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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계종(羅繼從) 연보(『죽헌유집』(竹軒遺集) 부록)
나종혁 국역
1339년 충숙왕(忠肅王) 8년 기묘(己卯)년 3월 9일 1세 고봉현(高峯縣) 송천동(松川洞) 출생(구 경기 고양 송천동; 현 서울시 강북구 송천동). 남다르게 뛰어남이 있었으며, 등에 6개의 점이 있었다. 태성(台星)의 별과 같은 모습이라고 해서 이름을 태석(台錫)이라고 붙였다.
1340년 충혜왕(忠惠王) 원년 경진(庚辰)년 6년 2세 집의 동쪽 우물가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잠이 들었을 때 함안군 부인(咸安郡夫人)이 학질에 걸렸다. 베개에 기대어 자다가 돌연 꿈을 꾸었는데, 우물 속에서 푸른 용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기이한 기운이 하늘을 올랐다. 놀라서 바로 사람들에게 우물을 보라고 했다. 선생이 물 바닥으로 떨어졌고, 연꽃 향의 미각에 이끌렸는가 싶다. 급히 구조해 천만다행으로 소생했다.
1341년 신사(辛巳)년 원년 1월 3세 전염병이 오래 돌아 치료가 불가했다. 문을 만드는 소년이 있었으나 성명도 알 수 없었다. 자칭 동악산인(東嶽山人)이라고 했다. 단약(丹藥)을 주며 3일을 복용하면 효과가 있다고 했다.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갔다.
1342년 임오(壬午)년 2년 4세 아직 말을 못했다. 정월 음력 보름날 이(李) 찬성(贊成) 문효공(文孝公)이 선생의 아버지 사재(思齋)를 방문했다. 화분에 심을 작은 매화나무를 미리 찾았다. 선생이 듣고, 집안의 노비를 바로 불렀다. 서원(西園)의 꽃 계단 아래로 가서 눈이 쌓인 곳을 파보면 작은 묘목 몇 그루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찬성이 크게 기뻐했다.
1343년 계미(癸未)년 3년 5세 붓을 들고 「정직」(正直)이라고 큰 글씨로 썼다.
1344년 갑신(甲申)년 4년 6세 말을 시작했다. 아직 말이 서툴렀다. 밤에 촛불 없이 앉아서 『소학』(小學) 편 내규를 암송했다. 관례 5~6장에 매우 숙달했다. 사재가 놀라 묻자 대답하기를, 작년에 숙부가 이 책을 읽게 했다고 말했다는 예로부터 전래 되는 이야기가 있다.
1345년 충목왕(忠穆王) 원년 을유(乙酉)년 5년 7세 사재가 『소학』의 천자(千字)를 초록으로 옮겼고, 종류별로 모아 가르쳤다. 일기(日記)가 450자였다. 한 번 보고 쉽게 옮겼다.
1346년 병술(丙戌)년 6년 봄 8세 『소학』에 입문하고, 사재가 친히 과제를 주었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에 도달하면, 반복해서 설득하며 가르쳤다. 겨울이 되어 마침내 책을 끝마쳤다.
1347년 정해(丁亥)년 7년 9세 사재가 『소학』을 복습하게 했다. 해가 가도록 쉼이 없었다. 길고 짧은 시를 지었다. 입을 열고 문장을 이어갔다. 시 「영반석」(詠磐石)은 이렇다.
개울가 푸른 돌 하나
큰 해에는 짝과 같지도 않아
도당 씨와 유우 씨의 치적을 바라나니
바위는 오랜 세월 말이 없도다
溪畔一蒼巖
大年無與儷
欲問唐虞治
千秋石不語
시중 이능간(李凌幹)이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길, 금성군(錦城君) 집안에 다시 명현(名賢)이 났다고 했다.
1348년 무자(戊子)년 8년 10세 『논어』(論語)를 읽고 틈이 나서 『사기』(史記)를 골라 예와 지금을 섭렵했다. 사재의 지도가 지엄해져 효제(孝悌)의 선생이 되었다. 예(禮)가 아니면 말을 말고,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非禮勿言 非義勿行)고 했다.
1349년 기축(己丑)년 9년 충정왕(忠定王) 원년 11세 선생의 학업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해서 사재가 선생이 된 셈이었다. 송악(松嶽) 송하동(松下洞)에 정사(精舍)를 건립하고, 장서를 수리하는 곳으로 썼다. 옛날에 입정(入定)한 승려 호연(浩然)이 말하길, 백 년 후 송천동에는 마땅히 명망 있는 선비가 수학하고 있을 터 귀한 과실이란 귀공자의 평론이다. 영남 처사(處士) 김의서(金義緖)가 성격이 바르고 엄했으며 문학(文學)으로 번성했으니 학비를 더해 정사에 초대해서 강습했다.
