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위계는 뚜렷해서 국왕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지밀이 최상급 부서다.
지밀의 수석상궁은 궁녀 전체의 장인 것은 물론, 조정대신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위세가 지엄하다.
궁녀는 대개 4,5살 때 입궁한다.
간혹 열살 넘어 입궁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때는 궁중 의녀가 앵무새의 생피를 팔목에 발라 처녀성을 감별한다.
피가 묻어나야 처녀라는 데....
어린 딸을 입궁시킨 부모는 빨래감을 내가고 버선을 넣어주는 등 일체의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이후 각 상궁이나 내인들에게 맡겨져 그들의 자식처럼 자라고 교육받는다. 일생 아이를 낳지 못하는 궁녀들로서는 양자를 들인셈.
입궁 후 15년 정도 지나면 관례를 치르는데 이는 성년식이자 신랑 없는 결혼식이다. 이후 마음이 맞는 두 궁녀가 짝을 이뤄 외로움을 달래며 한방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 국왕이 손길이 닿게 되면 더 이상 궁녀가 아니라 내명부(일명 후궁)로 승격되고 종4품 숙원에서 정1품 빈까지 품계가 내려진다.
*조선시대의 내명부
품계 |
정1품 |
종1품 |
정2품 |
종2품 |
정3품 |
종3품 |
정4품 |
종4품 |
명칭 |
빈
嬪 |
귀인
貴人 |
소의
昭儀 |
숙의
淑儀 |
소용
昭容 |
숙용
淑容 |
소원
昭媛 |
숙원
淑媛 |
이것이 궁녀들 일생의 꿈이지만 정말 꿈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 그러다보니 극히 일부지만 이들 사이에 '대식'이라고 하는 동성애가 행해지기도 한다는 후문.
궁녀는 궁궐에서 일생을 마치지 않는다. 늙고 병들게 되면 궁을 나가 본가로 돌아가야 한다.
러나 집으로 돌아가도 한번 궁녀는 영원한 궁녀, 혼인을 해서도 안되고 첩이 돼서도 안된다.
궁궐에서 자라나 궁궐에서 핀 꽃, 궁녀들, 비록 궁궐 밖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로이 지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궁궐을 향해야 한다.
<> 사적 제149호,칠궁
이곳은 조선시대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곳이다
비록 정실 왕비는 되지 못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이 됐던 여인들 그들은 궁녀였다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칠궁 사당
이 칠궁은 궁녀에 관한 얘기가 깃들여 있는 곳이다.
궁녀하면 아마도 왕의 승은을 입기 위해
암투와 시기를 벌이는 모습이거나 아니면 왕과 왕비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이 궁녀들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 삼국시대
백제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전설은 -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얘기이다.
-세종실록 책 표지내용 한문으로 나온다
세종실록에 그 전설이 기록을 보면
'의자왕이 신라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들이 이 바위로
달아나 스스로 강물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낙화대라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삼천궁녀는 과장이라 하더라도
삼국시대에 궁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고려시대
본격적인 궁녀제는 고려시대때 시작됐다고 한다.
그것을 이어 조선시대 초기에 구체적인 규정과 체제를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 정비된 궁녀제는 조선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궁녀의 범위
궁녀란 좁게는 상궁과 내인을 말하고
넓게는 무수리나 비자같은 하녀들까지 포함된다.
그렇다면 궁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그리고 궁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바로 이 칠궁안에 그들이 있다 *
칠궁이란 무엇인가?
- 그곳엔 궁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들이 있다
서울 궁정동, 청와대 경내 -
평소 굳게 닫혀 있는 이 문을
들어서면 오래된 재실을 볼 수 있다
이곳엔 7개의 사당이 있는데 후궁이 낳은
왕들이 자신들의 생모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7궁의 위패
그렇다면 이 위패의 주인들은 누구일까
-정빈이씨 진종 생모위패
추존된 왕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장희빈으로 더 유명한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비운의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가
그 주인들이다.
이중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명은 궁녀 출신이다.
홍교수 "후궁 어머니가 꼭 왕비이지 않은 왕들도 상당
히 있다 그런 왕들의 생모는 절대로
종묘에는 들어갈 수 없으나 그렇다고 일반
사당하고 똑같이 모실 수 없기 때문에 격을
높여서 궁자를 붙여서 서울의 여기저기에 그런
사당들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중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무수리로
궁녀 중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다
육상궁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생모에 대한 효심과
열등 의식으로 직위초부터 숙빈최씨의 묘를
능으로 만들길 원했다
홍교수 "영조는 자기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이 미천
하다는데에 대해서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기 때문에
영조는 왕이 되던 그 이듬해 원년에 이곳 사당
을 짓고 육상묘라고 하였다 왕의 사친이지만
바로 궁이라고 붙이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냉천전 사당 냉천정에는 영조의 어진이 보관돼 있었다
영조는 그 어떤 곳보다 이곳을 자주 들렀다고
한다.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이
깃들어 있다
사당,덕안궁 원래 육상궁을 제외한 나머지 사당은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1908년 각 사당을 이곳에 모아 육궁이라고
불렀고 1929년 순헌귀비 엄씨의 사당이
옮겨 오면서 칠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위패 칠궁에 모셔진 여섯명의 왕의 생모들
그들은 궁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조선전기 임금들은 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자 이후 3백년간은
창덕궁이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치르는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다.
