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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경신학회가 출판하는 학술지, ‘교회와 문화’ 40호(2018년)에 실린 이승구 교수의 글을 소개합니다. 학자가 소개하는 세대주의와 그 문제점을 들어보면 유익하겠다고 생각하여 공유해 드립니다. 논문의 pdf 파일에는 각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맨 끝에 있는 첨부 파일 참조). 아래는 pdf파일에서 각주를 제외하고 본문을 추출한 것입니다.
이 자료의 출처:
https://blog.naver.com/barunchurch/221405649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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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회복은 과연 예언의 증표가 실현되는 것인가? | 167
「교회와 문화」40 (2018): 167–89.
이스라엘의 회복은 과연 예언의 증표가 실현되는 것인가?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임을 인정하고, 현재 텔아비브 (이전에 사용되던 성경상의 명칭으로는 “욥바”)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곧 예루살렘으로 옮길 것이라고 선언하여 온 세상이 큰 혼란 가운데 빠졌다. 유엔 총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아랍권에서 미국에 가장 호의적이던 이집트가 이 선언을 철회하라면서 안건을 내어, 예루살렘의 지위에 대한 그 어떤 변화도 반대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2017년 12월 21일 목요일에 시행된 투표에서 128:9로 압도적으로 채택되었고, 팔레스타인과 아랍권 전체는 트럼프의 이 선언에 대한 저항의 큰 목소리들을 내고 있다. 온 세상이 중동의 평화가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고 걱정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이 선언이 세상의 폭력을 더 부르고 있다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정책 결정과 선언 배후에 트럼프와 미국 복음주의자들 일부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온전히 정착하는 것이 옛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한 바의 실현이라고 믿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규제 신념”(control belief), 즉 “다른 것을 그것에 근거해 믿도록 하는 근본적 신념들” 중의 하나이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발상 자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이렇게 중요한 정책 결정에 트럼프 개인과 그 주변 사람들의 종교적 신념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며, 따라서 이런 사람을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결정자로 만든 상황 자체를 더욱 더 회의(懷疑)에 찬 눈으로 보는 분위기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질문이 제기된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과연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일 안타까운 일
그러므로 제일 안타까운 것은 미국과 온 세계와 우리나라 안에서 성경을 공적 영역에 적용시키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더 강화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속화의 물결이 휘몰아치는 상황 가운데서 트럼프의 이런 주장은,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들로 하여금 공적 정책 결정에는 개인의 신념이 작용해서는 안 되게 해야 한다는, 다시 말하여, 개인이 무엇을 믿는가는 자유이지만, 그 개인의 신앙이 공적 결정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부추키는 결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공적인 영역은 사적인 신앙과는 관련이 없어 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더 강화되는 것이다. 어떤 일정한 분야의 일은 신앙과는 상관없고, 또 없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과 태도가 널리 고착되어 가는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신앙과 정책의 통합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태도가 점차 더 확대되고 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일반적 확산 - 이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무서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과 학문의 통합”과 같은 아이디어가 얼마나 이 상하게 여겨질 것인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세속화의 길로 더 나아 가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이번 트럼프의 선언도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이런 태도를 더 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신앙과 정책을 통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신념을 지닌 정치가들 가운데 자신의 신념과 자신이 수립하여 시행하고자 하는 정책을 연관시키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신념과 정책을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잘못된 신념과 정책이 연관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 정황에서 과연 무엇이 잘못된 신념인가?
트럼프가 성경을 실제로 참으로 믿는지는 (그의 심리를 다 들여다볼 수 없는 우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나름대로 성경을 강조하고 성경을 공부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성경을 잘못 읽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을 믿는 듯하다. 이번 선언에서도 그런 것이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선언 배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고 누구나 지적한다. 19세기 영국에서 나타난 성경해석의 한 관점이요 하나의 신학 사조인 세대주의는 그것을 이단이라고 말할 정도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아주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는 하나의 성경해석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란 무엇인가?
