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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무더위와 장마가 시작되려는 것 같다. 코로나마스크로 인해 여름 날씨를 감당하기가 곤혹스럽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먼저 걸었던 남한산성 탐방길 5코스에 이어 3코스, 남한산성행궁, 2코스와 4코스 일부를 걸어 남한산성 탐방둘레길을 모두 걸었다. 먼저 걸을 때에는 남한산성이 초행길이라 길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는데 이번에는 일찍 서두르기도 했지만 먼저 걸은 길을 반면교사 삼아 걷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이번에는 지하철8호선 산성역에서 내려 9번을 이용했는데 남한산성역 도로를 따라 한참을 돌아 산성 길 3.2km를 오른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산성역에서 9-1번 버스가 바로 남한산성으로 올라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지만 평일에는 어쩔 수 없다.
남한산성 탐방 둘레길 3코스는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에서 길 건너 산성보건진료소 가는 길로 진입해 ‘현절사’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 숲길을 따라 오른다. ‘봉암초암문’에서 암문을 통과해 벌봉(봉암)을 돌아 초암문으로 다시 내려와 동장대터를 지나 성벽을 따라 내려와야 하는데 판단 착오로 초암문을 통과하지 않고 벌봉으로 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오니 5코스 때 지났던 ‘장경사산지옹성’이 나온다. 그렇다고 되돌아 올라갈 수도 없고 다음을 기약하고 ‘장경사’에 들렀다가 ‘망월사’로 향한다. 장경사나 망월사는 유서 깊은 호국사찰이라고 하지만 현재는 그렇고 그런 보통의 사찰로 보인다. 망월사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와 좌익문(동문)을 지나 도로를 거슬러 올라 ‘지수당’을 지난다. 세계유산센터로 2시간 만에 원점 회귀했다.
연무관 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산성로터리에서 ‘남한산성행궁’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만해기념관’을 지난다. 남한산성행궁은 궁궐을 오밀조밀하게 농축해 놓은 것 같다. 행궁을 둘러보는데 30여분이면 족하다. 남한산성 행궁을 나와 둘레길 2코스로 오른다. 탐방 2코스는 행궁의 담을 끼고 영녕전과 정전을 지나 수어장대를 지나 우익문(서문)으로 향했다. 서문에서 ‘국청사’을 지나 식당(카페)이 밀집한 도로를 따라 내려와 산성로터리에 닿는다. 산성로터리에서 천주교성지와 성당을 잠깐 둘러보고 중앙주차장 앞에서 탐방길 4코스 ‘개원사’로 향했다. 1km정도 언덕길을 올라 막상 개원사에 닿았지만 개원사 사찰 입구 문이 닫혀있다.
언제부턴가 산에 있는 사찰들이 외부방문객을 반겨하지 않는다. 불전은 내놓지 않고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 일부등산객 때문에 특히 반기지 않는다. 두 번 만에 남한산성 둘레길 모두를 걷다보니 엄벙덩벙 걷게 된 면이 있는데, 가을에 다시 차근차근 걸어볼까 한다. 남한산성 탐방 둘레길은 코스가 중복되기도 하고 모두 연결되어 있지 도 않다. 남한산성 동문에서 시작해서 성벽을 따라 걸어 동문 건너편으로 내려오는 3시간20분이 소요되는 5코스와 남한산성행궁 그리고 몇몇 유적지를 선별해서 탐방하면 될 것 같다. 낙엽이 물드는 가을에는 숲이 울창해 기대가 많이 된다.
지하철8호선 산성역에서 내려 9번을 이용했는데 남한산성역 도로를 따라 한참을 돌아 산성 길 3.2km를 오른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산성역에서 9-1번 버스가 바로 남한산성으로 올라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지만 평일에는 어쩔 수 없다.