왕과 왕비 왕족의 생활공간
동궐도
이것은 1820년대 조선 후기에 그려진 창덕궁의 모습
인데요,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은 주로 어디서
생활하였을까?.
왕과 왕비의 일상적인 생활 공간을 내전이라고 하는데요,
궁궐의 뒷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희정당
이곳 희정당은 원래는 왕의 침전이었으나, 순조이후로는 왕이
공식활동을 하는 곳인 편전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조전
이 희정당 뒤편, 구중 궁궐 가장 깊은 곳에
왕비가 기거하고 생활하던 공간이 있다. 대조전이다.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침전이 바로 이곳에 있다.
왕과 왕비의 생활 공간인 내전의 동편에는 세자의 활동
공간인 동궁이 있었다. 서편 뒤쪽으로는 왕대비전이 있었다고 한다.
궁녀의 공간과 할 일
그렇다면 궁녀들도 이 일대 어디에선가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이 맡은 일을
했을 텐데요, 궁녀들은 이 넓디넓은 궁궐안 어디서-
과연 어떤 일을 했던 것일까 *
궁녀의 임무 하는일(독특한 일 중심)
-체계적이었으며 월급까지 받았다
궁궐 외경
각각의 전각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창덕궁
인정전
왕과 신하가 만나 의논하고 정사를 보는
집무 공간 뿐 아나라 왕과 그의 가족이 생활
하는 전각들이 모여 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은 궁궐내에서 각각의
전각에서 따로 독립세대를 이루며 생활했다.
대조전
따라서 대전 중궁전 동궁전 대비전 등의
궁녀들 또한 각각 따로 뽑았다.
그렇다면 궁녀들의 주된 근무 공간은
어디였을까,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궁궐의 평면도인
동궐도형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동궐도형에는 소주방이라고 하는 곳이 여러
군데 보여서 임금의 수라상을 마련하거나
아니면 궐내의 잔치때 잔치 음식을 마련하는
곳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궁녀의 일
궁녀들은 주로 의식주에 관계된 일을 주어진
역할에 따라 분담해서 일했다.
수라간
아침, 저녁 수라와 잔치 음식 등을 준비하는
일은 궁녀들이 맡은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다.
이강근 교수 "이자리는 왕과 왕비의 침전이었던 그
대조전의 서쪽 행각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원래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소주방이있던 자리이다.
그런데 1917년 외정때에
불타고 나서 다시 지으면서 서양식으로
개조돼 있기는 하나 여전히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곳이었고 그 수라상을 마련하던 궁중
나인들이 주무시던 곳이 바로 이옆에 있는 방
온돌방이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대조전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왕비의
생활 공간이다
왕과 왕비가 잠을 자는 대조전의 침전에
궁녀들의 특별한 업무가 있다
왼쪽 방문열리고 들어가면
중앙의 큰방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고
그 둘레에는 여러개의 작은 방이 있다.
침전을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방에서
궁녀들은 숙직을 섰던 것이다.
각각의 작은 방에 한명씩 들어가 숙직을
섰는데 그곳에 이부자리를 두지 않았다.
왕과 왕비가 함께 잘때는 노상궁들이 숙직을
섰고 젊은 궁녀들의 접근은 금지됐다
숙직과 부서
1. 지밀
이 숙직은 지밀에서 했다
지밀이란 말 그대로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여
말한마디 새어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과 안사랑 대청등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은 핵심 부서가
지밀이다
2. 침방
왕과 왕비의 옷, 이부자리 등을 만드는 부서이다.
3. 수방
의복과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이다.
4. 생과방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곳인 생과방이 있다.
5. 세수간
세수간에선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는 일을 전담한다. 내전 청소도 이들의 임무다
6. 세답방
빨래와 그 뒷손질을 담당하는 세답방까지 궁녀들은 각 부서별로 일했다.
