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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생각의 도구들
-로버트ㆍ미셸 루트번스타인의『생각의 탄생』을 중심으로
*작가와 함께 8호/차용국
* 일러두기 : 로버트ㆍ미셸 루트번스타인 지음, 박종성 옮김, 에코의 서재, 2008
이하 글에서 이 책의 인용문은 별도의 주석 표시 없이 괄호( )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창조적 생각은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상상력만 있으면 창조가 자동으로 쏟아져나올 수는 없다. 창조는 무엇을 끄집어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끄집어낼 것인가다. 상상력이 창조로 이어질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서 습득해야 창조적 생각이 빛을 본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창조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실제와 환상을 결합하기 위해 13가지 생각의 도구를 이용했다. 바로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이다.
관찰은 수동적인 보기와 다르다. 탁월한 관찰자는 모든 감각 정보를 활용한다. 위대한 통찰력은 사물에 깃들어 있는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무엇을 주시해야 하는지, 어떻게 주시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주의력을 집중시킬 수 없다.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이며, 생각은 관찰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상호 협력적이며 보완적이다. 생물학자 제라드 버메이는 어렸을 때 시력을 잃어 다른 감각에 의지해서 살아야 했다. 그는 “전에는 그냥 무시해버렸던 것들이 이제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내 세계는 컴컴하거나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전과 다름없이 찬란했다. 단지 소리, 냄새, 형상의 요철이나 질감으로 느껴지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남은 모든 감각이 협력해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한 세계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65)”라고 말한다. 한 감각기관이 마비되면 다른 감각기관의 의존도가 높아진다.
관찰력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다. 감각과 지식과 생각의 연결을 통해 향상될 수 있다. 서머싯 몸은 “작가들은 병실에서 날것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볼 뿐만 아니라 필요한 과학지식을 충분히 얻음으로써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삶의 측면에 대해 무지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시인 메리엔 무어는 “생물학 강의가 시와 마찬가지로 나를 즐겁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나는 의학을 공부할까 진지하게 고려한 적도 있었다. 시의 속성인 정밀함, 축약해서 진술하기, 그리기, 밝혀내기,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주기 등이 내게 비친 의학의 모습이었다(79)”라고 말한다. 예술과 문학은 과학과 기술의 관찰력 향상에 이바지하며, 과학과 기술은 예술과 문학의 관찰력 향상에 이바지한다. 예술가와 문학가는 과학과 기술을 공부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형상화는 현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과 특이한 추상 능력, 감각적인 연상을 망라한다. 형상화는 시각과 청각은 물론, 후각과 미각, 몸의 감각까지 동원해서 이루어진다. 내면의 눈, 내면의 귀, 내면의 코, 내면의 촉감과 몸 감각을 사용해서 형상화할 때 마음에 떠오른 모든 이미지는 말, 음악, 동작, 모형, 회화, 도형, 영화, 조각, 수학 논문 등과 같은 다른 전달 수단으로 변환할 수 있다.
음악의 대가는 소리에서 이미지를 본다. 베토벤은 “나는 악상을 악보로 옮기기 전에 아주 오랫동안, 어느 때는 온종일 그것을 머릿속에 품곤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것은 버린다. 그렇게 만족할 때까지 계속 반복한 후에 작품을 정밀하게 다듬는다. 악곡의 이미지를 모든 각도에서 보고 듣고, 그것이 마치 조각품과 같아지면 곡을 악보로 옮겨 적는 일만 남게 된다”라고 말한다. 베토벤은 소리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뛰어난 능력자였다. 그래서 심한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위대한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다. 그는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마음으로 음악을 들었다. 소리의 이미지가 곡을 이루는 모든 것이었다. 실제로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인 노버트 위너는 수학과 과학 언어를 사용해서 청각 연습을 하는 것도 형상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 눈에 심각한 질병이 생기는 바람에 여섯 달 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수학을 가르쳐주셨어요. 대수와 기하 모두 귀로 배웠어요. 화학도 그렇게 배웠지요. 그 상황에서는 책으로 공부를 못하니까 아버지가 말로 하시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103)”라고 말한다. 시각적인 과목을 눈으로 보지 않고 공부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기하학 모형을 종이 위에 그린 다음 머릿속으로 다시 그려본다. 그러면 상상에 수반되는 이미지와 느낌은 도형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의 소리와 연결되고 이해의 문이 열린다.