19세기에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 복음주의와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세대주의는 19세기 영국의 프리머뜨 형제단(the Plymouth Brethren)의 성경해석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공회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일랜드 교회(the Church of Ireland)의 목사였지만 1831년에 사직하고 그에서 나와 형제 교회(Brethren Church)에 속하게 된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를 통해 정교화 되고, Charles Henry Mackintosh (1820–1896) 등에 의해서 더 대중화되었으며, 1862-77년에 5회에 걸친 다비의 미국 사역의 결과로 미국에서 James H. Brookes (1830– 1897), D. L. Moody (1837–1899), Cyrus I. Scofield (1843–1921), 오랫동안 달라스 신학교의 초대 총장(1924-52)이었던 Lewis Sperry Chafer (1871-1952)9 등을 통해 제시된 신학적 입장과 성경해석을 흔히 “고전적 세대주의”(Classical Dispensationalism)라고 한다. 물론 각기 다른 분들이 조금씩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스코필드 주석 성경에 달린 주석이 고전적 세대주의의 대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그레이스 신학교 총장이었던 Alva J. McClain (1888-1968)과 달라스 신학교의 John Walvoord (1910–2002, 1952-86년까지 달라스 신학교 2대 총장), Charles Ryrie (1925–2016), J. Dwight Pentecost (1915–2014), Stanley Toussaint (1928-2017) 교수들이 제시한 입장을 “수정된 세대 주의”(revised dispensationalism)라고 한다. 이 수정은 50년대 말부터 60 년대에 일어난 것인데 그 기본적 수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원상태에서 하늘 백성(heavenly people; humanity in heaven)과 땅의 백성(earthly people, humanity on the new earth)을 더 이상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수정된 세대주의자들도 계속해서 “교회에 의해 대표되는 백성”과 “이스라엘에 의해 대표되는 백성”을 구별한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영원히 구별된다고 한다. 교회는 영원히 교회요, 이스라엘은 영원히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늘”(heaven)에 있다고 하는지, 아니면 “새 땅”(the new earth)에 있다고 하는 지는 수정된 세대주의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맥클레인과 펜트코스트와 호이트, 그리고 월부르드는 영원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부활한 몸을 가지고 “새롭게 된 땅”에 거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서 라이리는 천년왕국의 끝에 이스라엘이 교회와 함께 “하늘”에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2) 고전적 세대주의는 교회와 그 구원을 순전히 영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는데 비해서, 1970년대부터 세대주의자들이 교회의 공동체성과 신약성경에서 교우들 간에 “서로” 어찌하라고 말한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전 고전적 세대주의자들의 상당히 개인주의적 이해를 점차 수정하여 교회의 공동체성과 심지어 사회적 책임도 의식하여 간 것을 두 번째 중요한 수정으로 말할 수 있다.
(3) 천국과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에 대한 용례의 변화가 일어났다. 고전적 세대주의자인 스코필드는 4복음서 모두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로 영원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비해서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천국”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서 주신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천국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천년왕국에서 극치에 이르고, 이는 영원상태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다 고 보았다.
그러므로 스코필드에 의하면 천국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1) 하나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가까이 온 왕국”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를 제공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이를 거부하여 미래로 연기된 것이다. (2) “신비한 형태로(in mystery form) 있는 현재의 천국” 이다. 왕국을 약속한 다윗 언약의 왕국(그는 이것은 천국이라고 한다)의 신비한 형태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는 아니고 기독교권 (Christendom)이고, 교회는 천국의 현재적 실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3)천년왕국에서 성취된 천국이다. 다윗 언약은 왕국을 세우겠다는 정치적 언약이니 이 땅에 있는 천년왕국의 백성들을 위한 지상적 목적으로 지닌 것이라고 한다.
수정된 세대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수정하면서 각기 서로 다른 견해를 표현한다. 알바 맥클레인과 헤르만 호이트는 보편적 왕국(universal kingdom)과 중보적 왕국(mediatorial kingdom)이라는 용어를 도입시켰다. 보편적 왕국은 정통신학이 말하던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 즉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이다. 이는 모든 세대를 통해 항상 같은 형태로 있다. 그런데 중보적 왕국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중보자를 통해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유대의 왕들이 그 선택하신 통치자였고, 급기야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중보적 왕국의 중보자로 오신 것이다. 구약과 예수님에게서 중보적 왕국이 이 땅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니 이 교회 시대에는 이 땅에 중보적 왕국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중보적 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땅에 있게 된다고 하고, 따라서 천년왕국이 중보적 왕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현 시대를 “통치간 시대”(interregnum)라고 지칭한다. 투쌍(Stanley Toussaint)도 이 시대에 중보적 왕국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맥클레인에게 동의하면서, 신약에 나타나는 왕국의 현존에 대한 모든 말씀은 사실 미래 왕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것이 선취적으로(proleptically) 사용된 것이라는 해석을 한다.