"침전 일과 주변에 주로 수라간을 중심으로 해
서 침방이라든지 수방이라든지 또 생과방
이라든지 하는 궁녀들의 작업실들이 배치돼
있었던 것으로 된다"
궁녀의 수는 얼마나 될까
영조때 이익의 성호사설에 궁녀는
육백팔십사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종 실록에도 궁녀의 수를 적어 놓은
기록이 있다
대전에서 세손빈궁 시녀수12
대전 및 각전궁의 궁녀는 다 합해서 480명-
이들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궁녀는 5백명에서
6백명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전회통
대전 회통에 의하면 '궁녀란 궁중 여관의 별칭
으로 상궁이하의 궁인직' 이것은 즉
궁녀란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라는 뜻이다
궁녀도 직급이 있었던 것일까
궁녀들은 맡은 일에 따라 품계가 나눠져
있었다. 경국대전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궁녀와 후궁을 포함한 궁궐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을 내명부라고 했다"
정1품 빈이하로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국왕의
여자로 후궁을 말하며,
궁녀는 정5품에서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뉘며 그 업무에 따라 품계가 달랐다
신명호 교수 "정5품이면 양반 관리하고 비교한다면 참판
밑에쯤 되는 상당한 고위 관리는 아니지만
중견 실무자라로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월급 지급
궁녀들이 관리였다면 녹봉을 받았을 것이다
태조실록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궁녀들은 매월 정기적인 보수로 쌀 세말
그외 옷감 등도 특별히 하사 받았다.
1896에 쓰여진 궁중예산서가 바로 그것이다
여관봉급- 이백사십원.
대전 소속 궁녀들에게 지급할 봉급 총액이다
이때 궁녀들은 돈으로 월급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월급 명세서
궁녀들의 봉급은 어느 정도나 됐을까
우리는 앞의 자료와 연구 논문를 근거로
순종때 지급됐던 궁녀들의 월급 명세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발권정책팀 당시 가장 높은 보수였던 196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당시 경제 상황이 고려돼야 하기 때문에
화폐 자체로는 과거와 현재 돈의 가치를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다.
-쌀가격추이 책 우리는 1926년의 8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쌀가격과 현재의 쌀가격을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쌀가격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그당시 1920년
대 당시는 20원 했다 99년말 현재 15만9천원 상회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1926년에 196원은 오늘날 150만원을 상회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궁내부비예산 명세서 궁녀들은 맡은 업무와 연차에 따라 월급이
달랐고 품계에 따라 월급이 차등 지급됐다
-이배용 교수 "실제로 궁녀는 조선왕조에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는 소위 여성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을 전문직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려서부터 궁궐에 들어와서 자기가 맡은 일을
평생토록 하는데 특히 왕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준 높고 체계있는 자기의 전문
영역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거다."
-서류 여관 봉급 궁녀-그들은 국가에서 월급을 지급 받았던
공무원이었으며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여성에겐 관직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던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궁녀가 여성 관리였다는 사실은 잘 모르셨을 거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도청의궤의 반차도
왕비를 따르는 수많은 행렬 중에 여기 궁녀들의 행렬도 보인다.
기행 내인
- 말 그대로 말을 타고 가는 궁녀라고 써 있다..
가례때 입는 장삼을 입었다.
보행내인
그 뒤를 따라서 걸어 가는 이들은 보행내인입니다.말을 타지 않고 걸어
가는 것으로 보아 직위가 좀 낮은 듯 보인다.
상궁
장삼을 입고 말을 타고 가는 이 사람은 상궁이다.
장삼은 보행내인 이하는 입을 수가 없었다.
이걸로 봐서 궁녀도 계급과 직위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여성 관리인 궁녀가 되는 길
궁녀의 선출과 교육
각 부서별로 그 나이가 달랐다
지밀
4,5세,침방과 수방은 7,8세 그외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궁녀는 어린 나이에 뽑혀 들어왔다
-김용숙 교수 "지밀은 왕의 눈에 닿기도 쉬운 자리고 제일
대표 그러니까 교양도 어느면에서는 왕자 왕녀
못지 않게 4살부터 들어와서 말 익힐때부터
후천적인 준비라고 할까 궁중에서 길러지는
것이니까 품격이나 관습이나 못든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궁중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것"
궁녀의 출신 성분은 어떠했을까
예종때 궁녀의 신분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명회는 '양반 관료 첩의 딸과 양인의
딸을 뽑자'고 했고
신숙주는 '그때그때 임시로 선택하고 법을 미리
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효종때엔 궁녀를 양가의
딸 중에서 뽑았다
-이배용 교수 "조선초기에는 관청의 여자 종을 선발하기도
하고 기첩 소생이 궁녀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점차로 시기가 흐르면서 양가집의
규수들이 궁궐로 선발돼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게 나타나고 그러다 보니까 민간에서
일찍이 궁녀로 뽑히지 않기 위해서 조혼을
하는 풍습도 생겨나고 그랬다"
궁에서는 되도록이면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길 원했지만 폐단이 생기자 영조는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지 못하게 법으로 명문화시켰다.
-김용숙 교수 "상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서울에 있는 공상 계급에서 들어왔고 침방
까지는 중인 계급을 썼다는 것이다."
