을 들은 것일까. 로프 대신 "테이크 오프 스키!" 하는 가이드의 응답이 위에서 돌아왔다. 그렇구나. 킥턴(방향 전환)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파른 경사였다. 아슬아슬, 스키를 벗어 배낭에 매달고 폴 두 개를 모아 설벽을 찍으며 한 발자국마다 깊이 정성들여 다져 디디기를 반복하자 어느 순간 눈보라가 얼굴에 휘몰아쳐왔다. 고갯마루였다. 고갯마루 저편에 유한규, 올리비에, 김광선씨가 기다리고 있다가 애 많이 썼다며 반겨주었다. 짧은 바위턱을 내려선 다음 스킨을 떼고 완경사 설면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벌써 오후 6시가 지났다고 했다. 그럼, 산장은 거의 다 온 것인가. 가이드 드니는 이미 저 멀리 가고 없었다. 지친 데다 스키가 잘 나아가지 않아 금방 또 뒤처졌다. 유한규씨가 기다렸다가 플레이트 바닥을 보자고 한다. 본드가 잔뜩 묻어 있다. 왁스칠을 해두지 않은 탓에 스킨을 붙였다가 뗄 때 덕지덕지 옮겨 붙은 것이다. 플레이트 에지로 다른 플레이트 바닥을 긁어내자 스키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잘 나아갔다. 그런데 트리엥 산장(Cabane du Trient)은 어디 있는 것일까. 눈보라는 점점 짙어졌고 어둠도 설원에 스미기 시작했다. 우리가 진행하는 방향과 직각으로 가로지른 스키 자국이 보였다. 이건 뭘까. 그러나 가이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과 뒤섞이어 잿빛으로 변한 설원 저편에서 이상록씨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간 우리는 하강했는데, 그는 오른쪽 위로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가이드가 길을 잘못 들었대나 봐요. 야, 이거 큰일났네." 그의 뒤를 따라 올라가자 가이드가 웅크리고 앉아 GPS기기와 지도를 들여다보며 "퍽(fuck)! 싯(shit)!" 하는 상소리를 내뱉고 있다. GPS기기 배터리가 다 되었다고 했다. 얼른 배낭에서 꺼내주었다. 그는 다시 한참 궁리한 끝에 어딘가로 방향을 잡고 앞장섰다. "비박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설면으로 바람이 바로 불어닥치니 큰일났어요." 이상록씨는 8,000m급 고산등반 경험만도 두 번 한 산꾼이다. 그가 긴장하고 있었다. 다들 랜턴을 켜들었다. 가이드가 방향은 제대로 잡기나 한 것일까. 갑자기 눈 주위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다.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고 주변 산릉이 보였다. 그 순간 두어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저기, 산장이다!" 설원 저 건너편의 암릉 위에 삼각형 지붕을 한 건물의 실루엣이 보였다. 다들 걸음이 빨라졌지만, 나는 아니었다. 몇 걸음 뗄 때마다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코앞에 산장을 본 뒤 아마도 그렇게 걸은 것이 1시간도 더 되었을 것이다. 뒤에서 김광선씨가 독려해주지 않았다면, 먼저 산장에 들었던 유한규씨가 내려와 배낭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밤 산장까지도 못 가고 쓰러졌을지 모른다. 트리엥 산장에 들자마자 갈증 때문에 찬 물을 두 컵 연거푸 들이킨 것은 큰 실수였다.갑자기 숨이 가빠졌고, 30분 가까이 가쁜 호흡이 멈추지 않았다. 뜨거운 수프를 마시고 나서야 숨결이 진정되었고, 그후 나는 식탁에 엎드린 채로 혼곤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 글·사진 안중국 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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