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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화두(話頭)
조상님들 산소를 어떻게 관리 할 것인가? 우리 모두의 고민!
1. 관포 양씨 입거제 선조(入巨濟 先祖-處字海字)이후의 내력 (來歷)
남원양씨 병부랑중 양능양(兵部郞中 梁能讓)공(公)을 中始祖로 삼아 1世로 한 이후 계세(系世)하여 오고 있음. 그래서 우리들은 남원양씨 병부공파(兵部公派)라고 함.
13世 양 준(梁 峻)공께서 당시 郡守를 지냈으므로 그 후손들은 “군수공파(郡守公派)”라고 함.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 와서 19세 양 적(梁 勣)선조의 후손들은 전남 임실군 우번촌에서 살았다하여 우번파(雨番派)라고 함.
양 적 선조의 아들 3형제 중 막내 세장(世章)선조의 외아들인 21世 응규(應奎)선조는 4남(處海, 處福, 處晋, 處明)) 1女을 두셨는데 장남인 처해(處海)선조님이 병부공파 22世이며 입거제(入巨濟:거제에 처음 오신))하셔서 관포(冠浦)에 안착(安着)하신 분이시고 우리들에게는 1대조(代祖)이심.
처해(處海) 선조님은 성구(聖龜), 서구(瑞龜), 진구(震龜)와 효구(孝龜) 네 아들과 딸 둘을 두셨는데 성구선조는 인손(仁遜)과 준일(俊一) 두 아들을 두시고 효구선조는 금춘(今春)과 기정(己正) 두 아들을 두었음.
24세 인손선조는 수경(守京)과 용이(龍伊) 두 아들과 딸 넷을 두시고 금춘 (今春)선조는 일록(日綠)과 일업(日業) 두 아들을 두었으며 25세 수경선조는 유관(有寬), 재관(再寬), 관철(寬哲), 관열(寬烈), 관업(寬業)의 4형제를 두시고 용이선조는 후사가 없어서 관철을 계자(系子)로 하고 25세 일록선조는 도석(道石)과 도철(道哲)의 두 형제를 둠.
25세 수경선조의 장남 유관(有寬)선조는 상필(尙弼)과 상준(尙俊) 형제와 딸연악(連岳)을 두셨는데 상필선조는 외아들 모일(模一)을 두셨으나 후사가 없어 입거제 선조이신 처해(1대)선조님의 장남 장손 승계는 28세 모일(7대)선조로써 끝나고 26세 유관(5대)의 차남이신 27세 상준선조께서 봉도, 흥도, 흥석의 세 아들과 딸 다섯을 두시고 28세 봉도(鳳道)할아버지께서 두산, 두상, 수정, 우정(또정)의 4형제와 딸 둘을 두시고 흥도(興道)할아버지께서는 두웅, 두평의 두 아들과 딸 다섯을 두시고 흥석(興石)할아버지께서는 외아들 정덕(正德)아저씨와 딸 둘을 두셨음. 29세손 두산아저씨는 득봉과 덕범 형제딸 넷을, 두상아저씨는 아들 찬석이와 딸 둘을, 수정아저씨는 외아들 득춘이를, 우정아저씨는 대생, 상생, 주생, 주건의 4형제를, 두웅아저씨는 명호와 태수 형제와 딸 둘을 두고 정덕아저씨는 외아들 인원이와 딸 다섯을 둠.
25세(4대) 수경선조의 둘째아들 26세(5대) 재관(再寬)선조님이 우리6촌들의 고조부이시고 외동아들이신 만필(萬弼)선조님이 증조부이시며, 증조부께서는 봉구(鳳九), 봉주(鳳柱), 봉화(鳳化), 봉석(鳳石)의 4형제와 딸 둘을 두셨는데 이분들이 바로 우리들의 할아버지이시고 칠천도 고모할머니임.
그러므로 우리들은 남원 양씨 병부공파 30세손(世孫)인 반면 거제 관포에 오신 22세 처해 선조님(1대)의 9대 후손들임. 19세 우번파 양 적(梁 勣)선조로는 12대손이고, 13세 군수공파 양 준(梁 峻)으로는 18대손(代孫)에 해당됨.