궁녀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절차
궁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처녀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팔에 앵무새 피
이것은 12,13세의 당시로서는 성숙한 나이의
경우에만 실시하던 것으로
앵무새의 피 한방울을 팔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해서 탈락시켰다.
-김용숙 교수 "선조에서 죄인이 없다거나 병에 걸린 사람
전과자 그런것도 없어야 되고"
왕을 가까이서 모셔야 하고 또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궁녀의 선출 조건은
까다로웠다.
-황혜성선생 "손금보는 것처럼 그럼 손을 보고 일하던 손인
지 아니면 수나 놓고 깨끗이 바느질이나하는
손인지 아신단다. 그래서 너는 세답방이나
가라 손이 너무 거친사람을 보고는 너는
세답방,빨래터나 가라 아무튼 13살에 들어가서
운명이 그렇게 정해지는 거예요,그러니까 큰방
상궁들이 와서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맵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보고 갈자리를
정해 줬단다."
수라상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야 하며 까다로운
궁중 법도를 익혀야만 가능했던 것이 궁중일이었다.
수라상 요리 궁녀는 일단 소속 부서에 배치되면
철저한 도제식 교육을 받고 길러졌다
황혜성 선생 "각 부서마다 다 나눠서 소속이 됐다.
주방상궁 밑에 들어간 사람은 주방에서 파나
다듬고 너 가져와라 하면 가져오고 그런
정도로 일을 시키니까 그 일을 따라서 10년을
해야 돼요 혼자서 독립해서 시키는게 아니다."
쥐불 겁주기
쥐부리 글려란 궁녀들에게 입조심을 시키기
위한 교육이었다.그해 입궁한 견습 내인들을
세워 놓고 내관들이 횃불을 입으로 들이대며
지지는 시늉을 하며 위협하던 궁중 행사였다.
김용숙 교수 "첫째 일장 일조가 맡은 첫날 궁중은 아주
무서운데니까 나라님을 모시고 아주 무서운
데니까 말한마디도 하지 말고 보면 본데
들으면 들은데 둬라"
황혜성교수 "아주 조용조용 말을 하고 둘이서 한방써도
바깥에 소리가 나가지 않게 둘이서 말할 때도
아주 소근소근 얘기한다."
궁체
궁녀는 궁중 법도는 물론 맡은 업무, 기타
교양을 쌓기 위한 철저한 수련 과정을 거쳐야
했다
빽빽한 궁체 마치 활자로 인쇄한 듯 보이는 이 필체는
궁녀들이 쓰던 궁체다.
그는 궁체를 궁녀들을 수련시키는 또하나의
수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진세 교수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를 버린 글씨다 자기 버
리면 어떻하느냐 자기를 버리는 대신에 모든
정성과 모든 힘과 모든 충성심을 윗전을 위해
바쳐야 되기 때문에 끝까지 끝이 내려올 때
까지도 붓끝에 충성심 정성 정숙 온아함 이
여자들이 지켜야 할 모든 것들이 거기 가
있는 것이다. 궁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성
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궁체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스승인 상궁에게
전문 교육을 받으며 키워진 궁녀들-
궁체는 조선시대 궁녀들이 받았던 엄격한 교육
과 통제된 생활을 대변해 주고 있다
궁녀의 복장
궁녀들이 맡은 바 임무가 다 달랐듯이 직위에 따라 복장도 조금씩 달랐다.
-생각시,각시, 궁녀, 상궁
궁녀들은 어떤 복장을 했는지 한번 볼까
-생각시,각시 복식 은
먼저 내인이 되기 전 어린 나이의 견습 내인이다.
생머리를 매었기 때문에 이들을 생각시라고 불렀다.
생각시 머리 모양
머리를 보시면 이렇게 곱게 빗어 뒤에서 두가닥으로 땋아 말아 올려서 뒷머리
밑에 나란히 붙여서 묶는 것이다., 그위에 댕기를 늘이고 다녔다고 한다.
내인
입궁한지 15년이 되어 내인이 되면 머리 모양이 달라진다.
머리를 얹어 쪽을 졌다.
옷은 남치마에 옥색저고리와 생각시와 같다.
상궁복장(첩지,궁중정장)
그리고 일반 내인에서 15년이 지나면 상궁이 된다.
상궁들은 옥색저고리와 남색 치마에 당의를 입었다
머리장식인 개구리 모양의 첩지를 머리에 달았다.
