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창조
한스 새들마이어(Hans Sedlmayr, 1896~1984)는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정신적 창조 활동의 결과이고,
작품의 감상과 해석은 재창조 활동’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재창조란
작품의 물적・형식적 측면을
다시 창조하는 행위가 아니라,
작품이 가지고 있는 내용이나 의미,
그리고 가치를 새롭게 하거나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이 창조라면
해석은 재창조라는 이야기이다.
사회의 재창조, 권력의 재창조,
문화의 재창조 등
재창조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지만,
성경은 재창조를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재창조를 말하지 않고
새 창조를 말한다.
재창조는 잘못된 창조에 대한 교정이나,
부족함을 채우는 보충이나,
인간의 가치를 새롭게 하거나 확대하는 행위이다.
만일 하나님이 재창조를 하셔야 한다면
하나님은 전능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재창조가 아니라 새창조를 염두에 두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는 일에서 발생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에게 사랑을 묻는 사랑 행위이다.
창조는 하나님이 주도하신 일이지만
새창조는 인간이 주도하는 일이다.
이 일에 처음 사람 아담이 실패하여
아담과 그 후예들에게서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선이 단절되었다.
이제 모든 사람은
자신이 기꺼이(voluntarily)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생명선을 복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한(고후 5:18 새번역) 영혼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 고후 5:17)을
NIV, ESV, 쉬운 성경 등은 새 창조(new creation)로 번역했다.
창조가 물질의 창조라면
새 창조는 정한 마음의 창조요,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창조(시 51:10)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은
인성의 올바름을 칭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의 올바름을 칭하는 말이다.
물질의 창조는 홀로 지으실 수 있지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새롭게 하는 창조는
홀로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창조는 하나님 ‘홀로’(사 44:24) 하신 일이지만
새 창조는 인간의 협조로 만들어가는 창조이다.
만약 성경이 새 창조를 말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창세기 이야기는 신화와 다를 바가 없다.
새 언약
하나님의 언약을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누면서,
옛 것은 버리고 새 것을 취하듯이,
새 언약 시대에 사는 사람에겐
옛 언약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제1 언약, 제2 언약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정말 새 언약과 옛 언약은
내용이 다른 두 개의 언약으로 오해할 수 있다.
옛 사람 새 사람이라고 하면 한 사람이지만,
사람 1, 사람 2라고 하면 두 사람이다.
성경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말 중의 하나는 첫 언약과 새 언약이다.
첫 언약과 새언약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 8:7)와 같은 말씀이다.
그래서 첫 언약은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와 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서에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면서
‘나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기록한 법이 무엇일까?
첫번 돌비를 깨뜨리고 모세가 깎아 만든 돌비에
하나님께서 ‘처음 판에 있던 말을’(출 34:1) 다시 써주셨다.
첫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그 내용은 같다는 말이다.
첫 언약과 새 언약은 계명의 내용이 아니라
지키는 자의 태도에서 갈라진다.
첫 언약은 억지로 지키는 언약이요,
새 언약은 자원하여 지키는 언약이다.
첫 언약 시대에는 채찍으로 인도하셨으나
새 언약 시대엔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르비딤에서 물을 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을 치라’(출 17:6)고 하셨으나
40년 후 가데스에서 목이 마르다고 불평할 때
하나님은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민 20:8)고 하셨다.
첫 언약 시대엔 채찍으로 가르치시지만,
새 언약 시대엔 말씀으로 가르치실 것을 표상하신 것이다.
첫 언약에서 first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토스는 before, beginning,
best, chief, first(of all), former 등의 뜻을 가진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첫 언약은
원언약(原言約)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첫 언약의 시대에 인간이 범죄한 것은
언약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다.
자녀가 태어나면 그가 철들 때까지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자라서 철이 들어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면
부모와 함께 살아도 아무 문제없는 자녀로 바뀐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 없는 자처럼 살지만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하나님과 함께 살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언약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바뀐 것이다.
새 계명과 옛 계명에 대해 요한은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요일 2:7)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첫 언약과 새 언약은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지키면
첫 언약의 백성이요,
즐거이 자원하여 지키면 새 언약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돌비에
하나님이 쓰신 첫 번째 돌비를 가지고 하산할 때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가 만들어 가져 간 돌비,
즉 새 언약의 돌비를 들고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에선 광채가 났다(출 34:29).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는
자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광채요 능력이다.
광선(ray)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란(qaran)이
성경에서 뿔로도 번역되었다(시 69:31).
그래서 형상화의 천재인 미켈란젤로는
모세의 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뿔로 형상화 했다.
불교 초기 경전인 숫타니타파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함께 가자고 하시며 율법을 주셨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이 받아들이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뿔과 같은 힘을 갖는다.
모세가 만든 돌비에 쓰신 새 언약은
인간의 삶을 힘들게 하는 족쇄가 아니라
뿔과 같은 힘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