[남한산성(南漢山城) 등산코스]
①남한산성 금암산코스
*교통편: 지하철2호선, 8호선 잠실역8번 출구에서 하남시청 행 (30-5번)버스,
지하철5호선 둔촌동역4번 출구에서 하남시청 방면80번, 1번 버스이용, 광암정수장 앞 하차
*광암정수장앞↝금암산↝서문↝수어장대↝지하철8호선 산성역 [약5시간]
*산행코스: 광암정수장앞->금암산->표말삼거리->수어장대->남문 입구도로->산성역
②남한산성 마천역코스
*교통편: 지하철5호선 마천역
*지하철5호선 마천역↝표말삼거리↝수어장대↝남한천약수터↝지하철5호선 마천역 [약4시간]
*산행코스: 마천역->만남의 장소->표말삼거리->수어장대->안부삼거리->만남의 광장->마천역
③남한산성 벌봉코스
*교통편: 지하철2호선, 8호선 잠실역8번 출구에서 하남시청 행 (30-5번)버스 이용, 교산동 서부농협하차
*선법사↝벌봉↝북문↝고골종점 [약5시간]
*산행코스: 교산동 마을회관->고개삼거리->송전탑->벌봉->북문->고골종점
*북문에서 계속 서쪽 성곽을 따라 가면 암문, 서문, 수어장대, 남문으로 이어진다. 남문을 통과하여 왼쪽 계곡 길을 따라 내려가면 남한산성 식당(카페)가와 남한산성입구역으로 이어진다.
④남한산성 남한산성입구역코스
*교통편: 지하철8호선 남한산성입구역 하차
*지하철8호선 남한산성입구역↝능선삼거리↝남문↝수어장대↝남한산성입구역 [약4시간30분]
*산행코스: 남한산성입구역->사회복지회관->지능선 사거리->남문->수어장대->남문->수어장대->남문->
->남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남한산성입구역
[남한산성 내부둘레길]
*남한산성둘레길 1코스(거리 3.8km/1시간20분)
산성로터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로터리(0.7km)로 회귀
*남한산성둘레길 2코스(거리 2.9km/1시간)
산성로터리 → 영월정(0.4km) → 숭렬전(0.2km) → 서문(0.7km) → 수어장대(0.6km) → 산성로터리(0.9km)
*남한산성둘레길 3코스(거리 5.7km/2시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현절사(0.1km) → 별봉(1.8km) → 장경사(1.5km) → 망월사(1.1km) → 동문(1.0km) →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로 회귀
*남한산성둘레길 4코스(거리 3.8km/1시간20분)
산성로터리 → 남문(0.7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로터리로 회귀
*남한산성둘레길 5코스(거리 7.7km/3시간20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회귀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앞에서 둘레길5코스 와 3코스, 4코스 중간의 깃점이 된다..
3코스(승병의 길)
3코스 승병의 길은 남한산성을 만들 때부터 전쟁 시기 남한산성을 지켰던 승병들의 생활을 알아 볼 수 있는 탐방코스이다. 산성의 수축과 유지를 위해 승병이 머물렀던 장경사와 망월사와 남한산성의 외성인 봉암성을 볼 수 있다. 세계유산센터 건너 골목으로 진입을 하면 3코스가 시작된다...
현절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곤욕 끝에 참형을 당한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4년(1688)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후에 김상헌,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셔졌다. 죽어서도 임금을 향한 강직한 선비정신의 상징적 건물로 여겨진다. 지붕 양식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이며 이출목 이익공의 주심포 형식이며 본당 좌우의 방풍막은 아래를 직선으로 자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크기이며 정면 각 칸에는 4쪽의 여닫이 격자문을 달았다.
벌봉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다..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제3암문(봉암성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 편이나 이 암문은 문 위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m, 높이가 236m에 달해 문무만 없을 뿐 성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경사신지옹성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장경사신지 옹성 끝에는 2개소의 포대가 설치되었고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숲이 우거져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는 풍경이 멋질것 같다..
5코스 때는 성벽을 타고 올라왔다..3코스는 내려간다..