궁녀는 네다섯의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낯설고
엄하기만한 궁궐에 들어와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고서야
상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평생을 궁궐에서 살아야 했던 궁녀들- 어떻습니까,
궁녀들의 생활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궁녀의 생활( 연애 스캔들 포함)
궁궐에 들어와 15년이 지나면
견습 내인들은 관례식을 치르고 정식 내인이
된다.이때부터 궁녀로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례식
관례식은 곧 성인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궁녀에겐 이 관례가 사실상 혼례이기도 했다
궁녀는 왕을 위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여인이기 때문에 왕에게 시집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관례는 신랑 없는 혼례식인 것이다
황혜성 "스승한테 옷을 한벌 잘 해서 입혀야 된다. 스승
이,그걸 입고 고종황제 앞에 나란히 같은해
들어간 사람들이 서서 큰절을 한번 하고 나면
그게 신랑이다."
관례식 올린 궁녀2명 관례식을 치른 궁녀는 스승 상궁으로부터
독립해 두명씩 짝을 지어 한방을 쓰며 살게 된다.
김용숙 "그사람들은 같은 처소끼리는 또 안된다
말이 똑 같이해서 싸움 날까봐 그런지 이를
테면 세수간하고 소주방내인이면 둘이서 같이
살수가 있는거예요 같이 뭐라고 그럴까
룸메이트라고 그럴까요 그렇게 해서 둘이
살아 갔는데"
동거하는 궁녀들끼리 간혹 동성연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연산군 일기에는 궁녀들의 동성 연애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선왕조에 교붕 즉 동성 연애의 풍속을
개혁코자 했는바 이를 두려워 하지 않고
범하는 자가 많다'
세종,정종실록책 또한 실록에는 궁궐을 출입하던 관료와
궁녀간의 간통 사건도 간간히 등장한다
한번 궁궐에 들어오면 궁녀들은 평생을 궁궐
에 갖혀 살아야 한다.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출궁기록 가뭄이 들면 궁녀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 살게 했다.
세종조에는 여러차례에 걸쳐 궁녀를 수십명씩 출궁시켰다.그 이유는 뭘까
이배용 교수 "전통시대에서 자연적인 재해는 음양의 도가
어그러졌을 때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그럴 때
가뭄이라든가 천재가 일어날 때 유교를 이념
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너무나 지나치게 어려
서부터 궁궐에 들어와 갖혀 사는 어떤 여성
들의 원한이 쌓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서 궁녀
들중에서 몇 명을 바깥으로 보내서 그것을
풀어주고 그러면서 음양의 조화를 모색해 가는
그런 절차도 있었다"
그러나 궁밖으로 나왔다고 생활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궁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궁녀는 다른 남자와 살 수 없었다
신명호 교수 "궁녀는 국왕 옆에서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국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큰 여성들이었다
그래서 국왕 옆에 있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출궁이 되어도 신하들은 국왕의 여자일 가능성
이 있었던 여자이기 때문에 감히 범접을
못하게 수절을 하게 했다"
경국대전에는
'조정의 관리로서 궁중에서 내보낸 궁녀를
데리고 사는 자는 장 백대에 처한다'
는 규정이 보인다
궁녀는 궁궐과 자신을 얽메고 있는 굴레속에서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차단된채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갇혀 지내는 궁녀들,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 희망 사항은 바로 승은을 입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총애를 받아 승은을 입게 되면
그 위상은 물론 대우가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시중을 드는 입장에서 시중을 받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궁녀의 권력과 승은
후궁 역시 왕비처럼 간택을 해서 뽑기도 한다,
궁녀들은 일의 특성상 왕을 가까이 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간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궁녀가 승은을 입고 왕자녀를 낳게 되면 종4품 숙원에서
높게는 정1품의 빈, 즉 후궁의 자리에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5,6백명의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왕의 눈에
띄어 총애를 얻는 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I
따라서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은
궁녀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장희빈
칠궁엔 왕의 승은을 입고 권세를 부렸던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얻어 왕자를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홍성민 "경종을 원자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당시
서인과 남인들 사이에 심각한 정치적 파란을
불러오게 했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 당시에 왕비였던 인현왕후와 왕비를 서로
주고 받으면 다시 말하면 인현왕후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 났다가 그 자리에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쫓겨났다가 인현
왕후가 들어오고 결국 희빈 장씨는 죽음을
당하고 아주 파란 만장했던 그런 인생 역정을
밟았던 분이다"
숙종은 이후 후궁을 왕비로 승격시키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승은은 곧 신분 상승을 의미한다. 그것은
궁녀들의 최대 희망이었다
김용숙 인터뷰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면 승은 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삼축당 김씨(고종의 후궁)가 그래요
불려서 올라갈때는 만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
려서 투기와 안되기를 바라는... 치마까지
뒤집어 입지 않아도 다 소문난데요, 몇분안에"
왕의 승은을 입기만 하면 젊은 궁녀도 일약
특별 상궁이라는 지위로 뛰어 오르게 된다
이배용 교수 "아주 행운이 있어가지고 왕녀나 왕자를
생산하게 되면 품격이 상승해서 정1품에서 종4
품까지 후궁 대열에 오를 수 있고 자기 친절
가솔들이 궁궐에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영광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왕비의
질투라든가 궁녀간의 시샘이라든가 또 정치
적인 격동기에서는 파란을 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불행을 겪었던 후궁들도 역사속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명부기록 승은은 왕과 궁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신명호 박사 "왕은 궁중내에서 남성 통치자라서 남성의례를
대표하고 왕비는 여성통치자로서 여성의
의례를 대표하고 그런 상황에서 궁녀들은 바로
왕비를 도와서 여성 의례를 수행하고 여성
노동을 담당하는 그런 부분이지만 동시에
국왕이 궁녀를 자기 여자로 할 수 있는 가능
성이 높기 때문에 공적인 부분이 순신간에
국왕과의 사적인 남녀간의 관계로 변화될
수 있는 그런 이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낙선재 여든 두 살의 이해원 옹주-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딸이다.
