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여류시조》2016. 제30집
동현 김덕남 시인 『젖꽃판』에 붙여
- 김덕남 시조집 『젖꽃판』을 읽고
전연희
동현 부모님께
그 동안 안녕하신지요?
하늘나라에서 고 김찬제님 임후분님 두 분은 지금쯤 막 저녁을 끝내고 어느 별자리에서 눈을 감아도 환히 보이는 사랑스러운 따님을 지켜보고 계실런지요.
아, 저는 동현 김덕남 시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동현과 같은 부산시조 회원이랍니다.
동현시인이 두 분께 첫시조집 『젖꽃판』을 출간하여 바치는 모습이 애틋하고 아름다워 제가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누군들 낳아주고 길러 주신 어버이께 감사하지 않으며 가신 후엔 더욱 그립고 절절하지 않겠습니까만 늘 담대하고 후덕한 동현에게 이토록 절절한 사모곡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 시집에서 어머니의 생전, 임종 시 그리고 떠나신 후의 세 모습을 만났습니다.
스물이 안 되어 어린 동현과 홀로 남겨진 어린 어머니는 동현이 이립이 되도록 키우고 가르치다 막 지천명의 나이에 끝내 떠나셨습니다. ‘머뭇머뭇 내생을 가고 있는 어머니/ 아직도 못 내린 짐 있어 반눈 뜨고 나를 본다’ 시조집 제목인 『젖꽃판』의 구절입니다. 남편 곁으로 가는 것이 미안하고 애잔하여 채 눈을 감지 못하는 어머니. 어머니도 딸도 가슴에 낙화인을 찍을밖에는요. 그러나 어머니는 오롯한 자신의 삶이 슬프지만은 않으셨지요.
병풍을 밀쳐놓고 홑이불 걷어내자
어머니 머뭇머뭇 내생을 가고 있다
아직도 못 내린 짐 있어 반눈 뜨고 나를 본다
남루를 벗겨내고 골고루 닦는 몸에
이생이 지고 있다
달무리 피고 있다
젖꽃판,
갈비뼈 위에 낙화인을 찍고 있다
다섯 살 다 되도록 이 젖 물고 자랐다고
앞섶을 헤쳐 보이며 빙그레 웃으시던
몽환 속 이어간 말씀, 꽃숭어리 벙근다
- 『젖꽃판』 전문
너무나 아름다워 이별에도 환한 미소가 어립니다. 그토록 정성과 사랑을 다한 삶이었기에.
칼바람 막아주는 어머니 등에 기대
논두렁 달려가던 울퉁불퉁 자전거길
콧노래 입김에 닿아 무지개는 피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무조건 달리라던
쟁쟁한 그 말씀이 바람으로 나를 키워
쉼터서 숨을 고른 뒤 페달 밟아 왔었다
- 「자전거를 타고」 전문
어머니는 바람막이가 되어 어린 딸을 데리고 울퉁불퉁한 삶의 현장을 달립니다. 어머니 등에 기댄 딸의 가슴에는 무지개가 핍니다. 그저 어머니만 계시면 됩니다. ‘매파 다녀간 날 어머니하고 끈을 묶어 잠을 잤다’는 어린 딸을 어머니는 어려움이라도 올세라 세상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무조건 달리라던’ 어머니의 낮은 음성이 지축을 흔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별의 아픔을 겪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고통과 슬픔을 깊이만큼 느끼기엔 늘 마음이 모자랍니다.
밤하늘 바라보면 아스라이 뜨는 얼굴
별빛을 헤쳐 가며 불러보는 이 밤에
당신도 날 보기 위해 뜬눈으로 새웁니까
날마다 수척해 가는 하현달 가리키며
왔던 길 돌아간다고 눈으로 말씀하신
어머니 까끌한 손을 가슴에다 묻습니다
서서히 달이 차는 만삭의 여인처럼
산고 끝 꽃을 피워 보름달로 찾아오신
그 눈빛 애달픔에 젖어 가슴 한쪽 집니다
-「달의 눈빛」 전문
어머니 가신 뒤 동현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시조집 전체를 통틀어도 이처럼 그리움에 목메는 글은 달리 없습니다. 그만큼 동현은 과묵하고 자제력이 강한 시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록새록 그리운 어머니를 달을 보고 교감합니다.
