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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Ⅱ. 무정불성의 두 가지 의미
Ⅲ. 천태불교의 불성 의미
Ⅳ. 나가는 말
요 약 문
본고는 지의의 삼인불성과 관련해서 담연의 무정불성을 살펴봄으로써 천태 불교에서 불성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삼인불성의 관계에 대해 지의는 원융 상즉을 주장하는 반면, 무정불성은 정인불성만을 불성의 의미로 주장한다. 무정불성은 지의 불성론을 계승하는가? 본고는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먼저 정인불성에 대한 담연의 이 해가 이중적임을 밝혔다. 하나는 삼인불성 중 정인불성만을 불성의 의미로 주장하는 상대적 무정불성이고, 다른 하나는 정인불성을 연인‧요인불성과 원융상즉으로 주장하는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이다. 그에 따르면, 전자는 유정 불성에 대해 불성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후자는 객관인 진리에 대해 주관인 심성으로 불성을 이원적으로 분별하는 유정불성에 대해 진리와 불성의 불이 상즉을 주장한다. 다음은 불성론에 관한 담연의 교판을 통해, 상대적 무정불성과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열반경』의 불성론은 여러 가지로 이 중 유 정불성은 방편교에, 상대적 무정불성은 진실교에 해당한다. 그는 이를 통해 상대적 무정불성을 『열반경』에 근거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이자 유정불성보다 우월한 가르침임을 논증한다. 나아가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을 『열반경』의 삼 덕의 원융상즉을 주장하는 돈교로 교판하고, 『열반경』의 원융상즉은 『법화 경』의 개권현실에 근거해서만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법화경』의 절대적 우월성을 정당화한다.
담연의 무정불성은 유정불성과 논쟁 속에서 지의의 원융상즉을 천태불교의 불성론으로 확립하고,
나아가 천태불교의 배타적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 틀로 평가할 수 있다.
요약문 주제어(7개) 천태불교, 지의, 담연, 무정불성, 삼인불성, 정인불성, 교판
Ⅰ. 서론
본고는 형계 담연(荊溪湛然, 711-782)의 무정불성(無情佛性)을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 사상의 계승과 관련해 살펴봄으로써 천태불 교1)의 불성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담연에 따르면, 무정불성은 기와처럼 마음이 없는 물질에도 불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는 무정불성을 『열반 경』의 “일체중생실유불성”에 근거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열반경』은 일체중생실유불성의 일체중생을 마음이 있는 유정으 로 한정한다.2) 이는 담연의 무정불성을 두고 현대불교 연구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논란을 가져왔다. 이에 대해 담연의 무정불성에 관한 기존 연 구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불교의 중국화와 관련해서 담연 의 무정불성을 도가의 자연관 및 체용론(體⽤論)의 영향을 받은 사상으 로 설명하는 것이다.3) 다른 하나는 무정불성의 불성은 지의의 제법실상 (諸法實相)을 의미하고4) 제법실상의 보편성에 근거해서 불성은 유정뿐만 아니라 무정에도 있다는 구조로 그의 무정불성을 해명하는 것이다.5)
1) 여기서 천태불교는 담연이 여러 종파불교에 대해 배타적으로 그 정체성을 확립한 종파적 의미에 한정해서 사용한다.
2) 『⼤般涅槃經』(T12, 769a), “善男⼦! 譬如有⼈家有乳酪. 有⼈問⾔: 『汝有酥耶?』 答⾔: 『我有酪, 實 ⾮酥.』 以巧⽅便定當得故, 故⾔有酥. 衆⽣亦爾, 悉皆有⼼. 凡有⼼者, 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是義故, 我常宣說⼀切衆⽣悉有佛性.”(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집에 유락이 있는 것과 같다. 어 떤 사람이 ‘당신은 연유를 갖는가?’라고 묻자 ‘나는 유락을 갖지만 사실 연유는 아니다.’라고 답 한다. 교묘한 방편으로 반드시 얻을 수 있으므로 연유가 있다고 한다. 중생 또한 그러하니 모두 마음을 갖는다.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무상정등각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의미로 나는 일체중 생이 모두 불성을 갖는다고 항상 말한다.)
3) 대표적으로 차차석(2006); 鎌⽥茂雄(1992); 岡⽥眞美⼦(2002) 등이 있다.
4) 張⾵雷(2013), 238. 張⾵雷에 따르면, 지의는 『열반경』의 일체중생실유불성의 불성을 제법실상 으로 주장한다. 張⾵雷는 지의의 심구일체법을 두고 『열반경』이 중국에 전해진 이후 일반론으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일체중생실유불성을 불성이 곧 실상[佛性卽實相]임을 밝혀 일체중생실유 불성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논증한 불성론으로 평가한다.
5) 김정희(2016), 92-94. 이외에도 무정불성의 불성을 제법실상과 관련해서 논의한 연구로는 Penkower(1997); Chen(2011) 등
참조.
본고는 기존의 연구 성과, 특히 후자의 성과를 수용한 뒤에 나아가 담 연의 무정불성을 지의의 삼인불성(三因佛性)과 관련해서 분석함으로써, 천태지의 사상의 계승과 천태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주제로 그 논의 를 확장하여 담연의 무정불성이 천태불교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삼인불성은 천태지의의 독창적인 불성론이다
.6) 지의 는 『열반경』에 나오는 정인불성, 요인불성(了因佛性), 연인불성(緣因佛性) 의 개념들을 삼인불성으로 체계화했다.
그에 따르면, 정인불성은 법성의 실상으로 깨달음의 대상을, 요인불성은 반야의 관조로 진리를 통찰하는 지혜를,
연인불성은 반야 작용의 증장을 도와 진리를 통찰하게 하는 보 시‧지계‧인욕‧정진‧선정의 모든 수행법이다.
7) 지의는 공‧가‧중의 삼제와
진성궤(眞性軌)‧
관조궤(観照軌)‧
자성궤 (資成軌)의 삼궤,
법신‧
반야‧
해탈의 삼덕(三德)의 원융상즉에 근거해서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주장한다. 원융상즉에 대한 지의의 이해는 용수 의 공사상에 따른다.
용수는 『중론』 「관사제품」 24장 18게 “衆因緣⽣法, 我說卽是無(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8)에서 공‧가‧중 모두를 조건에
의존해 일어난 제법의 참된 모습[諸法實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공‧ 가‧중에 대한 이러한 관계를 지의는 세 측면에서 보면
공, 가, 중 셋으 로 다르지만, 이 셋은 모두 제법의 실상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하여 즉공즉가즉중(卽空卽假卽中)의 원융삼제로 해석한다.9)
6) 천태지의의 삼인불성과 관련해서는 久下陞(1997); ⽥村完爾(2007); 김정희(2010) 등 참조.
