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갈명 병서 墓碣銘 並書
공의 휘는 후겸厚謙이고 자는 자실이며 성은 이씨李氏로 구암舊庵은 그가 스스로 부른 것이다. 본관은 경주慶州로 신라에서부터 고려에 까지 벼슬이 이어져왔다. 우리 왕조에 와서는 휘 양사良仕가 있어 태종조에 관이 판서에 이르렀다. 휘 주周를 낳았는데 사정司正이었고, 휘 윤흥允興을 낳았는데 정의공신 靖義功臣이었고, 휘 말동末同을 낳았는데 호가 도원桃源이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선생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휘 종간宗幹을 낳았는데 참봉參奉에 추천되어 제수되었다. 휘 습熠을 낳았는데 바른 일을 행하여서 추천서에 올라 여러 번 임금의 부름을 받았고, 호는 두곡杜谷이고 관직은 직장直長이며, 공에게는 5대 위이다. 고조는 휘 복성復性이고 임진왜란(1592)에서 의병활동으로 공훈을 세웠고, 관직은 사제감司宰監 첨정僉正이었다. 증조는 휘 명익明翼이고, 조부는 휘 정선挺善이고, 아버지는 휘 하구厦構이고 진사進士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성시聖時의 따님이고, 상락김씨上洛金氏 성좌成佐의 따님이다. 휘 하기厦榰는 창녕조씨昌寧曺氏 하영夏英의 따님이고 본래 선생을 낳은 어머니이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둘째 형님이 된다.
공은 숙종肅宗 신유년(1681)에 태어나서 계묘년(1723) 4월 4일에 생을 마쳤다. 비학산飛鶴山 남쪽기슭 제비고개 계좌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어려서 영리하고 슬기로워 12~3세에 사서이경四書二經을 다 외우고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보는 사람들이 모두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계유년(1693)에 본래 낳아주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기묘년(1699) 양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모두 부모의 상을 잘 치렀다. 소문에 20세 때 숭덕전崇德殿에 들어가 제사를 도왔다. 축책祝冊이 서울에서부터 이르렀는데 임금의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공이 대축을 담당하였는데 운서韻書를 잡으니 임금의 이름 두 음절이 있었다. 고을 수령이 혹 잘못 읽을까 염려하여 글자의 음을 공에게 물으니 감히 직접 이름자를 거론하지 못하고 다른 글자로 고하여 말하기를 “아무개 자와 같은 소리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을 수령은 그가 대체大體를 아는 것에 깊이 감탄하였으니, 삼가고 조심함이 특히 소년의 경솔하고 급한 태도가 없었다.
일찍이 과거보는 일을 그만두고 정훈수, 호수鄭塤叟箎叟 권강좌權江左 손매호孫梅湖 매산梅山 정명고鄭鳴皐등의 여러 선배들과 경서를 토론하였으니 많은 학문과 품성을 닦는 벗들이 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미치지 않아 지키고 기름에 이미 익숙하여, 효도와 우애로 가정을 다스리고, 정성과 공경으로 자신에게 계율로 삼았다. 제사를 받듦에는 마치 계신 것 같이 정성을 다하였고, 사람을 만남에는 차별을 둠이 없었다. 남의 잘못을 바로 잡음에는 반드시 이치로 조용하게 깨닫게 하였고, 옳고 그름에 크게 관련하였어는 끊음이 확실하여 범하기가 어려웠다. 남의 궁함을 구하고, 남의 괴로움을 급하게 여겨서 많은 사람이 어려워하는 바를 도왔다. 이분에게 해를 빌려주었다면 성취한 바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수명이 갑자기 재촉되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공이 돌아가신 후 가정에 사고가 연이어 이에 남아있는 글이 텅 비어 사라져 거의 증명할 수 없으나, 당시 만사와 뇌사를 적은 300여 사람이 한마디로 사모하여 칭송하여 함께 벗에게 두텁고 정성스럽고 덕스러움으로서 일컬었고, 또 동경[경주]의 성리학자로 허여한 사람들이 모두 거장巨匠이고 문장가이니 이것에서 공을 볼 수 있다.
부인 아주신씨鵝洲申氏는 문석文錫의 따님이시고, 아들은 기직基稷, 홍유弘冑, 홍원弘源이고, 따님은 손희기孫喜耆에게 시집을 갔다. 기직의 아들은 익룡翼龍이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묘지명에 말하기를
뜻을 세움이 견고했고, 행동을 제어함이 높았고, 일을 처리함이 과감했고, 논의함이 명쾌했다. 이것은 공이 억지로 힘쓴 것이 아니고 스스로 터득한 것이니 마땅히 그가 여러 선을 겸비한 것이다. 어찌 짧은 수명을 한탄하리오. 또 이룬 덕이 넉넉하기에 공의 평판을 널리 모아서 돌에 새겨 길이 보이게 하노라.
임술년(1922) 국화절鞠華節 완산完山 류영필柳必永 삼가 적음.
墓碣銘 並書
公諱厚謙 字子實 姓李氏 舊庵其自署也 本貫慶州 由羅及麗 簪組相繼 入本朝有諱良仕 太宗朝官至判書 生諱周 司正 生諱允 興靖義功臣 生諱末同 號桃源 與寒暄金先生爲道義交 生諱宗幹 薦授參奉 生諱熠 以行義登薦 累被召命 號杜谷 官直長 公五世以上也 高祖諱復性 壬亂倡義立勳 官司宰監僉正 曾祖諱明翼祖諱挺善 考諱厦構 進士 妣安東權氏聖時女 上洛金氏成佐女 諱厦榰 昌寧曺氏夏英女 本生考妣也 於先公爲仲兄也
公以肅宗辛酉生 以癸卯四月四日終 葬飛鶴山南麓燕峴癸坐之原 公幼而穎悟 十二三盡誦四書二經 文辭大進 見者皆以神童稱之 丁酉丁本生內憂 己卯丁所後外憂 皆以善居喪 聞弱冠時入崇德殿助祭 祝冊自京師至有御諱 而公當大祝 據韻書御諱有二音 主倅慮或誤讀 問以字音公 不敢直擧諱字 證以他字曰 與某字同音 主倅深歎其識體 謹愼殊無少年率遽之態也
早廢擧業 與鄭塤叟箎叟 權江左 孫梅湖 鄭梅山鳴皐 諸先輩討論經籍 甚有麗澤之益 未及中年 持養已熟 孝友政於家 忠敬律於身 奉祭而致如在之誠 接人無畦畛之設 規人之過必理譬從容 而是非大關亦截然乎難犯 周人之窮 急人之困 左多人所難也 假之以年則所就有未可量 而壽限遽促豈非命歟
公歿之後 家故連 仍遺文盪失 殆無以證響 而當時輓誄三百餘人一辭慕誦 共以僕厚忠德稱之 亦以東京理學許之者皆碩匠信筆 斯可以見公也 配鵝洲申氏文錫女 男基稷弘冑弘源 女孫喜耆 基稷男翼龍 以下不盡錄 銘曰
立志堅 而制行高 處事果 而論議快 此是公不勉 而自得者 宜其衆善之兼備 何恨短局 亦優成德 博採公評 刻眎無極
玄默閹茂 鞠華節 完山柳必永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