라이리는 보편적 통치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을 말하고, 이 땅에서의 왕국을 그저 다윗왕국이라고 쓴다. 포로기 때에 다윗왕국이 멸망하고, 예수님에게서 왕국의 세 가지 형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공하셨으나 그들이 거부한 다윗왕국 (이것은 스코필드가 말한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있는 “천국”이다), 둘째는 기독교권(Christendom)이라고 말한 왕국의 신비한 형태이고(스코필드의 천국의 신비한 형태와 동일하다), 셋째는 다윗왕국의 종국적 실현인 다윗적 인 천년왕국이다. 그런데 천년왕국이 끝나면 이스라엘과 교회는 하나님의 보편적 왕국 아래서 하늘(heaven)에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 라이리의 독특한 주장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지상적 형태로서의 왕국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라이리는 현 세대에 있는 영적인 왕국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영적인 왕국은 오늘날 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영적 통치이다.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는 “영적”이고, “중생의 능력”이라고 그는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대주의 체계 안에서의 중요한 수정이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세대주의는 왕국과 교회를 직접 연관시킨 일이 없었는데 라이리의 “영적인 왕국”에서 새로운 수정과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윗 언약의 성취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의 세대주의자로서의 성격이 역시 나타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왕이기는 하지만 다스리지는 않는다는 주장도 한다. 다스림의 지상적 형태에 묶인 모습이 여기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영적인 다스림은 아직 충분히 다스림이 아니라고 보는 세대주의적 이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월부르드(John Walvoord)는 영적인 왕국이라는 용어를 모든 세대에 걸친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라고 정의하고 사용한다. 다윗왕국은 순전히 정치적 왕국이고, 예수님이 이를 유대인들에게 제공하였으나 유대인들이 거부하여 연기된 왕국(postponed kingdom)이 되었고, 결국 약속된 다윗왕국이, 연기된 다윗왕국이 천년왕국에서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천년왕국이 끝나면 지상적인 다윗왕국도 끝나고, 보편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새 땅이라는 말에도 주의하고 사용하기도 하나 그 영원 상태는 지상적이지 않고, 시간적이지 않은 형태의 “하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하는 듯하다고 Blaising과 Bock은 말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통치하시는 영적인 왕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순전히 정치적인 왕국으로서의 다윗왕국을 말하는 구약은 신약의 이 영적인 왕국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며 (세대주 의의 특성!), 현재의 교회는 다윗왕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펜트코스트(J. Dwight Pentecost)는 보편적 왕국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the eternal kingdom of God)라고 하고 이 때 영원이라는 말을 상당히 무시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이 영원한 나라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중보자를 통해서 시간적이고 우유적(contingent)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펜트코스트는 이를 “신정적 왕국”(theocratic Kingdom) 이라고 지칭한다. 과거의 신정적 왕국들을 (1)사사 하에서의 신정적 왕국, (2)열왕 하에서의 신정적 왕국, (3)선지자들 하에서의 신정적 왕국, (4) 그리스도 하에서의 신정적 왕국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현 재의 신정적 왕국은 세상의 통치, 가정, 고용자들, 그리고 교회 등을 통해 실현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영원상태에서 이스라엘과 교회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 땅”에 있게 됨을 강조하고 가르친다. 영원상태에서도 국가적 정체성들이 있을 것임을 이스라엘과 열방들의 구별로부터 이끌어 내고 있다.
