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법회와 함께 하자
- 대원4구 명등, 성덕 이한묵
저는 감히 불자란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크신 명호에 누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의 뜻 아래에서 모든 것에서 보고 느끼며 배우려 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려고 나름 애쓰고 있습니다. 제 삶을 작은 소재로 나눠서 열거하여 혹 누구라도 한사람 생활에 보탬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램이 없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함에 감사합니다.
어릴 적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당연시 하였던 그 생각을,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맙게 여기며 부모님의 깊은 사랑에 보답하려고 할 때는 꽤나 늦어져 있더군요.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말은 하는데 무엇이 부모님을 위함인지 모르고 지내오다 보니 효도라는 용어 자제를 잊고 살아간 시간이 많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제대로 못 나오셔서 자식들 공부 잘하는 것이 커다란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공부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마음대로 놀고 싶어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는 조금은 태도를 바꾸어 부모님께 즐거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써보지도 못하시던 고급 세면비누도 아닌 일반 비누를 사서 가져다 드리며 마치 큰 선물인 양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드렸던 것이 내 기억 속에 큰 잘못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효도란 제 삶을 건강하게 하여서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란 것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더라구요.
아버님께서 저의 어린 시절 무거운 수박을 30여리 떨어진 장터에서 망태기에 담아 비 내리는 산길 들길을 지나 어둠이 깊이 내려진 시간에야 집에 도착하셔서 수박을 잘라 먹여 주시면서 흐뭇해 하시는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겨울에는 추울까봐, 여름에는 더울까봐, 집 떠나 보내면 배 곪을까봐 걱정하시고, 어머님은 장독대에 정한수 떠놓고 두손 모아 자식의 무탈을 기원하십니다. 그것이 부모님의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대한 저의 대답은 사소한 일이라도 걱정거리를 만들지 말고 원치 않으시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 부모님께서 불편 하실까봐서 거짓을 표하여 안심시켜 드리는 것이 아닌, 참된 삶 속에 부모님의 마음이 편안하게 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는 절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시고 키워 주심에 감사드리고, 스승님께는 나를 가르쳐서 삶에 지표를 주심에 감사하며, 친구에겐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하고 상부상조의 정신을 가르쳐 줌에 감사하며, 저를 지켜보고 잘못됨을 꾸짖어 주는 많은 주변 분들께 감사하고, 또 건강하게 잘 자라서 본인에게 주어진 맡은바 소임을 다하려는 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담아서 불교에 귀의하고 재가불자로써의 삶을 살아 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최근에는 저에게 삶의 새로운 방식을 주시는 부처님의 경전과 법에, 함께하는 도반님들에, 범등 형제님들께 항상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불광 형제님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이 많습니다. 고찰/명찰 순례를 통하여 근기를 높이고 신심을 일으켜서 무엇이든 함께 한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예전에 작은 사찰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동네의 조그만 공간) 에서 적극적이고 세심하게 불교 입문을 가르치고 경전 해석을 가르쳐 주시던 스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스님에게 같이 다니는 도반의 아들 생일 축원을 부탁드리며 축원 헌공을 올렸는데, 그날 절에서는 스님도 없이 신도 4~5명이 모여 사시예불을 녹음기를 켜 놓고 올리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초지중을 설명하고 스님과 재가자의 사이라도 최소한의 사과와 나중에라도 축원을 해주셨으면 했으나, 부처님은 이미 다 아신다고 저희의 바램을 외면해버린 스님께 큰 실망을 하였습니다. 저의 믿음이 부족했을까요?