어린 시절 살던 사동궁에서 왕이 있던
본궁으로 들어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이해원 옹주 "여기는 윤비가 계셨고 이방을 여기 피아노가
있었다. 그래서 피아노 배우셨다고 일본여자가
교사였다. 밤낮 여기와서 놀았다. 마루에서"
상궁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해원 옹주 "여기서 젊은 상궁은 우리를 귀여워했다.
생머리를 하고 들어오면 놀리고 노래하라고
그러고 춤추라고 그러고 우릴 놀리고 귀여워
했다. 그렇게 위엄있게 안하고 위엄있는 내
인들이 있고 큰방 내인 큰방 상궁 대전
상궁이나 하는 분들은 위엄을 갖췄다."
상궁들 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있었으며 그 영향력도 커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뇌물 실제로 왕이 총애하는 궁녀에게
줄을 대기 위해 뇌물을 주었던 사례를
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제조상궁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재산을 관리했던
제조 상궁은 정치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수렴 청정 특히 수렴 청정 시기 대비전의 궁녀들의
권세는 막강했다
신명호 박사 "대비들은 조선시대 여성교육이라는 것은 사실
문자 교육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다 대비들이
수렴 청정을 해서 국정을 총책임지지만 상서
문이라든가 명령서를 한문으로 작성할 수도
없고 한문으로 된 공문서를 읽을 수도 없죠
그럴 경우 대비 옆에서 각종 공문서를 번역
해주고 대비의 명령을 한문으로 작성해 주고
이런 역할들을 글자를 아는 궁녀들이 담당했다
.그럴 경우는 궁녀들이 대비 수렴청정기 막후
에서 상당한 실세로 활동했다"
권력의 최측근에 서 있던 궁녀,
그들은 궁안의 또다른 실세로 자리하고 있었다
궁녀는 입궁하게 되면 평생 동안 왕실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한번 궁궐에 들어오면 나갈 수 없는게 바로 궁녀들이었다
궁녀가 지은 시조
'연못에 든 고기들아
누가 너를 몰아다가 여기에 두었느냐
북쪽바다 맑고 넓은 연못
어디두고 이 못에 와 있느냐
들고서 못 나가는 처지는
너나 나나 무엇이 다르랴'
궁궐에 갇혀 사는 자신의 심정을 연못 속의 물고기에
비유했다. 구중궁궐의 꽃다운 궁녀하면 화려한
생활이 연상될지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궁궐은
창살없는 감옥이었을지 모른다.
나이든 궁녀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채 한평생을 궁궐에서 지내온
궁녀들은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궁궐에서 나와야 했다.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었던 궁녀들에겐 또다른 어려움이기도 했다. 과연 궁
녀들은 그들의 집이었던던 궁궐에서 나와
어디서 어떻게 만년을 보내었을까 *
궁녀의 만년(마지막 상궁과 퇴출)
창덕궁의 뒷문인 요금문은
환자나 죽은 시신이 나오는 문이다
왕족외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
때문에 궁녀들은 나이들고 병들면 이 요금문
으로 나가야 한다
황혜성 선생 "산것처럼 태워서 이서문 뒤쪽으로 넘어가면
서쪽에 문이 하나 있다. 그리로 데리고 나갔
단다. 죽어도 대접을 제대로 받기도 어렵고"
궁궐에서 나와 궁녀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서울 은평구 갈현동, 궁말.
궁녀가 모여산 마을이라고 해서 궁말이라고
불리었던 곳이다.
궁녀 마을 숙종때부터 궁녀들이 살기 시작해
조선시대말까지 20,30가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성영 향토사학자 "서오능에 숙종왕을 모시게 되가지고 그왕을
생전에 모시던 대전에 내전에 모시던 궁녀들이
여기 나와서 살게 됐죠 정년 퇴직후 여기와서
능이 가까운데 여기와서 많이 살았다"
-김상궁 묘역 고양시 일산구-
이곳에는 90년대초까지 상궁의 묘가
있었다.