7) 『法華⽞義』(T33, 802a), “故知法性實相, 即是正因佛性;般若觀照, 即是了因佛性;五度功德資發般 若, 即是緣因佛性.”(법성의
실상이 정인불성이고,
반야의 관조가 요인불성이고,
다섯 바라밀의 공덕이 반야의 발현을 돕는 것이 연인불성임을 알 수 있다.)
8) 『中論』(T30, 33b).
9) 『摩訶⽌觀』(T46, 7b), “若謂即空即假即中者. 雖三⽽⼀雖⼀⽽三. 不相妨礙. 三種皆空者. ⾔思道斷 故. 三種皆假者. 但有名字故. 三種皆中者. 即是實相故. 但以空為名. 即具假中. 悟空即悟假中. 餘亦 如是.”(즉공즉가즉중이란 셋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지만 셋으로 서로 방애하지 않는다. 셋이 모 두 공이란 언어와 사려분별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셋이 모두 가란 다만 이름이기 때문이 다. 셋이 모두 중이란 실상이기 때문이다. 공이라고 해도 가와 중을 갖춘다. 공을 깨달으면 가 와 중을 깨닫는다. 나머지도 이와 같다.)
지의의 삼제원융에 따르면, 삼인불성의 정인불성‧요인불성‧연인불 성은 각각 통찰의 대상[境]‧통찰의 지혜[慧]‧수행공덕[⾏]의
셋으로 다 르지만, 셋은 서로 의존적이어서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 대해 독립적으로 세울 수 없다.
그런데 담연은 만년의 저서인 『금강비론』(⾦剛錍論)에 서 무정불성의 불성을 “정인불성”10)으로 정의하면서 정인불성을 연인‧ 요인불성과 구분한다.
이어서 부처는 다시 “허공과 열반이 함께 삼세에 포섭되지 않지만, 열반과 여래는 깨달음과 [여실지]견이 있고, 허공은 상주이므로 [허공의 있음이 열 반의 있음과] 같지는 않다.”라고 한다. 어떻게 정인불성은 연인불성‧요인 불성과 다르지 않겠는가?11)
10) 『⾦剛錍論』(T46, 781b), “既云衆⽣佛性. 豈⾮理性正因.”(중생의 불성을 말하면 진리의 본성인 정 인불성이 아니겠는가?)
11) 『⾦剛錍論』(T46, 781c), “佛後復云空與涅槃. 雖俱⾮世攝. 涅槃如來有證有⾒. 虛空常故是故不然. 豈⾮正與緣了不同.”
정인불성이 연인‧요인불성과 다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불성을 구성하는 삼인불성 중 정인불성이 연인‧요인불성보다 우월하다는 뜻인 가?
아니면 허공이 모든 존재를 포섭하는 것처럼 정인불성 또한 연인‧ 요인불성을 포섭하는 토대로서 연인‧요인불성과 다르다는 것인가? 어 느 쪽이든 담연의 무정불성은 지의의 불성론을 계승한다고 보기 어렵다. 지의는 용수의 공사상에 근거해서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주장하기 때 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용수의 공사상은 일체법 사이의 어떤 서열화나, 일체법의 존재근거로서 어떤 근원적인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삼인불성 중 정인불성을 연인불성‧요인불성과 구분하는 담연의 무정 불성은 지의 불성론으로부터 일탈인가? 그런데 담연은 천태불교의 6조 로서, 지의 불교사상의 정통적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무정불성이 지의의 불성론에 근거한다면, 정인불성은 연인불성‧요인불성과 다르다 는 그의 주장은 무슨 의미인가?
본고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금강비론』을 중심으로 담연의 무정 불성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먼저 정인불성과 관련해서 무정불성의 의미 를 분석하겠다.
이를 통해 담연은 무정불성의 정인불성을 연인불성‧요인불성과 구분하는 상대적 무정불성12)과 정인불성과 연인불성‧
요인불 성의 원융상즉을 주장하는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의 두 가지로 설명한다는 것을 밝히겠다.
다음으로 담연의 교판을 통해 상대적 무정불성과 원융상즉의 무정불 성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담연의 무정불성은 진실교의 정인불성과 방편교인 연인불성‧요인불성의 상대성을 지의의 개권현실 (開權顯實)을 통해 해체함으로써, 지의의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천태불 교의 불성론으로 확립하고 나아가 천태불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론 임을 논증하겠다.
Ⅱ. 무정불성의 두 가지 의미
1. 상대적 무정불성 담연은 무정불성을 천태불교의 불성론으로 주장한다. 『대반열반경』(⼤ 般涅槃經, 이하 『열반경』)은 5세기경 중국에서 한역된 이후, 불성론과 관 련해서 가장 권위 있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아가 중국불교도들은 『열반경』의 불성을
일반적으로 유정의 본성, 즉 주관의 심성으로 간주했 다. 『금강비론』에는 이러한 이해에 근거해서 유정불성13)을 주장하고 무정불성을 부정하는 손님이 가상의 논쟁 상대로 등장한다.
12) 삼인불성과 관련해서 삼인불성의 관계를 원융상즉으로 주장하는 무정불성은 “원융상즉의 무정 불성”으로, 이에 대해 정인불성을 연인불성‧요인불성에 상대해서 주장하는 무정불성은 “상대 적 무정불성”으로 구분하겠다. 담연은 구분 없이 모두 무정불성으로 말하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두 가지로 구분하여 쓰겠다.
13) 본고에서 유정불성은 담연의 무정불성에 대해 불성을 유정에 한정하는 불성론과 이러한 유정불 성을 주장하는 자를 함께
가리킨다. 담연은 가상의 대론자인 유정불성을 주장하는 손님을 구분 없이 유정불성으로 부른다.
담연은 손님을 상대로 무정불성이 『열반경』 권33 「가섭보살품」(迦葉菩薩品)에 근거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반박한다. 먼저 『열반경』 권33 「가섭보살품」에 따르면, 돌, 기와와 같은 무정의 사물은 불성이 아니다.
가섭보살이 부처에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불성‧열반은 삼세에 포 섭되지 않지만 있다고 합니다. 허공 또한 삼세에 포섭되지 않는데, 왜 있다 고 할 수 없습니까?”
부처가 말했다.
