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은 어머니 품속이지요
몇 됫박으로 퍼부었던 눈발이 그친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산자락의 나무들은 희끗희끗 폭설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봉고차를 타고 전북 완주의 모악산을 향해 달리는 날은 하늘도 꽤 흐렸다. 또 다시 눈발을 퍼부을 듯 날은 흐렸지만 모악산 자락 원기리 주차장에 봉고차를 세울 때까지 하늘은 그저 먹빛 구름장을 날려주기만 했다.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 전” 이 열리고 있는 도립미술관에서 두 패로 갈라진다. 비교적 긴 여정을 택한 무리 대신 난 주차장에서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정상을 거쳐 천일암을 거쳐 내려오는 비교적 짧은 여정을 택했다.
어머니 같은 모악산,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숨 쉬는데
먼저 모악산 입구에 도착하자 화강암 표지석에 휘갈겨 놓은 고은의 시 “모악산”이 일행을 맞는다. 한참동안 시에 젖다 보니 어머니의 품속 같은 아늑함이 전해져 온다. “먼데 사람들마저 오서 오라 어서 오라” 손짓하면서 내 자식처럼 품에 껴안은 어머니의 포근한 손길로 일행들을 얼싸 앉는다. 그런 어머니의 너른 품 같은 따스함 때문인지 모악산은 일치감치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자리매김을 했으며 난리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도 이름이 높았다. 금산사, 귀신사, 대원사 등 크고 작은 절과 암자들이 모악산 자락에 산재하는 것도 그런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금산사 가는 길에 등산객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다
대원사
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애를 껴안은 형상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모악산, 혹시라도 그 바위를 볼 겸해서 오르는 산길은 무수한 등산객들이 꾹꾹 다져놓은 눈발자국으로 뒤범벅이다. 눈길 안전을 생각해 등산화에 갈아 끼운 아이젠의 뾰족한 쇠이빨들이 걸음을 걸을 때마다 아그작아그작 이빨 가는 소리를 낸다.
뒹구는 바위 틈새를 굽이쳐 내리는 계곡물을 온몸에 휘감으며 몇 개의 오작교를 건넌다. 눈길 좌우로 울울창창 펼쳐진 소나무 숲이 대열을 이루며 길을 비켜준다. 대원사 못 미쳐 계곡 길에는 선녀폭포와 사랑바위에 관한 전설을 알려주는 알림판이 서있다. 초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서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었던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과 비슷하다. 감수성이 강한 초등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듯 하지만 참 아름다운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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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 표지석에 써 놓은 고은시 "모악산"
수왕사 법당의 풍경
대원사의 전경. 오른쪽 건물에는 기와 불화가 보관돼 있다
보름달이 뜨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수왕사 약수를 마시며 신선대에서 신선들과 목욕을 하며 놀았다는 선녀들, 그 광경 훔쳐보던 나무꾼이 그중 한 선녀와 눈이 맞아 사랑에 빠졌다가 하늘의 노여움을 받아 바위로 변했다는 믿지 못할 전설, 선녀폭포와 사랑바위에 관한 전설은 왜 이토록 가슴을 저리게 하는 것일까.
혹시라도 벚꽃 흐드러진 봄날이 돌아오면 이 선녀폭포에 선녀들이 강림해 목욕을 하지 않을까 궁금증이 인다. 그 때 내가 나무꾼이 되어 목욕하는 선녀들의 광경을 훔쳐보다가 선녀와 달콤한 사랑에 눈이라도 맞는다면, 탈 많고 말 많은 이 세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잠기며 숨이 턱턱 막히는 산길을 올라간다.
모악산의 산길은 어머니 같은 품속에 숨어있지만 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자애롭지만 논일이나 들일을 할 때는 거칠게 손을 움직이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풍진 세상을 혼자 몸으로 짊어져야 했던 강인한 여성상 같은 모습이랄까.
눈 덮인 절의 고즈넉한 겨울 풍경
얼마를 올라 왔을까. 돌담을 휘돌아 마당가에 올라서자 하얗게 눈을 얹고 있는 올망졸망한 절 지붕들이 달력 속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금산사의 말사인 대원사는 백제 의자왕 20년에 열반종 소속인 보덕의 제자 일승, 심정, 대원이 함께 창건하여 몇 번의 중창을 거듭한 후에 현재에 이르는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 말기 증산 강일순이 득도를 깨우친 절이기도 하다.
