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어보는 소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비슷한 느낌이다.
황토荒土 / 조정래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장편’으로 써야 할 이야기를, 저 옛날, 중국에서 여자들에게 전족을 하듯이 ‘중편’으로 오그라뜨려야 했다. 그렇게 태어난 「황토」를 대할 때마다 늘 께름칙하고 미안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장정을 바꾸어 재출간하는 기회를 맞아 장편으로 개작을 하기로 했다. 이제 내 작가 연보에서 중편 「황토」는 사라지고, 장편 「황토」가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이를 정본으로 삼고자 한다.
「탄생의 비밀」 중에서
“어쩐 일이세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아들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동익이가 말이다, 동익이가…….”
그녀는 그만 목이 메었다.
“그 자식, 또 일 저질렀어요?”
짜증난 아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전화를 끊으려 하다가 놀라며 송수화기를 다시 잡았다.
“글쎄 동익이가…….”
“빨리 결론부터 말하세요. 지금 바빠요.”
아들의 거친 말에 쫓기듯 그네는 한달음에 쏟아놓았다.
“동익이가 조난을 당했다는구나…….”
“조난을 당해요? 거 멋지게 됐군요.”
태순이는 코방귀까지 뀌었다. 그녀는 왈칵 울음이 솟구쳤다.
“…….
“피는 못 속여요. 인디안을 개 잡듯 한 그 살인자들의 피가 동해서 그 자식이 그따위예요.”
큰아들 태순이는 느글느글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송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이제 그녀에겐 경찰서를 혼자 가야 하는 두려움 같은 것은 깨끗이 없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용기가 생긴 것이 아니다. 악이 받친 것이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말한다 해도 풀릴 길 없는 한의 피멍이 터진 것이었다.
「안 보이는 흠」 중에서
왜 조선 사람들이 몇 년 전부터 줄기차게 징용이며 징병을 끌려가야 하는 것인지 점례는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답은 간단하고, 자명했다. 나라 없는 백성이라서. 나라 없는 백성……. 그럼 어째서 나라가 없어지게 되었는가……. 힘이 약해서 빼앗긴 것이라고 했다. 그럼 왜 힘이 약해진 것인가.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며 양반들은 무엇을 어찌 했길래 나라를 뺏길 정도로 힘이 약한 나라가 되게 했다는 것인가. 그 답을 알고 싶었다. 오래 전부터 속시원히 그 내막을 알고 싶었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치 보아가며 아버지에게 어렵게 물었지만, 이 애비가 무식한 데다가 저 머나먼 한양에서 높으신 대감 양반들께서 하신 일이니 그 깊은 속을 어찌 알겠냐. 또, 그런 것 시시콜콜이 알려고 해서 신상에 좋을 것 하나도 없느니라. 그 켯속 다 알아낸다고 해서 나라 찾아지는 것도 아니니 다 팔자소관이거니 하고 그냥 살아라. 그게 신간 편한 일이다, 아버지는 쓸쓸하게 웃었다.
「짧은 사랑, 긴 정」 중에서
“오늘 사랑에 오신 손님은 누구였지? 아는 사람이던?”
점례는 마른침을 삼켰다. 뜸을 다 들인 것이다. 이제 대답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피할 필요도 없었다.
“며칠 전에 왔던 그 젊은 사람이었어요.”
“그래? 한 번 보고 나서 얼굴을 알아보겠던? 연분은 연분이로구나. 그러기가 어려운데, 천생연분이야.”
이모는 이렇게 휘감아들었다. 점례는 그만 얼떨떨하고 아리송해졌다. 술상을 들여다 놓으며 아무런 관심 없이 얼핏 보았을 뿐인 남자를 다음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정말 연분 때문인가? 정말 그런가……? 연분……, 천생연분……, 그게 뭐지? 그런 게 정말 있기는 있을까…….
“그 남자 생김새가 어떻더냐? 내 눈엔 미남이던데, 어디 당사자인 점예 얘기 좀 들어보자.”
“…….”할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큰이모 눈에 미남이면, 미남인 것이다.
“사람 하나 똑똑하지. 얼굴만 잘 생긴 게 아니라 실하고 속이 찬 사내야. 머잖아 크게 될 사람이다. 눈에 총기가 들었어. 그 눈이 보배야.”
점례는 눈을 감았다. 그럼 그 매섭던 눈초리는 건달기나 시건방져서 그런 게 아니란 것인가.
“이모부가 그러는데, 그 사람이 네가 맘에 든다고 하더란다. 얼마나 다행이냐. 아니지, 그 눈이 여자도 고를 줄 아는 게지. 우리 점예라고 어디 나무랄 데 있나. 오냐, 오냐, 그만 주무르고 이리 와 앉아라.”
그러지 않아도 점례는 더 이상 주무를 수가 없었다. 나무랄 데가 없다니, 점례는 팔다리의 힘이 쑥 빠졌던 것이다. 이미 남자가 범해버린 몸이었다. 2백 리 밖에는 멀쩡하게 아들이 살아 있었다. 이보다 더 큰 탈, 이보다 더 큰 흠이 어디 또 있을까.
「인생, 그 굽이굽이」 중에서
내일 모레가 쉰 고개다. 험하고 고달프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세 자식뿐이었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허둥지둥하며 한시도 편할 때 없이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자식들이 잘되는 것만이 소원이었고, 그것이 유일하게 잡고 있었던 삶의 끈이었다. 그런데 자식들이 커갈수록 그 바람은 빗나가는 것만 같았다. 모두 하나로 뭉쳐져 서로 의지가 되고 힘이 되어 살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그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바람이 자꾸만 엇나가고 버그러지고 있었다. 세 자식을 위해 몸 바스러지게 최선을 다했던 것은 무슨 덕을 보자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세 자식이 오손도손 사이좋게 살기를 바랐다. 그것이 눈물뿐인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신세가 가엾고 적막했다. 그녀의 옆볼을 타고 내린 눈물이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