항상 재가신도들에게 법문을 하실 때는 하심하고 욕심을 버리고 내려놓아야 한다고 설법하시고는 정작 스님은 재가자의 바램과 소망을 잊어 버리는 것을 보면서 그곳을 떠나 다른 사찰로 옮기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본인의 잘잘못은 외면하고 부처님은 다 아신다고 하는 궤변만으로 언어도단하는 스님에게 의지하느니 조용히 누가 알아보든 말든 좋은 법문을 듣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에 불광법회를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이곳에 와서 시간이 허락되는 데로 정성을 다해 기도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불교기본반에 입교 49기로 수료하고 인연이 되어 대원4구 법등 형제가 되었고, 그 후 대학반 14학번으로 입교하여 경전의 깊은 뜻과 부처님의 높은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데 집중하며 도반들과 함께 불법을 익히며 고찰을 돌아보는 기회도 가지며 신심을 더욱 깊이 하였습니다.
불광법회에서 나름 만족한 신행 생활을 이어가던 중 한 스님의 일탈 행위가 또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스님이 신도들을 고소, 고발하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는데 불광사에서 처음 봤습니다. 중창불사 헌공도 소액이지만 올렸고 호법도 가입하고 만불전 부처님 봉안도 동참 하였습니다 그것이 참 후회스럽더군요. 스님이 욕심을 부리게 된 데에는 재가불자들도 한몫을 하였습니다.
축원을 올릴 때 보시가 많은 신도들의 축원 뒤에 OOO보~~~체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존경스럽게 하고, 그저 예불에 열심이고 어떤 지위나 직함에 연연하지 않는 신도들의 축원 끝에는 OOO보체 라고 짤막하게 소홀히 하는 듯이 지나갑니다. 그러니 신도들은 스님의 인정을 받고자 개별적인 헌공(뒷돈)을 하고, 가정 법회 때도 개업 축하 때도 금일봉은 필수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스님들은 돈과 재물에 욕심이 더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가족을 떠나 부처님의 자식이 된 스님이 과연 재물이 필요한지 고급 승복을 입고 자랑스러워하며 고급 자가용을 타고 권위를 내세우는 스님이 진정한 출가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업이 승려인지라 진정한 수행자로서의 모습은 찾을 길이 안보이는 것일까요? 재가자인 불광 형제님들은 이런 스님들을 보면서 과연 스님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출가자는 상구보리 하와중생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재가자는 스님을 공경하고 보시하여 수행을 완성하고 재가불자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고 반야의 지혜를 가르쳐 주셔야지요. 저는 이제 불광사 스님의 생각들과 현실들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중창불사한다고 하면 기와 한장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동참하던 행위가 없어지고, 이번 중창불사는 또 누가 얼마나 사리사욕을 취하려는지 의심부터 갑니다.
초발심 (처음 불교 입문) 자는 사찰에서 부처님께 기원을 드리죠.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부처님의 가피로, 관세음보살님의 보살핌으로, 지장보살님의 원력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수행자 스님들은 그들을 적당히 이용만 하려는 것이 아닌지… 오늘의 현실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탐진치 삼독에 빠진 스님들과 청정한 불광법회는 같이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탐낸다는 것은 이익을 얻기 위한 욕심이며 탐심이 뜻대로 안되면 화가 나고 화가 지나치다보니 사리판단이 안되어 어둠인지 광명인지 분별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며 신도를 대상으로 감언이설로 포장한 강요 아닌 강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불광 형제님들은 금전 만능주의의 권력 위주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는 이상한 출가 스님들을 배척하고 깨달음의 길까지는 모르나 자타불이의 정신으로 뭉치고 화합하여 불광법회가 광덕 큰스님의 뜻을 이어갈 수 있도록 다 함께 힘을 모아 봅시다.
우리 재가불자 불광 형제님들!
우리는 행복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왜? 오늘 이곳에서 모든 걸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의 행복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행복은 당신의 心中에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님들 우리 모두 마하반야바라밀의 큰 힘에 의지하여 용맹정진하여 보리를 이룩합시다.
진정한 도심포교의 중심 도량이 되기 위하여 우리 모두 결집하고 정진하여 마하반야바라밀의 진정한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정을 다하며 발원을 성취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