우리들의 고조부이신 재관(再寬)선조님은 조선국 순조(純祖)임금 28년인 무자년(戊子年-서기1828년) 음력 정월 20일에 태어나셔서 갑진년(甲辰年-1904년) 정월 10일 향년 77세에 돌아 가셨으며 묘지(墓地)는 관포 샘이골 동편 병좌(丙坐)에 있음. 고조모님은 김해배씨(金海裵氏)이시며 정해년(丁亥年-1827년) 동짓달 초하루에 태어나셔서 기해년(己亥年-1899년) 오월 초닷새 향년 73세에 돌아 가셨으며 묘지는 관포 작은골 장목 넘어가는 길 우측 도로 위 간좌(艮坐)에 있음.
우리들의 증조부님 만필(萬弼)선조님은 철종(哲宗)10년인 기미년(己未年-1859년) 정월 7일에 태어나셔서 신사년(辛巳年-1941년) 정월 7일 향년 83세로 돌아가셨으며 묘지는 관포 공동묘지 맨 위쪽 신좌(申坐)에 있음, 증조모님은 해주오씨(海州吳氏)이시며 정사년(丁巳年-1857년) 3월30일에 태어나셔서 갑술년(甲戌年-1934년)10월 1일 향년(享年) 78세에 돌아 가셨으며 묘지는 증조부님 묘의 우측에 나란히 있음.
25세 수경선조님의 셋째아들 관철선조님은 후사가 없는 동생 용이선조님의 계자(系子)로 가서 윤필, 성필, 원필, 명필 4형제와 딸 둘을 두었으며 장남 윤필선조님은 후사가 없고 차남 성필선조님은 봉갑(명덕이 할아버지), 봉길(용숙이 할아버지), 봉줄(종식 아저씨 아버지)할아버지와 두딸을 두셨음. 3째아들 원필 선조님은 봉호(학배 할아버지), 봉익(학준 할아버지), 봉근(딸만 넷이고 아들이 없는 숙부 명필의 系子가 된 학휘 할아버지), 봉동(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어 봉근할아버지 차남인 두홍아저씨가 계자가 된 학곤이 할아버지), 봉욱(광남=두규 아저씨의 아버지)), 봉문(6.25때 전사로 후사가 없음) 할아버지 6형제와 딸 둘을 둠. 넷째 아들 명필 할아버지는 후사가 없어서 봉근 할아버지(학휘, 학곤의 친 할아버지)를 계자로 하였음.
25세 수경선조님의 넷째아들 관열선조님은 외아들 진필과 딸 셋을 두셨으며 진필선조님은 봉기(후사가 없음), 봉운(두룡과 두인 두아들과 딸 하나를 둠), 봉염(아들 두원, 손자 천종, 종운), 봉찬(큰아들 대원-손자 희도, 둘째아들 철원, 셋째아들 성원과 딸 한를 둠)의 4형제와 딸 하나를 두었음.
25세 수경선조님의 다섯째아들 관업선조님은 딸 하나만 있고 후사가 없어서 만필 증조부님의 넷째아들 봉석 할아버지(기생, 탁생이 할아버지)를 봉사손(奉祀孫)으로 하였음.
25세 일록선조님(처해-효구-금춘-일록)은 도석(道石), 도철(道哲)형제를 두었으며 26세 도석선조님은 덕준, 덕수, 우출(又出) 3형제와 딸 셋을 두셨고 덕준선조님은 봉실(승열 할아버지), 봉협(후사가 없어서 학규 아저씨가 삼촌의 계자가된 해동의 할아버지), 봉엽(학조, 복종 아저씨의 아버지-민수의 할아버지), 덕수선조님은 개동(정남아저씨 아버지-동욱의 할아버지), 경립(정률 아저씨 아버지-영민의 할아버지), 경춘((찬호 아저씨 아버지-민영의 할아버지)와 딸 둘을 두셨음. 우출선조님은 봉숙할아버지(학윤 아저씨 아버지-은석의 할아버지)만 두셨음.
도철선조님은 외아들 덕찬선조님을 두셨으며 덕찬선조님은 다줄(多乼), 경운, 태숙, 금숙 4형제와 딸 하나를 두셨고 다줄할아버지는 두형제 명국(갑사의 아버지), 명호(은배의 아버지)와 딸 하나를, 경운할아버지는 문국(창민의 아버지), 광길(창수의 아버지), 윤호를, 태숙할아버지는 아들 인길과 딸 하나를, 금숙할아버지는 준통와 준부 아들만 둘 두었음.