마당에 오르자 굵은 대나무에 초가를 얹은 소회당이 일행들을 반긴다. 그 안에는 기와에 선녀 형상의 그림을 그린 불화 몇 조각이 전시돼 있다. 투박한 기와를 화선지 삼아 그려놓은 불화들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연꽃을 들고 어딘가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는 여인, 금관을 가지런히 덮고 있는 흰 손수건과 천의 자락으로 흘러내리는 머릿결은 사진을 찍은 듯 세밀하기 이를 데 없다. 여인이 금방이라도 기와를 빠져 나올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소회당을 벗어나 마당 한가운데에 선다. 오층석탑이 서있는 주변을 대웅전과 요사채, 범종각, 소회당, 향적당. 명부전이 서로를 부르며 얼싸 안 듯 절의 풍경을 소박하게 연출하고 있다. 짙은 단청 빛을 발산하는 기와지붕의 눈들이 풀썩이는 바람결에 우수수 꽃눈처럼 흩날린다.
대원사를 뒤로하고 모악산의 7부능선 쯤에 자리 잡은 쉼터에 뻐근한 다리를 올려놓는다. 그곳에서 일행들과 모여앉아 잠시 수육을 안주로 삼아 막걸리 잔을 다정하게 주고받는다. 칼바람이 송림을 훑고 가지만 기분좋게 나눠 마신 막걸리의 얼큰한 취기가 추위를 달아나게 한다.
대원사 마당에 있는 오층석탑과 범종각
범종각
천일암의 천부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길을 한참 오르자 정자 한 채가 나타나고 왼쪽길 끝에 수왕사가 시골 농가 같은 모습을 드러낸다. 물왕이절이란 다른 이름이 붙은 수왕사는 신라 문무왕 20년 (660년)보덕화상이 수도를 하기 위해 창건한 후 고려 인종 2년(1125년) 운명국사가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왕사는 생각보다 단아한 절이다. 법당과 진묵조사전이 전부다. 매서운 칼바람이 허공을 스쳐지나가자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이 미친 듯 허공을 휘저으며 청아한 울음소리를 낸다.
수왕사를 나오려다가 문득 이상한 물건에 눈길이 멎는다. 소줏고리를 달아놓는 시루를 거꾸로 엎고 그 위에 또 다른 시루를 얹어놓은 요상한 물건은 송화백일주를 빚는 소줏고리란다. 진묵대사가 즐겨 마셨다는 송화백일주는 스님들이 고산병과 편식을 예방하기 위해 마셨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지금까지도 민간에 전래되어 전통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옛날 선녀가 내려와 마셨다는 석간수로 빚었으니 그 맛이 얼마나 오묘할까 싶었다. 술맛을 보고 싶었지만 어디로 갔는지 스님의 종족은 묘연하고 처마 밑의 풍경만 고즈넉한 산사의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모악의 정상에서 아랫 세상을 보다
뻐근한 다리를 일으켜 세워 다시 눈 덮인 산길을 오른다. 곧 무제봉 전망대에 올라선다. 모악산 인근 주민들이 모여 기우제를 지냈다는 산봉우리다. 무제봉에 올라서면 거대한 KBS 송신소 철탑이 위압적으로 눈앞을 가로막는다.
저곳이 모악산의 정상이다. 어머니의 산이란 뜻이다. 그 이름답게 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만경평야와 호남평야에 물을 대주는 젖줄 역할을 독톡이 한다. 모악산은 영험한 기운으로 인해 신흥 종교와 미륵신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수왕사 팻말
수왕사 전경, 산중 민가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절과 암자만 해도 80여개에 이른다니 예로부터 모악산이 신성시 된 곳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모악산 정상에 세워놓은 KBS 송신소 철탑은 보기만해도 흉물이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필요불가결한 시설물이라도 철과 콘크리트가 던져 주는 혐오감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가시지 않는다. 식사 자리를 찾다가 사람들에게 개방된 송신소 옥상엘 올라본다. 한파에 얼어붙은 바람이 사람을 밀어젖히듯 사납게 요동을 친다. 옥상 아래 산자락은 천지가 희뿌연 세상이다.
희끗희끗 흰 눈을 뒤집어 쓴 산맥들이 골 깊은 주름을 만들어 파도를 치듯 아랫녘으로 흘러내린다. 저 멀리 금산사 가는 길에는 등산객들이 개미떼처럼 오밀조밀 모여 있다. 금산사는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후삼국 시대에 후백제를 세운 아버지 견훤이 장남인 신검의 난에 밀려 석 달간 연금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송신소 지붕 아래 콘크리트 바닥에서 허기를 채우고 송신소 산허리를 돌아 하산한다. 현대단학의 창시자인 일지 이승헌이 대각한 천일암을 거쳐 내려오는 중에도 모악산은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일행들을 떠나보내고 있다.어머니 품속을 벗어나는 자식들의 안전한 하산을 위해 기도를 드리듯 모악산은 백발 같은 눈을 뒤집어쓴 채 그렁그렁 눈물 촉촉한 눈으로 산객들을 떠나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