1350년 경인(庚寅)년 10년 충정왕 2년 정사에 머물며 선생이 과제를 학습했고, 김(金) 처사(處士)도 계속 상주했다.
1351년 신묘(辛卯)년 11년 충정왕 3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과제를 학습했다.
1352년 임진(壬辰)년 12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과제를 학습했다.
1353년 계사(癸巳)년 13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과제를 학습했다. 공민왕(恭愍王)이 선생의 명망을 듣고 사서 육경(四書六經) 각 한 질을 하사했다.
1354년 갑오(甲午)년 14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과제를 학습했다. 봄에 관례(冠禮)를 행했다. 사재가 관료와 귀빈 모임을 마련해 세 차례 축하 의례를 베풀었다. 이름을 계도(啓道)라고 내리고 자(字)는 술현(述贒)이라고 했다.
1355년 을미(乙未)년 15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과제를 학습했다. 봄에 돌아가신 찬성(贊成) 문효공 한주(韓州) 이(李) 씨 이곡(李穀)의 세 번째 사위가 되었다.
1356년 병신(丙申)년 16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책에 대한 마음이 사물과 같지 않았으며, 역시 시가와 문장도 같지 않았다. 염천(鹽泉)과 낙강(洛江)의 여러 현인들의 책을 모아 성리학을 익히 연구하니 밥을 잊고 분발할 만했다.
1357년 정유(丁酉)년 17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과제를 학습했다. 여름에 포은(圃隱) 정(鄭) 선생이 중감시를 보러 서울로 가다가 선생을 방문해서 정사에서 수개월을 머물렀다. 선생은 하늘과 인간이 하나의 이치라는 말을 했다. 하나의 이치가 묘하게도 만 가지로 나뉘며, 누누이 수백 마디에 이른다. 포은이 말하길, 나의 벗이 하늘의 자태에 고명하기까지 하니 일을 할수록 잘해서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1358년 무술(戊戌)년 18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과제를 학습했다. 김 처사가 늙고 병들어 고별하고 귀향했다.
1359년 기해(己亥)년 19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학문을 닦고 연구했다. 사재가 여러 가지를 함께 수련하고 과거에 응시하도록 했다. 선생이 육경의 의(義)를 시문으로 해석했다. 사서의 의(疑)를 시문으로 설명하거나 과문으로 부를 지었다. 송(頌)을 짓고, 시무책(時務策) 등 수백 편을 썼다. 화려한 수식의 사조(詞藻)를 찾지 않았다. 오직 정확하고 진실한 것만을 중시했다. 둔촌(遁村) 이 선생에 의하면 진사 최수강(崔壽崗)이 말하길, 술현(述贒)은 과거 시험에는 시문이 있고 유의가 미비하더라도 다만 이치로써 옛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압도했다.
1360년 경자(庚子)년 20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학문을 닦고 연구했다. 9월에 중시 국자감시에서 제9인에 들었다. 당시, 어사대부 이교(李嶠)가 시험을 주관했다.
1361년 신축(辛丑)년 21년 겨울에 선생이 정사에서 조정에 들기 위해 서울로 돌아오다가 안화문(安和門) 밖에 이르러, 듣자 하니 청백리로 불리던 전 어사 김응상(金應商)의 처자가 유약해서 7일장을 치른다고 했다. 가난해서 염을 하지 못했고, 선생이 그 사람에게 광목을 주었다. 슬픈 생각이 들었고 부의를 하고자 했다. 서둘러 물건을 취합하고 말을 버리고 말에서 내렸다. 시종에게도 알리지 않고 개인 일로 말을 떠났다가 또 황급히 역마까지 걸어서 말에 올라 돌아왔다. 물건을 내려준 후에 사재에게 갔다. 삼베와 무명으로 각 십 필씩 부의를 보냈다. 문경공(文敬公) 이강(李岡)이 말하길, 가다가 듣자 하니 상을 당한 사람이 있다고 하여 말에서 내렸소. 어찌 예를 치러야 하오? 선생이 답하길, 예를 베풀지 아니한다고 했다. 문경공이 이에 탄복하고 칭찬했다.