“선남자여! 열반이 아닌 것에 대해 열 반이라고 하고, 여래가 아닌 것에 대해 여래라고 하고 불성이 아닌 것에 대해 불성이라고 한다. 무엇이 열반이 아닌가? 일체 번뇌의 유위법을 말한 다. 이러한 유위 번뇌를 부순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여래가 아닌 것은 일 천제에서 벽지불까지이다. 이러한 일천제에서 벽지불까지를 부순 것을 여래 라고 한다. 불성 아닌 것은 일체의 담장, 벽, 기와와 돌처럼 무정의 사물이 다. 이러한 무정의 사물을 벗어난 것을 불성이라고 한다.”14)
유정불성은 이에 근거해서 무정과 불성을 함께 말할 수 없고 그리하 여 무정불성은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담연 은 오히려 이에 근거해서 무정불성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임을 증명하겠 다고 한다.15) 그는 먼저 가섭보살의 질문에 주목한다. 부처가 [진실교의] 깨달음의 [지위의 무애를 허공의 비유로] 답했는데, 이에 가섭보살은 방편교의 지혜와 단과에서의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이 모두 있 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가지고] 부처의 허공 비유와 이 가르침이 대응하지 않는다고 반론한다. 그리하여 가섭은 “여래‧불성‧열반이 있듯이, 허공도 당연히 있습니까?”라고 말한 것이다. 부처는 먼저 질문에 따라 대답하고, 이어서 앞으로 돌아가 허공을 설명한다.16)
14) 『涅槃經』(T12, 828b), “迦葉菩薩⽩佛⾔:「世尊! 如來, 佛性, 涅槃, ⾮三世攝⽽名為有.虛空亦⾮三世 所攝, 何故不得名為有耶?」 佛⾔:「善男⼦!為⾮涅槃名為涅槃, 為⾮如來名為如來, 為⾮佛性名為 佛性.云何名為⾮涅槃耶?所謂⼀切煩惱有為之法.為破如是有為煩惱, 是名涅槃.⾮如來者, 謂⼀闡提⾄ 辟⽀佛.為破如是⼀闡提等⾄辟⽀佛, 是名如來.⾮佛性者, 所謂⼀切牆壁, ⽡⽯, 無情之物.離如是等無情 之物, 是名佛性.”
15) 『⾦剛錍論』(T46, 781b), “今且為⼦委引經⽂. 使後代好引此⽂證佛性⾮無情者. 善得經旨不昧理性. 知余所⽴善符經宗.”
(지금 당신을 위해 경전의 문구를 인용하겠다. 지금까지 불성이 무정에 없음 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이 즐겨 인용한 문구를
통해 나는 경전의 취지를 잘 얻고, 진리의 본성 에 어둡지 않으며 나의 주장이 경전의 종지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16) 『⾦剛錍論』(T46, 781b), “由佛果答. 迦葉乃以權智斷果果上緣了悉皆是有. 難佛空喻法喻不⿑. 故迦 葉云. 如來佛性涅槃是有. 虛空應當亦是有耶. 佛先順問答. 次復宗明空.”
허공 비유는 “불성유여허공(佛性猶如虛空)”으로 불성을 허공으로 비유 한 것이다. 가섭보살은 여래‧불성‧열반이 있다는 가르침과 허공의 비 유가 일관성이 없다고 반문한다. 담연은 이 반문을 통해 「가섭보살품」에 “일체중생실유불성” 중 유(有, 있음)와 관련해서 두 개의 불성론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여래‧불성‧열반의 있음에 따른 유정불성이고,
다 른 하나는 허공의 있음에 따른 불성론이다.
유정불성의 있음은 없음에 대한 있음이다.
여래‧불성‧열반의 있음은 여래 아닌 것‧불성 아닌 것‧열반 아닌 것의 없음에 상대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여래는 일천제와 이승까지의 무명을 부순 것이고, 열반은 유위의 번뇌를 부순 것이고, 불성은 무정의 사물을 떠난 것이다.
불성과 무정은 모순이어서 무정에 불성은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불성은 유정 에만 있다.
허공의 비유에 따른 불성은 유정불성의 있음과 다르다. 허공 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담연은 허공과 관련한 불성의 의미를 다음 과 같이 설명한다. 『열반경』 33권 「가섭보살품」은 “중생의 불성은 허공과 같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안이나 밖을 분별하면 어떻게 모든 곳에 있다고 할 수 있겠 는가?”라고 한다. 있다[有] 이 한 글자를 잘 보기 바란다.
허공이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경전의 문구는 안 혹은 밖만을 허용하 지 않았기 때문에 “안과 밖이 아니다”라고 하고 나아가 “허공과 같다”라고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중생의 불성이라고 하면, 어찌 진리의 본성인 정인 불성이 아니겠는가?17)
17) 『⾦剛錍論』(T46, 781b), “故三⼗⼀[三]迦葉品云. 衆⽣佛性猶如虛空. ⾮內⾮外. 若內外者. 云何得名 ⼀切處有. 請觀有之⼀字. 虛空何所不收. 故知經⽂不許唯內專外. 故云⾮內外等及云如空. 既云衆⽣佛 性. 豈⾮理性正因.”
허공은 모든 곳에 있으므로 안과 밖 구분 없이 있다.
여기서 안은 주관인 마음으로 유정이고, 밖은 객관으로 무정의 사물이다. 허공은 유정이나 무정 모두에 있다.
다시 말해 불성은 유정에만 있지 않고 무정에도 있다. 그러므로 무정에도 불성이 있다고 해야 한다. 유정과 무정의 보편 적 본성은 모든 존재의 참된 모습인 제법실상이다. 담연은 제법실상으로 서의 불성을 삼인불성 중 정인불성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허공 비유는 불성을 정인불성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담연은 유정불성과 허공 비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후부터 부처는 비유를 버리고 진리에 근거해서 열반과 허공이 다름을 자 세히 밝힌다. 열반이 [허공과] 다르다면, 나머지 둘 [여래와 불성]도 [허공 과] 다르다. 그러므로 『열반경』은 정인불성으로 [가섭보살의] 비판을 막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세간의 무엇이 포섭하지 않는가? 어떻게 번뇌 및 이승과 격리하겠는가? 허공이라는 말에 무엇이 해당하지 않는가? 어떻게 벽‧담‧기와‧돌 등을 버리겠는가? 이어서 부처는 다시 “허공과 열반이 함 께 삼세에 포섭되지 않지만, 열반과 여래는 깨달음과 [여실지]견이 있고, 허공은 상주이므로 [허공의 있음이 열반의 있음과] 같지는 않다.”라고 한다. 어떻게 정인불성은 연인불성‧요인불성과 다르지 않겠는가? 18)
18) 『⾦剛錍論』(T46, 781c), “佛於此後捨喻從法. 廣明涅槃不同虛空. 若涅槃不同. 餘⼆亦異. 故知. 經以 正因結難. ⼀切世間何所不攝. 豈隔煩惱及⼆乘乎. 虛空之⾔何所不該. 安棄牆壁⽡⽯等耶. 佛後復云空 與涅槃. 雖俱⾮世攝. 涅槃如來有證有⾒. 虛空常故是故不然. 豈⾮正與緣了不同.”