그러나 동현 어머님 조금도 염려치 마세요. 어머니 잘 아시잖아요.
동현이 얼마나 반듯하고 의지적이며 열성적인지. 그 동안 내재해 온 문학에의 소질과 열정으로 시조를 만나고 쓰기 시작한 지 이태, 신춘문예 물꼬를 틀더니 시조공부 4년 만에, 묵직한 시조집을 발간했습니다. 일간지, 문학 월, 계간 전문지 등에서 쏟아지는 찬사도 굉장합니다만 연수며, 동인 활동이며 시조 공부에 얼마나 매달려 왔는지 알 만한 분은 다 아시니까요.
어머니의 반듯한 가르침과 사랑이 낳은 결실임에 틀림없지요.
한 번도 동현이 아버지라 불러보기는커녕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지만 보이지 않는 사랑과 정신이 또한 동현을 이끈 힘이었음을 읽습니다.
열여섯 새각시를 빈집에 홀로 둔 채
보던 책 밀쳐놓고 끓는 피 총에 감아
퍼붓는 물동이 포탄 그 속으로 뛰어들다
탱크와 자주포가
곡사포와 기관총이
마주보며 쏘아대는 승자 없는 불잉걸 속
밤마다 바뀌는 주인 유학산의 핏강이여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명命한 상관
그 앞에 몸을 던져 흩어지는 새파란 꿈
갓스물 볼 붉은 혼이 다부동에 살고 있다
- 「아버지, 길을 가다」 전문
어린 색시와 아기를 남겨 두고 젊음 한 번 피우지 못한 갓 스물에 양구전투에서 전사하신 아버지. 정작 동현은 아버지를 전혀 모르고 자랐습니다만 시조집 전반에 흐르는 역사의식, 애국심, 장부 같은 기개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임진란의 비사에서 연평도의 전사 장병 추모, 타는 숭례문에 대한 아픔과 극복의지, 독도에서 백두산에 올라서까지 뜨거운 애국심으로 끓어오름을 보면서 아버지의 거룩한 희생이 동현의 삶을 받쳐왔음을 알게 합니다. 그 붉은 혼이 다부동에서만 아니라 동현의 가슴에 또한 낙화인을 찍었습니다.
뒤란에 무성한 대숲이 있어 대의 미덕을 안고 살아온 동현, 필부의 젓대로, 빗자루로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맑혀 살고 싶다는 동현. 말씀 없는 아버지 유훈은 푸른 대처럼 살아 있었습니다.
나 죽어 한 필부의 젓대로나 태어나리
노래로 한 세상을 달래어 살다가도
그리움 지는 달밤엔 가슴으로 울리라
그 다음 생 또 있다면 빗자루로 태어나리
티끌 먼지 쓸어내어 이 세상을 맑히다가
해 지면 거꾸로 서서 면벽수행 하리라
화살이나 죽창은 내 뜻이 아닌 것을
속 비워 어깨 서로 기대며 다독이다
생애에 단 한 번 꽃으로 경전 피워 보리라
- 「대竹의 기원」 전문
시조의 정형을 반듯하게 다듬어 지킨 동현의 시조는 시정신이 또렷하고 맑습니다. 건강한 삶의 뿌리가 있고 - 「참기름을 짜며」 펄펄 끓는 민족혼이 있으며 장부 같은 기개가 넘칩니다.- 「백두산에 올라」 솔직 담백한 인간이 있고- 「된장을 끓이다가」 , 「밤 향내, 생명을 품다」 에서 「산으로 간 감나무」 에는 떠나신 시아버지를 향한 ‘은핫물 넘치는 소리 볼을 타고 흐르며’ 「대의 기원」 에서는 굳은 의지와 대찬 기개 속에 닦으며 키워온 맑고 지순한 향기가 어립니다.
동현이 심고 가꾸는 들에는 지금 백련이 눈부십니다. 고아하고 은은한 향기, 너울대는 잎에 바람도 햇빛도 쉬다 갑니다.
겸손하고 넉넉한 모습 참 눈이 부십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님, 어머님 당신의 훌륭한 따님이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2013년 8월 9일
부산여류시조시인 전연희 올림
- 《부산여류시조》2016. 제30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