정동일 "뒤에 보이는 산등성이 정발산인데 정발산
아래 쪽 내려와서 나무 심어져 있고 조그만
돌이 있는곳 이곳이 안동김씨의 묘역이 있던
곳이다"
서울 상계동에 자리한 학림사-
학림사 입구엔 특별한 부도가 있다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이 안치돼 있어야
한다.
이강남 "여기보면 상궁연화 요렇게 음각이 돼 있는데
상궁연화의 부도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부도 상궁연화 글씨 놀랍게도 이 부도의 주인은 상궁이었다-
상궁 연화-그녀는 궁궐에서 나와 이곳
학림사에 만년을 보냈던 궁녀였다
스님 "여기 몸담고 있었던 상궁 노비를 통해서 자세
히 얘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여기 많은 상궁
들이 몸담고 있다가 생을 마치게 되면 바로 요
밑 300미터 위치에 화장터,그곳에서 화장을
했다"
봉은사 서울 강남의 봉은사
이곳엔 또다른 궁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경내 부처 석가 여래상 뒤의 불화가 바로 그것이다
"시주 만 상궁 돌아가신 상궁이 시주했던 것
청정화는 불명이다
마땅히 의탁할 데 없던 궁녀들은 절에 시주
하며 그들의 만년의 쓸쓸함을 달랬던 것이다
김상현교수 "고종이 재위해 있던 한 사십여년 동안에 불화
가 한 220점 그중에 22점 대개 10% 정도의
불화에 궁녀들의 이름이 보입니다.그 궁녀들은
단순히 궁에 누구라고만 쓰지 않고 거기에
불문까지도 등장이 된다."
궁녀의 조선에서의 위치
규율과 법도에 얽매여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고 쓸쓸한 생을 보내야 했던 궁녀...
어쩌면 이들은 봉건적인 왕조 사회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이 제약되던 시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임무와 함께
최상층 문화인 궁중의 음식과 복식
그리고 한글문학, 궁중문학 등을 보존해온
궁녀들은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궁녀는 국가로부터 정식월급을 받고 일한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한 분야에서의 장인이었으며
최고의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
역사 스폐셜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었다" 를 정리 했습니다.
궁궐은 국가 최고의 정청인 동시에 국왕의 사가이므로
궁중의 운영에는 자연히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국왕을 보필하고 왕실 일가의 살림살이를 맡은 사람들은
남자는 내시, 여자는 내관(또는 여관)이라 불리며
공적 조직으로 제도화 되었다.
조선시대 내시부에 소속된 내시는
상선에서 종9품 상원에 이르기까지 총 240명이나 되었다.
안팎의 맡은 부서로 통하게 하는 궁궐 출입을 확인하고 수라 음식 요리와 청소 등 궁안 모든 잡무를 도맡아 하였다.
조선 전기는 내반원이라 하였다.
내명부는 품계를 받은 궁안 여성들의 조직으로 품계가 없는 여성들인 잡역궁인을 부리며 왕실을 보필하였는데 크게 내관과 궁관으로 구별된다.
내관은 정 1품 빈에서 정4품 숙원에 이르는 여관 곧 후궁을 가리킨다.
궁관은 정5품 상궁, 상의에서 종9품 주변궁까지의 낮은 관계를 가진 여관을 가리킨다.
궁관은 궁안의 잡무(왕실 일가의 모든 시중)을 담당하였다. 위로는 왕비와 내관을 받들고 아래로는 잡역에 종사하는 하층 궁녀를 지배하며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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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5품 |
정6품 |
정7품 |
정8품 |
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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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 |
사빈 |
사빈 |
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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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
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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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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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 |
사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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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5품 상궁은 왕비를 인도하며, 궁안의 문서와 장부 출입을 담당하는 정6품 사기와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아뢰는 중계 역할을 하는 종 7품 전언을 통솔하였다.
정5품 상의는 일상 생활에서의 예의와 절차를 맡았다.
정6품 사빈(손님 접대, 신하가 왕을 뵐 때의 접대와 잔치, 왕이 상을 주는 일 등과 정8품 전찬(손님 접대, 신하가 왕을 뵐 대의 접대와 잔치, 정승을 도와서 인도)을 통솔하였다.
종5품 상복은 의복과 무늬로 수놓은 채장의 수량을 공급하고 정 6품 사의(의복과 머리에 꽂는 장식품을 수식함)의 정8품 전식(머리감고 화장하며 세수하고 머리빗는 일)을 통솔하였다.
종 5품 상식은 음식과 반찬을 종류대로 가지런히 준비하고 정6품 사선(반찬 만들기)고 정8품 전약(처방에 의한 약을 맡음)을 통솔하였다.
