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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1947년 미국 'LIFE'지에 실린 몽양의 사진. 사진 설명에는 “그는 미국·소련군이 도착했을 때 잘 조직된 정부를 갖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1991년 11월25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몽양 여운형의 묘소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몽양의 친척들과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추도식을 위해 모인 것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여느 때와 사뭇 달랐다.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한복을 입은 한 여성이 묘소 앞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몽양의 무덤 앞에 두 개의 화환이 놓였다. 첫 번째 화환의 리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고 몽양 려운형 선생을 추모하여, 김일성.”
분단 이후 북녘 최고지도자 명의로 된 화환이 남측에 전달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다른 하나의 화환에는 몽양의 9남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
한 여인이 서럽고 그리운 마음을 눈물과 통곡으로 쏟아 냈다.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남북 여성 토론회에 북측 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 몽양의 둘째 딸 여연구(당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였다. 1946년 7월 “너희들이 한 발 먼저 가거라. 내 인차 따라가마”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헤어진 지 45년 만에 이뤄진 죽은 아버지와 산 딸의 ‘상봉’이었다.
3·1 독립운동과 상해임정 건설의 숨은 조직자
어느 작가는 고전(古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고.
몽양 여운형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비슷하지 않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이름이겠지만 그가 걸었던 발자취와 업적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만큼 지난 70여년 그는 우리에게 잊힌 존재였다. 아니, 망각을 강요당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몽양의 일대기를 다루자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터. 이 글에서는 주로 3·1 운동 그리고 상해임정과 관련한 몽양의 활동을 중심으로 짧게나마 그의 일생을 돌아보고자 한다.
1919년 1월부터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몽양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다. 봉건왕조는 이미 망했고, 개인은 참가 자격이 없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만들고 그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당인 신한청년당 조직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몽양이었다.
몽양은 조선독립의 의지를 확산하기 위해 장덕수를 국내로 파견하고 자신은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돌면서 이동녕·문창범·박은식 등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모두 상해로 모여 줄 것을 호소했다.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한청년당 결성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은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3·1 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김규식이 파리로 떠나기 전 그의 부인 김순애에게 했다는 말을 보면 그 인과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 힘들다.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강대국을 상대로 한 ‘독립청원’은 허망한 꿈이었다. 미국 대표는 조선 대표 김규식과 만나는 것조차 거절했다. 그들의 목적은 전후 처리 과정에 보다 많은 식민지를 쟁탈하는 것일 뿐이었다.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소국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생 독립국들로 확산되는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다민족국가인 소련의 해체를 노린 기만전술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몽양의 호소에 부응해 3·1 운동 직후 상해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몽양은 신규식의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리고 임시정부 수립 논의를 본격화했다.
1919년 3월 말 국내외에서 모인 30여명의 인사들이 3·1 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독립을 쟁취할 조직체로써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하고 먼저 의정원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국내에서 온 최창식과 일본의 신익희·윤현진, 만주와 러시아에서 온 이동녕·조성환·이시영·조소앙·김동삼 등이 그들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을 했던 여운형은 외무부 위원장을 맡게 된다.
레닌·손문… 세계적 지도자들과 친분 쌓아
1922년 모스크바에서는 동방피압박민족대회가 열렸다. 김규식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한 몽양은 회의 기간 레닌을 만났다. 몽양은 레닌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그때까지는 러시아가 조선에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만 (…) 레닌은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가 낮기 때문에 지금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이는 나의 이전부터의 주장과 일치하는 말이었다.”
러시아에서 상해로 돌아온 몽양은 중국의 손문을 만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결성하기도 했다. 몽양이 미국 유학이 아니라 중국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1911년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 때문이었으니, 그로서는 참으로 감회가 깊은 만남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몽양은 레닌과 트로츠키, 호찌민과 손문, 장개석과 모택동 등 세계 각국의 혁명가·지도자들과 만나 친분을 쌓고 조선 독립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몽양 스스로 세계적 지도자의 반열에 올라선 때이기도 하다.
