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팔자 위왕
십팔자 위왕 1
- 인주 이씨는 문종 때를 시작으로 고려 제일의 권문세족으로 거듭난 가문이었다. 그러나 이자의가 숙종에게 반기를 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그 세도가 거대했던 가문은 거짓말처럼 풍지 박산이 났다. 서슬퍼런 숙종의 칼날 아래 수 많은 일족들이 목숨을 잃었고 겨우겨우 도망쳐 산 일족들은 신분을 숨기고 깊은 산 속에 숨어지내야 했다.
- 이자의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도망치는 와중에 아내와 첫째 딸도 잃어야 했다. 그러나 장차 고려 황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그는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어 간신히 잡히는 것을 면했다.
- 이후 한동안 그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힘든 나날을 보냈다. 꼬리를 잡힐 때마다 희한하게도 계속 빠져나갈 수 있었다. 실로 하늘이 돕는다는 것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기묘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계속 숨어 살아야 했기 때문에 승려 생활도 여러 번 하고 정 오도 가도 못할 때는 거렁뱅이가 되어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노숙자 신세가 되기도 했다.
- 몇 년간 이런 풍파를 겪은 탓에 한때 황도 개경의 여자들을 설레게 할 정도로 출중한 외모를 자랑했던 이자겸의 외모는 전혀 딴판으로 변해갔다. 나이에 비해 팍삭 늙어버리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했다. 그러나 이자겸은 자신의 외모 따위는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일생을 걸고 이루어야 할 신념이 생겼기 때문이다.
-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문득 생각했다. 평생 이렇게 패배자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더구나 억울하게 죽은 아내와 첫째 딸의 원혼을 달래주려면 반드시 이를 악물고 재기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도박을 해야만 했다.
-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예의 집을 찾아갔다. 이예는 바로 예종의 비인 경화 황후의 아버지였다. 일찌기 인주 이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 교류가 잦았기 때문에 당연히 이자겸과도 안면이 있었다. 이자겸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이 예는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나 일단 호기심에 만나보기로 했다.
- 워낙 외모가 변한 탓에 처음에는 이자겸을 몰라봤으나 곧이어 이것저것을 물어보는 과정에서 바로 그가 이자겸임을 확인하고 이예는 곧바로 갈등에 휩싸였다. 비록 선대왕의 일이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인주 이씨 가문은 역적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려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면 이자겸은 그날로 끝장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에게는 숨겨진 패가 있었다.
"황후 전하의 용 체가 좋지 않으시다고 들었습니다."
- 사실 그동안 도망다니던 이자겸이 한 이 말은 단순히 풍문에 불과했으나 이예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자 이자겸은 그것이 사실임을 직감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아니 될 일이지만 만에 하나 황후 전하께서 불행한 일을 당하신다면... 새로운 황후를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둘째 여식을 밀어주시옵소서. 하오면 대감의 앞날은 제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 이 예는 나름 부귀영화에 관심이 많은 작자였다. 황후의 아버지로 지내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현실은 그것을 언제까지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황후가 지금도 위중한데 죽는다면 그 이후의 일도 가문의 차원에서 생각해야만 했다. 다른 명망있는 가문이 황후를 내면 자신은 그 날로 찬밥신세가 될 터였다. 차라리 이제 거의 멸문지화를 당해 아무런 배경이 없는 이자겸의 여식이라면 자신이 그래도 계속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지금 그대의 가문은 역적 집안이야. 그런 역적의 여식이 황후가 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하니 대감께서 황후 전하께 말씀을 드려야 하옵니다. 그리고 제가 황후 전하를 뵙게 해 주십시오."
- 마침내 이예는 이자겸의 미끼를 물었다. 그는 곧 이자겸을 내관으로 변장시킨 다음 같이 입궁해 황후를 만났다. 경화 황후는 맨 처음에는 놀랐으나 이자겸은 자신은 지난날을 잊은 지 오래이며 오직 가문의 일족들이 사람답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경화 황후도 사저에 있을 때부터 이자겸과는 아는 사이였다. 아니, 한때 그에게 연정을 품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몰라보게 변한 이자겸이 그렇게 호소하자 그녀의 마음도 심하게 흔들렸다.
- 며칠 뒤, 황후는 예종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주 이씨 일족들을 이제 그만 사면하시는 것이 어떨지요?"
그러자 황제는 놀라며 말했다.
"황후...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오?"
- 황후는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 황제는 이자겸의 그러한 대범한 행동에 내심 놀랐지만 아버지 숙종이 이미 역적으로 심판을 했기 때문에 지체 없이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황후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자겸의 여식은 제가 이미 만났습니다. 저와도 매우 닮았더군요... 폐하...저는 이제 오래 살지 못합니다. 부디 저를 이어 제가 바라는 여식으로 제 뒤를 잇게 해주세요. 이자겸은 이미 지난날을 참회하며 오직 폐하의 자비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 죽어가는 경화황후가 떨구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황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황제는 황후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유언같은 그녀의 바램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더구나 황제 입장에서도 현재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한안인 일파의 세력을 견제해야 하기도 했다. 여러 날을 고민 끝에 예종은 이자겸을 따로 불렀고 다시 한번 그에게 충성맹세를 받아냈다.
- 1108년 정월 정묘일. 이자겸의 둘째 딸이 '연덕궁주'라는 칭호로 예종의 둘째 비가 되었다. 아울러 이자겸도 복권되어 조정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자겸의 화려한 재기였다.
- 드디어 이자겸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황궁에 들여보내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앞날에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놓여있었다.
- 이자겸의 대표적인 정적은 한안인을 위시한 이른바 '관료파' 신료들이었다. 이들은 예종 자신이 의욕적으로 양성한 신료 집단으로 비록 예종 자신의 친위세력은 아니었지만 다른 세력이 자라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예종의 입장에서는 효용성이 큰 세력이었다. 이들의 영수는 한안인이었다.
- 한안인은 숙종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관료로 실로 타인의 혀를 내두르게 하는 뛰어난 두뇌와 언변으로 등용된지 얼마안되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던 고려조정의 기린아였다. 예종 또한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관료파를 장악하도록 일부러 묵과한 측면이 있었다. 이들은 적어도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안인은 숙종때의 연줄을 이용하여 이른바 '숙종파' 관료들과도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 이자겸의 또 다른 정적은 바로 이 '숙종파'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숙종이 가장 총애하던 신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시 진행되던 윤관의 북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종은 숙종파의 월권을 내심 싫어했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자겸을 등용했던 것이었다.
- 마지막으로 앞의 두 세력만큼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자겸에게 부담이 되던 세력은 '신라계'였다. 이들은 그 뿌리가 태조 왕건때까지 올라가는 이들로 그만큼 오랜 세월을 카멜레온처럼 변신에 능한 정치술을 구사하며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벌을 달가와하지 않았으나 예종과 숙종계의 강력한 의지에 밀려 이미 정국의 주도권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다시 정면으로 부상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정에 복귀한 이자겸으로서는 가장 먼저 제휴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 이자겸은 자신이 품고 있는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아무리 가까운 인척간이라도 내심을 절대로 표출하지 않았다. 게다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제 아무리 원수같은 이들과도 일시적으로 악어의 눈물을 지으며 힙을 합칠 마음의 각오도 한지 오래였다. 그만큼 이자겸의 독기는 깊었던 것이다.
- 이자겸의 딸이 순덕황후가 되자 자연히 이자겸은 예종의 장인이 되어 일정한 세력을 규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제일 먼저 제휴를 추진한 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라계였다. 이는 이자겸의 장인 최사추의 가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사추의 영향력으로 이자겸은 신라계에게 공동 대응을 미끼로 접근했다. 그것은 북벌의 반대라는 사안이었다.
- 혼자서는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던 신라계는 이자겸이라는 원군을 얻자 북벌의 무모성을 강조하며 여론을 형성해 나갔다. 북벌에 원천적으로 찬성하던 예종 역시 북벌로 인해 숙종파의 득세를 원치 않았다. 때마침 북벌이 예상외의 난항을 겪자 북벌 반대의 여론을 방조하기에 이른다. 사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장기간의 북벌로 인해 국력의 소모가 막대했기 때문에 황제의 처지로서도 달리 뽀죡한 수가 없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북벌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따라서 숙종계의 위세도 한풀 꺾이게 된다.
- 그러나 이미 이자겸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게 한 실수를 한번 저지른 숙종계는 관료파들과 결탁해 이자겸과 신라계의 세력에 대한 반격을 서두르게 된다. 한안인이 주도가 되어 내세운 카드는 바로 예종 사후 황제 계승의 문제였다. 그들은 예종이 아직 후사가 없으므로 일단 황제의 아우인 대방공 왕보를 차기 후계자로 삼을 것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당시 황실에 영향력이 막강했던 왕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종실 세력과도 결탁해 장차 이자겸과 신라계를 쓸어버릴 심산 이었던 것이다. 만약 황제가 왕보를 후사로 인정한다면 한안인 등은 이를 대세로 굳혀 그대로 황제 계승을 왕보로 시킬 속셈이었다.
- 그러나 황제인 예종의 입장에서는 비록 한안인등이 이자겸을 견제할 요량으로 왕보를 후사로 정하기를 청한다 해도 지난날 아버지 숙종의 전철을 다시 밟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예종은 자신의 혈육으로 후사를 정하고 싶었고 순덕 황후에게서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한안인은 몰래 예종과 독대하여 그러면 다른 집안에서 새로이 황후를 맞이하여 후사를 보시라고 권했으나 예종은 경화 황후의 부탁도 있고 해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가족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 이에 대응하는 이자겸의 행보도 재빨랐다. 그는 우선 신라계의 세력가의 딸과 재혼해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서기 1109년 7월에 경화 황후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순덕 황후를 지켜달라고 부탁하자 예종의 마음은 더욱 굳혀졌다. 이를 위해서 일단 숙종파를 꺾어야겠다는 생각에 예종은 그동안 지리멸렬하던 북벌을 전면적으로 취소하고 회군을 명했다. 북벌 취소의 황명은 당시 고려에 엄청난 여론을 환기 시켰으나 결국 이자겸과 신라계의 부상을 가져왔다.
- 이제 이자겸과 신라계의 세력이 어느 정도 조정에 자리 잡아 순덕 황후의 보호막이 되었다고 판단한 예종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 반대파인 한안인을 영수로 하는 세력에게 힘을 실어줬다. 북벌에서 귀환한 윤관 등을 여진족의 압박을 명분으로 대대적으로 조정의 요직에 기용해 이자겸 등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곧 윤관이 조정에서 물러나자 이자겸은 다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한다.