1362년 임인(壬寅)년 22년 선생이 정사에 머물며 학문을 닦고 연구했다. 10월에 우시중 홍언박(洪彥博) 지공거, 지부첨의 유숙(柳淑) 동지공거가 시부(詩賦) 시험을 주관했다. 선생은 중시 제17인이었다.
1363년 계묘(癸卯)년 23년 봄에 선생은 설사병이 심했다. 사재는 정사로 갔다. 돌연 동악산인(東嶽山人)이 다시 한번 당도해 단약(丹藥)을 주었다. 수십 알이었다. 7일간 복용했다. 산인이 말하길, 의사 가문에서 오진이 날까 두렵습니다. 부득이 번거로워도 삼가하노니, 오직 공만이 스스로를 아껴 자애롭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바로 떠났다. 11월 장자 백훈(伯勳)이 태어났다.
1364년 갑진(甲辰)년 24년 정월 사재가 상을 당했다. 장례는 고봉현(高峯縣) 갈산(葛山)에서 치렀다. 장례 제도는 모두 옛 예식을 좇았다. 이 당시에도 상례는 땅에 떨어지고 폐기되었었다. 선생은 홀로 3년 상을 치렀다.
1365년 을사(乙巳)년 25년 선생이 임시 오두막에 머물렀다.
1366년 병오(丙午)년 26년 봄에 선생이 상례를 끝마치고, 정사에 머물며 학문을 닦고 연구했다.
1367년 정미(丁未)년 27년 2월 보통사랑 선임, 춘추관검열, 8월 징사랑수찬 승진, 9월 둘째 아들 숙훈(叔勳) 출생
1368년 무신(戊申)년 홍무 원년 1월 선덕랑감찰사규정 겸 성균관순유박사에 제수. 성균관에 머물며 경전을 강론했다. 쌓인 미발간 자료들을 여러 권 주해 집주했다. 조정의 선비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운봉(雲峯) 호(胡) 씨의 사서 통각을 얻게 되었다. 관복을 입은 지 19일 만에 봉승랑에 전보되었고, 전리좌랑 겸 예문관공봉이 되었다. 「경제책」(經濟策)을 개진하고 16조를 제시했다. 모두가 시무(時務)에서 바로잡을 일이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완전한 지식에 이름)로써 선생이 되었다. 왕이 시종일관으로 칭찬하고 감탄했다. 그러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9월 서령군(瑞寧君) 유숙(柳淑)이 신돈(辛旽)에 의해 교살되었다. 선생은 글을 지어 애도했다.
1369년 기유(己酉)년 2년 2월 문하우정언. 선생이 천재지변(天災地變)을 우려했다. 「천경록」(天警錄)을 개진하고, 덕이 제사에 이르도록 수양을 청했다. 9월 조봉랑 사헌부시사 승진. 당시의 역적모의로 신돈이 정치를 혼란시켰고, 국가 세력이 위태롭고 험해졌다. 또 궁중에서 나쁜 소문이 들렸다. 마을 밖까지 퍼진 이야기였다. 참지 못하고 직언을 했으며, 선생은 책문으로 되돌렸다. 시사(時事)에 대한 극단적 논의가 터졌다. 대부인(大夫人)이 이를 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당신의 가문이 국가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것은 언론의 직분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조정에 보탬이 된다면, 마땅히 가다듬어 말을 다할 것입니다. 비록 죽음으로 저버려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만일 시대의 대세를 믿을 수 없다면, 위험한 말을 망발하는 일이며, 종묘사직(宗廟社稷)에도 일체 이로움이 없는 일입니다. 몸을 굽히고도 혹심한 화를 받는 셈이며, 그런즉 조정의 사도가 되는 셈입니다. 바른 선비의 이름에는 주검의 벌이 있고, 세족 세가에는 제사를 끊는 무자비함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충(忠)이 되는가요 효(孝)가 되는가요? 당신는 장차 어디에서 노년을 보낼 것인가요? 하고 말했다. 선생이 은퇴 후에 점을 치니, 기자(箕子)의 밝고 온화함과 조우했다. 소(疏)를 불태우기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인하여 귀향을 청하고 노모를 부양했다.
1370년 경술(庚戌)년 3년 1월 선생이 송천동으로 귀환했다. 가을에 갈산(葛山)의 사재 묘비를 수리했다.
1371년 신해(辛亥)년 4년 5월 정언 이존오(李存吾)가 사망했다. 선생은 문하생 박성수(朴聲秀)를 보냈다. 하사한 글을 읽고 곡을 했다. 9월 셋째 아들 중훈(仲勳)이 태어났다. 3일을 지나며 대부인이 새벽에 출산했다. 종중이 술을 가지고 와서 축하했다. 선생은 어머니가 새벽에 아기를 낳자 시 3수를 지었다. 「감군은가」(感君恩歌) 9장이다.
