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 박정순
둥근 지구 품에 안겨
둥글게 수그려 엎드렸다가
햇살 부름 받고 올라온 너
벌레야 오지 마라
토끼도 먹지 마라
염소도 비껴가라
목숨 부지할 만큼의 독을 쥐고
꼿꼿이 몸 세우려는데
오그려 쥔 손 펼치기도 전에
꺾고 삶고 말리고
다시 삶고 불리는 손
독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지만
구르고 뒤집히며 졸아드는 가슴
꼬불꼬불 고사리
고사리가 고소해
씁쓸함이 고소해질 때까지
오래오래 들볶이는
삶은
고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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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개의 초록
마종기
초여름 오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마흔 두 개의 초록을 만난다.
둥근 초록, 단단한 초록, 퍼져 있는 초록 사이,
얼굴 작은 초록, 초록 아닌 것 같은 초록,
머리 헹구는 초록과 껴안는 초록이 두루 엉겨
왁자한 햇살의 장터가 축제로 이어지고
젊은 초록은 늙은 초록을 부축하며 나온다.
그리운 내 강산에서 온 힘을 모아 통정하는
햇살 아래 모든 몸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물 마시고도 다스려지지 않는 목마름까지
초록으로 색을 보인다. 흥청거리는 더위.
열차가 어느 역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
바깥이 궁금한 양파가 흙을 헤치고 나와
갈색 머리를 반 이상 지상에 올려놓고
다디단 초록의 색깔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다.
정신 나간 양파는 제가 꽃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 주일을 골라 친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마흔두 개의 사연이 시끄러운 합창이 된다.
무겁기만 한 내 혼도 잠시 내려놓는다.
한참 부풀어 오른 땅이 눈이 부셔 옷을 벗는다.
정읍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