- 이자겸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기 1109년 10월에 순덕 황후가 드디어 예종이 기다리던 원자를 낳았으니 이가 왕구, 즉 훗날 인종이 되는 인물이다. 이 소식은 한안인 등에게 다시 한번 타격을 주었으며 나름대로 황제에 대한 야심이 있던 대방공 왕보는 크게 분개하며 형제들과 결탁해 실력행사에 나서기로 마음먹기에 이른다.
- 자신의 입지가 나날이 공고해지는 것을 느낀 이자겸은 겉으로는 황제에게 겸손했지만 반대파를 포섭할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사원 세력도 일찌기 장악한 이자겸이었지만 보다 실질적인 군대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자겸이 지목한 것은 일찌기 북벌에서 눈부신 공을 쌓은 대장군 척준경이었다. 단순하고 고지식했던 척준경은 일단 한번 포섭하면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을 것이라 이자겸은 판단했던 것이다.
- 북벌에서 돌아온 척준경은 당시 합문지후를 거쳐 예종의 전폭적 신임을 받으며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자겸이 어느 날 만면에 웃음을 띄며 찾아왔던 것이다. 척준경은 아버지처럼 따르던 북벌영웅 윤관의 죽음이 이자겸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수가 제 발로 찾아오자 그의 대검을 뽑아 당장 죽일 듯이 이자겸의 목 줄기에 갖다대며 으르렁거렸다.
"천하의 역적간신놈이 대의를 그르친 것도 모자라 이제 죽여달라고 제발로 나를 찾아왔구나...황제의 장인이고 뭐고 없다!"
- 보통사람같으면 사색이 되어 오줌을 싸기에 충분할 정도로 머리가 쭈뻣서고 눈을 부라리는 척준경의 모습은 금강야차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자겸이 누구던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조정에 재등장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척준경과 함께 윤관의 사당에 같이 가자고 했다. 척준경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자겸과 함께 윤관의 사당에 가 참배를 드렸다.
- 이자겸의 연극은 완벽했다. 그는 척준경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신라계와 결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실제로 자신은 가문의 명예가 회복된다면 윤관의 유지를 이어 반드시 북벌을 다시 일으키 겠다는 말을 해 척준경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윤관에게 사죄하는 뜻으로 북벌 출병 직전에 신라계를 도륙하여 그 목들을 윤관의 영전에 바치겠다고까지 했다. 이에 척준경은 감동하여 자신이 경솔했노라고 이자겸의 앞에서 절을 하며 즉석에서 사돈을 맺기로 약속한다.
- 물론 이자겸의 말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이자겸 자신으로서도 미지수였다. 그러나 일단 척준경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자 숙종계의 분열도 눈에 띄게 이어져 하나둘 이자겸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인 예종이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돈 소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
- 어느 한 세력에게 절대적인 힘을 절대로 주지 않는다는 것이 예종의 철칙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이자겸의 힘이 비대해짐을 느낀 황제는 한안인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안인은 과거제를 통해 끊임없이 지모에 능한 뛰어난 인재들을 독차지하며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또한 북벌의 실패로 인한 이자겸과 신라계에 대한 악평을 이용해 재야의 여론도 주도하기에 이른다.
- 황제와 이자겸, 한안인 등의 끓임없는 3각 구도에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서기 1118년에 터지기에 이른다. 그것은 바로 순덕 황후의 죽음이었다. 여기에는 한안인의 음모가 있었다는 설이 일시적으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무고로 밝혀져 이자겸의 일파가 숙청되는 일이 생겼다.
- 이를 기화로 예종이 당시 10살인 태자 구를 황태자로 책봉한 것을 철회해야 한다는 의견이 황실과 관료 세력들에서 봇물 터지듯이 대대적으로 나왔다. 어린 태자를 후사로 세우면 이자겸의 전횡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찌기 숙종 때의 일을 앙심품고 장차 대역을 저지를 수가 있다는 말까지 해 이자겸파를 격분시켰다.
- 물론 예종 자신이 이자겸의 이러한 가능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의 아들 대신 아우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기는 더욱 싫었다. 이는 아무래도 아버지로서의 본능에 가까웠다. 고민 끝에 예종은 한안인을 몰래 불러 설득하려 했지만 한안인은 오히려 일단 왕보에게 황제 자리를 준 다음에 장차 왕구가 성장하면 양위한다는 제안을 해 황제의 뜻을 꺾으려 하였다.
- 한안인의 결사적 반대로 자신의 외손인 태자가 후사로 결정되는 데에 차질을 빚자 이자겸은 직접 한안인과 독대해 정치적인 타협을 제안했다. 그러나 한안인은 뜻밖에도 이를 단호하게 거절해 이자겸을 더욱 자극했다. 역적이며 간신과 도저히 얼굴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한안인의 답변이었기 때문이었다.
- 이후 이자겸과 한안인은 조정에서 마치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다. 조정 밖에서도 사사건건 말 싸움을 했으나 아무래도 달변인 한안인에게 이자겸이 열세여서 더더욱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자겸은 심지어 이전 윤관의 북벌 철회의 일등공신이었던 김인존을 내세워 한안인과 '세기의 말싸움'을 벌이게 하였으나 오히려 한안인에게 당해 김인존이 개망신을 당하고 조정에서 물러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 이렇게 어영부영 긴장이 세월이 가는 동안 어느덧 예종의 최후도 다가오고 있었다. 예종은 이윽고 악성종양으로 서기 1122년 4월 운명하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예종은 죽기 직전 당시 어린 태자 구를 몰래 불러 비단주머니를 하나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애비인 황제가 너에게만 주는 것이다. 장차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때만 이것을 풀어보도록 하여라. 함부로 풀어보면 짐이 너를 구천에서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는 황제의 조칙이니 명심하렷다!"
- 정치의 중심에서 견제와 균형을 통해 황권 강화에 주력했던 예종의 죽음으로 인해 이제 이자겸은 태자를 황제로 올릴 준비를 했다. 이미 때를 놓친 한안인 등은 이를 막을 수는 없었으나 정변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제 예종이 없는 고려는 이자겸과 한안인의 정면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었다. 실력행사! 오직 그것만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양대 세력에게 남았을 뿐이었다.
- 비교적 영민한 군주로 치세를 별탈 없이 마무리시켰으나 북벌을 포기한 엄청난 역사적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 예종은 서기 1122년 4월 수수께끼의 비단 주머니를 아들 왕구에게 남긴 채 붕어했다. 조야의 슬픔을 뒤로 하고 예종의 황태자 구가 제위에 오르니 이가 고려제국 제 18대 황제 인종이다. 인종은 이때 나이 겨우 14세였다.
- 이미 예종이 죽기 전 이자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안인의 관료파와 숙종파는 이미 연합을 해 여기에 왕보를 위시한 황실파까지 가세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항해 이자겸도 신라계와 연합해 맞서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종이 살아있을 때 인종의 황위 계승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붕어하자 이제 예종의 마음을 영원히 돌릴 수가 없었다. 예종의 뜻은 이제 선제의 유훈이 되었고 이를 받들 수밖에 없는 것이 고려의 법도였다.
- 그러나 한안인을 영수로 한 대세력은 인종을 내세운 이자겸의 전횡을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일단 인종을 보위에 올린 다음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다시 끌어내리고 자신의 세력인 예종의 아우인 대방공 왕보를 새 황제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마치 숙종이 황제를 찬탈하기 전 상황이 재연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 하지만 숙종의 찬탈전야와는 상황이 약간 달랐다. 그때는 대의명분이 숙종에게 있어 찬탈시에도 어느정도 명분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오히려 그것이 인종측에 있었다. 숙종때부터 이미 부자 계승을 원칙으로 못 박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30여년전 똑같이 황제편에 서있게 된 인주 가문 역시 이번에는 해 볼만한 싸움을 앞에 두고 있었다.
- 어린 나이로 황제위에 오른 인종은 성격이 우유부단했다. 그러나 자신이 일단 어느 쪽에 의지해야 할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새 황제는 외할아버지 이자겸에게 사실상 모든 실권을 넘기고 의지하기 바랬다. 그래서 이자겸은 적어도 겉으로는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 것처럼 비쳤다.
- 황제가 자신의 뒤에 서서 보호받기를 바라는 상황은 일단 이자겸 일파에게는 하나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이자겸도 오랫동안 품어왔던 야망의 첫 단추를 풀기 위해서는 일단 황제를 자신의 손으로 마음껏 요리할 환경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면한 과제는 일단 한안인파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 그동안 비밀리에 양성한 문객을 빙자한 책사들을 불러모은 이자겸은 오랜 토론 끝에 반대파를 제거할 함정을 파기로 했다. 그것은 이자겸이 고의로 국정을 농단하는 척해 한안인의 지탄을 유도한 다음 이들의 거사를 부추켜 그 때에 맞춰 일망타진한다는 계책이었다. 물론 그것은 이미 한안인파가 비밀리에 군사력을 모으고 거사 준비를 마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세워진 것이었다.
- 이때부터 이자겸은 '쇼'를 하기 시작했다. 일부로 황제가 있는 조회에서도 신료들의 눈에 거슬리는 행위를 일삼고 대신들에게도 눈짓으로 오라가라하는 등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기 시작 했던 것이다. 또한 조정에도 걸핏하면 결석하고 정사를 모두 자기 집에서 보는 일도 다반사였던 것이다. 미리 황제에게도 귀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종도 내심 이런 이자겸의 월권행위를 불쾌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자겸의 연극은 나중에 보겠지만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 한안인파는 180도로 변한 이자겸의 태도에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척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한안인은 인종에게 이자겸의 오만을 벌해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유달리 핏줄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인종은 외조부를 처벌할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한안인의 입장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최대한으로 이자겸의 실정을 부각시켜 자신들의 정변의 명분으로 쌓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파당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이자겸의 갖은 '악행'을 열거하며 그를 내쫓을 것을 황제에게 주청했다. 물론 한안인은 황제가 이러한 요청을 들어 줄리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함으로써 조정과 여론에 자신들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전시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 한안인파가 자신을 탄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겸은 각본에 따라 불같이 화를 내며 조정에 쳐들어가 황제에게 삿대질을 하며 이에 대해 따졌다. 이미 군신간의 예의는 온데 간데 없고 다만 할아버지가 손주를 나무라는 형국이었다. 좌우의 신료들은 이 광경에 경악했으나 의외로 한안인은 자신 때문에 황제가 욕을 보았다고 집으로 가 근신하며 나오지 않았다. 이는 이자겸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이자겸은 자신의 연극에 한안인파가 결정적인 계기를 잡았다고 자위하며 거사를 앞당기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한안인은 사저로 물러나 쳐박혀 근신했던 것이다. 역시 노련한 한안인이었다.
