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집 치콜리니
정현기
집에서 나와 내가 항상 다니는 길, 완만하고 제법 기다란 언덕 길목에 소박한 상권을 형성한 가운데 내가 가끔 들르는 카페 치콜리니가 있다. 한 여름에는 담장을 넘어온 철 잊은 덩굴장미와 소담하고 담백한 안개꽃이 피어있는 집을 지나면 바로 할먼네 반찬 가게가 있고, 열댓 보쯤 아래 미장원 건너 작은 테라스에 약간 기다란 붙박이 탁자와 화분들이 잘 정리되어 쥔장의 꼼꼼함이 엿보이는 이 커피집은 오래전부터 본래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있고 친근감이 가는 집이다. 창밖, 전봇대의 얼기설기 늘어진 전선 사이로 멀리 관악산 자락이 보이고 해거름 판에 석양의 모습이 정감을 더하며 늦가을 지붕 위에 걸친, 낙엽이 져 휑한 감나무 열매가 지는 붉은 해와 잘 어울려 때로는 애틋함을 준다. 밖에서 볼 때 이 집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알려 주는 것은 넓은 통 창 안에 소금(암염) 등의 불그스레한 포근한 불빛이 문이 열고 닫힘을 알려주고 그 불빛은 담담하기도 하다.
주인인 그녀는 가냘픈 몸매에 허리까지 내려온 긴 생머리를 정갈하게 땋아서 늘어트리고, 화장기 없는 작은 얼굴은 얌전하고 고상함이 묻어있어 무엇인가에서 승화된 듯하고, 곰살궂은 모습은 치콜리니 커피 집에 딱 어울리며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따뜻하고 진정의 분위기가 있는 듯하다. 느긋한 여유와 작지만 공간적 풍요로움이 우리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리 넓지 않은 아담한 실내 벽에는 그녀의 그림으로 적당히 배치되어 있다. 앤티크 한 오디오와 정리되어 꽂혀 있는 판과 CD, 책장의 몇 권의 책, 올망졸망한 클래식한 소품들의 소박함이 충분하다. 그리고 컴퓨터 책상 위의 한구석에는 이 집식구인 이름이 달식이라는 달팽이도 살고 있는데 바로 위 선반에는 뜨게 실로 짠 셜리(소품들은 이름이 다 있음)라는 작은 고양이 인형이 금방이라도 튀어 내려와 달식이를 노리는 듯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모든 것들이 서로 어울리어 차분하고 아담한 공간 안에서 분위기에 휩쓸리듯 잘 이용되어 소박한 커피집으로 보이게 한다. 세 개의 탁자와 네댓 명이 앉으면 꽉 차 보이고 커피 볶음 내음이 은근히 퍼지는 이곳은 옆 탁자의 손님과도 쉽게 대화가 되고 서로 같은 정서를 나누는 커피집의 의미가 충분한 작은 다락방과 같은 곳이다. 한적한 동네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이 커피집은 일상에서 삶에 혼란도 없고 공평함으로 상처도 없는 행복한 사람들 만이 오는 곳인가 보다. 모습들이 다 행복해 보인다. 오며 가며 스친 이곳 단골손님들과도 어느정도 알고 지내며 가끔은 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잔잔한 음악과 함께 대화할 때도 있다.
드립으로 정성을 다한 한 잔의 아메리카노 커피는 차분하고 감성에 젖게 하는 분위기를 더하며 쥔장인 그녀와 공통의 관심사나 하잘것없는 일상의 뒷얘기를 할 때, 우호적이고 따스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부담 없는 대화로 이끌어 가고 공감하는 소통의 도구이기도 하다. 또한 친한 친구와 마시는 술만큼의 짠한 연결고리와도 같다. 커피의 맛이란 분위기에 따라 맛이 다를 수도 있다. 커피의 제맛을 즐기기에 이상적인 방법은 원두를 알맞게 로스팅하여 적당히 분쇄하고 정확한 추출 시간으로 훌륭한 커피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주제가 같은 대화를 부드럽고 때론 격렬하게 토론하고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이해의 폭을 다양하게 해주는 서로의 뜻을 함께할 때 커피의 제맛을 한층 더 느껴지게 한다. 친구나 동료들과 마시는 한 잔의 커피야말로 감칠맛 나는 즐거움이 아닐까? 몽마르트르 카페에서나,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처럼 숱한 예술가들이 커피와 함께 그들의 삶을 고민하고 스스로 자극하면서 그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듯이 많은 것을 의미하는 커피의 진가는 확실하다. 오래전 시절이 떠오른다. 옛 친구들과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우리의 관심사나 다른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를, 그리고 지금 여기 치콜리니에서 그녀와 커피를 마시며 진솔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보내는 이 시간만큼은 여유와 한가로움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행복해진다. 그녀의 감미로운 친화력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치콜리니 작은 공간 안에 조용하고 은은하게 바버의 현악 4중주 선율이 흐르고 있다. 잠시 눈을 감고 이 분위기에 몰입되어 빠져 본다. 혀와 코에 스며드는 커피의 맛과 향, 그리고 바이올린 선율이 설레는 감성에 자극을 준다. 지금은 한껏 센티멘털에 빠지고 싶다. 커피의 아로마 향기가 번져 나오는 이 상태로 취해버려 내 빈 마음을 무엇인가로 충만하게 채우고 싶다. 지나치게 많아도 상관없다. 감성에 빠져 어스름에 묻혀 아련히 보이는 아름답고 수수한 그 무엇인가를 찾고 싶다.
창밖에는 해가 지고 거미가 내려 어슴푸레 어둠이 깔린다.
2012.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