1372년 임자(壬子)년 5년 봄 선생이 나주성(羅州省)의 선산 묘역에 갔다. 묘각 아래에서 글을 거듭 짓고, 편액으로 옛일을 추억했다. 일기도 병기했다.
1373년 계축(癸丑)년 6년 봄 선생은 집을 내외당(內外堂)으로 분가했다. 내당은 과학(課學)이라 했고 수재들이 모여들었으며, 외당은 수학(修學)이라 했고 벗들이 모여들었다. 강학을 거두지 않았다. 의리(義理)의 정수를 모으니 속에 39조가 있었다. 각 편은 송천 시절의 견해를 언급했다. 목은(牧隱) 이 선생이 이어서 말하길, 술현(述贒)은 학문을 논했으며, 칼로 대나무를 가르는 지조(志操)와 같았다. 깊은 분석에 조리(條理)가 있었고, 소득이 극히 높았다. 단지, 자기 자신을 너무 직접적으로 다루어 화를 면키 어려울까 두려웠다.
1374년 갑인(甲寅)년 7년 2월 정포은(鄭圃隱)이 경상도로 출장을 갔다. 주상(主上)이 묻자 신하가 말하길, 홍문관 유신은 기거할 데가 제공됩니다. 지금 정몽주(鄭夢周)는 재외(在外)에 머물고 있습니다. 누구를 내부 승진으로 발탁할 것인가? 전리정랑 김의로(金宜輅)가 대답하길, 전 시사(侍史) 나계도(羅啓道)입니다. 문장이 정교하고 박식합니다. 사람의 됨됨이가 충실하고 강직합니다. 일을 맡으면 변하지 않는 절의가 있습니다. 주상이 말하길, 나계도는 여러 해 고향에 머물고 있다. 벼슬을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 명현을 알 만하다. 특별히 교지로써 소집을 하교했고 이미 당도했으니, 통직랑 문하기거사인에 임명한다. 3월 천봉선대부, 소부사소윤. 주상의 생질이 와서 축하했다. 선생이 말하길, 지금은 늦도록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다만 성은(聖恩)이 크고 막중할 따름입니다. 생사를 달리하는 영원한 이별(永訣)은 인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되돌아보면, 중요한 기로에서는 다방면으로 노력했어야 할 것입니다. 7월 중정대부 좌사의대부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임명. 8월 진정순대부 좌상시 예문관제학. 이때 한림원으로 바뀌어 예문관이 되었고, 승지(承旨)로 바뀌어 제학이 되었다. 주상이 말하길, 경은 평소에 두터운 명망이 있소. 부러운 데가 있소. 가장 뛰어난 경의 옛 사당의 선조 문절공(文節公)의 명망과 뜻을 취합하여 이에 서명하오. 경의 가문의 유훈(遺訓)을 덧붙이게 될 것이오. 경은 능히 선조들의 뜻을 계승할 것이오. 그 위대한 열조(烈祖)를 따르시오. 사실상 조정의 경사가 되리니 특별히 이런 뜻을 취합하여 이름 계종(繼從)을 하사하오. 경도 그리 염두에 두오.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신이 비록 목숨을 건지기 어렵다 해도, 성은의 교지를 잊으리까? 퇴정해서 자(字)를 술선(述先)으로 바꾸었다.
갑신(甲申)년 9월 홍윤(洪倫; 신라의 인물)이 왕을 시해했고, 고려에서 신우(辛禑)가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선생은 빈전(殯殿)에서 통곡했다. 즉시로 귀가했고,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했다.
경신(庚申)년 10월 왕(공민왕)이 현릉(玄陵)에 안장되었다. 선생이 장례용 수레를 타고 서둘러 능 아래에 도착하니 이미 안장된 후였다. 송천동으로 되돌아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거듭 호를 송은(松隱)이라고 했다. 매년 1월에 현릉에 참배했다. 바람 불고 눈이 와도 그만두지 않았다.
1375년 을묘(乙卯)년 8년 신우(辛禑)가 참범하던 해였다. 2월 선생은 송천동 학등곡(䳡藤谷) 깊은 곳에 작은 집을 건축했다. 이로써 서숙(棲宿)의 장소가 된 셈이었다. 10월 정포은(鄭圃隱)이 권세를 꺼리다가 언양(彥陽)으로 귀양갔다. 조정의 신하들도 감히 환송하지 못했다. 오직 선생만이 술을 가져와서 전별(餞別)했다. 12월 신우로써 이전의 직책으로 불리었다. 병 탓으로 오르지 않았다.