- 그러나 사태는 의외로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일찌기 한안인파에 속해 있던 최홍재라는 인물이 고급정보를 제공하며 이자겸에게 귀순을 자청 했던 것이다. 그는 공명심이 대단한 위인으로 한안인이 자신을 푸대접하자 이를 갈며 배신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가 마침내 몇몇 사람과 의기투합하여 때를 보아 이자겸 쪽으로 붙고자 했다. 때마침 한안인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위축되어 있는 지금이 호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간접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한안인파의 반정음모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증거를 전혀 기대도 아니했던 곳에서 입수하게 된 이자겸은 무릎을 치며 이들을 환영했다. 최홍재와 그 일당의 배신이 참이던 거짓이던 이자겸의 입장에서는 단지 그들을 이용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동안 누차 한안인 진영에 정보를 캐내고 분열을 획책할 인물을 투입하려 했으나 한안인의 용의주도함에 번번히 고배를 마시던 이자겸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넝쿨째 굴러왔으니 과연 하늘이 도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 일대 호기를 잡은 이자겸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즉시 황궁에 입궐해 인종으로 하여금 조회를 열게해 모든 중신들이 모인 앞에서 한안인파의 '역모'의 전 말을 최홍재를 내세워 공개했다. 최홍재의 배신에 한안인파는 부르르 떨었으나 일단은 부인을 해야 했다. 한안인을 위시한 당 여는 오히려 이자겸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몰아세웠으나 이자겸에 비해 증거가 부족했다. 한안인파가 궁지에 몰리자 인종은 이자겸의 말대로 하루동안 심사숙고하겠다는 말만 하고 조회를 파했다.
- 이자겸이 즉각 한안인파를 제거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 그 하루 동안 한안인파가 반정을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거병하면 그때는 완벽한 명분으로 한안인 파를 숙청할 수 있을 것이었다.
-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사지로 몰린 한안인파는 그날 밤, 그동안 준비했던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거병했다. 그러나 이미 이자겸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겨루는 일전이라는 것을 한안인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미처 황궁으로 향하기도 전에 이자겸의 군대와 충돌했고, 가뜩이나 사기가 저하된 한안인파에서는 투항하는 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백전노장 척준경의 활약으로 한안인파의 장군들마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싸우기도 전에 이긴 전투였던 것이다.
- 문초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거병한 것 자체가 이미 황명을 가지고 있던 이자겸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역모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더기로 사로잡힌 한안인파에 대한 처리는 매우 신속했다. 한안인은 귀양가던 길에 이자겸의 심복들에 의해 바다로 던져져 고깃밥이 되었고, 대방공 왕보 또한 이자겸이 죽이고자 하였으나 한안인의 목숨을 대신 원한 인종의 바램으로 귀양에 처해졌다. 그밖에 많은 신료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게 되어 이제 조정에서 한안인파, 숙종파, 황실파 등은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한꺼번에 이자겸에 의해 일망타진되어 인종은 오직 이자겸과 그 세력만으로 둘러싸이게 된 것이었다.
- 숙적 한안인파를 타도한 이자겸은 이제 고려의 주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라계가 있었으나 아직은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런데도 이자겸의 전횡은 오히려 도를 더해갔다. 이자겸은 이제 완전히 황제처럼 행세하며 고려의 국정을 문란케하였다. 그의 어린 아들들 또한 아비를 따라 못된 버릇을 일삼고 있는데도 이자겸은 일부러 이를 방조했다. 이자겸은 어린 황제를 진짜로 못난 손자처럼 허구 헌날 구박하고 비웃었다.
- 이윽고 인종 자신에게는 이모들은 이자겸의 딸들을 인종의 황후들로 둘씩이나 황궁에 들여보냈다. 족내혼이 유행하던 고려 초기와는 달리 중기에는 유학의 정착으로 이런 일은 상상할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으로 이를 관철시켰다. 온 나라가 이자겸의 패륜 행위를 욕했으나 절대권력자였던 그에게 제대로 반대하는 세력은 당시 없었다. 이제 의지 할데라고는 이자겸밖에 없던 인종은 외할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이 철이 들수록 이해가 안되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자겸의 계산된 행동이었다. 한안인파의 제거로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인주 가문은 옛날의 영화를 되찾았으나 이자겸의 오랜 숙원을 푸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일찌기 이자의가 숙종에게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자겸은 생각했다. 그로 인해 자신은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 가족과 가문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을 또다시 겪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예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자겸 자신이 새로운 제국을 건설해 태조가 되어야 가문과 자신의 일생일대의 개인적 염원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인종은 이미 손자가 아닌 제거되어야 할 정치적 청산의 대상에 다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도의니, 인륜이니 하는 것은 오래전에 포기한 이자겸이었다.
- 18세가 된 젋은 청년 인종은 이제 이자겸의 횡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던 그에게는 할아버지 숙종의 결단력이나 아버지 예종의 정치력 또한 없었다. 그리고 즉위 초에 한안인파가 무서워 외조부인 이자겸에 의지했는데 이자겸이 이제 자신을 핍박하니 주변에 아무도 황제를 위해 나서는 이들이 없었다. 오직 인종의 내시였던 김 찬과 안보린만이 있었다.
- 김찬과 안보린은 예종이 자신의 사후를 대비해 인종을 보필할 것을 명령받았던 일종의 '고명신료'들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인종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이자겸은 장차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이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것만은 인종의 결사적인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정치를 알고 있던 이자겸은 고려를 철저하게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순과 명분을 쌓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 이자겸의 견제를 받기 시작한 김 찬과 안보린은 이제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이자겸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이자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여러 세력들과 접촉해 거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능수능란한 화술에 의외로 많은 신료들과 장군들이 황제를 위해 충성하겠노라고 피로서 서약했다. 특히 고려의 병권을 쥐고 있던 척준경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고위급 장군들도 이에 동조했다.
- 이자겸의 적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고무된 김 찬 등은 위험하지만 신라계까지 접촉했다. 당시 신라계는 이자겸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혜택을 입고 있었지만 이자겸의 전횡에 대해 은근히 못마땅해 있었고 나아가 그의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특히 떠오르는 신라계의 희망 김부식 같은 이는 이자겸이 장차 찬탈을 노린다며 노골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이미 읽고 있던 김 찬 등은 쫓겨났다가 정계에 복귀한 당시 신라계의 대표 김인존을 만나 의사를 타진했으나 예상 한대로 거절당했다.
- 그러나 신라계는 이 같은 사실을 이자겸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 찬 등이 인종의 칙서를 가져와 읽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실 조작이었으나 황제의 이름으로 찾아온 그들과의 대화 내용을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자겸에게 이들과 접촉했다고 된서리를 맞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신라계는 굳게 입을 닫았다.
- 김 찬과 안보린은 이제 최종적으로 황제인 인종의 허가를 받는 일만 남았다. 이들의 계획을 들은 인종은 처음에는 펄쩍 뛰며 외조부를 칠 수는 없다고 반대했으나 아버지 예종 때의 일을 꺼내며 설득하는 그들의 언변에 그럼 오만방자한 외할아버지의 버릇을 고치고 군신 관계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일을 매듭짓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종은 일찌기 아버지 예종이 주었던 비단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황제의 인준이 떨어졌다.
- 물론 김 찬과 안보린은 거사가 성공하면 이자겸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 일은 그 때가서 볼 것이었다. 당장 이자겸을 칠 준비가 완료되고 한안인파의 실패를 거울삼아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를 모를 이자겸이 아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냥 모르는 척 했던 것이다. 이 또한 장차 고려를 도모할 또 하나의 함정이었기 때문이었다.
- 마침내 서기 1126년 2월 25일 어둠이 내릴 무렵, 인종의 허가를 받은 군부의 장군들이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과 아들 척순 등이 지키고 있던 황궁으로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기 시작했다. 소위 '이자겸의 난'의 서막이었다.
- 서기 1126년 2월 25일 석양이 질 무렵, 고려의 황도 개경에서 일단의 무장병력이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종의 밀지를 받은 김 찬과 안보린의 사주를 받아 반이자겸의 기치를 내세운 상장군 최 탁과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이들은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변복을 벗고 일시에 황궁으로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갔다.
- 당시 황제를 보위한다는 명목하에 사실상 연금하고 있었던 당대의 맹장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 척 순은 이러한 불시의 공격에 놀라 급히 외부로 사람을 보내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고 황궁안으로 완전히 포위된 형국에 직면했다. 우선 척준신은 척 순으로 하여금 황제를 자신들 옆으로 끌고 오게 하려고 했으나 이미 상장군 최 탁 등과 연락을 취한 황제는 김 찬과 안보린과 함께 황궁안의 은신처로 피신한 직후였다.
- 아무리 뒤져도 황제의 행방이 묘연하자 낭패한 척 순은 홧김에 황족들을 대신 끌고 와 척준신 앞에 대령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척준신은 윽박지르며 황제의 행방을 물었으나 비밀리에 몸을 숨긴 황제를 이들이 알리가 만무했다. 일단 척준신은 이들을 감금하고 황궁 성벽으로 나가 밖의 추이를 살폈다.
- 당시 중국의 황성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했던 대고려 황궁의 성벽은 튼튼해 아직도 적군의 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만약 황성 내부의 내통자가 없었다면 문자 그대로 황성은 난공불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데 있었다.
- 이미 사전에 모든 계획을 갖춘 공격군은 이미 안에서 적절한 시기에 내통자로 하여금 비밀통로를 만들어 두도록 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백전노장 척준신이 적은 군사로도 잘 막아내자 이들은 이제 비밀통로를 열도록 했다. 처음부터 이 계책을 쓰지 않은 까닭은 일찍 비밀통로가 알려지면 할 수없이 정공법을 써서 피해가 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정공을 하다가 방어군의 전력이 한곳으로 쏠리면 그때 비밀통로를 사용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 이제 모든 것은 수순대로 밞아 나갔다. 비밀통로가 열리자 일단의 공격군이 방어군의 배후로 돌아가 뒤통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 앞뒤로 적군을 맞은 척준신은 그 옛날 형 척준경과 함께 수만의 여진족에게 둘러싸이면서도 기적적으로 대원수 윤관을 구했던 일을 상기하며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 싸웠다. 그러나 워낙 기습적으로 공격을 당한 탓에 앞뒤 분간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상장군 최 탁의 화살에 가슴을 뚫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척준신이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뒤이어 알수 없는 적군의 칼이 자신의 목을 사정없이 베었다.
- 척준신이 참수당하자 의지 할데 없는 척순은 사지를 벗어나 아버지 척준경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과연 고려 최고의 명장 척준경의 아들답게 뛰어난 무예로 적군의 기세를 제압하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또한 적군의 화살과 창에 꼬치가 되어 최후를 맞았다.
