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인 이웃의 범죄
얼룩말이나 영양, 가젤 같은 초식동물은 군집 생활을 한다. 반면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는 가족 단위거나 혼자 초원을 누빈다. 초식 동물들은 집단 생활을 통해 무리 전체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는다. 사자와 같은 맹수가 가젤을 공격하면 무리에서 가장 느린 가젤 하나가 희생되어 전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전략을 택하기 때문이다. 전쟁 같은 극한 상황이 닥치면 힘없는 아이와 여성, 노약자, 장애인들이 먼저 희생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예외의 경우를 보았다. 야생 의 버팔로 무리가 새끼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사자 무리와 싸우는 이른바 '크루거의 전투'(Battle at Kruger)라는 동영상을 보았다. 영상은 버팔로 무리와 사자 무리가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사자 무리는 추격 끝에 새끼 버팔로를 잡아 물속에 빠뜨리고 잡은 먹잇감을 물어 뜯는다. 물속에서는 악어까지 새끼 버팔로를 탐내며 달려든다. 이때 죽어가는 새끼를 구하기 위해 거대한 버팔로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엄청난 수의 버팔로들은 사자들을 제압하고 기적적으로 기진맥진한 새끼 버팔로를 되찾는다.
이와 반면에 안타까운 장면도 있다. 새끼 버팔로가 단 한마리 사자에게 잡혀 있다. 주위를 빙 둘러싼 거대한 버팔로 무리들은 금방이라도 사자를 공격할 듯 주저주저 망설이다가 두려움에 결국 후퇴하고 만다. 새끼는 비명을 지르며 갈갈이 찢겨 죽는데 무리들은 현장을 떠난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사자를 물리치고 구해낼 수 있는데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무서워하며 후퇴하는 버팔로 무리를 보면 분하기 짝이 없다. 특히 가장 힘센 우두머리 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600만 명이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학살 대상이었다. 나치 정권은 제2차 세계대전동안 독일의 각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지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 27만 5,000여명을 학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장애인을 학살하면서 살인기술을 연마하고 정당화하는 도구로 생각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아돌프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스 친위대 중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말살책의 실무적 책임자로 일하며 수백만의 인간을 도살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보니 평범한 독일의 한 가장으로 평소에는 매우 '착한' 사람이었으며,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수행 과정에서 어떤 잘못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아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인가 전범 재판 법정에서 그는 당시 최고 권위를 지닌 히틀러의 ‘정당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곤혹케 하였다.
‘악惡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분석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행동이 무사유無思惟(thoughtlessness)'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아이히만이 범죄를 저지른 것은 특별히 사악하거나 지능이 낮은 타고난 악마같은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악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인물의 '악마성'을 부정하고 악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다는 이러한 주장은 평범한 사람이 권위에 의한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아이히만과 관련하여 에리히 프롬은 '관료주의적 인간'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보는 아이히만은 관료의 극단적인 본보기였다. 아이히만은 수십만의 유대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던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죄'였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즉 기술적인 일만 성실히 수행했다. 이게 곧 아이히만의 대답이기도 했다.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은 우리는 이러한 아이히만의 관료적인 대답이 하루에도 수천 번 쏟아지고 있는 현실에 살고 있다고 말하며 내 결정의 인간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고 오로지 관료주의의 효율성을 위해 맡은 역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사고가 지배하는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모범적 시민이 희대의 악마가 될 수 있는 '악의 평범성'과 '권위에 대한 복종'을 보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무사유와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조나단 글레이저가 감독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2023>는 대학살을 다룬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다. 기존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피해자의 고통과 삶을 체험하고 들여다보는 피해자 중심의 작품이었다면, 그는 철저하게 가해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 자체에 집중한 특이한 인물이다.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하마스의 전쟁을 모두 비판하여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독일군 장교 가족의 아주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다. 단란한 군인가족으로 아버지는 군인의 의무를 생각하고, 어머니는 가사와 정원을 가꾸는 데 정성이다. 부모와 함께 행복한 일상을 누리고 있는 아이들까지 이들의 삶은 평범하고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일상을 지내는 집은 바로 유대인 포로수용소와 담 하나 사이의 거리에 있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두 공간의 차이를 생활소음과 같이 들려준다.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총을 맞고,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는 비명의 소리와, 불에 타서 재가 되는 순간 새어 나오는 처절한 소리를 낸다면, 한쪽 공간에서는 강물이 흐르고 나무 위에서 새가 지저귀고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생활 소리들로 가득하다. 이 가족들에게 유대인들의 고통의 비명소리는 일상생활에서 나는 여느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왜냐면 이들의 집과 아우슈비츠는 담 하나로 갈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실제 사실이었다. 악마 같은 행위를 저지르는 악인들이 실제로는 매우 평범한 이웃의 모습으로 가까운 곳에서 나와 생활 소음을 공유하면서 살고 있을 수 있다. 뒤돌아보면 일상에 평범하게 스며드는 악의 모습은 나의 일상의 마음일 수 있다. 그러한 내가 모인 것이 나의 이웃들이다. (202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