과학자, 화가, 시인 등은 복잡한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변수를 제거함으로써 핵심적 의미를 찾아낸다. 진정한 의미의 추상화는 불필요한 부분을 도려내서 사물의 놀라운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대상 자체의 본질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추상화를 “한 가지 관점 아래 어떤 대상을 놓아두고, 그 대상이 가진 다른 모든 속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추상의 본질은 특별히 중요한 한 가지 특징만을 잡아내는 데 있다”라고 한다. 피카소는 “나는 누드를 말하고 싶다. 나는 오로지 가슴을, 발을, 손을, 배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들을 말하는 방법을 찾는 것, 그것뿐이다(115)”라고 말한다. 그는 추상화를 그리며 시각언어의 본질을 추구했다.
모든 추상화는 단순화다. 물리학자이자 발명가인 미첼 윌슨은 “위대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것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장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무엇을 간파해서 저변의 단순성을 파악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115)”라고 말한다. 뛰어난 추상 작업은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은 특성을 단순화를 통해 드러내는 일이다.
패턴을 아는 것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것을 의미한다. 패턴인식 능력은 예측과 기대 형성 능력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패턴에서 지각과 행위의 일반원칙을 끌어내며 그것을 예상의 근거로 삼는다. 그다음 새로운 관찰 결과와 경험을 예상의 틀 안에 끼워 넣는다. 이렇게 해서 관찰과 경험의 틀을 흔드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게 될 때 새로운 패턴이 만들어진다.
패턴은 일상적인 말과 글에도 들어있다. 구어체 영어 많은 단어의 엑센트가 뒤쪽에 있는 2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2음절은 약강격弱强格의 각운脚韻, 즉 굿바이goodBYE, 페이웰fareWELL, 아듀aDIEU 같은 단어를 만들어 낸다. 같은 단어라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리듬과 느낌의 언어 패턴을 드러낸다. 시인은 산문이나 신문 기사, 광고 문안, 책 등에서 시적 글귀를 찾아내거나 우연히 보고, 그것을 재구성 혹은 변형하여 시적 특성의 언어 패턴을 만들어 낸다. 패턴들 사이의 패턴들(메타패턴)을 발견하는 능력은 대상에서 나타나는 반복적인 순서나 양식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 보고 듣고 느끼는 일에 달려있다.
패턴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어슬렁거리거나 놀이를 해야 할 필요가 있고, 상당한 인내력이 요구된다. 나보코프는 어린 시절 패턴에 민감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제발 부모들에게 간청한다. 아이들에게 서둘러라고 말하지 말라”라고 썼다(159). 나보코프의 충고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청각적, 시각적, 언어적 패턴을 움직임의 패턴과 결합시키는 일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경험이었다.
패턴 형성은 혁신의 열쇠가 된다. 패턴 형성 기술은 특별한 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운동감각적 패턴과 청각적 패턴, 리듬감 등을 이용해서 훈련할 수 있다. 한 패턴을 분해하면서 동시에 다른 패턴을 조립하는 일은 어떤 현상과 과정을 이루는 실제 요소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지식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는 것이다. 경험한 세계를 표현하고 정의하기 위해 더 많은 패턴을 고안해 낼수록 우리는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나보코프는 글쓰기를 “맥락이 끊어진 조각 글들로 조화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초기 소설 『메어리』는 옛 연인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의 도착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한 젊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패턴화된 경험을 서술하고 있는 이 소설은 6개의 방이 있는 베를린의 하숙집에서 7일 동안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각 방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고, 이것은 수년 전 그가 6일간 연인과 약혼 중이었던 것을 나타낸다. 기다리는 내내 젊은 남자는 매일 여섯 방 중 하나에 들어간다. 7일째가 되자 더 이상 들어갈 방이 없다. 그는 연인과 재회할 가능성을 남겨두고 하숙집을, 베를린을 떠난다. 사건들을 날짜와 방에 가둠으로써 나보코프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반복적 구조로 기억과 기대를 병치시켜서(178) 쓰라리면서도 달콤한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유추analogy는 닮음similarity과 다르다. 닮음은 색이나 형태처럼 관찰에 근거한 사물 사이의 유사점을 말한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현상들 사이에 기능적으로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내적 관련성을 알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렌지가 포도 같다” 혹은 “오렌지가 야구공 같다”라는 표현은 유추라기보다는 단순히 관찰적 비유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렌지를 삶의 달콤함에 비유한다면 유추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맛을 혀로 볼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이 달콤해지길 욕망하고 또 그렇게 되는 것에서 만족을 느낀다는 점에서 은유적으로 ‘달콤’하기 때문이다. 또한 야구공을 태양에 비유한다면 유효한 유추라고 할 수 있다. 야구공이 태양처럼 하늘에 아치를 그리면서 솟아오르고 떨어지는 공통점을 지닌다(198)고 볼 수 있다.
