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2023년 11월 01일(수요일)
신륵사일주문
일주문 현판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
일주문 옆에 공덕비
신륵사 김병기송덕비
판돈령김공병기송덕비(判敦寕金公炳冀頌德碑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조선 철종대(1849~1863)의 세도가인 김병기(1818~1875)가 신륵사에 시주하여 법당과 구룡루를 보수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건립연대는 1860년(철종 11)입니다.
규모는 총 높이 약 226.5㎝로, 비신 높이 136.5㎝, 폭 63㎝, 두께 14.5㎝이며, 개석(蓋石) 높이 42㎝, 폭 98㎝, 두께 63.5㎝이고, 방부 높이 48㎝, 폭 91㎝, 두께 63㎝입니다.
비신의 뒷면에 음기(陰記)가 13행의 단정한 해서로 새겨져 있으나, 비제(碑題)와 찬서자(撰書者)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비신 앞면에 큰 해서로 “판돈령김공병기송덕비(判敦寧金公炳冀頌德碑)”라 적혀 있고, 그 옆에 작은 해서로 “간역 오위장 연안김지택(看役 五衛將 延安金智澤)”이라 되어 있습니다.
불이문
남한강변에 보제루(普濟樓)가 있습니다.
남한강 황포돛대
삼층석탑과 강월헌(江月軒) 정자
달을 감상하는 강가의 정자라는 의미로 달맞이 하기에 좋은 장소인가 봅니다.
강월헌 현판
신륵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 위에 있는 신륵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은 화강암을 깍아 만든 삼층탑으로, 신륵사 다층전탑 근처 강변의 암반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양식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기단부는 넓적한 한 장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상대중석(면석)과 갑석을 올려 놓았습니다.
면석(面石)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모서리 기둥)와 탱주(撐柱-가운데 기둥)를 새겼고, 그 위를 덮고 있는 갑석(甲石)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고려 말 나옹 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 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감로수조
보호수 은행나무
나무나이 :600년, 나무높이 22m, 나무둘레 3m, 3.5m
현판에 구룡루(九龍樓)라고 써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9마리의 용이 승천했던 연못이 있었나봅니다.
구룡루(九龍樓) 현판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이 전탑은 신륵사 경내의 동남편 강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래로 한강이 보이고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기단부(基壇部)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무질서한 7단의 층단형으로 구축하고, 윗면에는 낮은 탑신받침을 마련하였습니다.
탑신부(塔身部)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몸돌 하나가올라가 있어 7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전탑의 북쪽에는 수리할 때 세운 수리비가 전해 오는데, 그 비에 1726년(영조 2)에 고쳐 지었다고 적혀 있어 원래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는 고려 말 신륵사에 대장각을 만든 후 그 내력을 새긴 것입니다.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습니다.
비문은 예문관 대제학이었던 이숭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 제학이었던 권주가 썼습니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했던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심검당(尋劍堂)은 신륵사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극락보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極樂寶殿)으로 올라가봅니다.
신륵사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법당으로 절안의 중심부에 자리해 있습니다.
극락보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 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사이에도 있는 다포(多包) 형식입니다.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보물 제 1791호)
아미타여래삼존상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가운데의 여래는 앉아 있고, 여래 양쪽의 보살은 서 있는데, 유난히 높은 육계(肉髻), 이국적인 얼굴, 옷 주름 표현의 독창성 등의 조형적 특징은 다른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특징입니다.
불상 내부에서 복장 원문이 발견되어 1610년(광해2)에 승려와 일반 백성 백여명이 마음을 모아 삼존상을 만든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특히 인일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이 확인되어 17세기 초기 조선 시대 불교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은 백대리석(白大理石)을 재료로 2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려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통일 신라나 고려의 양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기단부에서 탑신부까지 전부 돌을 한 장씩 쌓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추켜 올라가 있습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각 부분 아래에 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 일부 드러나지만, 세부적으로는 그러한 특징을 벗어난 표현도 나타납니다.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의 가운데 칸에는 칠성탱화(七星幀畫)가 그려져 있습니다.
칠성탱화는 민간 신앙인 칠성을 불교의 호법선신으로 수용하고 이를 의인화하여 묘사한 불화(佛畵)입니다.
조사당(보물 제180호)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이곳에는 중앙에 지공 화상과 좌우에 무학 대사와 나옹 화상의 영정이 있어요.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은 신륵사 조사당에 보존되어 있는 세 폭의 초상화로, 지공화상(?~1363), 나옹 화상(1320~1376), 무학대사(1327~1405)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가운데는 지공 화상, 왼쪽은 무학대사, 오른쪽은 나옹 화상의 영정을 그렸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 좌상입니다.
이 삼화상진영은 신륵사의 중요한 인물인 나옹 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입니다.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 점의 진영 가운데 삼 화상을 그린 진영은 매우 드물어 희구한 자료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乾隆三十八年銘) 동종(銅鍾)은 1773년(영조 49)에 만든 동종으로 높이는 93.6cm이고, 폭은 66.2cm입니다. 용뉴가 쌍룡으로 되어 있고 조선 후기 범종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원형 범자를 연과과 보살상 사이에 배치하거나 하대의 연화 덩굴무늬를 중간에 배치하는 등 신륵사 범종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입니다.
종에 새겨 기록을 통해 종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 범종 형식과는 다른 다양성이 나타나므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습니다.
봉송각 우측에 두개의 사리탑이 있네요.
앞에 있는 원구형석조승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팔각원당형석조승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명부전 앞에는 수령 600년(1982년 기준)의 보호수인 향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명부전 (冥府殿)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여 염라대왕과 시왕(十王)을 모신 법당으로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곳입니다.
지장보살과 염라대왕 그리고 시왕들의 모습 입니다.
봉송각
이곳은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시는 영가님들을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입니다.
관음전(觀音殿)
관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