남한산성의 ’사찰‘
남한산성에는 유독 사찰이 많다. 남한산성 내에 있는 사찰은 1.장경사 2.망월사 3.동림사 4.옥정사 5.개원사 6.한흥사 7.남단사 8.천추사 9.국청사 10.영원사 등 무려 10개나 된다. 남한산성 주변이 호국불교의 성지라는 신앙적인 측면과 함께 절이 많았던 또 하나의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승군의 편성 때문이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임진왜란을 겪은 스님들은 목탁 대신 사람을 살리는 활인검을 들고 위병들과 함께 큰 활약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인조는 1624년 남한산성을 축성하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병을 조직적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결과 남한산성에 총 9개의 사찰이 들어서게 된다. 8도 승병들의 주둔지로 8개의 사찰이 배치되었고 총괄본부의 역할을 하는 사찰이 하나 추가되어 9개가 된 것이다.(영원사는 늦게 창건된 사찰이다)
장경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승려 벽암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축성 후에도 승군을 주둔 시켰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하여 인조 16년(1638)에 건립한 절이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짧은 툇마루를 내었으며 2쪽 미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요사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의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산신각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으로 좌우에는 밑이 둥근 바람막이를 하였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정면 2칸에는 2쪽 여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현재 장경사만이 유일하게 옛 모습이 남아 있다.
장경사 동종
남한산성 장경사 동종은 조선 17세기의 대포적인 승장 사인이 제작한 통도사 종루 종의 시작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크기와 하대문양만 다를 뿐 전체적인 형태. 세부구조 및 표현이 모두 같다. 세부의 표현수법 등이 거의 같은 모양이다.
장경사 일주문 앞길로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망월사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망월사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
남한산성 내에 있는 10개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로 망월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곳에 있던 불상, 금자화엄경 등을 옮겨 창건하였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이후에 복원된 것이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4종의 복원된 건물의 규모가 옛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웅전, 금당, 요사체 2동, 13층 적멸보궁탑과 병풍석은 망월사의 자랑이다. 망월사의 돌축대는 옛 망월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하며 대형 맷돌이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망월사에서 5코스 시작점인 동문 옆으로 내려오게 된다..
지수당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
현종 13년(1672)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지붕의 양식은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정자 크기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되어 있으나 측면의 1칸은 반칸 크기로 되어 건물의 평면은 장방형 꼴을 이룬다.
대장군포
대장군포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 발사하는 유동식화기의 일종으로 조선후기에 사용된 화포이다. 철 주물로 주조하였고, 두터운 마디를 두른 것으로 포의 강도를 보완하였습니다. 또한 포신에 손잡이처럼 튀어나온 포이 부분이 특징이며, 포이에 쇠고리를 달아 손잡이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신기전기화차
신기전기화차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총통이나 신기전을 쏠 수 있게 만든 조선 시대의 로켓형 무기이다. 이동과 각도를 조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이 특징이고, 전투가 벌어졌을 때 빠르게 이동하여 적에게 화약무기로 공격할 수 있었다.
투석기
돌을 던져서 공격하는 공성 병기로, 발석기라고도 한다. 지렛대의 힘을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멀리 던지기 위한 도구이다.
연무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곳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무관은 규모가 크고 육중하여 높은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건물 내부 가운데에 있는 대들보에는 전, 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 쪽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연무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규모가 크고 높이가 높은 육중한 건물로서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정면 쪽은 2단의 기단을 축조한 이중 기단 형태이다. 이중 기단의 중앙에는 화강석 계단을 1개소 놓았다.
남한산성 행궁으로 올라가는 로터리이다..
한남루
한남루는 상, 하궐을 포괄하는 행궁 외곽 담장의 정문에 해당하는 행궁 외삼문의 누각이다. 정조 22년에 광주 유수 홍억이 행궁 입구에 한남루라는 누문을 대문으로 세웠으나 20세기 초반에 붕괴되었다. 한남루란 한강 남쪽 성진(城鎭)의 누대라는 뜻이며 프랑스 영사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2011년 같은 위치에 한남루를 복원하였다.
남한산성행궁(국가사적 제 480호)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이라 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은 1909년까지 잘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훼손되었다. 1999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2002년에 상궐에 해당하는 내행전을 준공하고 2004년 행궁 좌전을 준공하였다.