헬렌 켈러는 자신의 유추 작업에 대하여 “나는 관찰한다. 나는 느낀다. 나는 상상한다….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인상과 경험, 개념을 결합한다. 이 가공의 재료를 가지고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세계의 안과 밖 사이에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닮은 것들로 가득 찬 바다가 있지 않은가….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꽃의 신선함은 내가 맛본 갓 딴 사과의 신선함과 닮았다. 나는 이러한 유사성을 이용해서 색에 대한 개념을 확장한다. 내가 표면과 떨림과 맛과 냄새들의 특질에서 이끌어 낸 유사성은 보고 듣고 만져서 찾아낸 유사성과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이 나를 견디게 했고 눈과 손 사이에 놓인 간극에 다리를 놓아주었다(196)”라고 한다.
은유는 진부해지는 법이 없다. 오히려 매번 새롭고 독특한 연상과 어울리며 공명한다. 시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자신과 같다고 가정하며 시각·청각·후각·촉각의 이미지를 다듬고, 그것을 통해서 독자들의 가슴속에 자신이 경험한 정서적 느낌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쓴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는 “시는 다른 누군가의 내부에 자신과 유사한 상태의 존재를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시인에게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기를 원하는 통찰이 찾아오는 때를 브로노프스키가 말하는 ‘숨겨진 닮음’, 즉 유사성이 폭발하는 순간(203)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몸을 움직여 어떤 일을 처리하고 난 후에야 그것을 인지할 때가 있고, 자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몸의 느낌을 알게 될 때도 많다. 피아니스트들은 손가락에 음표와 소나타를 기억하고 저장한다. 배우가 몸의 근육 속에 자세와 몸짓의 기억을 저장하는 것과 같다. 사고하고 창조하기 위해 근육의 움직임과 긴장, 촉감 등이 비로소 ‘몸의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이때가 사고하는 것은 느끼는 것이고, 느끼는 것은 사고 하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1959년, 엘리어트 돌 허친슨은 육체적 기능이나 숙련을 요하는 창조행위는 몸의 감각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자기표현은 결코 언어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피아니스트를 비롯한 연주가·조각가·무용수·외과의사·수공예 장인 등의 창조적 생각의 발현은 하나의 운동감각적 형태로 이루어지며, 느낌은 다양한 근육의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손가락은 연주하고 싶어서 근질거리고, 음악은 손에서 흘러나오고, 관념은 펜에서 풀려나온다. 형을 뜨고 싶은 심미적인 욕구는 조각가에게 좀처럼 억누르기 어려운 것이다(220).”
로댕의 조각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유수용 감각적 상상력에 육체적인 형태를 부여한 것이다. 이 작품은 벌거벗은 남자가 긴장감을 주는 자세로 바위 위에 앉아서 생각에 빠져 있다. 로댕은 “내 작품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머리, 찌푸린 이마, 벌어진 콧구멍, 앙다문 입술만이 아니다. 그의 팔과 등과 다리의 모든 근육, 움켜쥔 주먹, 오므린 발가락도 그가 생각 중임을 나타낸다(223)”라고 한다.
물리학자이자 발명가인 미첼 윌슨이 쓴 소설 『번개와 함께 살다』에서는 온갖 소재와 물질을 다루면서 얻게 된 촉각적인 지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에릭은 선반이나 드릴 프레스, 기타 기계들의 사용법을 배우면서 금속의 성질이 마치 오래된 친구의 품성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는 금속의 성질에 대하여 “구리는 너무 부드러워서 누구라도 그것과 함께라면 온순해진다. 황동은 선량하고 무르기 때문에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친구와 같고, 강철은 어떤 부분은 거칠지만 강한 마디 사이사이에는 부드러운 부분도 있어 종잡을 수 없다(226)”라고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다. 칼 포퍼는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공감적인 직관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보았다. 그는 감정이입을 “문제 속으로 들어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감정이입적 상상력을 촉진하고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연극 경험이나 문학적 소양이 도움이 된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싶은 것’이 될 때 가장 완벽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조지 엘리어트는 글이 가장 잘 써질 때가 작중 인물의 감정에 완전하게 지배될 때였다고 한다. 블레즈 상드라르는 그가 그려낸 “인물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든 것을 알기 전까진 글을 쓸 수 없었다”라고 고백한다. 단순한 사실 나열 이상의 것, 작중 인물들이 가공의 상황 속에서도 ’진화‘해 나가도록 만드는 능력이 감정이입이다.