2. 선조님들의 묘지에 비석과 상석 등이 왜 없을까?
입거제 선조이신 처자해자 선조님을 비롯한 선조님들 산소에 가 보면 비석이나 상석도 없으며 심지어 분상이 훼손되었어도 방치되어 있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 자라온 우리들임. 이제 우리들이 어른이 되어 다른 지방에 가보기도 하고 살기도 하다 보니 우리 거제의 풍습이 좋다고만 생각하지 않음이 비단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리라 믿어짐. 다른 지방에서는 청명.한식날이 되면 앞에 가신 분들의 산소를 손질도 하고 비석도 상석도 설치하여 후손들이 번창함을 알 수 있는 반면 우리 거제는 비단 우리집안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선조들의 산소를 거의 방치한 상태로 두고 있어 그나마 벌초마저 하지 아니하면 후손마저 없는 폐가집안의 산소로 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음.
이와 같은 현상이 왜? 그럴까하고 내 나름대로 추측하고 알아보고 고심해보았더니 우리거제는 어업이 주업으로 망망한 바다에 그물을 던져 놓고 물고기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물때가 되면 그물을 거둬 수확하는 생계 수단이다 보니 용왕님과 조왕님께 비는 샤마니즘( 소위 미신이라고 함)이 일찍부터 뿌리를 내려 집이나 산소 등을 함부로 손질을 하면 ‘동토’가 생긴다는 관념이 생활화 되다시피 되어 있음. 다른 이유로는 거제는 비석과 상석을 할 대리석이 생산되지 아니한 관계로 다른 지역에서 구해 오려면 첫째, 돈도 없고 둘째, 운반해 올 우마차는 물론 해상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 것으로 이해됨. 그러다 보니 어느 집안 할 것 없이 비석도 상석도 없고 봉분도 허물어 져 있는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됨.
그러나 육로는 물론 육지와 섬인 거제도와의 육교가 생겨 운송이 쉽고 또한 석물 취급 전문어체도 생겨 근년에는 산소를 쓸 때 처음부터 비석과 상석을 설치하고 문화 교류가 활발하여 한식날이나 손 없는 좋은날을 잡아 봉분 손질도 하고 심지어는 절대금기로 되어 있던 이장도 쉽게 하고 있는 세태가 되는 생각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
3. 우리들 선조님들의 산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관포양씨 선조들의 산소는 무려 100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산소 모두를 손본다는 것은 전체 문중의 합의를 구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갈래마다 경제적, 종교적, 가치관 등의 이유로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며 입거제 선조이신 ‘처자해자’ 9대조님 내외분 산소는 불원간 진행될 재실 이전 시(거가대교 건설로 인한 철거가 부득이함) 문중회의에서 결정할 사항이라고 간주됨.
그러나 우리 갈래의 고조부내외분 산소와 증조부내외분 산소 4기(基)에 대해서는 우리들 6촌들의 몫이며 우리들이 합의한 의견에 따라 시행여부와 진행시기 및 방법을 결정 할 사안이라고 보고 여러 동생들의 의견을 타진하고자 함.
왜 고조부와 증조부 산소를 우리 6촌들이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조부님도 증조부님도 각각 외동아들이시기 때문에 그 직계 후손이신 우리들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타계하셨고 그 아래 후손이신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12형제 중 여섯분은 타계하시고 살아 계신 여섯분도 연노 하시고 경제적으로도 생각으로도 수행 할 능력이 없으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임. 그러므로 우리 6촌 40명이 뜻을 모아 이 큰일을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나의 의견을 먼저 제안하고자 함.
먼저 이일을 하기위해 지난 2월 22일 진생이 동생의 공학박사 학위 수여식을 축하하기 위해 부산대학교 졸업식장에 들려 그다음 다음날 거제 간 김에 하청 팔도장의사 김석도 사장을 모시고 관포와 대구지 공동묘지에 가서 현지답사하고 견적을 내보도록 하고 상경한 이틀후에 전화로 견적을 받은 내역은 아래와 같음.
