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 근암서원 사적(近嵒書院事蹟) / 금산
근암서원은 현재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148-1(산북면 금천로 351-5)에 있다.
문경시 '산양'의 지명은 고려시대 때 산양현(山陽縣)이라는 이름의 관아를 설치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삼국사기지리지』에 "가유현(嘉猷縣)은 본래 근품현[近品縣, 건품(巾禀)이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이 고쳤으며 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이다."라는 기록에 처음 보인다. 『고려사지리지』에도 "산양현은 본래 신라의 근품현(近品縣)인데 경덕왕이 가유(嘉猷)로 고쳐서 보주(甫州, 현 예천)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지금의 명칭인 산양으로 고쳤고, 현종 9년(1018)에는 상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감무를 두었다가 명종 10년(1180)에 없앴다."라고 하여 고려 때 상주목에 속하였다가 폐현이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상주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상주조)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앞서 조선 태종 때도 상주목 속현이 되었으며, 조선 말기인 1906년 9월 24일 대한제국기에는 면리제(面里制) 시행에 따라 지방행정구역을 개정할 때까지 상주군에 속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지방행정구역 폐합 때 산양현지역은 산남면(山南面)과 산동면(山東面) 및 산서면(山西面) 일부를 병합한 산양면으로 개편하여 문경군에 편입되었다. 이 시기 산북면은 산양면 지역을 제외한 지역과 예천군 화장면 대부분을 병합하여 문경군에 이속되었다.
또한 조선 전기의 사서(史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양(山陽)의 옛 이름은 근품(近品)이고, 근암(近巖)이라고도 한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지금의 산양면 현리가 옛 변진시대엔 근기국(勤耆國 또는 巾耆國) 영역이었는데, 신라 초기에 병합된 이후 근품현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가유현(嘉猷縣)으로 개칭되어 보주(甫州, 현 예천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 감무(監務)를 설치하여 예천군 산양현(山陽縣)이 되었으며, 다시 상주에 예속되었다가 폐현이 되었다. 그 뒤 조선 태종 때에는 상주목(尙州牧) 직속현으로 복원되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는데, 대한제국기(1897년 10월 12일~1910년 8월 29일)에 지방행정구역을 개정하면서 상주군 산양현을 산서, 산동, 산남, 산북으로 나눌 때 산서면은 호계면에 통합되었고, 산남면과 산동면은 산양면으로 통합하여 문경군에 편입되었으며, 산북면은 예천군 화장면과 통합하여 문경군에 편입되었다.
상주목 산양현의 '근암서원(近嵒書院)'은 조선조 명종(明宗) 때 영천자 신잠(申潛, 1491~1554)이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재임(1552년~1554년)하면서 상주목 관내 18개 지역에 세운 서당의 하나로 '산양향약소(山陽鄕約所)에 부설한 '죽림서당(竹林書堂)'에서 비롯되었다. 죽림서당은 산양현 웅암 남쪽의 산기슭 영원사 옛터에 처음 세우고 이름을 '죽림'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당사 가까이 죽림사 옛터가 있고 죽림칠현의 고사에서 '죽림지의'를 취한 것이라고 한다.