불성을 유정에 한정한다면, 허공 비유는 불성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허공 비유와 유정불성은 보편성과 한정에서 다르다. 담연은 불성의 보편성을 가리키기 위해 벽과 기와와 같은 무정에도 불성이 있다 고 주장한다. 즉 무정불성은 유정불성에 대해 성립한다. 담연은 불성을 정인불성으로 주장하는 무정불성에 대해 유정불성의 불성은 삼인불성중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으로 한정한다.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은 각각 수행공 덕과 지혜로서 마음의 작용을 가리킴으로써 유정에만 해당하기 때문이 다. 마음의 작용인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은 제법실상인 정인불성과 다르다.
정인불성은 연인불성‧요인불성과 다르다는 담연의 상대적 무정불성 은 이렇게 성립한다. 상대적 무정불성은 무정불성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유정불 성의 비판에 대한 담연의 반론으로 성립한다. 그는 「가섭보살품」의 허공 비유를 통해 무정불성이 『열반경』에 근거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임을 논증 하는 동시에, 불성을 유정에 한정하는 유정불성과 달리 불성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이론으로 확립한다.
2. 원융상즉의 무정불성
담연의 상대적 무정불성은 삼인불성 중 정인불성을 연인불성과 연인 불성에 상대해서 주장한다. 이는 지의의 불성론을 계승한다고 보기 어려 운 측면이 있다. 지의는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 편 담연은 『금강비론』에서 상대적 무정불성 외에 본체의 보편성[體遍]과 심구(⼼具)를 통해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곳곳에서 주장한다. 여기서는 불성과 법성(法性)의 관계를 두고 진행된 유정불성과 논쟁을 통해 무정 불성에 대한 담연의 또 다른 이해를 살펴보겠다. 손님이 공손히 물러나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었다. “물결과 물의 비유는 그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다. 나는 일찍이 어떤 사람이 『대지도론』의 ‘진여가 무정에 있으면 법성이라고만 하고, 유정 안에 있으면 비로소 불성이라고 한다.’라는 말을 인용하는 것을 들었다. 당신은 왜 [무정에] 불성이라는 이 름을 주장하는가?”19)
19) 『⾦剛錍論』(T46, 783a), “於是野客恭退吳跪⽽諮⽈. 波⽔之譬其理實然.僕曾聞⼈引⼤智度論. 云真如 在無情中但名法性. 在有情內⽅名佛性. 仁何故⽴佛性之名.”
진여는 일체법의 참된 모습으로 진여의 측면에서 보면, 일체법은 모두 평등하다. 유정불성은 일체법이 하나의 진여이지만, 무정과 유정의 차이 가 있고 이러한 차이에 근거해서 무정의 진여는 법성으로 유정의 진여는 불성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유정불성은 불성을 주관 인 마음의 본성에 한정한다. 불성과 법성에 대한 유정불성의 이원적 분 별을 두고 담연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곧 이름에 미혹하여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법(法)은 불각(不覺)의 이름이 고, 불(佛)은 각(覺)의 이름이다. 중생에게 본래 불각의 이치는 있지만, 아직 불각을 깨닫는 지혜는 있지 않다. 그리하여 또 이를 나누어 불각을 깨닫게 한다. 어떻게 불각을 깨닫는다고 할 때의 불각이 [고정적인] 불각이겠는가? 반문하면 깨달음의 대상과 깨닫는 주체가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는가?20) 법은 무정으로, 불은 유정으로 분별하는 유정불성의 주장은 『열반 경』21)의 “불은 각이고, 법은 불각으로, 이름과 의미가 모두 다르다.”라는 구절에 근거한다.
20) 『⾦剛錍論』(T46, 783a), “此乃迷名⽽不知義. 法名不覺.佛名為覺. 衆⽣雖本有不覺之理. ⽽未曾有覺 不覺智. 故且分之令覺不覺. 豈覺不覺不覺猶不覺耶. 反謂所覺離能覺耶.”
21) 『涅槃經』(T12, 636a), “善男⼦! 有法名⼀義異, 有法名義俱異. … 名義俱異者, 佛名為覺, 法名不覺, 僧名和合, 涅槃名解脫, 虛空名⾮善, 亦名無礙, 是為名義俱異.” 112 •• 한국불교학 제104집(2022.11)
유정불성은 이러한 분별에 근거해서 불성과 법성을 분별하고, 불성은 유정에만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담연은 유 정불성이 불의 각을 오해한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정불성이 법 의 불각을 무정의 지각없음이라고 분별하는 것은 불의 각을 유정의 지각 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정불성은 법성을 무정의 진여로, 불성은 유정의 진여로 분별한다. 담연은 불의 각을 깨달은 자의 지혜[能覺]로 말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 해서 법의 불각은 능각에 대해 통찰하는 대상[所覺] 즉 진여, 진리로 설 명한다. 그에 따르면, 일체법의 본성인 진여에서 보면, 일체법은 평등하 여 통찰[佛]과 통찰대상[法]으로 나눌 수 없다. 따라서 각과 불각의 구분 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불을 각으로, 법을 불각으로 나누는 것은 일체를 나와 대상으로 나누는 중생의 미혹 때문이다. 미혹의 중생에게 불의 각은 아직 없지만, 진여는 그 본성으로 있다. 부처는 중생이 수행을 통해 지혜로 진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중생의 미혹에 따라 불의 각에 대해 진여를 불각으로 시설한다[不覺之理]. 각과 불각의 이러한 관계를 담연은 불각을 깨닫는다고 할 때의 불각이 불의 각을 떠나 있을 수 없다 고 주장한다. 불의 각과 법의 불각은 능각과 소각으로 서로 의존한다. 이는 불성이 법성을 떠나 있지 않다는 것으로 법성과 불성의 불이상즉을 의미한다. 담연은 불성과 법성의 불이상즉을 공사상에 근거해서 설명한다.