- 이렇게 황궁 안의 접전이 일단락되자 어둠 속에 적막이 흘렀다. 이어 하나 둘 횃불이 켜지고 황제 또한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을 공격했던 모든 장졸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근엄한 목소리로 이자겸의 체포를 명했다.
- 황궁이 황제에게 장악되는 그 시간, 몸이 날랜 한 관리가 인적이 드문 황궁 뒷담을 넘어 이자겸의 처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학문. 내직기두의 관직에 있던 자였으며 동시에 이자겸의 첩자이기도 했다.
- 이 때 이자겸은 척준경을 불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했으나 속으로는 사태의 추이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때 학문이 들어섰다.
"지군국사, 황궁에서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각본에 따라 이자겸은 짐짓 크게 놀란 기색을 하였다. 자신의 아들과 아우가 모두 황궁에 있던 척준경의 안색도 변했다.
"내직기두, 그것이 무슨 말인가?"
"황궁에 변란이 일어나 견룡군들이 도륙되고 지군국사의 사병 다수도 참살되었나이다!"
"그럼 내 아들과 아우는?"
척준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장군의 혈족들 또한 반군들에게..."
학문이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척준경은 괴력으로 탁자를 부수며 울부짖었다.
"...죽었다는 말인가?"
학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산히 말했다.
"...송구...송구하옵니다, 장군..."
- 이자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시 척준신과 척순을 황궁에 남겨 숙직토록 한 것도 바로 자신의 주선이었다.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이들을 황성 밖으로 빼내어 살릴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를 기화로 척준경을 영원히 황실을 원망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다.
- 척준경은 미칠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자신의 군사들을 급히 모아 황궁으로 돌진했다. 이자겸은 이와는 달리 천천히 갑주를 갖추며 조정백관들을 불러모아 서슬이 퍼렇게 엄포를 놓았다.
"오늘 야음을 틈타 일단의 적당패들이 감히 범궐을 하고 지금 황상폐하의 종적이 묘연하다고 하오. 이는 국가의 일대 중대사이니 지군국사로서 본인은 임시로 모든 국사를 총괄하고자 하니 제신들은 이를 따라주기 바라오."
그때 말석에서 홀연히 어떤 관리가 일어나더니 앙천대소를 하며 이자겸에게 말한다.
"지군국사라...그것은 그대가 바라는 관직이지 황상께서 내리신 관직이 아니거늘...그대는 이미 천하를 가졌음에도 이와 같은 욕심을 부리는 까닭이 진정 무엇이오이까?"
마치 이자겸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매로 이와 같이 질타하는 이는 바로 신라계의 촉망받는 젊은 관료 김부식이었다. 이자겸 또한 이에 질세라 눈을 부라리며 맞섰다.
"일개 미관말직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지금은 비상시국이니 임시로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일뿐...네놈의 한치 혓바닥이 어찌 이리도 방자하단 말인가?"
"하하하...진실은 꼭 말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외다. 그럼 저는 이러한 자리에는 더 이상 있지 못하겠으니 이만..."
김부식은 미련이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던 이자겸은 이윽고 시선을 신라계의 영수 김인존에게 쏘아붙였다. 김인존은 민망한 듯 그런 시선을 피해 허공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급히 황궁 성문에 도착한 척준경은 불을 밝히며 적군에게 문을 열라고 윽박질렀다. 그러자 적군은 신원을 물었고 척준경은 주저없이 노기서린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이윽고 최 탁이 나타나더니 척준신과 척 순의 머리를 성벽 밖 척준경의 말 앞에 내던졌다. 이는 척준경을 더욱 흥분시켜 이성을 잃고 실책을 저지르게 해 자군에게 유리하게 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 철옹성같은 황성의 성벽은 깎아지른 절벽처럼 그 위용을 자랑했다. 그래서 특별한 장비 없이 달려온 척준경의 군사들은 전혀 이를 타고 넘을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게다가 성벽 위의 유리한 지형에서 인정사정없이 활을 쏘는 적군들의 화살 세례에 척준경 자신이 훈련시킨 정예군사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연거푸 쓰러졌다.
- 아무러한 백전노장 척준경이라 해도 이러한 상황으로는 전혀 가망이 없었다. 그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뒤로 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일단 군사들을 물렸다. 자신들은 횃불을 밝히고 있었던 반면에 적군은 어둠 속에서 높은 지형에 포진하여 이러한 상황을 무기로 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자겸이 자신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도착했고 거기에는 무예에 능통한 헌화사의 승병까지 가세하고 있었다.
-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이제 적군의 식별이 가능해졌다. 척준경은 정공법을 쓰고자 했으나 이자겸은 지구전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어차피 황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습을 감추려고 애쓸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이자겸은 황궁을 포위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이 전개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 그러나 이자겸의 이러한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왜냐하면 황제 측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황제 자신이 이자겸과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친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는 엄청난 전시효과였다. 신봉 문에 모습을 드러낸 인종은 황색 양산을 펼쳐 보이며 공격군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대들이 따르는 이자겸은 비록 짐의 장인이며 외조부이기는 하나 자신의 욕심을 위해 종사를 어지럽히는 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런 무도한 자를 받들어 감히 범궐을 하려고 한다는 말인가? 그대들이 공격하는 군사들은 다름 아닌 짐의 충성스러운 용사들이다. 누가 역적인지는 이제 하늘의 힘을 빌어 짐이 이제 친히 그대들에게 깨우치리로다!"
- 황제에게서 직접 이러한 말을 들은 성 밖의 군사들은 어리둥절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이는 척준경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사태의 정확한 전 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척준경은 일말의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황제에게 품했다.
"황상 폐하. 하오시면 야음에 황성을 공격한 자들이 폐하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란 하교이시나이까?"
"그렇다"
"그러하다면..."
척준경의 목소리가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과 아우를 죽이라 명하신 것도 폐하이시나이까...?"
척준경의 무서운 눈초리에 인종은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간신히 말했다.
"그건...그건 짐은 모르는 일이로다..."
- 그러나 아무리 우직한 척준경이라도 이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모를리가 없었다. 특히 아우 척준신의 환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척준신이 누구인가? 단순히 아우의 차원을 넘어 북벌 때 만주벌판을 자신과 함께 누비며 수많은 생사고락을 같이 한 일심동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동생을 죽인 자가 바로 척준경 자신이 충성을 다 바친 대상인 황제였다는 말인가? 이것이 평생 충성을 바친 댓가라는 말인가? 척준경의 한쪽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척준경은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군사들에게 명했다.
"저자는 황제가 아닌 가짜다. 어서 저자부터 처치해라!"
- 그러나 군사들은 수군거리더니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척준경은 본보기로 앞의 몇 명의 목을 베며 다시한번 독촉했다.
"난 수십년동안 지금의 황상 폐하를 모셔온 몸이다. 그분인지 아닌지는 내가 한마디만 나눠보면 금방 판명이 난다. 난 방금 그렇게 말했고 그래서 저자는 황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 가짜를 처치하는 것을 신호로 우리는 황성을 넘는다! 시행하라!"
- 물론 척준경은 황제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을 저버리고 자신의 혈육을 참혹하게 죽여 충성을 이런 식으로 되갚은 주군은 이미 황제가 아니었다. 이미 척준경은 황제의 모습을 마음 속에서 지웠다.
- 서슬퍼런 척준경의 명으로 군사들은 드디어 공성전에 돌입했다. 이미 이자겸이 공성 장비들을 끌고 왔기 때문에 이는 가능했다. 그러나 수비군들도 이제 여기서 물러서면 모두 죽을 것이라는 절박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이에 맞섰다. 그 결과 전세는 척준경의 기대와는 달리 계속 공격군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또다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 이자겸은 또다시 지구전을 언급했으나 척준경은 일찌기 아골타와 자웅을 겨루던 과거를 되새기며 황제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의 사기가 얼마나 충천한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구전에 반대했다. 이윽고 척준경은 비장한 표정으로 마지막 카드를 내놓았다.
"화공을 씁시다!"
아무러한 이자겸도 이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는 실로 엄청난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장군, 그러나 황궁을 불태운다는 것은 좀..."
"사돈, 우리는 이미 황제와 맞서고 있소. 다시 말하면 황제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바로 역적이란 말이오. 게다가 시간을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하게 되어있소. 황제를 등에 업은 것은 저쪽이지 우리가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 무엇을 더 망설인단 말이오? 저 드높은 황궁의 성벽을 깨뜨릴 방법은 오직 그것 뿐이오!"
- 이자겸은 이제 순간의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황궁을 불태우는 것은 실로 엄청난 반역의 행위였지만 어차피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같기도 했다. 더우기 이제 막다른 골목에 와있는 이상 더 이상 머뭇거리는 것은 오히려 손해였다. 이자겸은 결국 이에 찬동했다.
- 또다시 날이 저물고 있었다. 황성 내에서는 황제를 보위하는 세력들이 야음을 틈타 황제를 몰래 밖으로 빼내 지방으로 피신시키고 사방에서 군사들을 일으켜 이자겸을 타도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황성을 빙 둘러싼 이자겸과 척준경의 군사들은 비오 듯 불화살을 황성 안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 때마침 바람도 황성 안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황성은 불바다가 되었다. 게다가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자욱하게 만들어 지척을 분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자겸은 이때를 이용해 군사들에게 공격을 명하려고 했으나 척준경은 이를 제지하며 말했다.
"좀 있으면 불구덩이 속에서 스스로 저놈들이 나올 것이오!"
- 이리하여 약 100년 전 거란의 침입으로 잿더미가 된 황궁은 다시 한번 이자겸과 척준경에 의해 불살라지게 된 것이었다. 사방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고 비명 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뒤덮어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 와중에 금강야차 같은 표정의 척준경을 쳐다보며 이자겸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불길은 어느덧 이자겸 자신의 눈 속에서도 활활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척준경과 이자겸이 놓은 불길은 황성을 순식간에 휩쓸어 성벽은 물론이고 외성을 지나 내성까지 번지고 있었다. 황도 개경의 모든 주민들은 이 엄청난 화재에 모두 잠을 깨고 이 난리를 구경하러 구름같이 황성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 공격군의 불화살이 황성을 빙 둘러싸며 들어왔기 때문에 외성을 지키던 수비군들은 퇴로가 불구덩이로 막혔다. 불에 타 죽느니 차라리 적군과 싸우다가 죽어버리겠다는 각오로 이들은 이성을 잃고 황성의 정문을 열고 미친듯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공격군의 가차 없는 창검이었다. 기진맥진한 수비군들은 척준경의 엄명에 의해 한사람도 남김없이 도살되었다.