이와 같이 1950년대 말부터 세대주의의 틀 안에서 수정과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있어 왔고, 그 문제 제기를 더 심각하게 고심한 결과로 나타난 그 다음 세대의 세대주의자들의 신학은 1991년에 도입된 용어인 “점진적 세대주의”(progressive dispensationalism)라는 명칭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Robert L. Saucy, Craig A. Blaising, Darrell L. Bock 등이다. 이들은 자신의 선생님들인 수정된 세대주의자들을 성경 계시에 좀더 충실하게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의 가장 좋은 예가 성경 계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라는 두 용어가 사실은 같은 실재를 지칭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 둘을 동일시하고 있으므로 우리들도 이 둘을 구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그들은, 월부르드 같은 이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왕국이 여러 왕국들인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하면서 월부르드는 그것이 하나의 종말론 왕국의 여러 측면들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펜트코스트 같은 이는 하나의 신정적 왕국을 말하면서도 이전 세대주의자들과 같이 각 시대를 너무 독자적으로 본 듯하며, 이 모두의 역사적 연속성과 점진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모든 계시들이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인 점진적 계시의 부분인 것을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이 모든 시대의 역사적 연속성과 계시의 점진성을 강조하여 가는 것이고, 그리하여 자신들의 신학 체계를 지칭하여 “점진적 세대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이해에서 그들은 고전적 세대주의와는 달리 교회가 괄호 안에 있다거나 등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하나의 구속 계획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a vital part) 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이스라엘과 교회를 끝까지 구별하면서 종국적으로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는 이스라엘을 위한 자리와 그 외의 열방을 위한 자리가 있다고 끝까지 구별해서 말한다. 또한 예수님을 지칭할 때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요, 구속된 인류의 모든 민족들의 왕이라고 구별해서 지칭한다. 이 모두를 그저 모두 다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지칭하며, 이제 하나가 된 이 영적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지칭하기를 상당히 어려워하는 이유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는 자들은 모두 “한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에베소서 2:15 말씀을 잘 인용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는 잘 설명하면서도 끝까지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별을 유지하려는 것은 그들의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이다. 그들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말을 인용하면, “구속된 유대인 들과 같이 구속된 이방인들이 그들의 다른 민족성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도되며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텍사스의 달라스 신학교, 시카고의 무디 성경학교(the Moody Bible Institute), 그 학교의 모델을 따라 만들어진 로스앤젤레스 성경학교(The Bible Institute of Los Angeles, 오늘날의 바이올라 대학교와 캘리포니아의 탈봇 신학교의 전신) 등을 통해 더 진전된 세대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만 아주 독특한 성경해석을 한다.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의 문제점
세대주의의 근본적 문제는 그들의 지나친 문자주의이다. 세대주의자 들은 모든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수정된 세대주의는 더 철저히 문자적 해석을 하려고 한다. 찰스 라이리는 일관성 있는 문자적 해석이 세대주의의 본질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서, 우리는 성경이 문자적 해석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문자적인 해석을 하고, 성경이 영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영적인 해석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모든 부분을 거의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서, 에스겔 34:12-13이나 에스겔 36:24, 스가랴 8:7-8 등에서 이스라엘을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건져내어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한다는 말에 대해서 이것이 주전 5세기에 일군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귀환한 것으로 다 성취되었다고 보지 않고, 지금도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할 날이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그 수도로 삼고 나라를 이루어 살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의 언약들은 백성, 땅, 국가적 생존, 왕국, 왕, 영적 축복들 등을 영원한 것으로 보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축복들이 성취될 수 있는 영원한 땅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후의 소위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재림 전에 역사는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 지를 아는 사람들은 (1)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일에 힘쓰며, (2)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토로 돌아가서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여기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소위 “백투제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이 나타날 토대가 마련된다.