내행전
상궐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으로 인조 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의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을 되어있고, 좌우 2칸씩은 온돌방과 마루방이다. 대청을 제외한 3면에는 퇴칸을 두었고 내행전의 기동 위쪽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 개 겹쳐 쌓은 이익공 형식으로 행궁 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가공한 돌을 3단 쌓아 경사가급하고 평지가 협소한 약점을 보완하면서 동시에 장엄한 외관과 안정감을 주도록 하였다. 팔작지붕에는 용문양과 봉황문양의 막새기와를 사용하였다. 현재 내행전은 2002년에 중건되었다.
외행전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인조 3년에 준공되었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궐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 면적이 내행전 보다 작고, 내행전에 비해 6m 정도 낮은 곳에 지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이곳에서 행하였으며, 한봉에서 청나라 군이 홍이포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좌승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외행전은 2010년에 중건된 것으로, 발굴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확인되어 건물지와 기와를 쌓은 곳 일부를 보존하고 있다
일장각
일장각은 행궁 하궐에 있던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일장각은 수어장대가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건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하궐 내부담장 밖에 있었던 여러 건물 중 하나로써, 조 29년에 광주부 유수 이지연이 세운 건물이다. 1900년대에 촬영한 사진에서 일장각의 모습은 확인되지만 행궁지에 있었던 광주군 청사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함께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건물지의 일부를 확인하였으며 현재 일장각은 2010년에 중건되었다.
좌승당
상궐 내행전의 북쪽, 담장의 밖에 있었던 좌승당은 광주부 유수의 집무용 건물로 순조 17년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건립하였다. 뜰로 나서면 좌우 문이 있는데 왼쪽문은 좌숙문이라 하여 북쪽 담밖으로 나무다리를 놓아서 통했다. 오른쪽 문은 의정문이라 하여 하궐 뒤로 통했다. 좌승이란 ‘앉아서도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건물의 기초부분이 잘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고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복원이 완료된 상태이다.
이위정
이위정은 좌승당 뒤편 후원에 2010년 중건되었다. 순조 17년 광주부 유수부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건축 당시에 지은 ‘이위정기以威亭記’가 탁본과 함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기문은 심상규가 짓고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이위(以威)’란 ‘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와 충용으로써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전
정전은 조선 왕조 임금의 신위를 모신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라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곳이다.
영녕전
영녕전은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으로, 영년전의 제례는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본성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동장대, 서장대, 남장대, 북장대, 외동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다. 청량산 정상(해발 482m)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 익공식이다. 영조 27년(1751) 2층 누각으로 증축하고 외부에 ‘수어장대(守禦將臺)’ 내부에 ‘무망루(無忘樓)’라고 편액을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우익문(서문)
국청사 사찰
한경직목사 우거처(寓居處)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목회자이자 교육자이며 사회사업가이었던 한경직목사가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남의 집에 임시로 몸을 붙여 산다는 뜻으로 우거처(寓居處)라 이름 지었다고..
천주교 순교자 성지 주변
천주교 성당..우리나라의 오래된 성당을 보면 지붕을 기와로 올리고 개량된 한옥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려 할 때 조선의 친화적인 모습을 하려고 한것이라고 한다..
광주시 항일 운동기념탑
남한산성은 1896년 서울 관군 진공계획을 목표로 일어난 광주, 이천, 양근 등 1,600여명의 연합 의진으로 정토군과 의병진 사이에 수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인 곳이다. 도한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남문에 집결한 만세시위대가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항일운동사에 중요한 격적지였던 남한산성에 광주 출신으로 구한말 의병 춘경 구연영의병장,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정암 이종훈선생, 임시정부를 대표한 해공 신익희 선생 3인을 재조명하고자 항일운동기념탑이 건립되었다.
개원사 (경기도 기념물 제 119호)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려들을 총지휘하는 본영사찰로 건립되었다. 고종31(1894) 갑오경장으로 의승방번제가 폐지될 때까지 번창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소실되고 1976년 새로 지어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다. 원래 군기고지, 누각지, 종각지 등에는 주춧돌이 남아있어 개원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짐작케 한다. 또한 이 사찰에는 남한산성 축성과 산성 수호승군들이 사용했던 유분 1점과 석장, 옹기 함지 등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어서 번창했던 사찰의 영광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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