무정에는 법성이라고만 하고 불성은 아니라고 한다면, 왜 『화엄경』 「須彌⼭ 頂偈讚品」은
“일체법의 자성은 무소유임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이해하면 노사나불을 본다.”라고 하겠는가? 어떻게 제법에 본래 노사나불의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법성은 본래 공적으로 가질 수도 볼 수도 없다. 본성의 공이 곧 불(佛)이고 분별적 사유를 통해 알 수 없다.”라고 한다. … 또 진실혜보살은 “일체법의 무상(無相), 이것이 곧 진불의 본체이다.”라고 한다. 이미 진불의 본체가 일체법에 있으니, 너는 이를 잘 생각하여 가르침 에 미혹되거나 나아가 불성의 진부에 미혹됨을 벗어나야 한다. 22)
22) 『⾦剛錍論』(T46, 783ab), “但名法性⾮佛性者. 何故華嚴須彌⼭頂偈讚品云. 了知⼀切法. ⾃性無所 有. 若能如是解. 則⾒盧舍那. 豈⾮諸法本有舍那之性耶. ⼜云. 法性本空寂. 無取亦無⾒. 性空即是佛. 不可得思量. … ⼜真實慧云. ⼀切法無相.是則真佛體.既真佛體在⼀切法.請⼦思之. 當免迷教. 及迷佛 性之進否也.”
제법의 본성인 법성이 곧 불성이다. 일체법은 조건에 의존해서 일어나 자성 없이 공[無⾃性, 空]으로, 법성과 불성으로 분별할 수 있는 고정된 모습이 없다[無相]. 그리하여 법성과 불성은 무자성으로 원래 분별할 수 없지만, 중생을 수행으로 이끌기 위해 법성과 불성을 나누어 시설할 뿐, 능각인 불성은 소각인 법성을 떠나 있지 않다. 법성과 불성의 불이상즉은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함의한다. 지의의 삼인불성은 『열반경』의 이인불성(⼆因佛性)에 근거한다. 『열반경』은 불성 의 의미를 정인불성과 연인불성,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의 불이상즉으로 설명한다.
지의는 이를 그의 철학적 토대인 삼위일체[삼궤, 삼덕, 삼신의 원융상즉]를 통해 원융상즉의 삼인불성으로 체계화한다.23) 법성은 통찰 의 대상인 진리, 즉 정인불성을, 불성은 진리를 통찰하는 지혜로 요인불 성에 대응한다. 연인불성은 지혜를 증장하여 깨달음의 완성을 돕는 보조 적 원인이므로, 요인불성을 떠나 있지 않다. 법성과 불성의 불이상즉에 따르면, 정인불성은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을 떠나 독립적으로 있을 수 없 다. 담연은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승의 십승관법은 법화삼매의 정체이고, 普現⾊⾝이 의지하며, 정인불성은 이를 통해 결과의 작용이 있고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의 修⾏性은 이를 통해 드러낸다. 性德의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은 [이를 통해] 개발되니 『열반경』의 진 이[∴,삼덕원융]는 이를 비유하며, 『법화경』의 큰 수레가 이르는 곳이다. 24) 이는 이불성과 행불성의 불이상즉의 의미로, 정인불성‧연인불성‧요 인불성이 각각 통찰의 대상[境]‧통찰의 지혜[慧]‧수행[⾏]의 셋으로 다 르지만, 정인불성은 요인불성을 작용하게 하며, 작용한 요인불성은 연인 불성을 이끌며 연인불성은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정인불성을 더욱 분명 히 드러나게 하는 순환적인 과정이 무한히 지속되는 일체로 설명한 지의 의 삼인불성의 원융상즉25)을 반영한다.
23) ⽥村完爾(2007), 597.
24) 『⾦剛錍論』 (T46, 785c), “當知⼀乘⼗觀即法華三昧之正體也. 普現⾊⾝之所依也. 正因佛性由之果 ⽤. 緣了⾏性由之能顯. 性德緣了所開發也. 涅槃真伊之所喻也. 法華⼤⾞之所⾄也.”
25) 久下陞(1997), 131.
법성과 불성의 불이상즉에 따르면, 유정과 무정의 분별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담연은 법성과 불성의 이원적 분별 속에서 불성을 유정에만 한정 하는 유정불성에 대해 원융상즉의 삼인불성을 무정불성이라고 이름한다.
불성론에는 무정불성의 개념이 없지만,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은 지의 불성론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다.
Ⅲ. 천태불교의 불성 의미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은 지의 불성론을 계승한다. 담연이 천태불교의 6조로서 천태지의의 불교사상에 근거해서 다른 종파불교와 구별되는 천 태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면,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을 주장함으 로써 그 목적은 달성된다. 그는 왜 원융상즉의 무정불성 외에 상대적인 무정불성을 주장하는가? 상대적 무정불성은 정인불성만을 불성의 의미 를 정의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천태지의 불성론의 일탈로 오해할 수 있 는 원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담연이 무정불성을 천태불교의 불성론으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상대적 무정불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여기서는 담 연이 『열반경』의 불성론을 교판하는 개념인 방편교와 진실교, 돈교를 통 해 그 의미를 살펴보겠다.
1. 무정불성을 주장하는 목적
담연은 『금강비론』에서 무정불성을 주장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우리가 현재와 미래를 [이롭게 하는 『법화경』과 『열반경』을] 탐구하여 원융 의 진리를 세우고자 할 때, [세상 사람들은 불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불 성이 없다는 것은 근심하지 않고, 다만 진리에 옹색해지는 것이 병폐이다. 그러므로 불성 중에 본체의 편재에 방점을 찍어 보여 간접적으로 청정진여 에 편벽해서 가리키는 것을 막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소승의 진리조차 잃어버리게 되니 불성은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는 이를 보지 못 하고 헛되이 무정에게 불성이 있는지를 논하면서 일가가 세운 목적의 큰 종지를 깨닫지 못한다.26)
26) 『⾦剛錍論』(T46, 782c), “今搜求現未建⽴圓融. 不弊性無. 但困理壅. 故於性中點⽰體遍. 傍遮偏指 清淨真如. 尚失⼩真佛性安在. 他不⾒之空論無情性之有無. 不曉⼀家⽴義⼤旨.”
현재의 원융상즉은 『법화경』이고 미래의 원융상즉은 『열반경』으로 두 경전에서 최고의 가르침은 모두 원융상즉의 불성이다.
