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인형/ 박은혜
명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면 엄마는 내게 오백원짜리 동전을 하나 쥐여주었다. 그러면 나는 쏜살같이 뛰어 옆 동네 문방구로 갔다. 문방구점이야 우리 동네에도 있었지만 그런 날 가는 곳은 반드시 거기여야만 했다.
그 문구점은 유독 예쁜 종이 인형을 많이 팔았다. 가격대는 50원부터 500원까지 다양했다. 인형의 크기, 갈아입힐 옷의 종류와 퀄리티는 가격에 비례했다. 200원짜리 두 장을 사서 두 판 놀 것이냐, 500원짜리 한 장을 사서 한판 제대로 놀아볼 것이냐 하는 것은 그 순간 최대의 난제였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며 짜증 내는 친구를 무시한 채, 나는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쪼그려 앉아 인형을 고르고 또 골랐다. 그러고 나면 가게 안쪽 컴컴한 방에서 곰팡이처럼 새하얀 머리를 한 할아버지가 나와 돈을 받아가셨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이 살았던 외할머니댁에는 명절이면 수많은 손님들이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엄마는 상을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했다. 어른들은 바빠서 나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전에서 나는 기름 쩐 냄새에 속이 울렁거리고, 제사상에서 내려온 조기 몇 마리의 뼈가 죄다 보일 때쯤이면, 그제야 골목 끝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언니이! 둘째 이모의 딸, 바로 아래 사촌 동생의 가족이 온 것이다.
그 애는 한 살 위의 나를 엄청난 언니로 대접했다. 작고, 하얗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같이 하고 싶어 하는 애였다. 내가 착한 일을 해도, 나쁜 일을 해도, 재밌는 일을 하거나, 심지어 조금쯤 심술을 부릴 때에도. 그 애는 내가 하는 일이라면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우리는 늘 서로를 그리워했다. 만날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고작 대여섯 번이었지만, 한 번도 서로 서먹해 본 기억이 없다.
우리 집에는 장난감이 많지 않았다. 뛰어놀만한 공간도 따로 없었다. 함께 나눠 가질 수 있던 유일한 놀잇감이 바로 종이 인형이었다. 종이 그림판 한 장에는 대개 두 명의 공주와, 그에 맞는 옷과 장신구, 소품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보통 짧은 머리에 성격이 괄괄해 보이는 공주를 골랐다. 그 애는 머리가 길고, 눈이 좀 더 반짝이는 쪽을 고르곤 했다. 그렇게 서로 의견이 꼭 맞아떨어지면 우리는 은밀히 눈을 마주치고 씩 웃었다.
어른들은 원래 늘 바빴다. 명절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중요하지도 않고, 재밌는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세상 심각하게 하는 어른들의 등 뒤에서, 우리는 사각사각 종이를 잘랐다. 손에 맞지 않게 턱없이 큰 주방용 가위 날에 온 정신을 집중하면, 공주님의 드레스 자락을 따라 시간이 한 움큼씩 뭉턱뭉턱 잘려나갔다. 종이 위의 공주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불러낸 뒤에는 수고한 시간의 보상이라도 되는 듯 맹렬한 놀이가 이어졌다.
우리는 가장 예쁜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모자를 쓴 채 무도회에 갔다. 왕자가 없어도 얼마든지 즐겁게 춤출 수 있었다. 아름다운 티포트를 기울이며 차를 마실 땐 새하얀 고양이가 발밑에서 새침하게 꼬리를 살랑거렸다.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는 온갖 물건을 다 담을 수 있었다. 악당이 등장하면 그 안에서 꺼낸 칼을 용감하게 휘둘렀고, 숲속을 지나다 피곤해지면 침대를 꺼내 누워 별자리를 그리기도 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직접 도둑이 되기도 했고, 해적이 되어 적을 물리치거나, 집에 나뒹굴던 이 빠진 효자손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로 떠나기도 했다. 장르와 차원을 넘나들며 신나게 놀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고요해진 어른들이 어이없다는 듯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맨날 인형 갖고 놀면서 매번 그렇게 재미있니? 뭐 하고 노는지 우리한테도 좀 알려주렴.’
세상 어디라도, 그 무엇이라도 종이 공주들과 우리는 함께 했다. 무도회가 열리는 궁궐, 숲 속, 바닷가, 괴물의 성 등. 무수히 많은 종이 인형들이 우리의 손에서 잘려 나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애가 돌아간 이후 방바닥을 나뒹구는 종이 인형을 혼자 치우는 게 너무 쓸쓸한 일이라고 느꼈다.
