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1945~1994)는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 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시인‘이다.
또한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 선 혁명시인이었다.
1945년 전남 해남군 봉학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삼화초등학교, 해남중을 거쳐 광주일고에 입학하였으나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대, 자퇴하였고, 이후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3선개헌 반대투쟁‘에 참가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과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배포하여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이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1974년 ‘창작과비평‘에 「진혼가」 등으로 문단에 나온 이후 작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 등을 결성하기도 했다. 19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 투쟁 지하조직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동지들과 함께 체포․구속 되었으며, 지역 15년형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 등지에 복역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도합 10년 세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가 남긴 470여 편의 시 가운데 300여 편이 옥중에서 쓴 시이며, 그의 옥중시는 80년대 한국시의 한 절정을 이루었다.
1988년 1월 가석방되어 출소한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단재상․윤상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작고 이후에 민족예술상이 수여되었다.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1994년 2월 13일 불과 마흔 아홉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는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등이 있다.
민족시인 김남주(1945~1994)의 해남 생가가 게스트 하우스로 꾸며졌다.
김남주기념사업회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있는 김 시인의 생가에 게스트 하우스를 열었다. 기념사업회는 20돌을 맞아 생가의 개방을 추진했다. 생가는 방 2칸씩이 있는 본채와 행랑채로 짜여져 20여명이 숙식할 수 있다. 생가 옆에는 고인의 흉상과 대표 시를 새긴 공원이 조성됐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시비 ‘노래’를 비롯해 동판에 새긴 ‘조국은 하나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저 창살에 햇살이’ ‘자유’ 등을 만날 수 있다.
생가에는 서예가 신영복 선생이 쓴 현판이 붙었고, 옥중에서 담배 포장지에 새긴 원고와 치열했던 일대기를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묵으려면 다음카페 ‘김남주생가게스트하우스’(cafe.daum.net/kimnamjuhouse)에 들어가 예약하면 된다. 1박에 1인은 2만원, 방 1칸은 5만원이다.이곳은 그가 태어나서 중학까지 성장기를 보낸 공간이다. 초기 작품인 ‘진혼가’ ‘잿더미’ 등을 창작한 산실이기도 하다. 그는 74년과 79년 두차례 구속됐지만 독재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맞서 옥중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사랑의 무기>, <조국은 하나다> 등을 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김남주는 대한민국의 시인, 시민. 사회 운동가이다. 유신을 반대하는 언론인 「함성」(뒤에 「고발」 로 개칭)을 발간하였고 인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었다.
1980년 남민전 사건 조직원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1993년 2월 문민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석방되었다.
그는 '시인'이 아닌 '전사'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보통 일반적인 농가의 모습이다.
현재 사람은 살지 않는 생가이다.
대체로 잘 가꾸어져 있어 다행이다.
김남주 생가 왼쪽에는 시인의 시들이 돌에 새겨져 있어 방문객들을 반긴다.
민족시인 김남주시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 반대투쟁으로 옥고
박정희 대통령의 반유신투쟁으로 옥고..
감옥에서 10년을 보낸 시인은 감옥에서 그가 남긴 시 470편중에서 300편이 옥중에서 나왔다.
그리고 젊은 나이 49세에 생을 마감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에드워드 볼워-리튼)라는 말을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