- 아 래 -
@고조부 산소 : 봉분 앞쪽 경치 돌을 2단으로 쌓고
양쪽 약간 윗쪽 흙으로 봉분을 만들고
상석과 비석 그리고 돌꽃병 두개 설치
비용은 포크레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관계로 모두 사람의
손과 힘으로 해야 하므로 인력이 만이 들어가기 때문에 2,000,000원 이라고 함
@고조모님 산소 : 봉분은 손질 안하고 상석과 비석 그리고 돌꽃병 두개
설치, 비용은 900,000원 이라고 함
@증조부모님 산소 : 앞쪽에 경치돌을 3단 높이로 쌓고
봉분을 각각 복토하여 손질하고
상석과 비석은 두분 사이에 하나만 설치하고
돌꽃병 두개 설치, 비용은 4,000,000원 이라고 함
- 임도에서 산소 가는 길이 없기 때문에 페타이어 또는 나무로 계단을 만들 어 지금 보다 수월하게 다닐 수 있는 계단길 설치, 비용 300,000원
- 소형포크레인이 들어가서 작업하는 것으로 전제로 한 것임.
총소요금액 : 7,200,000원
(단, 비석은 글자 수대로 가격이 다르기 때문에 기본적인 글자 수 보다 많을 경우 추가 금액이 있을 수 있음)
4. 비용분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6촌들이 균등하게 부담하는 것이 불평이 없을 것으로 보아 1인당 200,000원으로 하고 (20만원x33명=660만원) 모자라는 돈(60만원)은 조금 형편이 낳은 형제들이 상의하여 부담 하는 것으로 함.
-6촌 가운데 이미 타계한 형제는 부담을 제외하고 해외에 장기 취업 또는 거주하는 형제도 현실적으로 부담하기 어려우므로 부담 시키지 아니함.
-6촌 남자 형제 명단(순서는 할아버지 연세 순으로 함)-
①鳳자九자 할아버지 손자: 혁생(타계), 동생 /장수(타계), 장건, 일수(타계),
광수, 광덕 -7명중 4명은 성금 부담가능
②鳳자柱자 할아버지 손자: 녹생, 일생, 능생, 홍상, 근생 /경생(타계), 영생,
영석 /성생, 은생(타계), 석문(재중국), 학문(재중국) /진생, 진석, 진삼 -15명중 11명은 성금 부담가능
③鳳자化자 할아버지 손자: 명생, 방수(재미국), 호보, 호덕, 호동, 호진 /재호
-7명중 6명은 성금 부담가능
④鳳자石자 할아버지 손자: 기생, 탁생 /충생, 정생, 문생, 승생 /덕생, 덕삼 / 달생, 대생, 호진, 호섭 -12명은 성금 부담가능
(총 41명중 33명 성금 부담가능 함)
5. 성금은 어디로보내고 의견(意見)이나 이견(異見) 있으면 어디로 보낼 것인가
@성금은 “양녹생” 신협 02013-13-053444 로
전화번호; (핸드폰) 017-857-4133, (집) 051-807-4133
주소;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연지동 세동 한신 아파트 102동 301호
2010년이후 변경된 새주소:부산시 부산진구 부암1동 304-1 진흥마제스 타워/서면 102동 2203호
@의견이나 이견은 이메일 “owndam@hanmail.net" 로 보내 주기 바람.
6. 공사는 언제 할 것인가
금년 한식일 에는 하청 김석도 사장이 일거리가 많아서 곤란하다고 하기도 하고 모금도 안 되었고 형제들의 의견도 청취하야 하는 관계로 금년 늦가을이나 내년 한식일이 어떨 런지 의견 주면 협의하여 결정할 생각임.
7. 일이 시작되면 현장 감독 등 일 처리는 누가 할 것인가
형제들의 의견을 듣고 협의하여 결정하여야 할 사안으로 생각됨.