일가 즉 천태불교의 종지인 무정불성 또한 원융상즉의 불성을 명확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은 유정불성 때문에 두 단계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불성을 유정에 한정함으로써 청정진여로 정의하는 유정불성 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하는 무정불성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 단계에서 주장한 무정불성의 의미를 오해하는 유정불성에 대해 무정불성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다.
담연은 전자를 대권명실(帶權明實)과 관련해서, 후자는 돈교의 진실교와 관련해서 설명한다.
더구나 다시 허공으로 정인불성을 비유하고, 오히려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은 [유정에] 제한하는데 [불성의 진부를 모를 수 있는가?] 가섭보살이 인용한 [여 래‧불성‧열반] 셋이 있다는 구절은 곧 『열반경』이 방편문을 지닌 교설이어서 부처는 가섭보살의 질문에 따라 셋이 모두 있다고 [한다.] 돈교의 진실 교 설이라면, 본유의 삼도 종자가 곧 이성의 삼인불성으로 원래 모든 곳에 있다. 이성에 통달하여 수행을 성취하면 수행의 삼덕 또한 모든 곳에 있다. 27) 담연에 따르면, 『열반경』의 대권명실은 「가섭보살품」과 같은 가르침이 고, 『열반경』의 돈교의 진실교설은 원융 이자[∴]의 가르침이다. 무엇을 비밀장이라고 하는가? 이자와 같으니 세 점을 나란히 해도 이자가 되 지 않고, 세로로 해도 되지 않는다. 마혜수라 얼굴 위 세 눈이 이자를 이루듯 세 점이 각각 있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도 또한 이와 같다. 해탈의 법이 열반이 아니고, 여래의 몸 또한 열반이 아니고 마하반야 또한 열반이 아니며 삼 법이 각각 서로 각각 있어도 열반이 아니다. 나는 지금 이처럼 삼법에 편 안히 머물면서 중생을 위하니, 세상의 이자처럼 열반에 든다고 한다.28)
27) 『⾦剛錍論』(T46, 782a), “況復以空譬正緣了猶局. 如迦葉所引三皆有者. 此乃涅槃帶權⾨說. 故佛順 迦葉三皆是有. 若頓教實說本有三種. 三理元遍. 達性成修. 修三亦遍.”
28) 『涅槃經』(T12, 616b), “何等名為祕密之藏? 猶如伊字, 三點若並則不成伊, 縱亦不成; 如摩醯⾸羅⾯上三⽬乃得成伊, 三點若別亦不得成.我亦如是, 解脫之法亦⾮涅槃, 如來之⾝亦⾮涅槃, 摩訶般若亦 ⾮涅槃, 三法各異亦⾮涅槃. 我今安住如是三法, 為衆⽣故名⼊涅槃, 如世伊字.”
『열반경』의 원융 이자는 불성이 여래‧해탈‧반야 삼덕의 원융상즉이 라는 의미로, 이는 곧 천태지의가 주장한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이고, 나 아가 담연이 천태불교의 종지로 주장한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이다. 여기 서는 방편교와 진실교, 돈교의 진실교을 통해 담연이 상대적 무정불성과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을 어떻게 천태불교의 불성론으로 확립하는지 살펴 보겠다.
2. 상대적 무정불성과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의 관계
1) 방편교와 진실교
담연은 『열반경』에 방편교, 진실교, 돈교의 진실교가 함께 있다고 주 장한다.
그런데 방편과 진실을 알지 못하고, 『열반경』에서 불성이라는 이름이 어떤 가르침에서 성립하는지, 무정이라는 이름이 어느 글에 한정 해서 있는지 알지 못하면,29) 불성에 대한 오해를 낳아 오히려 『열반경』 의 돈교에 대한 이해를 막는다고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에 따르면, 『열반경』의 돈교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방편교와 진실교의 의미를 알아 야 한다. 방편교와 진실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열반경』은 오직 상법과 말법 시기의 그릇된 집착을 막기 위해 정인불성‧ 연인불성‧요인불성으로 나누고 진실과 방편으로 구별해 가리킨다. 진실교 에 집착하여 방편에 대해 알지 못하면 오히려 진실을 잃고, 방편에 집착하 여 진실을 알지 못하면, 방편과 진실 모두를 잃는다.30)
29) 『⾦剛錍論』(T46, 782c), “故世不知教之權實. 以⼦不思佛性之名從何教⽴. 無情之稱局在何⽂. 已如 前說.”
30) 『⾦剛錍論』(T46, 782b), “涅槃唯防像末謬執. 分正緣了別指⽅隅. 若執實迷權尚失於實. 執權迷實則 權實俱迷.”
담연은 유정불성을 방편교로, 불성을 정인불성으로 정의하는 상대적 무정불성을 진실교로 교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정불성은 일체중생실유 불성의 가르침에 대해, 말법 시기의 어떤 중생이 불성의 “있음”을 의심 하자 불성을 삼인불성으로 나누고, 삼인불성 중 마음의 작용인 연인불성 과 요인불성을 불성의 의미로 한정하여 일체중생실유불성을 가르친 방 편교이다. 즉 중생의 근기에 따른 임시적 가르침으로, 부처가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설한 진짜 의도를 반영한 가르침은 아니다. 부처의 의도는 불성의 보편성으로 이는 정인불성을 통해 보인다. 그러므로 불성을 정인 불성으로 정의하는 상대적 무정불성이야말로 진실교이다. 담연은 방편교와 진실교의 교판을 통해, 무정불성에 대한 유정불성의 비판을 반박한다. 유정불성은 『열반경』에 무정불성의 가르침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무정불성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열반경』의 가르침이 대권명실임을 모르고, 방편교인 유정불성에 집착하여 진실교인 무정불성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나아가 담 연은 상대적 무정불성을 진실교로 교판함으로써 무정불성이 오히려 방 편교인 유정불성보다 우월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2) 돈교
『열반경』의 궁극적 가르침은 돈교의 진실교이다.