그리하여 세대주의자들은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팔레 스타인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국가를 명백히 구현하는 것이 예언의 징표(clock of prophecy)라고 한다. 오래 전에 다비 자신이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를 이룰 것이라고 1929년에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잘 돕고 그들이 메시아를 다시 받아들이도록 하여 급기야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나라가 수립되는 것을 돕는 것이 참으로 성경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초기 세대주의자로서 미국의 전도자인 블랙스톤(William Eugene Blackstone, 1841-1935) 같은 분은 시온주의 운동(the Zionist movement)을 돕고 지지하는 데 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바로 이런 데에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의 문제가 있다. 모든 것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중심이 된다는 구약의 예언을 장차 언젠가 그 일이 문자적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예루살렘을 명백히 언급하는 구절도 그 문맥 상 예루살렘만을 의도하지 않고 매우 폭넓은 회복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몇 구절을 맥락 속에서 보기만 해도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서, 스가랴 8:7-8을 보자.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 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예언은 주전 536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온 후의 주전 520-518년경에 스가랴에 의해 주어진 예언으로, 분명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말이고, 이것은 B.C. 458 년 일단의 유대인들이 에스라 지도하에 팔레스타인으로 온 그 에스라 시대에 문자적으로 성취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장차 유대인들 이 그 본토로 돌아가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세대주의자들이 해석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것이고, 또한 그런 해석으로도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살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지나친 문자적 해석의 결과로 세대주의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친 이스라엘 정책을 펴는 것이 이런 성경 예언에 제대로 반응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표한다. 또한 소위 아마겟돈 전쟁이 문자적으로 중동 땅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하면서 문자적인 전쟁을 예상하고, 그 때에 이스라엘의 편을 드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 잘못된 성경해석과 정책을 통합시키는 예가 된다.
이런 지나친 문자적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스가랴 14장 16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전에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따라서 후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성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상기하는 제사가 다시 드려지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지나친 문자적 해석을 하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나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끝까지 주님을 부인하는 영벌 받을 사람들은 내어 쫓기어 영원한 형벌을 받으나 온 세상이 정상적이 되어 하나님께 대한 바른 경배에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영적인 해석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세대주의의 지나친 문자적 해석의 강박 때문에 문자적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이 회복되고 그 성전에서 문자적인 제사가 드려지게 되리라는 생각과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나고 있는 세대주의의 둘째 문제는 끝까지 이스라엘 과 교회의 구별을 유지하는 점이다. 고전적 세대주의 입장에서 점차 변화하여 언약적 해석에 상당히 근접하고 있는 점진적 세대주의 (progressive dispensationalism)를 주장하는 분들조차도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과 끼어든 시기에 나타난 교회라는 두 그룹이 끝까지 유지된다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하여, 언약 신학적 해석에 의하면,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결국 갱신되고 확대된 것이 신약의 교회이고, 교회에는 “예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인 사람들”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공동체이며, 그들이 영적인 이스라엘로서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 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 하게 하시고”(엡 2:14-15,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라고 말씀하시는 것의 온전히 성취가 나타난다. 끝까지 이스라엘과 교회가 나뉘어져 제시되고, 이스라엘은 천년왕국의 본 백성들이요 교회는 일부는 천상에 있고, 일부는 지산에서 통치를 받으며 있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셋째로,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재림 전에 있을 대환난(the great tribulation)을 생각하면서 참되고 준비한 신자들은 대 환란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일부는 다비의 입장을 따라서 대환난 전의 휴거 (pre-tribulation rapture)를 주장하거나, 일부는 대환난 중간의 휴거 (mid-tribulation rapture)를 주장하며, 또 일부는 신앙의 강도에 따라 휴거의 시기가 다르다는 부분 휴거설(partial rapture theory)을 주장하여 성경적인 휴거의 진정한 의미를 손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세대주의자들은 휴거가 성도의 진정한 소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래드 교수가 이전에 잘 말했던 바와 같이 성경은 휴거가 성도의 진정한 소망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때 이루어질 부활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휴거는 우리 주님이 오실 때에 주님을 공식적으로 영접하기 위하여 공중으로 끌어 올려지는(snatch away or seize) 것을 뜻한다. 다음 구절이 명백하게 이런 것을 전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 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rapture)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이 말씀에 의하면, 참된 성도들은 (이미 죽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부활체를 입거나 (당시에 살아 있는 성도들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모하여 공중에로 끌어 올려지는데 그 목적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 사용된 “영접하다”는 용어는 공식적인 영접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일반 적 용례로서는 왕의 사절을 영접할 때 사용되던 말이다. 성경에 나타난 예를 들어 보면, “보라 신랑이라 맞으러 나오라”(마 25:6) 또는 사도 바울 일행이 로마를 향하여 가자 “그곳 형제들이 우 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행 28:15) 등에 사용된 용어이다.
