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새 세기의 요구에 맞춰라”며 직접 챙겨
일생일대의 오디션이 평양을 흔드는 중이다. 지난 7월 초 ‘가창이나 악기 연주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이는 여성들을 선발하라’는 김여정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시 관철의 책임자는 현송월이다. 현송월은 평양 김원균음악종합대학을 중심으로, 키 165cm 이상인 성악배우(보컬)와 기악수(악기 연주자) 선발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심사방식, 비밀주의, 토대 정밀검열 등이 모란봉악단 창설 때와 흡사하다고 한다. 단원을 새로 선발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는 배경이다.
이것이 왜 일생일대의 오디션인가. 모란봉악단은 김정은이 직접 만들고 챙긴다는 이른바 친솔악단이기 때문이다. 단원이 된다는 것은 본인과 가족 전체의 신분 상승을 뜻한다. 2012년 창설 후 한두 명을 신입 단원으로 보충하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반(半)공개적으로 단원을 뽑은 적은 없다. 기존 단원의 나이가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모란봉악단은 북한 당국이 전력을 다해 육성하는 원톱(one top) 걸그룹이다. 북한에 걸그룹은 모란봉악단 딱 하나다. 걸그룹 시장을 독점(獨占)했으니 북한 전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과점(寡占)도 아니고, 글자 그대로 독점이 가능한 이유가 있다. 북한에서는 모든 예술을 당국이 통제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강가에 나가 기타를 치며 노는 정도라면 모를까, 개인이 가수가 되고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간 회사, 민간 공연장이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모란봉악단원을 매년 정기적으로 뽑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걸그룹’의 로망이 있는 아티스트라면 이번 심사는 ‘평생 단 한 번뿐인 기회’에 다름 아닐 터이다.
물론 다른 흐름도 있다. ‘왕조시대 기생을 뽑느냐?’ ‘무슨 심사단을 그렇게 요란스레 내려보내나?’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모란봉악단이든 5과(課)든, 예전에는 뽑히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곳에 뽑혀가 일생 가족과 떨어져 사느니 차라리 안 뽑히는 것이 낫다. 뽑혀가 봐야 조국과 당이 뭐 해주는 것 있느냐’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모란봉악단에 집착하는 이유
▲ 2017년 7월 31일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 성공 경축공연에서 노래하는 모란봉악단. / 사진=뉴시스
김정은은 왜 모란봉악단에 집착할까. 어쩌면 그는 악단이 ‘자기 정체성(正體性)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가 집권 초기 한 일 중의 하나가 모란봉악단의 결성이다. 김정일이 만든 은하수관현악단을 제쳐두고 자기만의 단체를 만든 것이다. 자신의 전용기에 사용한 글자체를 모란봉악단 DVD에도 쓸 정도다.
김정은의 아내 이설주의 등장도 모란봉악단과 관계가 있다. 그녀가 처음 대중 앞에 공개된 때와 장소가 바로 2012년 7월 6일 모란봉악단의 첫 시범 공연이다. 하이힐과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들이 영화 〈록키〉 주제곡과 ‘마이 웨이(My Way)’를 연주하고, 미키 마우스와 백설공주 같은 미국 만화 주인공들이 등장한 파격적인 무대를 기억하시는지?
당시 북한 TV에서 공연을 중계했는데, 화면에 잡힌 김정은 옆에 앉아 있던 ‘묘령의 여성’에 대해 국내외에서 궁금증이 일었다. 공연 며칠 후 능라인민유원지 개장식 때 북한 매체가 ‘부인 이설주 동지께서 함께 나오셨다’고 보도하여 상황을 정리했다. 참고로 이설주는 은하수관현악단의 단원이었다.
단원들에게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특혜도 따른다. 공연 중 가수·연주자의 이름을 배경막에 투사하는 것이다. 그 결과, 북한 내부에서 개인을 향한 일종의 팬클럽이 생겼다. 김정은 이외에는 어떤 개인적 우상화도 허용하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북한 기준으로는 엄청난 파격이다.
개인이 떠오르다 보니, 모란봉악단 내부에는 라이벌 관계도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 선우향희 악장의 라이벌은 차영미다. 한 사람이 무대에 서면 다른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선우향희가 대부분의 공연을 소화했지만, 문재인 대통령 방북(訪北) 때는 차영미가 연주를 했다. 보컬의 톱스타는 류진아다. 북송 재일교포의 딸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류진아의 라이벌은 라유미다. 라유미는 단원 중 두 번째로 공훈배우 타이틀을 받을 만큼 잘나갔지만 2014년 9월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 첫 번째 공훈배우는 류진아다.
하기야 선우향희와 류진아도 사라진 적이 있다. 한동안 무대와 방송에서 보이지 않아 숙청설까지 돌 정도였으나 북한 매체가 ‘장성택 처형과 연루돼 조사 중’이라는 보도를 하며 행방을 확인해줬다.
북한판 걸그룹
▲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만찬에서 조용필과 공연을 하는 현송월(왼쪽). / 사진=공동사진기자단
김정은이 모란봉악단을 각별하게 챙기는 이유가 또 있다. 선전·선동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모란봉악단은 이른바 7·27 전승절(정전협정 체결일) 70주년 행사 등 북한 당국이 주최하는 거의 모든 행사에 등장해, 해외 언론으로부터 ‘북한판 걸그룹’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북한의 기존 악단들과는 완전히 다른, 화려하고 세련된 의상과 헤어스타일, 격렬한 안무로 국내외에서 인기몰이를 한 결과다. 일본에도 팬클럽이 생겼고, 중국에서는 해적판 CD, DVD가 나올 정도였다. 평양에서 공연하면 ‘평양이 들썩인다’는 이야기가 돌고, 입장권이 생기면 할머니가 친손녀에게조차 표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군부대 공연을 가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김정은이 와도 그보다 더 흥분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한다. 지방 순회도 열광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모란봉악단의 필살기는 각 지방 관객을 위한 맞춤 노래를 준비한다는 점이다. 대홍단에 가면 ‘하늘아래 첫 동네’라는 노래를 불러주는 식이다.