유정불성은 방편교에 집착함으로써, 진실교도 알지 못하므로 돈교의 진실교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담연은 진실교의 집착과 관련해서 다시 돈교의 진실교를 설명한 다. 진실교에 대한 집착은 대론자인 손님, 즉 유정불성의 다음과 같은 의혹에서 보인다. 당신이 잘 분별하여 참으로 커다란 의심을 부수었다. 일체법[의보와 정보‧ 유정과 무정]이 모두 정인불성을 [갖는다는 것은] 믿지만, 정인불성 중에 삼인불성이 편재하고, 수행[因]에 편재하고 과보에 편재한다고 하고, 하나의 티끌 하나의 마음이 곧 모든 중생과 부처의 심성이라고 해도 심정적으로는 아직 해결되지 않는다.31) 손님은 담연의 상대적 무정불성을 듣고, 일체중생실유불성에서 불성의 의미가 보편성에 있음을 이해하고, 무정불성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아 니라는 의심을 해소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진리[정인불성]와 불성을 분별한다. 그리하여 무정은 연인불성‧요인불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전 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정에 불성이 있는지를 의심한다. 담연에 따 르면, 이러한 의심은 진실교에 대한 유정불성의 집착 때문이다. 다시 말 해 유정불성은 진실교와 방편교의 상호 의존성을 모르고 진실교를 방편 교에 독립적인 가르침으로 분별하여 돈교의 원융상즉으로서의 정인불성 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담연은 유정불성의 집착을 『법화경』의 개권현실32)을 통해 해소함으로 써 유정불성에게 돈교를 드러내 보인다. 지의는 『법화경』의 개권현실을 절대묘(絶待妙)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절대묘는 용수의 공사상에 근 거해서 진실교와 방편교의 이원성을 해체하여 방편교즉진실교를 드러내 는 가르침이다.33)
31) 『⾦剛錍論』(T46, 783c), “仁善分別實壞重疑. 信⼀切法皆正因性. ⽽云正中三因種遍修遍果遍. ⼜云 ⼀塵⼀⼼即⼀切⽣佛之⼼性. 情猶未決.”
32) 『⾦剛錍論』(T46, 782b-c), “此世⼈不知教之權實.如⼆乘⼈處處聞⼤.尚⾄法華⽅信⼰性.悔來⾄此財 ⾮⼰有.此豈⾮⼦不知⽗性耶.聞開權已.⽅云⼝⽣化⽣有分.故涅槃中猶恐未來⼀分有情不信⼰⾝有如來性 及謂闡提未來永斷.⽰令知有及以不斷.豈部內諸⽂全無頓耶.”
(이 세상 사람들은 가르침에 방편교와 진실교가 있음을 모른다. 마치 이승들이 곳곳에서 대승의 가르침을 들어도 법화시에 이르러서야 자기의 본성을 믿고, [화엄시에는] 여기에 이른 것을 후회하고, [반야시에는]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아들이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방 편을 열어 진실을 보이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사리불이] 가르침의 자식이고 가르침의 교화의 자식이어서 가르침의 후계자라고 한다. 그리하여 『열반경』 중에는 미래에 어떤 유정[⼀分有情]이 자기에게 여래성이 있음을 믿지 않거나, 일천제는 미래에 부처가 될 선근을 영원히 끊었다고 말 할 것을 두려워하여, 있다고 하고 또 끊지 않았다고 가르쳐 알게 한다. 어떻게 『열반경』의 모든 글에서 돈교의 가르침이 전혀 없겠는가?)
33) 『法華⽞義』(T33, 696c-697a), “⼆, 絕待明妙者, 為四 … 四, 圓教若起, 說無分別法, 即邊⽽中, 無⾮佛法, 亡泯清淨. 豈更佛法待於佛法? 如來法界故, 出法界外, 無復有法可相形⽐. 待誰為麁? 形 誰得妙? 無所可待, 亦無所絕, 不知何名, 強⾔為絕.”
(두 번째로 절대로서의 묘를 설명하면 네 가 지이다. … 넷째, 원교를 일으키면, 무분별법을 설한다. 변이 곧 중도이다. 불법이 아닌 것이 없다. 모든 분별이 사라져 청정하다. 이미 불법인데 어떤 법을 기다려 불법이라고 하겠는가? 여래 법계이므로 법계를 벗어나 다시 비교할 수 있는 형상이 없다. 누구를 기다려 추로 삼고, 누구를 기다려 비교해서 묘라고 하겠는가? 대대가 없기 때문에 끊을 것도 없다. 어떻게 이름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억지로 절대라고 한다.)
개권현실에 따르면, 진리교인 상대적 무정불성은 방편교인 유정불성에 의존해서 성립한다.
상대적 무정불성은 불성을 삼인불성 중 정인불성으 로 정의한다. 이는 유정불성이 불성을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으로 정의하 여 유정에 불성을 한정하는 폐단을 고치기 위해 삼인불성 중 정인불성을 강조할 뿐,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을 떠나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 다. 다시 말해 상대적 무정불성의 정인불성은 연인불성‧요인불성을 함 의한다. 중생은 정인불성을 가지며, 법신과 평등하다고 하면서, 보신‧화신과 평등 하지 않다고 하면, 도리어 중생과 중생의 평등함만 성립한다. 왜 그러한가? 보신과 화신을 배제하면 이는 오히려 중생이다. 또 만약 보신과 화신을 갖 는 법신과 같다고 한다면 이는 妙法⾝으로 보신 화신과 다르지 않다.
이로써 말하면 [법신, 보신, 화신] 모두와 평등하다.
34) 상대적 무정불성은 불성을 “진리의 본성인 정인불성”으로 정의한다. 담 연에 따르면, 정인불성은 삼신 중 법신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법신만을 가리킨다면, 이는 법신에 근거해서 중생과 중생의 평등함을 말할 뿐 부처 와 중생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생이 불성을 자신의 본성으 로 갖는다는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은 부처와 중생의 불이상즉을 의미한다.35)
34) 『⾦剛錍論』(T46, 786a), “若⾔衆⽣有正因性與法⾝等. 不與報化等者. 還成衆⽣與衆⽣等. 何者若除 報化猶是衆⽣. 若⾔等於有報化之法⾝. 其如法⾝⾮報化外. 以是⾔之故須悉等.”
35) 下⽥正弘(1989), 81.
부처의 본성은 법신‧보신‧화신을 모두 갖는다.
따라서 불성의 삼신과 삼덕이 원융상즉이듯이, 정인불성 또한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을 포함해야 한다.
개권현실을 통해 상대적 무정불성의 정인불성은 원융 상즉의 정인불성으로 재해석된다.
담연은 개권현실을 통해 드러난 원융상즉의 무정불성이 곧 『열반경』의 돈교의 진실교라고 주장한다. 담연에 따르면, 불성과 관련해서 『열반경』에는 방편교, 진실교, 돈교 의 진실교의 여러 가르침이 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르면 『열반경』의 돈 교인 원융상즉의 불성은 분명히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돈교의 진실교는 『법화경』의 개권현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불성과 관련해서 가장 권위 있는 『열반경』조차 『법화경』에 의존해 있다. 그러므로 『법화경』이 모든 대승불교의 경전 중 가장 뛰어나며,36) 천태불교는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성립한 종파불교로 여러 종파불교에 대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
36) Pap(2019), 137.