한편 일제의 회유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몽양은 1929년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결국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다.
15년간의 중국 망명생활을 끝낸 몽양은 옥고를 치른 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거뒀을 때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우승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채 기사를 내보낸 것 또한 유명한 일화의 하나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조선중앙일보>는 “황군만세 따위의 기사나 쓸 바엔 차라리 폐간하는 게 낫겠다”는 결정에 따라 자진 폐간하게 된다.
적진 한가운데서 일왕과 담판하다
몽양은 1940년에서 1942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동경을 방문한다. 여기서 몽양은 조선총독과 일본군 수뇌부, 고노에 수상과 일왕까지 만나게 된다. 일본이 몽양을 동경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태평양전쟁을 위해 중국전선에 투입돼 있던 병력을 돌리기 위해 중국 지도자들과 친분이 깊은 몽양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서툰 회유가 천하의 몽양에게 먹힐 리가 있겠는가. 다음은 통역을 위해 몽양과 함께 일왕을 만났던 조카 여경구의 증언이다. 자신(일왕)을 위해 일해 줄 수 없겠는가 하는 회유에 몽양은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고 한다.
“친일과 반일은 수화상극(水火相剋)이거늘, 일본이 조선 민족에게 큰 재난을 들씌우고 어찌 조선 사람에게 친일을 설교하는 것인가. 나에게 재능과 수완이 없어 천황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그럼 왜 동경에 왔느냐는 일왕의 힐난에는 “조선 인민은 친일주구 몇 놈 때문에 일시적 치욕을 당하고 있으나 우리 인민은 영웅들을 무수히 낳고 우리 힘으로 치욕을 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다. 그런데 너의 곁에는 이 진리를 아는 자도 없고 또 알아도 말해 주는 사람이 없겠으니 내가 수고로이 온 것이다.”
억이 막히고 맥이 빠진 일왕은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며 그를 순순히 돌려보내고 말았다. 말이 쉬워서 담판이지 일본인들도 감히 쳐다보지 못하는 일왕 앞에서, 그것도 총칼로 무장한 호위병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일왕에게 호통을 쳤다는 것은 몽양의 담력과 패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뚜렷이 보여 준다.
▲ 정부는 2008년 2월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몽양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색테러의 흉탄에 쓰러진 지 65년 만이었고, 노무현 정부 임기가 사흘 남은 시점이었다.
백색테러에 스러진 통일독립국가의 꿈
일제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던 몽양의 꿈은 1945년 9월8일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면서 좌절을 맛보게 된다. 단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몽양의 노력도 미군정의 탄압과 기만, 좌우경 기회주의자들의 외면과 배신으로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만다.
운명의 날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울려 퍼진 두 발의 총성이 한국 근현대사의 거목을 쓰러뜨렸다. 민족해방과 통일조국 건설의 거성(巨星)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통일독립정부 수립의 꿈은 사그라들고 조국의 남단은 이승만과 미군정 주도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몽양 테러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여연구가 어머니와 언니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장택상(당시 수도경찰청장) 놈이었다. 장택상은 이승만의 지시를 받았고, 이승만은 미국의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G-2(미 24군단 정보참모부)의 보고에 따르면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몽양 암살 20일 전에 이승만에게 암살계획을 중단하도록 충고한 것으로 나와 있다.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3·1 독립운동과 상해임정 100주년을 맞아 몽양이 다시 주목받고, 우리가 그의 삶과 활동을 깊이 들여다봐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동북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가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북미 간의 정치·군사적 대결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고, 남북관계는 답보와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오늘. 진보적 민족주의자, 이념의 좌우를 넘나드는 폭넓은 국제네트워크, 남북협상과 좌우합작을 통해 전쟁을 막고 통일된 독립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몽양 여운형이야말로 오늘의 현실이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지도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정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