■ 근암서원 배향 인물 ■
본관 | 배 향 인 물 <배향연도> | 생 몰 년 도 |
부계(缶溪) | 우암 홍언충 (寓菴 洪彦忠) <1664년> | 성종 4년(1473)~중종 3년(1508) |
광주(廣州) | 한음 이덕형 (漢陰 李德馨) <1669년> | 중종 36년(1541)~광해 5년(1613) |
상산(商山) | 사담 김홍민 (沙潭 金弘敏) <1702년> | 중종 35년(1540)~선조 27년(1594) |
부계(缶溪) | 목재 홍여하 (木齋 洪汝何) <1702년> | 광해 13년(1621)~숙종 4년(1678) |
전주(全州) | 활재 이 구 (活齋 李 榘) <1786년> | 광해 5년(1613)~효종 5년(1654) |
연안(延安) | 식산 이만부 (息山 李萬敷) <1786년> | 현종 5년(1664)~영조 9년(1733) |
안동(安東) | 청대 권상일 (淸臺 權相一) <1786년> | 숙종 5년(1679)~영조 35년(1759) |
*{尙山誌} 무진본 院詞조를 살펴보면 <상산지구록> 창석본에서는 근암서원의 창건연대를 현종 6년(1665)으로 처음 기록하고, 우암 홍언충에 이어 추가 배향한 한음 이덕형, 사담 김홍민, 목재 홍여하 3현의 이름이 적혀있으나, 뒤에 중간한 증보판 <상산지> 청대본에서는 근암서원의 향현사 건립시기를 현종 5년(1664)으로 신증한 내용이 보인다. 현재의 <상산지> 무진본은 임진란 때 화재로 구본(창석본과 청대본)이 모두 소실되어, 구당본(병오초책) 등 흩어진 자료들을 다시 모아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새로 편찬하여, 이듬해인 1929년에 간행한 <상주읍지>로 오탈자가 많은 사료이다.
*近嵒書院('근암서당'이 '근암서원'으로 승격된 내용)
近巖[在州北樹介村 顯廟乙巳(현종 6년, 1665) 因書堂舊舍建 廟宇 享洪寓庵彦忠 己酉追享李漢陰德馨肅廟壬午又追享金沙潭弘敏 洪木齋汝河 講堂曰典敎 齋曰主一 東齋曰欲仁 西齋曰喻義 門樓曰知遠]
[新增]在州北六十里 顯廟甲辰(현종 5년, 1664)創建 享處士李榘 別堤李萬敷 副提學僖貞公權相一]
*부기(祔記) 1
조선 중기 당시 '근암서원'과 함께 '수계소' 및 '서당'의 운영에 고심했던 낭옹 고세장(高世章)과 부훤당 김해(金楷)는 <부훤당문집> '영빈서당이설기(潁濱書堂移設記)'에서 죽림서당→근암서당→수계서당→영빈서당의 변천내력을 설명하면서 "죽림(竹林)이라 함은 산향현사 남쪽 1리 웅암 기슭 강변의 영원사(鴒原寺) 구기(舊基)에 석탑 3좌가 급연히 솟아 있는 곳으로, 가까운 곳에는 죽림사고지(竹林寺古址)가 있어서 죽림칠현의 고사인 '죽림지의(竹林之義)'를 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조선조 사회는 고려조의 제도를 모방한 군현제(郡縣制)의 실시로 팔도의 부(府)·목(牧)·군(郡)·현(縣)에 관청(官廳)과 향청(鄕廳)을 설치하였다. 특히 군(郡)·현(縣)에는 향(鄕), 소(所), 부곡(部曲)을 두었는데, 대략 5개의 마을(村, 里)을 단위로 향(鄕) 또는 사(社)라고 칭하였으며, 소와 부곡은 특작을 행하는 임내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이 시기 상주목 산양현도 임내현으로서 세곡창(稅穀倉)과 향약소(鄕約所)를 두었다. 그 뒤에 산양현 향약소는 수계소(修稧所) 및 풍헌소(風憲所)라고 칭하였다.
조선 중종조 이후 유림(특히 新興士林派)에서는, 큰 고을부터 여러 촌락을 하나로 묶은 방(坊)과 면(面)이라는 새로운 명칭의 구획단위를 사용하면서 이전의 제도를 한층 더 조직화하고 보완해 나갔다. 각 향(鄕)에는 향정(鄕正) 또는 촌장(村長)을 두었고, 각 현(縣)에는 지역 사림(士林)의 공의(共義)로 영향력 있는 인사를 추천하여 풍헌(風憲)·권농(勸農) 등을 두었는데, 이들은 관아(官衙)와 가까운 유향소(儒鄕所) 또는 풍헌소(風憲所)에 상근하면서 고을의 수령인 현령(縣令)·현감(懸監)의 자문역을 수행하였다. 또한 지역의 풍교를 교화하고, 관아의 사무를 위임 받아 동헌 6방의 구실아치들에게 직임을 주는 대신 그들을 단속했던 제도이다. 한편 각 부(府)·목(牧)·군(郡)에 설치된 향청(鄕廳)에는 서울(漢城)의 경재소(京在所)에서 인준을 받은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이 상근하면서 부사와 목사 및 군수 등의 자문에 응하고, 고을의 풍교(風敎)를 관장하였다.