- 한순간에 가짜 황제로 몰려 부리나케 내전으로 피해 들어온 인종은 견룡군들에게 둘러싸인 채 대장군 최 탁 등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군의 함성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최 탁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외성 수비를 맡았던 오탁은 불길에 둘러싸이자 근처 우물로 가 옷가지에 물을 묻혀 덮어쓰고 말을 달려 황궁으로 오는 기지를 발휘하며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화상을 입은 말이 고꾸라지자 같이 넘어져 뒤따라오던 적군에 의해 부상당한 몸으로 사로잡히게 된다.
- 이자겸 군은 화재를 진압하며 어느덧 내성에 도착했다. 이 때에 이르러 자신의 모든 사병을 동원한 상태인 이자겸은 척준경의 병력까지 합세해 무려 그 병력이 3만에 달했다. 이제 도저히 내성의 방어군은 적수가 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 내성이 겹겹이 포위되자 인종은 친히 창고를 열어 온갖 비단과 금은보화를 성 밖으로 던져 공격군을 흐트려뜨리려고 했으나 이미 척준경이 이에 대해 엄포를 놓은 바 있었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심 끝에 최 탁은 자신이 직접 내성을 나와 공격군과 혈전을 벌이다가 척준경의 칼에 목이 날라 갔고 이 틈을 이용해 오탁은 인종을 호위하여 황도를 빠져나갔다.
- 그러나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척준경에게 잡혀 나머지 장군들도 모두 뼈도 못추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시나무 떨듯이 있는 인종을 한번 매섭게 바라보더니 척준경은 황제를 가마에 태워 잿더미가 된 황궁터로 데리고 왔다. 거기에는 이미 이자겸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마치 새 황제 마냥 타지 않고 남은 용상에 앉아 있었다.
- 하룻 밤 사이의 전투로 황궁 뿐이 아닌 거대한 규모의 황성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을 정도로 실로 엄청난 화마가 황도 개경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화마 이후 고려의 역사는 달라져 있었다. 마치 고려 최후의 날을 목격하듯이 이자겸이 모든 반대파들을 제압하고 사실상의 황제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이자겸에 대항했던 모든 이들은 10족까지 멸문지화를 당했으며 이자겸은 황제를 자신의 처소로 옮겨 연금했다.
- 이제 완전히 고려가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이자겸은 다음 일을 생각했다. 우선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황성을 공격한 행위는 반란군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펼쳐야 했다. 이를 위해 하등 상관이 없던 황족 일부를 역적으로 몰아 죽여버렸다. 다른 황족의 일부는 이미 대화재 때 창고에 갇혀 불타 죽었기 때문이었다.
- 다음 문제는 바로 우군인 척준경이었다. 척준경은 이제 이자겸을 도운 인연으로 고려 최고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군대의 신망을 받고 있던 베테랑이었다. 척준경이 비록 혈육을 잃은 분노로 황제에게 칼을 들이 댔지만 그가 과연 자신을 도와 고려사직을 무너 뜨릴지에 대해서는 이자겸 자신은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만큼 아직도 이자겸의 대망인 '역성혁명'의 길까지는 넘어야 할 산들이 있었던 것이다.
- 이자겸은 지모가 출중한 아들 이지미를 비롯한 일족들과 긴밀히 상의한 끝에 일단 황제가 이자겸에게 양위한다는 교서를 쓰게 한 다음 이자겸이 그것을 받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는 구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재종형 이수는 그렇게 역성혁명을 서두르면 일단 척준경부터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경고를 넌지시 한다. 이자겸 자신도 사병과 승병들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척준경이 거느린 정예군들은 일찌기 북벌을 감행한 경험이 풍부한 일당백의 용맹한 군사들이었다. 물론 이자겸은 자신이 황제가 된 다음 척준경으로 하여금 북벌을 감행해 윤관의 한을 푼다는 '당근'을 제시할 수 있었지만 이것도 사실 위험부담이 컸다. 그야말로 '척심'이 이자겸의 대망에 가장 큰 변 수였던 것이다.
- 고심끝에 이자겸은 일단 역성혁명의 계획을 보류한 채 일단 민심을 추스리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성씨인 '이'(李)씨를 풀어 쓴 '십팔자'(十八子)가 황제가 된다는 이른바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의 풍문을 의도적으로 민간에 널리 퍼뜨려 장차 자신이 제위를 찬탈한다는 정당성을 자연스럽게 각인시키도록 하였다.
- 또 하나의 과제는 자신의 외손자이며 사위이기도 한 황제 인종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자겸은 황성까지 불지른 이상 이제 황제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황제가 죽느냐 자신이 죽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미 사가에 연금한 황제를 이자겸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전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으며 인종은 이러한 이자겸의 차가운 모습이 마치 저승사자처럼 몸서리쳐졌다.
- 이자겸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황제이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의 혈육이라는 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황제를 대할때마다 그의 심정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자신의 평생의 맹세를 이루기 위해 이러한 사적인 감정은 사치라고 생각한 지 오래였다. 제일 먼저 독이 든 떡을 인종에게 바쳐 독살하려 하였으나 다름 아닌 일찌기 황후가 된 자신의 넷째딸이 이를 발설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몇 번의 황제의 독살시도도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딸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다. 이자겸은 이 모든 것이 인지상정이라 탄식하고 잠시 황제를 죽이는 계획을 보류했다.
- 이미 조정 또한 이자겸에 의해 완전장악되어 있었지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신라계의 동향이었다. 신라계는 비록 이자겸이 황궁을 칠 때도 중립을 지켰으나 이자겸이 소집한 조정에 참여하는 것도 역시 미온적이었다. 이자겸은 이 참에 아예 옛날 척준경과 약속한 바 대로 신라계를 숙청하는 생각까지 고려했다. 게다가 자신은 그 뿌리가 백제계였기 때문에 신라계에 대한 전통적인 상극의 감정이 있었다. 또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아골타가 세운 제국의 뿌리가 신라의 마의 태자에 닿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은근히 북벌에 대한 야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 이윽고 이자겸은 자신이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다음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 첫 번째 조치는 일찌기 척준경과 약속한 대로 신라계의 씨를 말려버리고 척준경을 대장으로 삼아 다시 북벌을 재개해 위협이 될만한 무인 세력들을 모두 북쪽으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북벌이 성공하면 좋고 실패한다면 그 책임을 물어 척준경 또한 숙청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황제가 되어 새로운 제국의 기틀을 다진다는 청사진이었다.
- 이윽고 이자겸은 이러한 계획을 알리기 위해 척준경과 독대했다. 당대 고려의 두권력자들은 역사를 바꿀만한 대회동을 한 것이었다. 이자겸이 의외로 자신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제국을 세울 것이라는 말을 당차게 꺼내자 척준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군국사, 고려를 멸하자 하셨소이까?"
이자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어차피 고려는 이제 2백 년 종사를 맞아 그 기력이 쇠했소. 게다가 백성들 사이에는 '십팔자위왕'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소. 그건 다름 아닌 본인을 말하는 것이오.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 지금의 못난 황제는 비록 본인의 혈육이나 용상을 지킬 자격이 없소. 나의 아들들 또한 영민하니 장군은 우리를 도와 새로운 왕조의 일등공신이 되주길 바라오. 이것이 또한 비명에 간 장군의 혈육들의 한을 풀어주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 믿소."
"고려의 운이 다했다..." 척준경은 혼잣말로 뇌까리면서 이자겸을 무섭게 노려봤다.
"나의 혈육들이 황제가 계시는 황궁을 보위하다 역적들에게 죽은 것은 고려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오. 또한 이 몸도 고려를 위해 멀리 북쪽으로 가서 온 청춘을 바쳤거늘... 그런 나에게 이제와서 고려를 배반하라는 것이오? 지군국사...그런 망발을 하고도 나의 칼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오?"
어느덧 다혈질인 척준경의 손은 검집에 닿아있었다. 그러나 이자겸 또한 척준경을 대하는 솜씨가 일가견이 있었다.
"장군이 믿었던 그 고려가 장군에게 해 준것이 무엇이오? 고작해야 혈육을 죽인 뼈아픈 고통을 준것하며 또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장군이 그토록 어버이처럼 따르던 윤관 대원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준 것이 과연 누구의 조정이었다는 말이오? 내가 이 자리에서 피로써 맹세하건데 만약 장군이 나를 도와 새로운 왕조를 연다면 그 첫 과업으로 난 황제로서 장군에게 북벌군 20만을 주어 금나라를 도모하게 할 것이오. 그러면 장군은 대원수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오."
- 북벌! 그것은 척준경에 있어서도 오매불망 가슴속에 깊이 숨겨뒀던 필생의 꿈이었다. 사실 현재 신라계가 버티고 있는 조정에서는 북벌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는 이미 척준경 자신에 있어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태조 왕건의 유지인 북벌을 저버린 고려는 이미 죽은 고려였다. 한참 눈을 감고 생각을 하던 척준경은 이윽고 눈을 뜨며 나직이 말했다.
"좋소. 지군국사가 북벌의 유지를 받든다면 난 그대를 도울 것이오. 사실 이미 고려는 죽었소. 차라리 옛 고구려를 이을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조상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잠시 척준경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더욱 나직이 말했다.
"...신라계를 먼저 정리하고 왕조를 창업해야 할 것이오."
이자겸은 특유의 회심의 미소를 띄었다.
"물론이오. 그 작자들은 이제 하등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소. 또한 현재 금나라의 조상 또한 신라 왕자 마의태자의 후손들이니 신라계가 있는 이상 북벌은 불가능하오. 당연히 그들부터 먼저 처치하리다!"
"좋소. 그럼 이제 피로써 맹세합시다."
- 이자겸과 척준경. 단순히 사돈의 관계를 넘어 이제 이들은 운명을 함께 하는 혈맹이 된 것이었다. 이제 고려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 이자겸과 척준경은 이제 고려의 사직과 왕조를 멸망시키는데 일종의 의기투합(?)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은밀한 밀담은 천우신조인지 정국의 동향에 민감한 신라계의 한 첩자에 의해 재빠르게 신라계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그 신라계의 첩자는 다름아닌 미리 포섭해두었던 척준경의 집사였다.
- 급보를 들은 신라계는 망설일 틈이 없었다. 이제 조정을 쥐고 있는 이자겸과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척준경이 자신들에게 창검을 들이미는 것이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김부식의 계략에 따라 이들은 황제 인종과 접촉해 이, 척, 의 역모 사실을 고하기로 했다.
- 이때쯤 인종은 복구된 연경궁으로 옮겼고,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던 이자겸은 연경궁 남쪽에 거처를 마련하여 지내면서 북편 담을 뚫어 황궁과 통하게 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만일에 있을 정적들의 준동에 대비해 군기고에 두었던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자신의 저택에 옮기고 삼엄한 경비를 했다. 이러한 삼엄한 경비를 뚫고 신라계가 황제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비상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 고민 끝에 신라계는 다시 한번 척준경의 집사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척준경에게는 지인을 만나러 황궁으로 들어가는 허가를 받은 뒤에 밀서를 품에 넣고 야밤에 몰래 인종의 침소에 그 밀서를 투입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 신라계의 밀서를 읽은 인종은 경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외조부가 외손자인 자신을 죽이고 고려 황조를 전복시키려 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젊은 황제는 그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이러한 신라계의 투서를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이자겸이 갑주를 갖춘 채 허락도 없이 갑자기 문을 벌컥 열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폐하, 그 서찰이 무엇이오이까?"