1376년 병진(丙辰)년 9년 선생이 송천동에 머물렀다. 여름에 전리판서(6부 정3품)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학등곡의 집에 불이 났다. 12월 넷째 아들 계훈(季勳)이 태어났다.
1377년 정사(丁巳)년 10년 선생은 송천동 서원(西園)에 별재(別齋)를 건축했다. 세자가 경서와 송나라 제현들의 책을 왕명으로 하사했다. 노년까지의 연구 계획이 갖추어졌다.
1378년 무오(戊午)년 11년 7월 정포은이 일본에서 귀국했다. 시를 적은 두루마리가 있었다. 선생이 두루마리의 제목을 보자 주상이 말하길, 많이 쌓아둔 맑은 시로다. 산수의 기록으로 가득한 시문이오. 군자가 보기에도 청렴함이 적지 아니하오. 낭송하고 노래하여 진주와 옥을 이루니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알리고 암송했다.
1379년 기미(己未)년 12년 선생이 별재에 머물렀다. 윤달 오월에 설사병이 났다. 「소병론」(蘇病論)이 있으니, 이로써 백성의 뜻을 되살리기에 이르렀다.
1380년 경신(庚申)년 13년 봄과 여름 사이에 멀고 가까이에 왜군 오랑캐가 출몰해 물리쳤다. 백성들이 모두 농사를 접고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선생은 집안의 하인들을 데리고 논밭을 갈고 김을 매는 때가 늦지 않게 관리했다. 송천동 부근의 땅이었다. 혼자서 늦게까지 농사를 관리했다. 10월 대부인이 상을 당했다. 12월 장례를 치렀고, 사재의 묘역에 합장되었다.
1381년 신유(辛酉)년 10월 선생이 오두막에 머물렀다.
1382년 임술(壬戌)년 15년 선생이 오두막에 머물렀다.
1383년 계해(癸亥)년 16년 봄 선생은 상례를 다하고, 나주성 선산 묘역에 참배했다. 당시의 교지를 따라 금강(錦江)을 지나는 길이었다. 어부들이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목격했다. 교지의 말씀은 이러했다. 옛날에 어떤 사람에게 그물이 여럿 있었다. 더러운 물웅덩이에는 들어가지 않고, 아직 자라지 않은 물고기는 잡는 것을 금했다. 선생에게는 물고기 잡는 것을 보고 쓴 시가 있다. 이로써 군자(君子)는 소중한 것에 대한 사랑(仁)을 말했다. 어부가 이를 듣고 감탄하며 그물 여러 개를 거두어들였다.
1384년 갑자(甲子)년 17년 7월 밀직우대언에 제수되었다. 「진경부」(秦京賦)를 썼다. 현직의 일을 맡아 의견을 피력했다.
1385년 을축(乙丑)년 18년 봄 같은 현(縣)의 유생 이인학(李仁學)이 임금이 하사한 사서(四書)를 빌려달라고 청했다. 선생이 말하길, 임금이 하사한 것은 빌려줄 수 없어 다른 책을 가져다주면서 이미 빌려주었다고 했다. 이 씨의 집에 불이 나고 도적질을 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도적 떼가 밤에 이 씨의 집 문에 당도했다. 사서가 환수되었다고 말했다. 책마다 나 선생의 손길이 닿아있었다. 우리 무리는 의적이외다. 이런 것을 가져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1386년 병인(丙寅)년 19년 9월 1일 소부판사(종3품)에 제수되었다. 듣자 하니, 상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 말에서 바로 내렸지만, 바른 예도는 아니었다. 은율(殷栗; 현감)로 좌천되었다. 「애송경」(哀松京)을 지었다. 갈산을 바라보며, 굴원(屈原) 등이 지은 부(賦)를 회고했다. 이로써 자기의 지조(志操)를 보였다.
1387년 정묘(丁卯)년 20년 5월 전라도 유생 이성묵(李誠默) 등의 상소로 인하여 논쟁 끝에 선생의 고향 마을 귀향이 허가되었다. 6월 나라가 변하기 시작했다. 만주인의 복제(服制)가 중화의 제도를 따랐다. 선생이 의관을 짓고, 사당에 먼저 고하고 옷을 갖춰 입었다.
