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형무소 생활
그러던 차에 어떻게 인천형무소에 있는 것을 알았는지 부모님이 내복을 보내주셨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내복을 입으니 추위가 덜 하였다.
하루생활에서 제일 못 견디고 불편한 것은 화장실 가는 문제였다.
감방지기 간수가 문을 열어주어야 가기 때문이다. 한사람이 소변보러 가려면 5명이 다 같이 가야한다.
‘선생님, 25방 소변 보내주십시오’ 하고 큰소리로 부른다.
물론 소리를 듣고 있지만 들은 척도 않는다. 최소한 세번 이상을 불러야 한다.
마음씨 좋은 간수가 당번을 할 때에는 한번 부르면 문을 열어주어 화장실에 갈수도 있지만 마음이 나쁜 간수가 해당되면 모든 감방안의 죄수들은 화장실에 보내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안하니, 우리들은 감방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몇 시간을 울부짖으면서 부른다.
형무소 집은 길이가 100m나 되는 긴 집이다.
제일 끝에 앉아서 책만 읽으면서 문 열어줄 생각을 안 한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해” 하면서 감방 문을 열어준다.
1번부터 시작하여 25번방까지 한꺼번에 연다.
“빨리 갔다 와” 하면서 “1분 내로 갔다 오지 않으면 기합이다”라고 윽박지른다.
화장실은 아래층에 있고 부지런히 갔다 와야 한다.
그러나 몸이 아프거나 설사가난 사람은 1분 내로 오지 못한다.
뒤늦게 올라와서 보면 앞에 온 사람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5명이 다 와야 방으로 들어간다. 한사람이 늦은 관계로 모여 엎드려뻗쳐하고 기합을 준다.
간수는 할일이 없으니 한참 기합을 준 다음 방안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이런 생활이 매일 반복된다. 그래도 이런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고향소식도 그리워진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탓이리라.
그리고 또한 형무소생활에서 제일 겁이 나는 것은 이질병과 학질병 이었다.
이 병으로 입원하는 환자가 늘어났고 치료 중에 사망하는 환자도 속출하고 있었다.
그 당시 약이라고는 아까진끼, 아스피린, 다이야쯩, 금개락 정도의 약이다.
이들이 만병통치약이었다.
그러나 우리 방에는 이질이나 학질로 병원에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내가 이질에 걸렸으나 병원에서 준 약을 복용하였더니 다행히 나았다.
늘 걱정이 되는 것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생각이고 고향 친구인 고행문형의 행방도 걱정이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형무소에서도 예수교를 믿어야 된다면서 복음 책을 준다.
심심하여 책을 읽어보아도 머릿속에 들어 올리가 없다.
하루는 우리 방으로 새로 들어온 한사람이 있었는데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5년형을 받고 온 사람이다.
3일 동안 같이 자고 다른 방으로 갔는데,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도 우리제주도 4.3사건과 똑같은 사건으로 행동을 하다가 경찰에 잡혀서 들어왔다고 말하였다.
어느 일요일, 죄수전원을 간수가 예배당으로 인솔하는 것이었다.
밤이었는데 예배당에 앉아 사방을 쳐다보니 행문이 형이 보였고 마침 행문이형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으나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고개만 끄덕이며 눈시울만 뜨거워졌다.
‘저 형도 이형무소에 같이 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만날 것을 기대하였다.
다음 주 일요일이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예배당에 예배하러 갔다.
나의 방으로 와서 창문을 열고 건너편 감방을 보니 행문이 형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형도 우연히 우리 감방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고향의 형이 곁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마음의 의지가 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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