이 시기(1535년경) 산양현에는 첨지 황사웅(黃士雄), 사맹 변종번(卞宗蕃), 별좌 변종범(卞宗範), 부장 변안인(卞安仁), 통정 서흔(徐訢) 선생 5人이 결성한 '산양향약'이 있었는데, 이 향약을 실천하기 위해 영원사지 및 죽림사 옛터에서 취회를 자주 열면서 산양향약소(山陽鄕約所)를 창건하였다. 산양수계소(山陽修稧所)의 전신이다.
[참고문헌] '상산지', '상산향언록', '목재집’, '부훤당집’.
*부기(祔記) 2
조선 명종 7년(1552)~명종 9년(1554) 상주목사로 재임한 영천자 신잠(申潛) 선생이 관내 18개 지역에 서당을 창건하거나 인준해 준 뒤에 산양향약소는 서당을 겸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왜적에 의해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 ~ 1604년경(선조 37) 이 서당의 산장(山長) 겸 도유사(都有司)를 맡았던 칠봉 황시간(黃時榦) 선생과 월봉 고인계(高仁繼) 선생, 서재 채득강(蔡得江) 선생, 양애 채득호(蔡得湖) 선생 등이 중지를 모아 옛 자리(웅연동 영원사지)에 산양향약소를 복원하고 당사 하나를 더 지어 '근암재(近嵒齋)라는 현판을 달아 양애 채득호 선생이 전적으로 관리하였다고 전한다.
뒤에, 그 자리가 한쪽으로 치우치고 협소하여 마침내 1614년(광해 6)에 수개곡(樹介谷. 현 산북면 서중리 남단)으로 당사를 옮기고는 '근암서당(近嵒書堂)'이라 개칭하여 수년을 지냈다. 이후 1623년(광해 15) 지역 유림의 공의로 묘우, 강당, 동재, 서재, 협실, 문루 등을 중창하여 서당을 일신하고 서원이라 칭하면서 우암 홍언충 선생을 배향하는 '향현사(鄕賢詞)' 설치(1664년, 갑진)와 함께 서원으로 사액 받고자 여러차례 상소하였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향현사만 인가를 받게 되어 이듬해인 1665년(현종 6, 을사) 봄에 고유제를 지냈다. 이어서 명망 높은 한음 이덕형 선생을 추배하고 또 상소를 올리니, 마침내 1669년(현종 10)이 되어서야 비로소 예조의 승인을 받아 '근암서원(近嵒書院)'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1702년에 사담 김홍민, 목재 홍여하 선생을 추배하였고, 1786년 활재 이구, 식산 이만부, 청대 권상일 선생을 더 추배하여 칠현(七賢)을 모시는 서원(書院)이 되었다. 이 시기 청대 권상일 선생의 위판은 웅창의 풍헌소(겸 회로당) 및 수계소(겸 서당) 내의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이설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1680년경 서당과 서원은 각각 하는 일이 다르므로 근암의 서당은 웅창 수계소로 잠시 옮겼다가 山長인 부훤당 김해 선생과 낭옹 고세장 선생 등이 더 넓은 곳으로 이당할 것을 제안하여, 지역 사림의 중의를 모아 선비인 정지걸 선생이 내놓은 집을 사들이고 일부는 기부받았다. 이에 숙종 12년(1686) 산양 반곡리 남쪽 영강변의 와가 10가와 초가 5간의 민사를 더 매입한 뒤 이듬해인 숙종 13년(1687) 당우와 동서재 및 협실과 대문 등을 신축하고 문적을 옮겨 당호를'영빈서당(潁濱書堂)'으로 고쳤다고 한다.
[참고문헌] '산양향약소 임원록', '산양수계안’.
첫댓글 1702년경 작성한 근암서당사적기와 1786년경 작성한 근암서원사적기가 따로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