불손한 말투였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옆에서 황제를 보좌하던 충직한 내시 최사전은 사색이 되었으나 마침 이자겸은 그러한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인종은 이자겸의 눈길이 최사전에게 향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외조부님, 이건 하루속히 황궁을 복원하라는 여러 신하들의 주청서요...직접 한번 보시겠소?"
이자겸은 다시 한번 황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호탕하게 한번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 올린 상소문인데 신하인 내가 볼 이유가 있겠소? 황궁을 옛 규모로 복원하려면 시일이 꽤 걸릴 거요. 그것보다는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먼저 걱정하는 것이 조정의 본분이거늘, 쯧... 어린 외손주가 잘 있는지 내 직접 보러 온 것이니 폐하께서는 신경쓰지 마시오. 그럼..."
- 이건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하는 말투이지 도저히 군신간의 대화로는 볼수가 없었다. 이자겸이 나간 것을 확인한 황제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황제 자신이 한사코 서찰을 보여주기를 거부했으면 이자겸은 끝까지 보려고 했을 것이었다. 그러면 이자겸은 반드시 자신을 이전에 처소에 감금되어 있었을 때처럼 수하를 시켜 구타하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패륜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미 사실상의 고려의 황제는 이자겸이었지 인종 자신이 아니었다.
- 그리고 문듯 인종은 이자겸의 눈빛을 기억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은 도저히 손자를 바라보는 그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장차 손자의 목숨까지 빼앗을 각오가 되어 있는 권력자의 화신 그것이었다. 그러자 인종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부들부들 떠는 황제를 보고 이미 서찰을 황제에게 바치기 전에 읽어봤던 최사전은 신라계의 말이 옳을 것이라고 진언했다.
- 최사전은 일찌기 이자겸이 황제를 감시하기 위해 심어놓은 심복이었으나 황제를 모시면서 마음이 변해 이자겸도 모르게 이미 충성의 대상을 바꾼지 오래였다. 황제 또한 자신의 측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최사전에게 지극한 총애와 정성을 쏟았다. 이자겸이 들어왔을 때 최사전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던 것도 사실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마음이 여리나 성정이 착했던 황제는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 무한한 비애를 느꼈으나 이제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했다. 그때 주먹을 만지작거리던 황제의 손아귀에 무엇인가가 잡혔다. 그것은 아버지인 예종이 붕어할 때 꼭 위급한 상황때만 보라던 그 비단주머니었다. 수십년 동안 청년 인종은 선제의 명을 지키기 위해 바지춤 주머니에 고이 그리고 가깝게 지니고 왔던 것이다.
- 인종은 이제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떨리는 손으로 수십년 동안 밀봉되었던 비단 주머니를 풀어보았다. 그 안에는 누렇게 변한 한 장의 상소가 있었다.
"아..."
- 인종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윤관이 임종 직전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바친 충정의 상소였던 것이다. 그 내용은 장차 이자겸의 발호를 우려하면서 이자겸의 상이 바로 반골이므로 장차 고려의 큰 화근이 그로 인해 비롯되었을 때 반드시 이 서찰을 척준경에게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 씌여져 있었다.
- 황제의 눈물이 떨어졌다. 비로소 이제서야 아버지 예종이 위급할 때 풀어보라고 한 뜻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게다가 미래를 예측한 윤관의 예지에도 마음속으로 깊은 경의를 표했다. 최사전은 실제로 이 서찰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 미심쩍었으나 별다른 방도가 없던 현실에서 이제 이것을 척준경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는 의외로 쉬었으니, 왜냐하면 황제의 답신을 받아오라는 신라계의 명으로 척준경의 집사가 한번 더 황궁을 다녀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궁궐에 깔린 이자겸의 눈들이 척준경의 집사가 드나드는 것을 의심했고 그의 뒤를 밟았으나 이미 황제가 직접 쓴 서찰과 윤관의 그것은 이미 척준경의 손아귀에 들어간 뒤였다. 물론 신라계가 전후 사정을 파악한 뒤였고 그들은 윤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야말로 묘책이라며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 황궁에서 도착한 서찰을 펼쳐본 척준경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맨 처음에는 서찰을 의심했으나 윤관의 필적이 맞았다. 자신의 양아버지였던 윤관의 충정어린 글을 읽은 척준경은 그 순간 방망이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하게 아파 옴을 느꼈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 그러나 동시에 이자겸과 약속한 북벌의 대의가 생각났다. 여기서 척준경은 갈등에 빠진다. 사실 이제와서 사돈이며 동지인 이자겸을 배신한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밖에서 척준경의 집사를 의심해 뒤를 밟은 이자겸의 수하가 잡혀 들어왔다. 척준경이 그에게 연유를 묻자 척준경의 집사는 실제보다 과장해 이자겸의 수하가 척준경까지 욕하며 자신이 황궁에 드나드는 것을 의심했다고 고했다. 척준경은 이에 크게 노하며 이자겸의 수하를 반죽음으로 매를 친 다음에 쫒아냈다. 그리고 불쾌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 척준경은 그날 꿈자리에서 윤관을 만났다. 그 옛날 만주대륙을 정벌하던 윤관 장군의 풍모는 전성기의 그대로였다.
"장군..." 어느덧 척준경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려내렸다.
"척 낭장 잘있었는가...?" 윤관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장군...이게 얼마만이옵니까? 이제서야 장군을 뵈옵다니요?"
"그래...난 저세상에서 주군들을 모시며 잘 지낸다네...그리고 고려의 앞날을 위해 날마다 부처님께 빌고 있지..."
"오늘...장군의 서찰을 뵈었나이다. 과연 이자겸은 어떠한 인물이나이까...?"
"그는 야심이 큰 사람일쎄... 장차 고려를 멸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하는...그런데 그대도 그런 사람과 가까이하다니 그 연유가 무엇인가?"
어느덧 윤관의 목소리는 노기에 차 있었다.
"그것은...그것은...지군국사가 북벌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나이다. 장군님의 뒤를 이어 제가 그 유지와 대의를 이어보려고..."
"어리석은 소리!!!"
윤관의 꾸짖음은 서릿발같았다. 척준경은 눈을 질끔 감았다.
"이자겸의 약속에는 진실성이 없네. 난 일찌기 살아 있었을때부터 그를 유심히 봐왔지만 그는 결코 신하의 위치에 만족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네...그래서 장차 그가 변란을 일으킬 때를 대비해 이 서찰을 그대에게 전달한 것이야...거기에는 한치 틀림이 없네...그리고 이미 고려는 시운을 놓쳤네...앞으로 우리가 또다시 대륙을 도모해 선조들의 고토를 회복하는 때는 이제 다시 천운을 기다려야 할 뿐...다만 우리 고려는 지금 그때를 위해 대비해야 할 뿐인 것이야!!! 대사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네...모든 것이 순리를 따라야 하는 것인데도 이자겸 그 자는 자네에게 무책임한 약속을 한 것이야. 그리고 그 약속을 얼마나 지킬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 척준경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렸다. 그제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어 윤관의 말이 이어졌다...
"척 낭장, 헛된 꿈은 버리게... 북벌의 대망은 장차 우리 후손의 것이네... 이제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야...지금은 오직 고려의 사직을 굳건이 지켜야 하는 것이 자네의 도리이네... 이제 고려의 사직은 자네 양 어께에 달렸네...다시 우리가 같이 그 옛날 북토의 벌판을 달리며 고려를 위해 싸웠던 그러한 심정으로 말이야...!"
"장군...하오면 아둔한 소장은 이제 어찌해야 하나이까?"
"그건... 자네가 이제 스스로 택해야 할 일이네..."
"장군, 장군!!!"
- 알듯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희미해지는 윤관의 모습을 뒤로 하고 척준경은 잠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바로 윤관의 계시였던 것이었다. 거기에는 자신이 이자겸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진실성이 있었다.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 이자겸에게 사로잡혀 언제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황제에게 달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한시바삐 황제를 보위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다음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역시 척준경다운 결단이었다.
- 한편 이자겸은 자신의 수하가 척준경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왔다는 소식에 머리칼이 쭈뻣 서도록 분노를 느꼈으나 자신의 거사에 동참한 척준경이기 때문에 분기를 누르고 오히려 아들 이지미를 보내 화해를 청했으나 이미 척준경이 수하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신도 급히 군사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이지미가 아버지의 명을 받고 척준경의 집으로 향했을 무렵 이미 척준경은 병장기도 없는 차림으로 수하 몇 명을 데리고 이미 황궁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러나 척준경은 집사의 의견으로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황궁을 책임지고 있던 이자겸의 심복 유원식에게 황제를 암살하러 왔다고 귀뜸했고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유원식은 척준경을 직접 황제에게 데리고 갔다.
- 황제와 독대하게 된 척준경은 그제서야 인종의 발 아래 엎드려 눈물로써 그간의 잘못을 빌었다. 척준경의 눈물...그것은 곧 이자겸 파멸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 이자겸의 수하 유원식을 속이고 황제를 만난 척준경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동안 자신의 죄를 빌었다. 그러나 급박한 황제는 어차피 척준경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에 그를 도울 사람은 척준경밖에 없었던 것이다.
- 한편 유원식은 천복전으로 들어간 척준경이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수하들을 이끌고 칼을 빼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척준경이 득의 양양한 표정으로 유원식을 향해 말했다.
"황제는 내가 직접 끌고 가 송악산에서 처치할 것이니 장군은 지군 국사에게 그리 전해 주시오."
유원식이 보니 황제는 보쌈당한채 군졸들에게 실려가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척준경 일행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 척준경 일행이 송악산 쪽으로 사라지자마자 이자겸과 이지미가 이끄는 승병들과 군사들이 황궁으로 들이닥쳤다. 유원식은 헐레벌떡 앞으로 가 머리를 조아렸다.
"지군국사, 어인 행차이시나이까?"
순간 이자겸은 뭔가 꺼림직한 느낌을 받았다. 눈을 부라리며 유원식에게 물었다.
"황제는...그리고 척장군을 보았느냐?"
이자겸의 날카로운 모습에 유원식은 순간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으나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척장군이 나타나...직접 황제를 처치하겠다고 하시어 황제를 보쌈하여 뒷산...송악산으로 갔습니다만..."