1388년 무진(戊辰)년 21년 선생은 송천동 별재에 머물고 있었다.
1389년 기사(己巳)년 22년 공양왕(恭讓王) 원년
1390년 경오(庚午)년 23년 선생은 풍을 앓았다. 일년내내 침상에서 보냈다. 12월 왕이 특별히 하교를 내릴 때까지 말을 삼갔다. 좌상시 예문관제학(정3품)에 복직되었다. 병세가 심해도 조정으로 나아갔다. 송하동 정사에 되돌아가는 것만도 감사했다. 왕이 말하길, 근처에 머물러 계시오. 병이 있어도 벼슬을 버리지 말라고 했다.
1391년 신미(辛未)년 24년 1월 풍이 심했다. 벼슬을 포기하고 송천으로 귀향했다. 9월까지도 낫지 못했다. 소(疏)가 봉해져 있는데 13건의 조례였다. 사서 『야사통회』(野史通會) 20권 완성. 12월 둘째 아들 숙훈(叔勳) 사망.
1392년 임신(壬申)년 25년 1월 현릉에 다녀왔다. 별재 화재. 동서 4실의 고서들이 불에 탔다. 4월 정포은 순절. 7월 고려 멸망. 10월 1일 현릉에서 곡을 했다. 나주로 집을 환향했다. 석간동(石澗洞)에 거주했다. 초가를 별채로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호를 죽헌(竹軒)이라고 했고, 송나라 제현들의 서적 수백 권의 경전들을 보유했다.
1393년 계유(癸酉)년 26년 1월 현릉에서 곡을 했다. 「술회부」(述懷賦), 「사회부」(瀉懷賦), 「애시부」(哀時賦) 등이었다.
1394년 갑술(甲戌)년 27년 1월 「구현찬송」(九贒贊頌)을 지었다.
1395년 을해(乙亥)년 28년
1396년 병자(丙子)년 29년 3월 음력 열엿샛날 석간동 부근에서 호남의 고려 말 조선 초 사람들을 중심으로 오로회(五老會) 조직
1397년 정축(丁丑)년 30년 2월 금성산을 등반하며 두견(杜鵑) 소리를 듣고 두견시(杜鵑詩)를 썼다.
1398년 무인(戊寅)년 31년 9월
1400년 경진(庚辰)년 2년 10월 동악산인(東嶽山人)이 왔다.
1401년 신사(辛巳)년 3년 봄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방문해서 한 달여를 머물렀다. 야은이 시를 짓기를,
자줏빛 빗장에는 봄날 고요한 하늘이 보이지도 않고
비 온 후 딸기와 녹색 이끼가 뜰에 가득하다
무너진 책들을 점을 더해 나누어주니
성현들은 유서 깊게 예의와 형벌을 밟노라
산에서 캔 고사리가 소반 속 아름다운 풍미려니
반 잔의 술로 진펄의 씀바귀를 회상하는 우아한 노래
이런 궁색한 거처에 기대 악기를 고치지도 않으니
늙어가는 나이를 애석해하며 나의 길을 근심하도다 <끝>
寂寥春晝掩柴扃
雨後莓苔綠滿庭
經籍殘編加點俵
聖贒遺緖踐儀刑
盤中美味採山蕨
酒半雅懷歌隰苓
信是窮居不改樂
爲憂吾道惜衰齡 <끝>
야은이 돌아갈 때가 되자, 선생이 읊기를,
새해 벽두부터 동지(同志)련가
보슬비 내리는 위태로운 끝이련가
나이 들며 아득히 헤어지노니
그렇다고 슬퍼만 할까 <끝>
早歲同志
零落殆盡
衰年遠別
能不悵然 <끝>
다만 바라노니 아직 사(死)에 이르기 전에 연이어지는 소리로다. 화운(和韻)이 있어 바로 시행을 보내노라.