담연은 개권현실을 통해 천태불교의 무정불 성이 『열반경』에 근거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임을 증명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여러 종파불교에 대해 천태불교의 절대적 우월성을 증명한다.
Ⅳ. 결론
담연의 무정불성은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주장하는 불성론으로, 천태 지의의 불교사상을 계승한다.
그는 무정불성을 통해, 여러 종파불교에 대해 천태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천태불교의 우월성을 증명 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여러 종파불교가 자기 종파의 우월성을 배타적으 로 주장하던 8세기 중국불교의 상황 속에 진행되었다. 이는 지의가 아직 종파적 대립의식이 명확히 성립하기 전인 6세기경 그의 사상을 체계화 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차이가 있다. 지의는 중국에 전해진 기존의 다양한 불교 이론을 하나의 체계 속에 통합하고자 했던 반면,37) 담연은 천태지의의 불교사상에 근거한 천태불교를 다른 종파불교에 대해 차별화하고 이를 통해 배타적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체계화했다.
37) Donner & Stevenson(1993), 3.
그 결과 담연이 체계화한 천태불교는 지의 불교사상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 라, 어떤 개념의 선택적 강조나 의미의 확장을 필연적으로 수반했다. 논 쟁과 대립 속에 성립한 사상은 논쟁 상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담연이 천태불교의 불성으로 주장한 무정불성이 대표적 예이다.38) 담연의 무정불성은 그가 논쟁했던 상대인 화엄불교와 선불교의 유정 불성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 없다. 무정불성은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주 장한 천태지의의 불성론을 계승한다. 원융상즉에 근거하면, 무정과 유정 ‧법성과 불성‧정인불성과 연인불성‧요인불성의 이원적 분별은 성립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담연은 불성을 유정에 한정하는 유정불성에 대해 불성의 보편성을 확립하기 위해 “유정”에 대해 “무정”이라는 개념을 선 택하고, 불성을 연인불성과 요인불성으로 한정하는 유정불성에 대해 삼 인불성 중 정인불성을 강조해서 천태불교의 불성을 무정불성이라고 한 것이다. 담연의 무정불성은 유정불성을 주장하는 다른 종파불교와 논쟁 속에 서 천태불교의 불성을 차별적으로 확립하고 나아가 천태불교의 우월성 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방법론적 틀39)이라고 할 수 있 다. 이는 그가 원융상즉에 근거해서 무정불성의 무정을 유정과 이원적으 로 분별하는 것을 끊임없이 비판하거나40) 개권현실을 통해 정인불성을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으로 재해석하고 삼인불성의 원융상즉을 천태불교의 불성론으로 주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38) Penkower(1997), 1307-1311.
39) Penkower(1997), 1307.
40) 『⾦剛錍論』(T46, 785b), “圓⼈始末知理不⼆. ⼼外無境誰情無情. 法華會中⼀切不隔.”
(원교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치의 불이를 알고, 마음 외에 다른 경계도 없으니 누가 감정이 있고, 감정이 없겠는가? 법화회에서는 어떤 존재도 소외되지 않는다.)불교의 진리는 불변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불교의 개념은 철학자가 직면한 당대의 문제의식과 밀접히 관련해서 변화한다.
이는 중국불교사 상사의 긴 시간에 걸쳐 나타나는 다양한 불교 개념의 이해를 위해 그 개념을 주장한 철학자가
당면한 당대의 문제의식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임 을 말해준다.41)
41) Shuman Chen은 무정불성의 이해와 관련해서 무정불성은 천태불교의 원교의 맥락에서 탐구해 야 하며, 무정불성을 원돈지관에서 초목성불(草⽊成佛)로 그 중심을 옮겨 전개하는 논의는 자연 에 근거한 토착적 문화를 배경으로 둔 일본 천태승려의 이해에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무 정불성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두 문화 간의 교류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Chen(2011), 101. 이는 무정불성의 이해와 관련해서 참고해야 할 중요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담연의 무정불성도 예외가 아니다.
참고문헌
1. 약호 및 원전류
『⼤般涅槃經』(T12, no.375) 智顗, 『法華⽞義』(T33, no.1716) 智顗, 『摩訶⽌觀』(T46, no.1911) 湛然, 『⾦剛錍論』(T46, no.1932)
2. 단행본 및 논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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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Meaning of Buddha-nature in the Tiantai Buddhism - Focusing on Zhan-ran and the Buddha-nature of Insentient Beings -
Kim, Junghee(Inha University)
This article is an inquiry into the meaning of Buddha-nature in Tian-Tai Buddhism by examining the Buddha-nature of insentient beings according to Zhan-ran. This examination is done in relation to the threefold Buddha-nature of Zhi-yi. This article is divided into two parts. The first part examines the direct-cause of Buddha-nature (正因佛性) in insentient beings. The direct -cause of Buddha-nature is defined in two ways. The relative directcause of Buddha-nature and the nondual direct-cause of Buddha-nature. Part two examines the Buddha-nature of insentient beings in relation to the doctrinal classification theory (敎相判釋). Accordingly, there are several teachings in the Nirvāṇa sūtra regarding Buddha-nature. The Buddha-nature of sentient beings is classed as the relative teaching (⽅ 便敎) or the relative direct-cause of Buddha-nature as the true teaching (眞實敎). The nondual direct-cause of Buddha-nature is classed as the ultimate teaching (頓敎). It is asserted that the meaning of nonduality of the ultimate teaching in the Nirvāṇa sūtra is interpreted only through “the opening up of the relative teachings, in order to reveal the absolute (開權顯實)” in the Lotus sūtra. The superiority of Tian-tai Buddhism is shown through the doctrinal classification theory. The Buddha-nature of insentient beings according to Zhan-ran can be evaluated as a methodological framework for establishing the theory of Buddha-nature according to Zhi-yi.
It can be said that it redefined Zhi-yi’s thoughts in the debate with other sects of Chinese Buddhism.
Keywords Tian-Tai Buddhism, Zhi-yi, Zhan-ran, Buddha-nature of insentient beings, threefold Buddha-nature, the direct cause of Buddha-nature, the doctrinal classification theory.
논문투고일: 2022. 10. 11. 심사완료일: 2022. 11. 2. 게재확정일: 2022. 11. 10
『한국불교학 제104집, 101-126쪽 서울: (사)한국불교학회, 202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