순간 이자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음...황제를 네 눈 앞에서 그냥 내줬다...언제냐...?"
"바로 조금 전입니다만...시생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자겸은 보검을 빼들어 가차없이 유원식의 목을 베었다. 유원식의 목은 피를 흩뿌리며 허망하게 땅바닥을 뒹굴며 멀어져갔다.
"이런 머저리에게 황제를 감시하게 하다니...이것은 천추의 한이 되겠구나...멀리 못갔다. 지미는 어서 군사들을 이끌고 반역도당의 무리의 뒤를 쫓아라. 아비도 뒤따라가마!"
"예, 아버님!"
- 이자겸은 황궁에서 군사들을 더 모아 송악산을 완전히 포위해 불바다를 만들어서라도 황제와 척준경을 한꺼번에 없앨 계산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척준경은 장차 이자겸의 장래에 큰 걸림돌이 될 인물이었다. 오히려 이자겸은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 척준경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단 황제를 군기감에 모셔두고 군대를 규합하여 이자겸을 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곳곳에 이자겸의 사병들이 진을 치고 척준경 일행을 저지하려고 했다. 곧이어 이지미가 이끄는 승병들이 빠른 걸음으로 뒤를 바짝 쫓자 다시금 최사전이 꾀를 내었다. 즉, 가짜 보쌈을 만들어 일행을 두 갈래로 나누어 이지미를 속이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가짜 보쌈의 주인공은 환관 조의가 담당했다. 인종은 충직한 환관의 선택에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 척준경과 황제 일행이 먼저 길을 재촉하고 뒤처진 조의 등의 몇몇 군사들은 일부러 이지미의 눈에 포착되는데 성공했다. 이지미를 유인한 척준경의 부하 순검도령 정유황은 이윽고 송악산 안에 있는 낭떠러지에 도착했다. 그러자 이지미는 통쾌한 웃음을 흘리며 비웃었다.
"그럼 그렇지. 네놈들이 가봤자 어떻게 우리 인주 가문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가 있겠느냐? 그 보쌈만 내려놓으면 너희들의 버러지 같은 목숨만은 살려주마."
- 여기서부터 정유황의 연기가 필요했다. 정유황은 하늘을 우러러 눈물지으며 보쌈 안에 있는 가짜 황제에게 절을 했다.
"폐하, 이로써 고려의 사직은 운을 다한 것 같나이다. 이제 우리들 모두가 저 반역도당들에게 죽을 처지이니 차라리 이 낭떠러지에서 장렬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게 되었나이다. 용서하소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짜 보쌈은 사정없이 낭떠러지 밑으로 던져졌다. 그러나 비명 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어 정유황이 선두로 뒤를 따르고 이윽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벼랑에 떨어져 최후를 맞았다. 이는 최대한 진짜 황제 일행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런 저런...!!!"
- 이지미는 이 놀라운 광경을 그저 입을 떡 벌리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부친에게 달려와 자초지종을 고했다. 그러나 척준경을 못봤다는 사실을 안 이자겸은 탄식하며 아들을 나무랬다.
"바보 같은 놈! 척준경이 황제를 놔두고 도망쳤을 리가 있느냐? 그건 놈들이 너를 속이기 위해 고육지책을 쓴 것이다. 이미 시간이 너무 경과 했으나 우리도 빨리 척준경의 행방을 확인해 그자를 제거해야만 한다. 거기에 황제가 있을 것이야!"
- 한편 군기감에 도착하자마자 척준경은 황제를 안전한 곳에 겹겹이 호위를 한채 모시고 자신의 장군들을 급히 소집했다. 그러나 이미 군기감에도 이자겸의 사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오고 있었다. 실로 급박하기 짝이 없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척준경이 누구였던가. 혼자 그 옛날 북방에서 여진족 2만을 상대로 홀로 고군분투해 물리친 역전의 용사가 아니던가! 비록 이제 많이 늙었지만 그 기개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제 사방에 원군을 청했으니 우리가 여기서 황제를 위해 사력을 다해 막으면 승리는 곧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나의 자랑스런 용사들이여...우리는 죽을 각오로 고려의 사직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병장기를 휘두르자, 알겠느냐?"
"장군과 함께 끝까지 같이 하겠나이다!"
- 이윽고 이자겸의 사병 1만이 노도와 같이 척준경의 군사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이에 비해 척준경의 군사는 수백에 불과했다. 그러나 척준경 자신이 직접 말을 몰아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추풍낙엽처럼 적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이에 고무된 그의 군사들은 뒤를 따랐다.
- 척준경의 무예는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그의 신기에 가까운 무예에 적들이 오히려 넋을 잃고 바라볼 지경이었다. 이자겸의 장군 강호는 하는 수 없이 군사들을 물리고 대신 무예의 고수들인 승병들을 투입했다. 그제서야 척준경의 군사들의 기세도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그때 이자겸의 군사들이 다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자겸과 이지미 부자의 정예군이 도착한 것이었다.
"이런, 이런 척 장군...!"
이자겸은 얼굴 가득히 냉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눈감고 나의 대업에 동참했더라면 그대는 북벌의 대망을 이루고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을...스스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새삼스럽게 일의 전후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이제 황제와 함께 그대도 죽어줘야겠소."
"닥쳐라, 이 천하의 역적 같으니라고...! 내가 한때 너의 감언이설에 속아 고려사직에 씻을 수 없는 대죄를 지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이제 황제까지 죽이고 이 사직을 멸하려는 너의 사악한 책동에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내가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이자겸을 따르는 그대들이여...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창검을 인주 가문에게 돌려 너희들의 우매함을 씻도록 하라!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하하하...대대로 우리 가문의 음덕을 입은 이들에게 나를 배신하라고? 애들아, 안되겠다, 저 한 줌도 안되는 무리들을 쓸어버리자! 오늘이 바로 고려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 이자겸의 돌격 명령과 동시에 그의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전진했다. 말이 사병이지 이자겸이 거느린 군사들은 정규군보다도 오히려 더 정예였다. 심지어 성을 공격할 때 쓰는 공성기까지 갖추고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우선 소낙비같은 화살을 퍼부어 척준경 쪽의 군사들의 기를 꺾으려고 했다. 실제로 이 화살로 상당한 척준경의 군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간신히 피한 상당수는 또 이자겸의 공성기에서 날아온 돌무더기에 박살이 나기도 하였다.
- 사람을 상대로 한다면 일기당천의 척준경이었으나 무지막지하게 날아오는 각종 병기로 인해 일단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기감의 야트막한 담을 방패로 척준경은 모든 군사들을 그 뒤로 물렸다. 이를 본 이자겸의 수하 고진수는 이자겸에게 진언했다.
"지군국사, 이제 저들이 군기감에 모두 쳐넣었으니 화공을 해 깨끗이 청소해버립시다! 어떻습니까?"
"음...저번에 황궁을 불태울 때 군기감도 타버렸다면 이런 수고를 덜었을 것이 아닌가...하하하...장군의 뜻대로 하시오."
- 장군 고진수는 수하들에게 불화살을 재라고 명한 다음 막 신호를 내리려고 하였다. 그 순간, 군기감의 정문이 열리며 황제 인종이 가마에 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자겸의 군사들조차 황제임을 알아채고 잠시 행동을 멈췄다. 척준경의 호위를 받은 황제는 준엄한 목소리로 이자겸의 사병들을 꾸짖었다.
"너희들은 모두 고려와 짐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써 어찌 이런 심한 난신적자의 길을 가려고 하느뇨? 이제 이자겸이 천하를 도둑질하려는 것은 모두 다 드러난 것이고 이제 심지어 짐의 목숨을 노리고 있거늘...이자겸은 사적으로 짐의 외조부이며 장인이나 이제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노라...오죽하면 척 장군이 짐의 편으로 돌아섰겠는가...? 이제 진정한 대의가 어디 있는가를 너희들도 속히 깨닫기 바라노라... 후손들에게 역적의 오명을 주지 말라는 말이노라!"
이자겸은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궁지에 몰린 쥐 주제에 어디서 장소도 못가리고 망언을 씨부리느냐? 이제 고려는 썩었고 망할 운명이기 때문에 하늘이 이 몸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봐라, 망국의 군주는 신경 쓸 것 없이 모조리 쓸어버려라!"
- 그러나 이자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는 품 안에서 누런 서찰을 꺼내들었다. 일찌기 척준경에게 주었던 윤관의 죽기 전 서찰이었다. 좌중은 다시 숨을 죽였다.
"이 서찰은 일찌기 북토를 평정한 대원수 윤관 장군이 죽기 직전 짐에게 남긴 서찰이다. 여기에는 이미 장군이 그대들이 모시는 원흉 이자겸의 역모를 미리 예견하고 있다."
그러면서 황제는 낭랑한 목소리로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자겸은 점점 사색이 되더니 수하들에게 빨리 불화살을 쏘라고 열화같이 날뛰었다. 그러나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아무도 선뜻 황제를 향해 감히 불궤를 도모하지는 못했다. 마치 이제 진정한 대의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이.
- 황제가 직접 읽은 윤관의 서찰의 파급효과는 이자겸의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파국이었다. 자신들이 분명 역적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자겸의 수하들은 혹은 병장기를 놓고 엎드리거나 혹은 역시 무기를 내리고 줄행랑을 치거나, 혹은 분노에 차 같은 군사들을 향해 창검을 돌리는 등 자기네들끼리 분란이 일어났다. 이들을 지휘하던 강호와 고진수 역시 일찌감치 그 자리를 벗어나 도망치고 이자겸은 가장 충성스러운 승병들의 호위를 받아 가까스로 도망길에 올랐다. 그리고 척준경의 군사들은 그 기세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항거하는 이들을 향해 진압에 나섰다.
- 이자겸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거느리는 군사가 윤관의 서찰로 인해 오합지졸이 되어 패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역적 이자겸은 거기 서서 나의 칼을 받으라!"
- 이자겸이 쳐다보니 김부식의 형 김부일이 거느리는 신라계의 사병들과 척준경을 따르는 군부의 수장들이 거느린 군사들이 연합하여 자신의 승병들을 마구 짓밟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찌기 황제를 호종했던 최사전이 신라계들에게 선을 너어 적절할 때에 이자겸을 공격하도록 지시했고 이들은 이제서야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이것이...이것이 정녕 꿈이 아니란 말인가...?"
- 이자겸은 그렇게 절규하며 아들 이지미 등의 호위를 받으며 황도를 빠져나가기에 바빴다. 그렇게 그의 천하는 이제 막 막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때가 서기 1126년 5월 어느 동녘이 밝아오던 날이었다.