-이 상-
2008년 3월 1일 서울 역삼동에서 양명생 작성
8. 추가 변동사항
이상과 같은 생각은 관포 재실을 이설하기 전에 구상하고 작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상을 나의 6촌형제들에게 한번도 의논해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속에는 늘 고조부모님, 증조부모님 산소뿐만 아니라 문중 전체의 산소와 우리들의 문제까지 고민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막상 이런 구상을 하고 그동안 거제를 수차 다녀오고 다른 집안들의 사정이나 요즈음 우리나라의 장묘문화가 63%가 화장문화로 바뀌는 세태를 감안할 때 특히나 종교적 이유로 조상의 산소를 돌보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고 해마다 문중 벌초하러 가보면 늘 오던 형제들만 오고 아예 관심이나 성의를 보이지 아니하는 형제들도 있고, 우리 다음의 세대는 과연 우리들 만큼이나마 음력 7월 그믐날 벌초와 음력 10월 16일 시제에 참여한다고도 보증할 수 없을것 같은 점 등등을 감안해 보니 2008년 3월에 쓴 위 글은 수정이 불가피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나의 6촌간만의 고민이 아니고 우리 문중 전체의 고민을 다 같이 지혜롭게 풀어 가야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년(2009년) 시제때 제사와 식사가 끝나고 앞으로의 조상님들의 산소관리 문제를 이대로 지탱 할 것인가? 에 대한 화두를 처음으로 제기해본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같이 현재대로는 유지하기 곤란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 였었읍니다. 그래서 금년 봄 서울 친척들 모임에서 이 문제를 의논하였고 부산에서도 형제들회 모임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 하게 되었으며 서울이나 부산에서도 하나 같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견이고 우리세대이후를 생각해서라도 우리세대가 책임지고 정리를 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9월 5일 벌초때 식사 끝나고 이 문제를 집중 논의한 결과 모두들 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 추진 방법에 대하여는 먼저 입향조 처자해자 조상님이 계신 산소자리(213평)를 문중선산으로 하되 주위땅을 더확보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관포문중에서 먼저 땅 소유주와 협상을 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자금 조달방안도 거론되었습니다. 그때의 결정 사안 등은 임 우리문중 “카페”에 올린바 있으므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금년 시제일은 11월 21일 (음력 10월 16일)이므로 예년 보다 더 많은 친척들이 참석할 것이라고 기대가 큼니다. 그때 더 구체적인 논의가 있을 것입니다. 좋은 의견과 관심을 주시고 이일이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일이다 라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여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처음에는 왜 내가 나의 6촌만 생각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즉, 문중 전체는 비용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나의 고조부모님과 증조부님 산소만이라도 6촌들이 합심하면 아담하게 손질해 볼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생각만 하게 된것입니다. 이제는 문중 전체가 동의하기 때문에 개별산소마다 봉분을 다시 만들고 비석과 상석을 설치하고 하는 어려움은 해결되었다고 봅니다. 나는 평생 나의 어머님 산소에 대하여 한(恨)을 품고 살아왔기 때문에 1997년에 지금의 임도 10.4㎞를 뚫고 그 덕에 우리들의 재실도 번듯하게 이설(移設)할 수 있어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고마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릴 것은 장목면 역사를 정리해서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지금 장목면발전자치위원회에서 하고 있습니다. “장목면지발간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보내온 1차 원고를 교정하고 있으며 4월 8일 장목면사무소에 가서 회의 하고 면 발전을 위한 여러가지 제안사항중에 관포공동묘지(7,500평) 끝자락에 7층높이의 “납골당”을 짓고 옥상에 전망대 및 휴게소를 설치하면 관포공동묘지는 물론 거제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조들의 산소도 정리해서 여기 납골당에 모시면 좋을 뿐만 아니라 관포 사람들에게 일자리도 마련해 줄 수있다는 방안을 제안하였던바 6월에 거제시 사회복지과와 장목면사무소에서 현지 조사를 하여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말을 전달 받고 이 납골당 문제는 쉽게 될 일이 아니고 두고두고 연구하고 논의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우리 문중이나마 장차 우리들과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선산”을 만들자는 뜻에서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추진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 깊이 이해하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首丘初心의 심정으로 뼈가루라도 고향땅에 묻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들 해 봅시다.
누구든지 어릴때 자란 고향의 추억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있을 것입니다. 나의 경우는 유독 즐거운 일보다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 많은 것 같지만 그래도 받아줄 선산이라도 있으면 여기 경기도 근처보다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어머니곁인 외포로 가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쪼록 모두 합심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냅시다. 2010년 9월 29일 양명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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