이들이 신랑이나 바울 일행을 맞았으면 그곳으로부터 목적지인 혼인잔치 장소나 로마를 향하여 같이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이 우리들이 공중에 끌어 올려져서 주님을 맞았으면 그 공중에 일정 기간을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이 땅으로 내려와서 주께서 하실 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이다. 후크마의 다음 같은 진술이 아주 정확한 것이다: “공중에서의 이런 만남 이후에 휴거된 교회는 다시 땅으로 내려오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근자에 트럼프가 나타내 보이고 있는 이런 행보와 관련하여 그 배후의 사상들과 그 문제점을 살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는 성경을 존중하되, 성경을 가장 건전하게 해석하는 일에 대 한 관심을 더 일으켜야 한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보다 성경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그것을 잘 못 해석하며 잘못된 길에로 자신만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잘못된 데로 끌고 간다는 것을 유념해서 무엇보다도 성경을 바르고 과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읽고 해석하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바른 성경해석은 언제나 주어진 문맥을 잘 살펴서 해석하는 것이다. 예언으로 주어진 것도 문맥을 주의하면 지나치게 이상하고 문자적인 해석에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세대주의적 해석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첫째 필요한 일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이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건건하게 성경을 해석해온 방식인 언약신학적 해석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성경을 가장 건전하게 해석한 바른 전통을 존중하면서 성경의 신적 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때라 성경을 해석하면서 그 성경이 주시는 말씀에 따라가야 할 것이다.
둘째로, 그와 함께 19세기 말에 시작된 성경해석의 한 관점으로 선교사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를 심각하게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세대주의는 이단이 아니다. 그리고 세대주의 입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몇 가지 강조점을 제외하고는 가장 건전한 성경해석을 제시하고 오늘 날 교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삶들이 있 음도 우리는 강조하야 한다. 캘리포니아 그레이스 교회와 마스터즈 대학교와 마스터즈 신학교(Master’s Seminary)의 총장인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 Jr.) 목사님이 그런 분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문자적 해석과 종말론과 휴거 등의 문제에 있어서 세대주의는 아직도 여러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세대주의 형제들에게 바른 영향을 미쳐서 세대주의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더 해야 한 다. 고전적 세대주위에 비해서 근자의 점진적 세대주의는 좀더 계시의 점진성에 유의하는 성경해석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이스라엘과 교회를 계속해서 나누어 제시하는 세대주의 형제들과의 대화가 더 깊어져서 점진적 세대주의에로 나온 것 이상의 변화가 있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본래 세대주의자로 자라났으나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언약 신학적 해석이 더 옳음을 발견하고 소위 신학적 회심을 한 조지 래드(George Ladd, 1911-82)나 세대주의의 본산인 달라스 신학교 출신으로 세대주의적 해석보다는 언약신학이 더 옳다고 하면서 고전적 언약신학의 의미를 잘 밝히고 오늘날 입장에서 언약신학을 잘 제시하면서 개혁신학의 요람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총장을 오랫동안 역임하고(2005년-현재까지) 있는 피터 릴백(Peter Lillback) 교수에게서 일어난 변화가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로, 바른 성경해석의 빛에서 이 세상을 잘 살펴보고 이 세상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바른 성경적이고 기독교 세계관적인 통찰을 제시하는 일에 좀 더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여러 의견을 그대로 따라 거거나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 있으나(in the world)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not of the world). 진정 그런 모습이 이 세상 여러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행동과 반응에서 나타나야 한다. 트럼프의 모습과 같이 이 세상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어떤 영향을 미쳐서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것 같은 모습을 우리가 나타내 보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말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주장할 때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드러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임하여 와 있으나 아직 그 극치에 이르지 않은, 그리하여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것이다.
<끝>.
1강 : 시대의 징조와 마지막에 될 일들 / 강사 : 이승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https://youtu.be/WiI1y9JWZrI?feature=shared
2강 :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과 천년왕국 / 강사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https://youtu.be/CZURYfdKIQw?feature=shared
3강 : 세대주의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 강사 : 이상웅 교수(총신대신학대학원)
https://youtu.be/UM9YnfP_c9Y?feature=shared
천년왕국의 실체와 의의ㅣ한국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한철흠 교수
https://youtu.be/4fD59Y3Ttlo?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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