-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는 듯이 이자겸의 2만 사병들은 혼비백산해 패주의 길에 올랐고 승기를 잡은 척준경의 군사들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뒤처지거나 항복하는 이들을 제압하기에 바빴다. 이자겸은 내친 김에 고려의 사직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병력을 황제와 척준경이 있는 군기감으로 집중시켰는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 것이었다.
- 이자겸은 아들 이지미와 함께 일단 황도를 빠져나가 후일을 기약하려고 했다. 마치 그 옛날 숙종의 서슬퍼런 손아귀를 벗어나 10년간 갖은 죽을 고생을 다 했던 때가 문득 생각이 났다. 이제 60이 넘은 이자겸이었지만 고려의 사직과 종사에 대한 불굴의 원한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는 칠전팔기의 각오로 다시 한번 장차 재기를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 반드시 권토중래하여 이 망할 놈의 고려사직을 절단 내고야 말리라...지금은 비록 일시적으로 천운이 안 따라 이 꼴이 되지만...내가 안되면 내 아들 대에서라도 반드시...)
- 그러나 이번에는 하늘은 이자겸의 편이 아니었다. 신라계의 선두주자로 나선 김부식은 이미 최사전과 의논하여 승기를 잡을 시 이자겸의 일당을 황도를 못 빠져나가게 철통같은 계획을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척준경을 따르는 장수들이 황도의 4 대문에 배치되어 이자겸 일당들을 속속 제거하고 있었다.
- 광화문(廣華門)에 도달한 이자겸의 무리들은 그러나 아침 햇살에 창검을 번쩍이며 저승사자처럼 기다리고 있던 척준경의 장군들을 보자 금새 사색이 되었다.
"아 광화문...그 옛날 여기서 우리 일족의 아버님이신 이자의 영감이 여기서 최후를 맞았었지...나도 이제 같은 운명이던가...?"
"지군국사, 반드시 빠져나가시어 우리가 원하던 세상을 이루어 주십시오. 영감이 이제 우리의 희망의 모든 것입니다."
그렇게 외마디를 외치며 남은 장수들과 병사들이 돌진하며 길을 열려고 하였으나 이들은 그 즉시 하나하나 수비군들에 의해 어육이 되어 버렸다. 이자겸은 눈을 불끈 감고 다시 왔던 길로 도망쳐야 했다.
- 군기감 싸움에서의 또 한번의 반전으로 이자겸의 대군은 그야말로 궤멸되어 대부분의 군사들은 항복하거나 뿔뿔이 도망쳤고, 이자겸에게 가장 충성을 바쳤던 승병들은 사방으로 나뉘어 항거했으나 그들 역시 저하된 사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다. 이제 이자겸이 도망치는 길에는 오직 아들 이지미만이 그를 호종하고 있었다.
"아버님, 이제 어찌해야 하옵니까?"
"....."
- 이자겸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그러나 이자겸의 속내와는 반대로 청명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부터는 잠시전의 아비규환을 비웃듯이 새들의 지저귐마저 들려오고 있었다.
"하늘이 이 이자겸을 버린 것인가? 아니면 이 이자겸이 하늘을 버린 것인가...이 모든 것이...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순간이 모두 꿈만 같구나..."
이자겸은 그렇게 혼자 뇌까리며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권력...오작 권력만을 향해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며 달려온 그였다. 그러나 한 순간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도 최후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자겸은 나직이 아들에게 말했다.
"지미야, 우리 사저로 돌아가자꾸나."
"예?"
이지미는 당연히 놀랐으나 이자겸이 입을 굳게 다물자 잠시 후 발길을 이자겸의 사저로 돌렸다.
- 이자겸의 사저는 여전히 고래 등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패퇴해오는 잔당들, 특히 충성스러운 승병들이 이 곳에 속속 집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자겸의 모습을 보자 환호성을 질렀다. 이자겸은 무언의 미소로 이에 답한 다음 집으로 들어갔다. 이자겸의 잔당들은 이에 철통 방비에 들어갔다. 황궁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그의 저택이었기 때문에 흡사 요새와도 같았다. 만약 적들이 이곳을 치려면 또 한번 한바탕 전투를 각오해야만 했다.
- 그러나 척준경과 신라계가 이자겸의 이러한 행동을 예측 못했을 리가 없었다. 척준경은 신라계와 만난 다음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이자겸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얼마 남지 않은 승병들이 최후결전의 태세로 방비하고 있었다.
- 당장 불살라 버리자는 신라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척준경은 이를 한사코 만류했다. 그래도 한때 뜻을 같이 했던 동지였던 이자겸에게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고 싶었다. 척준경의 엄명에 따라 군사들은 어떠한 공격도 삼가 한 채 이자겸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기로 했다.
- 그렇게 3일이 지난 후,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던 이자겸이 마침내 소복을 입고 저택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하들이 극구 말렸으나 이미 이자겸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미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그나마 남은 부하들의 선처를 부탁하는 차원에서 척준경에게 입을 열었다. 이자겸의 얼굴은 평온과 온화, 그 자체였다.
"척 장군, 이제 대세는 정해진 듯 싶소. 이제와서 구차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 다만 내 수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소. 그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보여 주시오."
척준경은 무표정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소. 당신 부하들의 문제는 내 황상께 말해 보리다."
- 이자겸은 부하들의 통곡을 뒤로 하고 황제가 있는 황궁으로 쇠사슬에 묶이어 끌려왔다. 자신의 외조부이며 장인이었던 최고의 권력자의 몰골을 쳐다보는 황제의 심경 또한 복잡했다. 그러나 그 곤란을 겪는 동안 인종도 많이 변했다. 신라계는 당장 이자겸의 10족까지 처형하라고 난리 부르스를 쳤다. 그러나 척준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황제의 조칙이 떨어졌다.
"이자겸과 그 일족들의 죄는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하나 그래도 한때 짐과는 혈족의 인연을 맺는 자이니 참형만은 면해주고 모두 각기 귀양에 처하노라."
이자겸은 이 관대한 처분에 놀란 듯이 황제의 용안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신하들은 불가하다고 벌떼같이 일어났으나 황제는 단 한마디로 이를 일축했다.
"역적 이자겸에게 이러한 자비를 베품은 오직 황제만이 할 수가 있는 일이오. 황제의 자비이니 모두들 도전하지 말기를 바라오."
그러면서 황제는 이자겸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었다. 이자겸 또한 알듯모를 듯한 엷은 미소로 이에 답했다. 이것이 그들 생전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직도 이자겸에게는 사무치는 한이 있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이제 황제가 자신으로 인해 더욱 강해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신의 핏 줄이라는 사실이 새삼 뼈져리게 느껴왔다.
- 이자겸의 일족들과 수하들은 놀랍도록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나 자손 대대로 역적이라는 오명을 쓰며 모두 뿔뿔히 고려 각지로 나뉘어 귀양길에 올랐다. 이자겸이 사라진 조정은 이제 척준경과 신라계의 독무대였다. 다음으로 이들이 취한 조치는 당장 인종의 황후였던 이자겸의 두딸들을 내쫓는 것이었다. 이들을 대신해 들어온 새 황후는 바로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맹활약했던 공예 태후 임씨 바로 그녀였다. 그러나 이때 그녀는 '공예 황후'로 갓 황궁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꽃다운 18세였다.
- 그런 다음 곧바로 척준경계와 신라계의 정권 암투가 벌어졌다. 이자겸이라는 커다란 그림자가 사라지자 특히 신라계는 척준경에 대한 무자비한 인신공격을 거침없이 자행했다. 그들은 척준경이 이자겸과 더불어 청산대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논리 때문에 척준경을 따르던 북벌파와 군 장성들에게는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수세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척준경은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북벌파의 대표 정지상을 불러 말했다.
"저 썩어빠진 신라계 놈들은 오십 보 백보 이면서 나만을 성토하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한때의 어리석음으로 이자겸과 손을 잡은 사실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난 모든 책임을 지고 너희들의 부담을 없애주려 한다. 이 또한 어찌 자업자득이 아닐쏘냐...!"
정지상 등은 척준경의 자기희생을 극구 말렸으나 오히려 척준경은 이들을 크게 나무라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정지상, 그대는 그 총명한 머리로 어찌 아둔한 이 몸의 뜻을 그토록 모르겠느냐! 북벌은 우리 고려의 국시이며 일찌기 태조 폐하께서 이 제국을 세우신 뜻인 것을 정녕 알지 못한단 말인가? 내 너희들 개인의 앞으로의 전정만을 생각해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바로 너희들이 우리 고려제국의 앞날이며 희망이기 때문이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부디 내 뜻을 더 이상 더럽히지 말기 바란다!"
- 이윽고 서기 1127년 3월 정지상은 눈물을 머금으며 척준경을 탄핵하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다. 즉, 척준경도 이자겸의 난에 일정한 연관이 있으니 중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북벌파가 적으로 겉으로는 척준경에게 돌아서자 신라계는 옳다 구나 하고 척준경 숙청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미 척준경은 전날 몰래 황제와 독대해 자신의 심경을 밝혔기 때문에 인종 황제 또한 이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척준경은 결국 유배길에 올라 얼마 지나지 않아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
- 척준경이 죽었다는 소식은 멀리 영광에 유배되어있던 이자겸의 귀에도 들어왔다. 권력의 무상함을 다시 느낀 이자겸은 파도 소리를 벗 삼아 눈을 감고 사색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 파란만장한 자신의 생애가 뇌리속에서 하나둘씩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권력의 온갖 명암을 맛보며 육순이 넘도록 살아있는 자신은 억세게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숙종의 잔인한 숙청에 목숨을 잃은 무고한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 생각도 났다. 그리고 절치부심 권력을 향해 질주하던 자신의 야망이 펼쳐졌다. 그러나 자신의 혈육인 황제를 기어코 죽이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마주치자 갖가지 회한에 잠겼다. 이자겸은 문득 그 순간 번쩍 눈을 떴다.
- 다음 날, 이자겸의 모습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귀양처에서 발견된 것은 그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주검으로 발견된 것 뿐, 그야말로 이자겸은 증발해버리고 말 았던 것이다. 그가 워낙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에 갖가지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혹자는 이자겸이 신라계나 원한 관계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고, 혹자는 이자겸이 탈출을 감행해 외국으로 도피했다고도 말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이자겸이 몰래 지키던 병사들을 죽이고 자살했다고도 했다. 어쨌든 그날 이후 이자겸의 모습은 생사를 알 수가 없도록 증발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집 밥상에 평소 그가 즐겨 먹던 생선 옆에 글귀가 적혀 있었다.
"굴비(屈非-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 한편 한 시대를 풍미한 이자겸과 척준경의 퇴장으로 고려의 역사는 이제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고 있었다. 척준경의 희생으로 고려는 이제 새로운 '북벌영웅'을 마치 메시아처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 영웅은 다시금 신라계와 피 말리는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오래지 않아 조정에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