심장의학자 존 스톤John Stone은 문학은 젊은 의사들이 적절한 감수성을 갖도록 해주고,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심지어는 자신이 환자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해줄 수 있다고 한다. 바스타인은 “감정이입은 단순한 심리학적 개념이 아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인물 개개인의 인생을 대신 ‘살았던’ 작가들이 상상력을 통해 창조해낸 것이고, 이 작가들은 작중 인물에 생명을 불어넣어 독자에게 소개한다. 문학은 학생들에게 상상력을 가동시킬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을 제공한다. 따라서 문학적 소양은 감정이입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반듯이 필요하다(247)”라고 말한다.
차원적 사고dimensional thinking은 2차원에서 3차원으로, 혹은 그 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한 차원에서 주어진 정보를 변형시켜 다른 차원으로 옮기거나, 차원 내에서 어떤 물체나 과정이 차지하는 크기를 일정한 비율로 줄이거나 변경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따라 공간과 시간 너머의 차원을 개념화하는 것을 뜻한다.
내과 의사는 환자의 X레이 사진이나 MRI를 판독할 때, 그것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환치해놓고 해석한다. 입체파 미술은 3차원 물체가 가지고 있는 다면성과 입체성이 2차원 평면에 묘사될 때 나타내는 한계를 끈질기게 대비시킨다. 그리하여 2차원 세계의 크기나 색채와 형상이 3차원 세계의 그것들과 다르게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우리는 매우 제한된 공간과 극히 작은 시간 영역 안에서 살고 있다. 분야에 따라 활용하는 시간의 스케일도 다르다. 거의 영구적인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주비행사와 지리학자의 영역에 있으며, 1조분의 1초 시간대에 발생하는 것들은 물리학자의 세계에 속한다. 우리는 한쪽으로는 초 시간 단위에, 다른 한편으로는 연 시간 단위에 구속받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스케일의 문제는 다른 스케일을 가진 우주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시사한다. 시간에 관한 것이건 물질에 관한 것이건, 스케일이 다르면 다른 유형과 다른 종류의 현상, 다른 물리적·생리적·지각적 개념들과 마주치게 된다(281). 지질학자 데이비드 데이비스David Davies는 “사고의 독창성을 기른다는 취지에서 내가 좀 더 배웠으면 하는 주제들이 있다. 그 하나는 차원적 분석이다. 물리학자에게 차원적 분석은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로 인해 문제의 핵심에 빨리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투영법인데, 이는 상상력 넘치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열거하는 것이다. 지구과학 분야에서 내가 만나본 창조적인 사람은 새로운 유형의 도표와 투영법을 만들어 냈을 때 가장 뛰어난 창의성을 발휘했다(287)”라고 말한다.
모형은 보는 사람이 즉각 인식할 수 있도록 실제를 축약하고 표현한다. 모형은 실제 혹은 가정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필요한 규칙과 자료, 절차를 이용하는 시뮬레이션이다. 우리가 정치학이나 역사, 인류학을 공부할 때 전투 과정이나 건축양식의 혁신, 전통 의술의 효능, 경쟁적인 경제활동의 결과물, 종교의식 등의 목적을 물리적, 기능적, 이론적인 모형으로 만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피에트 몬드리안은 어린 시절 제1차세계대전을 다룬 기록영화 한 편을 보고 모형이 가지고 있는 전달력과 의미에 대해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침공하는 독일군이 지도 위에 마치 작은 입방체 블록처럼 나타났고, 반대편의 연합군 진영 역시 작은 블록처럼 보였다. 그런 식으로 보면 전 세계의 격변이, 그 속에 품고 있는 무수한 세부 사항이나 작은 부분은 무시된 채 그저 플라스틱 블록의 양으로 표시되고 있었다(296)”라고 회고한다. 이 블록들은 투입된 병력뿐만 아니라 동원된 정치적·경제적 힘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힘은 너무 크기 때문에 모형으로 만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창조적 인물은 어린 시절 모형 만들기 놀이에 몰입했던 적이 있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 경험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융은 10대 시절의 모형 만들기 취미가 과학 일반에 대한 흥미를 키우게 했다고 한다. “나는 진흙을 모르타르 삼아서 작은 돌로 성을 쌓고 포좌를 설치했다. 보방(vauban, 17세기 프랑스 군인이자 축성 전문가)의 축성도를 보이는 대로 사들여서 닥치는 대로 파고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축성기법에 정통해졌다. 나는 모방을 거쳐 보다 현대화된 축성법에 눈을 돌렸다. 내가 쓸 수 있는 수단에는 제약이 많았지만, 온갖 형태의 요새 모형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이 일은 2년 이상이나 내 여가 시간을 빼앗아 가버렸지만, 그동안 나는 과학 공부와 어떤 형체를 지닌 것들에 대해 심하게 경도되어갔다(317)”라고 말한다.