김정은 우상화도 세련된 방식으로 진행한다. 김정은이 어촌에 현지지도를 한 뒤에는 ‘바다 만풍가’를 부르고, 과수농가 지도를 한 직후에는 ‘천령 아래 사과바다’를 레퍼토리에 집어넣는 것이다. 김정은은 “새 세기의 요구에 맞춰라”며 악단을 챙기고, “가수들의 눈과 귀를 틔워주라”며 최신 자본주의 음악의 청취와 연주도 허용한다. 빼먹을 것만 빼먹고 자본주의의 바람을 막는다는 이른바 ‘모기장 이론’을 넘어, ‘우리 것을 더 재미있게 만들라’고 공세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드라마와 영화는 한류(韓流)에 완벽하게 밀렸지만, 그래도 모란봉악단은 K-POP에 맞서 나름대로 선전(善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베이징 공연 무산
▲ 2015년 12월 중국 순회공연길에 오른 모란봉악단. 이들은 군인 신분이라 곧잘 군복을 착용한다. / 사진=AP/뉴시스
모란봉악단의 선전·선동이 늘 통하는 것은 아니다. 현송월 단장은 2015년 12월 베이징에서 공연 3시간을 앞두고 갑자기 공연을 취소하며 전 단원과 함께 전격 귀국했다.
2019년 12월에도 마찬가지였다. 북중(北中) 수교 70주년을 기념해 12월 3일 베이징 공연을 시작으로 11개 도시를 순회하려던 공연이 중단되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나 리커창(李克强) 총리 등 국가지도자와 각 성(省), 시(市) 지도자들이 참석할 것”이라는 기획사의 안내문도 나온 뒤로, ‘핵·미사일’ 등 공연 내용을 놓고 중국과 북한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진실을 알려주는 단서는 2015년 현송월의 발언이다. 그녀는 “장군님이 지시하신 것은 토씨 하나도 뺄 수 없다”며 철수를 결행했다.
모란봉악단은 연주뿐 아니라 배경 영상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진짜 메시지는 영상에 담겼다’는 평가도 있다. ‘단숨에’라는 노래를 하면 미사일 발사 장면,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하는 장면, 미사일이 날아가 미국 본토를 타격하고 성조기가 찢어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북한은 틀겠다고 하고, 중국은 안 된다고 막았을 것이다. 결국 양측은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이다. 당시 연합뉴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모란봉악단이 중국 공연을 취소한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전언과 관측도 나와 있다. 이 가운데 11일 국가대극원에서 진행된 모란봉악단의 공연 리허설 중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 장면이 대형 화면에 등장한 것이 원인이 됐다는 전언이 있다. … 이와 관련해 9일 정통한 중국소식통은 “중국 관리가 무대 배경화면을 문제 삼으면서 국제형사재판소를 언급하자 현송월이 발끈했다”고 말했다. … 처음 중국 관리는 다짜고짜 “(화면을) 삭제하라”고 했고, 이 말을 들은 현송월이 나서 문제 제기를 하면서 언쟁이 이어졌다. 그러자 중국 관리는 “너희가 그러니까 김정은이 ICC에 회부되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모란봉악단 단원 모두는 현역 군인 신분이다. 노래 후 거수경례를 하는 이유다.
현송월은 김정은의 內緣女 아닐 것
말이 난 김에 현송월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현송월이 김정은과 내연(內緣)관계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언젠가 3·8 부녀절 행사 때 TV 카메라가 객석을 비춘 적이 있다. 객석에는 한복을 입은 만삭의 현송월이 앉아 있다가 사회자와 관객의 요청을 받고 ‘준마처녀’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기 전 ‘아들이냐, 딸이냐?’라는 질문에 ‘딸이라서 남편이 싫어하지만,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딸도 중요하다’는 답도 했다.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은 ‘북한은 본처가 아닌 김씨 일가의 여자를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숨긴다.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였던 김옥도 사진에서 지우고, 구두만 살짝 나온 부분도 세심하게 지울 정도다. 만약 현송월이 김정은의 여자였다면, 만삭인 영상을 방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김씨 일가의 여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김정은의 형 김정철은 에릭 클랩턴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독일, 2011년 싱가포르 공연에도 모습을 보였다. 2011년 공연은 김정일의 생일 전날인데도 현장에 나타났다. 2015년 5월 20일, 21일에는 런던 로열 앨버트홀에서 열린 에릭 클랩턴의 공연을 이틀 연속으로 관람하기도 했다.
그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대기하던 한국·일본 언론에 여자친구와 경호원의 모습이 잡혔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의 공연에 그 자신이 상당 수준의 기타연주자인 김정철이 대동한 여자친구는 바로 모란봉악단 기타리스트 강평희였다. 그 둘을 호위했던 인물 중 한 명이 후일 한국으로 망명, 지난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뽑힌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당시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이다.⊙
장원재 / (사)배우고나누는무지개 고문
월간조선 202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