1402년 임오(壬午)년 4년 8월 보름 진사 김원이(金元履)가 거문고를 메고 선생을 찾아와서, 달 밝은 밤에 오랫동안 여러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말하길, 선생은 고상하고 충성과 절의가 있어 두 임금 밑에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누가 비난하겠습니까. 자녀의 혼사를 생각하면, 고려의 구신을 필히 구할 것이요, 따르는 자들이 모두 고려인이었고, 조선의 선비와는 통교하지 못했습니다. 문 앞에서 차갑게 멀어졌습니다. 지금 나무가 이렇게 자라도, 자손들이 앞으로도 시골 마을 사람들에 불과하게 되고, 비가 오래 내린 후에도 바뀔 것이 두려운 것이려니, 귀의할 곳조차 없어, 홀로 생각에 이르지 아니하는가. 만일 때를 좇고 하늘을 거스르지 아니한다면, 젊어서는 일을 이루는 의의가 있고, 어진 관료로 앞장서니, 조정이 뜻이 합치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영혼은 공훈을 베풀어야 하고, 명철한 책으로 유명을 펼칠 것이고, 자손이 부귀할 것입니다. 이 역시 집안의 한 가지 도리(道理)로 전래하는 것입니다. 선생이 용안이 살아나며 말하길, 나로 하여금 낮은 데서 발자취를 구하라면, 이로써 일어나 오르기를 구할 것이요, 이것이 당시 맞서서 연이어진 일이거늘, 처음으로 생각해보니 선대의 훈업이 어찌 같으리오. 옛 조정의 은혜는 어찌 맞으리요. 이리하여 지금 문득 잊고 끝나는 것입니다. 자손이 흥성하고 번성함이요. 경서에서 이르길, 선이면 경사(慶事)가 있고, 선이 아니면 재앙이 있을 것이며, 선인즉 나는 미치지 아니하고, 선이 아니어도 역시 나는 미치지 아니합니다. 소위 다수라는 것은 하늘이 버린 것을 받아들임이며, 어찌 사사로운 힘을 바라겠소. 나는 두 마음을 생각지 못하며, 그로써 사사로운 녹을 구할 뿐이오. 거문고를 가져와 아름다운 지조와 기개를 생각하노니, 탁주로써 연이어 건배하며 나아갑니다.
1403년 계미(癸未)년 원년 1월 현릉을 알현했다. 말을 타고 천안을 지나는 길에 기생이 「감군은곡」(感君恩曲)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 「속감은곡」(續感恩曲) 3장(三章)을 연이어 지었다.
1404년 갑신(甲申)년 2년 2월 옛 언덕을 지나며 김상현(金相顯)이 뜰에서 쓴 편지에서 고려국사를 보면 선생은 관직을 지냈고 그 자취를 남겼으며 선대의 훈업을 맡았고, 임신(壬申)년 봄 간당이 일어나 그런 까닭으로 연보의 기록 작업을 시작하고 집안에서 전래했다고 했다.
1405년 을유(乙酉)년 3년 3월 두루 편찬하고 편지를 보내 초대하고, 석간동에서 이웃을 맺어 살며 이로써 호남의 원로가 되었다. 독자적 존재가 두루 미친 까닭이다. 집 한 칸이라도 비용이 들었으니 많은 보탬을 더했다.
1406년 병술(丙戌)년 4년 선생이 근년에 생각하고 서신의 왕래로 언급하길, 노래가 시의 문장과 화합해도, 지금 세상에서는 벼슬하는 자에게는 이름이 없노라니, 이로써 두루 편찬을 보이며 말하길, 나의 일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또 말하길, 우리 문하생들은 많지도 않지만 누구도 벼슬에 연루된 자가 없다. 역시 기이한 일이라고 했다.
1407년 정해(丁亥)년 5년 선생이 3대 이래의 기록을 검토하니, 송대(宋代)에 이르러 동방의 제현들이 오륜을 실행했다. 각 권 서문과 해설이 첨부된 3권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덕룡산(德龍山) 스님 청묵(淸默)이 이를 보고 울며 말하길, 불가의 사업 30년이지만 윤리성이 있는지 모르니 당장 사퇴하고 머리를 기르겠습니다. 승려 무리들이 감화되어 환속을 결정한 자들이 이십여 명이었다.
1408년 무자(戊子)년 6년 가을 고려 조정의 정랑이었던 영동 출신 이경안(李景顔)이 누추한 차림으로 집에 찾아왔다.
1409년 기축(己丑)년 7년 초 선생이 편지에서 자손처럼 제자를 훈계하라고 했다. 임신년 7월 이후 출생으로 손 순필(舜弼) 갑술생이라 하는 자가 과거에 입문해 같은 해 3월 목사가 경내에서 문과 시험을 주관하자 필순 또한 참가했다. 목사가 눈여겨보고 고려인이라고 제외했다. 당시 고려인에 대한 대우가 이와 같았으니 말하길, 이렇게 불리더라도 우리 집안에서는 무방하다고 했다.