놀이에는 분명한 목적이나 동기가 없다. 놀이는 성패를 따지지 않으며, 결과를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고,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도 아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상징화되기 이전의 내면적이고 본능적인 느낌과 정서, 직관, 쾌락을 선사하는데, 바로 그것들로부터 창조적인 통찰이 나온다. 놀이는 우리 자신만의 세계와 인격, 게임과 규칙, 장난감, 퍼즐을 만들게 하여 지식을 변형시키고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들이 새로운 과학과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놀이는 ‘시시한’ 것이며 호기심과 흥미의 변화에 왔다 갔다 한다. 섣부르고 과장되고 전복적인 동시에, 그 자체적으로는 계산된 복잡성과 행위의 완결성을 꾀한다. 몸동작이나 손에 쥐고 있는 물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생각, 골프, 미생물 등 그 무엇과도 연루(327)될 수 있다.
놀이는 분야 간 경계가 없다. 어떤 것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어떠한 구분, 경계, 난공불락의 진실, 용도의 한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문법이 와해되고 논리가 전도되며 인식에 혼란이 오는 순간, 게임이 시작되고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안다.
마틴 가드너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주석본에 의하면, 이 게임들은 결코 의미가 없거나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앨리스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거나 아주 작아지는 것은 그가 탐색한 인간의 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조나단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한 것과 같다. 루이스 캐럴의 재미있는 동화는 실상 매우 정교하게 짜여진 놀이며 논리학과 수학, 물리학 법칙이 그 속에 담겨있다(335).
변형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종합적 이해라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감각적인 인상과 느낌, 지식과 기억이 다양하면서도 통합적인 방법으로 결합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공감각적이다. 종합적 지식은 공감각의 지적 확장이며 미적 감수성의 가장 고급한 형태로, 다양한 방식의 앎과 느낌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통합한 것이다. 상상하면서 분석하고, 화가인 동시에 과학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상태에 이른 종합지적인 사고의 모습이다.
나보코프는 자신이 가진 여러 겹의 의식을 ‘우주적 동시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는 “과학자는 우주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시인은 시간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느낀다”라고 말한다. 모든 감각과 모든 의식은 모두 앎이 되었으며, 이 감각과 의식과 앎은 합쳐져서 상상력으로 가득 찬 작품들의 원천(389)이 된다.
통합적 사고의 세계는 분명히 경험의 일반적인 범주(아는 것을 느끼고 느끼는 것을 안다)를 넘어서는 것이다. 사람은 경험에서 알아낸 것을, 교육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연결 짓는 법을 배운다. 나보코프는 현실에서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을 무차별적으로 불러내는 경험을 하곤 했다. 그는 소리를 듣는 동시에 본 적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시각과 소리, 그 밖의 모든 감각이 뒤섞인다.
조지아 오키프는 색의 맛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소녀 시절 “집으로 가는 큰 길가에 이르렀을 때 커다란 기쁨에 휩싸였던 것을 기억한다. 먼지가 띠고 있는 색채는 햇빛 속에서 밝게 빛났다. 너무나 폭신해 보여 얼른 그 속에 뛰어들고 싶었다. 먼지는 따뜻했고 마차가 지나가며 만들어 낸 공기의 일렁임으로 가볍게 동요하고 있었다. 나는 먼지 속에 주저앉아서 그것을 만끽했다. 어쩌면 그것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느낌은 훗날 내가 튜브에서 갓 짜낸 물감을 맛보고자 할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392)”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교육시스템은 문학, 수학, 과학, 역사, 음악, 미술 등 과목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가르친다. 수학자들은 오로지 ‘수식 안에서’, 작가들은 ‘단어 안에서’, 음악가들은 ‘음표 안에서’만 생각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이것은 ‘생각하기’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창조적인 사고’는 통찰을 서로 주고받는 데 있어 말이나 숫자만큼 중요하다.
생물학자, 철학자, 화가인 동시에 미술사가인 C. H. 워딩턴은 1972년에 쓴 『미래의 생물학과 역사학』에서, “세계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은 오직 ‘전인whole men’만이 해결할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412)”라고 말한다. 통합은 이상이나 꿈이 아니라 당면한 현실이며 당위이며 필수다.
우리에게는 통합적인 마인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오늘날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 중에서 단일한 학문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분석적이건, 정서적이건, 한 가지 접근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혁신의 기법이란 항상 모든 분야에 걸쳐 있으며 다양한 방법론을 가진다. 미래는 우리가 앎의 방법 모두를 통합해서 해결책을 창출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