정6품 상침은 왕이 옷입고, 밥먹는 순서를 맡으며 정 6품 사설(장막. 왕골 자리 .쇄소. 장설등을 맡음)과 종8품 전등(등불과 촛불을 맡음)을 통솔하였다. 정6품 상공은 여공의 과정을 맡으며 정6품 사제(의복을 만듦)와 종8품 전채(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음)을 통솔하였다. 종6품 상정은 궁녀들의 품행과 직무에 대하여 단속하고 죄를 다스리는 구실을 하였다. 종 8품 전정은 궁정의 일을 도왔다.
동궁(세자의 전)을 위한 내명부도 따로 조직되어 있었다.
상궁 직위 및 신분별 명칭
1.제조상궁 ∼일명 큰방상궁이라 하며 수백 궁녀의 장이다. 물론 한 사람뿐이며 대전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대소치산을 주관하며 학식이 많고 영도력이 있어야하며 인물도 훤출하여야 한다.
2.부제조상궁 ∼차석이며 일명 아랫고(내전 금고)상궁이라고한다.내전 금고를 관리한다.
3.시령상궁 ∼ 잠시도 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어명을 받들 자세로 대기한다고 지밀 상궁이라고도 한다.
4.보모상궁 ∼ 왕자녀의 양육을 맡은 내인 중의 총 책임자.
5.시녀상궁 ∼ 시녀 상궁의 임무는 궁중 지밀에 여러 가지 봉사하는 것이다.
이밖에 일반 상궁이 많았는데, 상궁이 되려면 원칙적으로는 30년 내지 35년이 걸렸다.
궁중여인 중에 궁녀가 아닌 하녀와 기생들
1.무수리 ∼각 처소에 물긷기,불 때기 등의 잡역을 맡는 여인들로 이들은 선출의 여부도 없이
민간의 아낙네들 중에서 내인들의 소개로 통근하는 대개 기혼자들이었다.
무수리는 고려·조선시대 궁중에서 나인들의 세숫물 시중을 들던 계집종을 가리키는 말로 수사(水賜)라고도 부른다. 무수리와 관련된 인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이다. 숙빈최씨는 무수리 로 궁중에서 지내다가 숙종의 은총을 입어 숙빈의 지위에까지 오른 여인이다.
2.비자(婢子) ∼무수리는 통근을 하는데 반해,비자는 붙박이로 각 처소 혹은 상궁의 살림집에
소속된 하녀를 일컫는다.
3.의녀(醫女) ∼ 일명 여의사이며,내인들을 잡아가는 여순경의 역할도하며, 원래 신분이 기생이라
궁중안에 대소 잔치가 열리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춤을 추는 무희로 변한다.
왕에게 딸린 내시는 수정전 서쪽 일곽, 경회루 남쪽에 자리잡은 대전장방, 수라간 등에서 살면서 맡은 소임을 다하였다.
왕비 침전의 뒷동산(아미산) 서쪽, 경회루 북쪽에 자리잡은 침채고, 원역 처소, 장방등은 위치로 보아 왕비전과 대비전에 딸린 내시들의 거처인 듯하다.
내명부의 장소 소주방, 세답방, 침방(춘소당),수방(취운당)등이 그것이다.그밖에 조석 식사 이외의 음료와 과자 만드는 일을 담당하며 예춘당과 복회당을 포함하는 생과방이 있었다.
이들 장소에는 지밀나인(지밀은 침전을 가리킴), 침방나인, 수방나인, 처소나인 등으로 구분되는 궁중나인들이 거처한다.
처소나인은 소주방, 생과방, 세답방, 세수간, 복이청, 퇴선간 등에서 일하는 나인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궁중의 살림살이를 맡는다.
소주방은 왕과 왕비의 침전 곁에 가까이 배치되었는데 내소주방은 아침저녁으로 수라를 장만하던 곳이고 , 외소주방은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 대 다과와 전과 곧 떡을 만들던 곳이다. 주방을 책임지는 주방상궁이 되려면 13살에 궁중에 들어와 스승을 정하여 20년 동안 전수받고 33세가 되어야 주방상궁 첩지를 받을 수 있었다.
주방상궁은 평생 소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일을 한다. 그러나 수라상차림은 수라간 혹은 퇴선간나인 세사람이 맡는 데 이들을 수라상궁이라 한다.
궁중에는 주방상궁 말고도 음식을 담당하는 남자 곧 내시 전문 요리사가 있어서 궁중의 진연 음식을 다 맡아서 하게 된다. 이들은 대령 숙수 라고 불렀는데 세습에 의해서 기술을 전수하였다고 한다.
영조때에는 내시가 335명, 궁녀가 684명이었다.
고종 31년(1894)에는 왕의 직계가족을 위한 궁녀만도 48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