그 무렵부터 우리가 함께했던 무지개색 기억 속에 낯선 모습들이 불쑥불쑥 침범했다. 예를 들면, 그 애의 엄마인 이모와 달리 늘 헝크러져 있던 우리 엄마의 머리카락이라든가, 손님이 가고 나면 집을 정리하는 엄마의 지친 손끝. 그 애 가족이 타고 온, 우리 집엔 없는 새까맣고 큰 자동차 같은 것들. 학교에서 내는 숙제가 점점 많아졌다. 나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종이 인형을 사 오던 옆 동네 문방구는 문을 닫았고, 늘 거기 있을 것만 같던 주인 할아버지도 모습을 감추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 댁에서 나와 힘겨운 시간을 살았다. 그 애의 가족은 자기소개서 성장 배경란의 첫 줄에 나올 것처럼 모범적이었다. ‘엄하지만 성실한 아버지, 다정하고 상냥한 어머니’를 가진 그 애는, 말 그대로 화려한 자소서 같은 인생을 살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 가장 인기 있는 학과에 합격했다고 들었다. 나는 악몽 같은 10대를 간신히 빠져나와 그보다 좀 더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낯선 지역에 직장을 얻어 혼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퇴근 후 돌아온 기숙사 방. 침대에 누우면 천근 같은 몸이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땐 어딘지 모를 세상에서 날아온 형형색색의 종이 조각들이 화르륵 곁을 스쳐 사라지곤 했다. 좋았던 기억들을 두서없이 꺼내 보면 그 속엔 어김없이 그 애가 있었다. 나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만일 우리 앞에 시간이 좀 더 남아 있다면. 그동안 우리를 비추던 긴 햇빛이 우리의 다른 인생마저 비슷한 색으로 바래게 할 때 즈음엔, 또 한 번 세상의 등 뒤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랬기에 영정사진 속에 놓인 그 애를 마주했을 때는 슬픔보다 황망함이 더 컸다. 몹쓸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생사가 오가는 병도 아니고, 워낙 의학 기술이 발달한 세상이니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애가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모들의 오열과 엄마의 통곡을 뒤로 한 채, 나의 원망은 장례식장을 허망하게 떠돌았다. 왜 너지? 구겨지고 짓밟혀, 어느 한 페이지 성한 곳 남지 않은 나도 아직 여기 있는데, 왜 네가 먼저 떠나버린 거니. 나는 죽음을 선택함에 꼭 무슨 자격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그 애에게 따져 물었다.
반드시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몇 가지 선택과 우연, 실패와 성공이 지그재그로 얽힌 끝에,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키우는 현재의 삶에 정착했다. 그동안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두어 번의 커다란 국가적 사고가 있었고, 미세먼지 농도가 짙어지다 옅어지고를 반복했으며, 카페의 계절 메뉴가 이름만 바꾼 채 몇 번인가 다시 나왔다. 나는 어느새 길을 걸으면서도 아이 유치원과 학원 시간표, 가족의 식단과, 멀리 떨어져 사는 친정엄마의 안부 같은 걸 아무렇지 않게 떠올리는 남의 것 같은 삶에 익숙해졌다. 그러다 문득 거리의 햇빛이 유난히 밝아 눈이 부실 땐, 이 빛이 이제 그 아이에게는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라 우리의 세상이 완전히 갈라졌음을 실감하곤 한다.
언젠가 나에게도 이 버겁고 고단한 인생을 떠날 시간이 올 것이다. 그때 만일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천국이 있다면, 거기엔 무릉도원이나 황금으로 된 궁전 같은 건 없어도 될 것 같다. 인형이 그려진 종이 한 장과 작은 가위 두 개, 그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상상을 하면 남은 시간을 오려내는 가위질 소리가 사각사각 들리는 것 같아,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길을 걷게 된다.
첫댓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 섬세하고 깔끔한 문장에서 선생님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남의 것 같은 삶에 익숙해졌다'는 문장에서 한 번 더 머물다 갑니다.
박은혜 선생님, 맥심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올해 응모작이 정말 많았는데 대단하십니다.
우리네 삶이 종이인형을 오려내는 가위질 같은 것처럼 마음가는대로 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편의 글 속에 박샘의 깊은 사색이 녹아있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맥심상 수상도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