1410년 경인(庚寅)년 8년 초 옛 고려 조정의 원로로서 조선의 선비와는 교통하지 않고, 조선의 선비 역시 절연했다. 이로써 당대의 인물들 이야기 가운데 출중하더라도, 두루 이 씨 두 노인이 매번 한(恨)이 되었으니, 2월에 계곡물 앞에서 야유회를 하며 분노의 시를 2편 남겼다. 돌아오다 선생에게 보이니, 선생이 견주어 말하길, 우리들은 고려 조정 5백 년의 명족이 되었고 지금에도 출중함을 보노라니 수리로도 그러하다. 후손의 안위를 알지만, 역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니, 더구나 궁핍하기까지 하도다. 내가 스스로 묘목을 심을 곳을 마련하노니 어찌 더욱 울적하지 않겠는가. 다만 자손으로 하여금 자기 연마에 힘쓰게 하고 의리를 알게 하며 가히 스스로 선한 자가 되게 하라. 이리하여 끝내 두 편의 시를 불 속에 던졌다.
1411년 신묘(辛卯)년 9년 11월 명나라 황제의 덕을 공경하던 절강(浙江)의 선비가 표류해 나주에 도착했다. 그 사람은 경학과 선한 책과 그림을 알고 있었고, 선생의 이름을 들었다. 놀라 말하길, 내가 소년 시절에 동국의 성절사 정달가(鄭達可) 선생을 만났으니, 나송은이 해동의 제현 유학자라고 들었다. 성리학에 일찍이 통달하여 관직을 구하지 않았으니, 이 사람에게는 오히려 근심이 없지 않는가. 바로 나아가 선생에게 절하고, 생강과 계피를 바쳤다. 물러나며 비단 장막을 걷으니 이채미(夷採薇) 화백의 수양산(首陽山)의 진경 그림이었다. 앞선 문장과 버금가는 서체로서 한문공(韓文公)이 이(夷) 화백의 그림과 송(頌)을 옮겨 놓은 것이었다. 선생이 자리에 앉아 말하길, 이 장막에 대해 전혀 흠이 없다고 했다.
1412년 임진(壬辰)년 10년 7월 7일 부인 이(李) 씨 사망. 나주 동북 자산(紫山) 안장. 선생이 제문과 긴 만시(挽詩) 등을 남겼다.
1413년 계사(癸巳)년 11년 2월 현릉 알현. 쇠약해져 길을 가기 어려웠으니, 글을 지어 영원한 이별(永訣)을 고했으며, 능 아래에서 십여 일 머물렀다. 말을 잇기 어려워 절하고 시 칠언 절구 10수를 애도사로 지었다. 돌아서서 갈산(葛山)으로 향해, 또한 축문(祝文)을 짓고 부친 사재(思齋)의 묘역에서 작별을 고한 후, 병으로 한 달여를 머물렀다. 영회시(詠懷詩) 오언 율시 50구가 있다. 선생은 남쪽에서 돌아와 매년 한 번씩 현릉을 알현하고 사재 묘역에 참배했지만, 이후에는 건강이 나빠져 다시는 방문하지 못했다.
1414년 갑오(甲午)년 12년 선생이 평일에 아침에 일어나 사당에 참배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 책을 펼치고, 늦도록 불을 켜고 성현의 뜻을 묵묵히 깨달으며, 밤늦게 취침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상례와 제례를 아니하면 우환이 그치지 아니하므로 쇠약해져도 오히려 그만두지 아니했다. 늘 지쳐 안석에 의지해도 책을 놓지 않았다. 때로 뜰을 거닐며 소제하고 자못 가볍게 노래를 읊더라도 시사(時事)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12월 손으로 써서 후세에 전래되는 것은 자손에게 가르침이 되었고, 장차 집안의 토지와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1415년 을미(乙未)년 13년 1월 9일 선생 서거. 향년 77세. 3월 자산(紫山) 안장. 좌측 이(李) 부인 묘. 4남 의(義), 숙(肅), 무(茂), 철(哲)을 두었고, 3녀 이재삼(李載三)의 처, 김휴건(金休謇)의 처, 신제(申悌)의 처를 두었다. 모두 고려 말 조선인이었다.
1416년 병신(丙申)년 3월 석간동 초당, 유적지, 갈산 묘각, 화상(畫像) 등 화재 <끝>
* 경인(庚寅)년 중간본 당시 1권으로 합했으며, 지금은 상하 2권으로 나누었다.
* 본 연보는 1415년 나계종의 후배 문인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쓴 송은(松隱) 나계종(羅繼從) 행장(行狀)과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 원문 출전: 『죽헌유집』(竹軒遺集) 하(下)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