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밤 김견남
우리 딸은 시부모님과 함께 정육점을 하고 있어서 평소에도 바쁘지만, 명절이 다가오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더 바빠진다. 그래서 명절 동안 딸과 사위는 손녀를 시누이 집에 맡기고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안쓰럽고 마음이 답답하다. 내가 만약 시부모라면 가게가 아무리 바빠도 며느리를 일찍 퇴근시킬 것 같은데,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그게 쉽지 않은가 보다.
이번 명절은 추석 전에 토요일을 끼고 3일이나 빨간 날이 이어져, 나는 손녀를 미리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딸의 시누이네도 어린아이가 세 명이나 있어 우리 손녀까지 가면 4명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돌보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바쁘기도 하고 거리도 멀어서 대천과 부산의 중간 지점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손녀는 나를 보자마자 양팔을 벌리고 "할머니!"라고 외치며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보니 장거리 운전의 피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손녀는 내 품에 안겨서 저녁을 먹으며 딸에게
"나는 할머니 집에 갈 거니까 엄마는 빨리 엄마 집에 가"라고 말했다.
손녀의 말에 딸은 몹시 서운해하며 발길을 돌렸다. 손녀는 할 말이 많은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린이집에 갔다가 고모네 집에 가서 언니 오빠, 동생과 함께 놀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기는 고모 집에 있다가 할머니 집에 있다가 하고 싶다고 했다. 손녀는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소외되거나 외로워하지 않고 즐겁게 보낸 것 같아서 안도감이 들었다.
다음날은 가까이 사는 언니의 손녀도 추석이라 미리 와 있었기에, 우리는 두 아이를 미용실로 데려가서 파마를 시키기로 했다. 네 살, 다섯 살인 아이들은 실제로는 10개월 정도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고, 둘은 어릴 때부터 명절이나 집안의 중요한 행사에서 종종 만나 익숙한 사이였다. 파마를 하면 공주처럼 예뻐진다고 하니 두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얌전히 앉아 유튜브를 보며 파마를 했다. 공주에 대한 로망이 있는 여자아이들답게, 파마 후 곱슬거리는 머리를 보고 공주 같다며 신이 나서 좋아했다.
그날 밤, 두 손녀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비슷한 또래라서 그런지 잘 놀다가도 어느 순간 장난감을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며 다투고, 울음이 터지기 일쑤였다.
나는 두 아이에게
"어린이집에서도 그렇게 싸우고 울고 하면서 노니?"라고 물었는데, 둘 다 합창하듯
"아니요!" 하고 대답했다.
"그럼 왜 집에서는 싸울까?"라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도 어린이집에서처럼 양보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것 같다"라고 했더니, 둘 다 알았다고 한다. 그러더니 언니인 민아가 먼저
"채민아, 언니가 미안해"라고 했다.
채민이도 "응, 나도 미안해, 언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민아가
"채민아, 이제 좀 마음이 풀렸니?"라고 묻자,
채민이도 "응, 언니도 마음이 좀 풀렸어?"라고 대답했다.
둘은 쿨하게 화해하고 다시 사이좋게 장난감을 나눠 갖고 놀았다.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저런 언어를 구사하고, 이해하며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너무 놀라웠다.
저녁이 되자 손녀는 디지털 시계를 바라보며 숫자가 9자로 바뀌면 자야 한다며 잠자리로 갔다. 그런데 잠자리에서 또 문제가 생겼다. 집에 하나밖에 없는 동물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베개를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며 싸우고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예쁜 꽃 그림이 그려진 베개를 민아에게 주면서
"민아야, 민아 할머니 집에도 민아 베개랑 이불이 있지?"라고 물었다.
민아는 "네"라고 대답했다.
"만약에 채민이가 민아 할머니 집에 가면, 민아 베개랑 이불을 채민이에게 다 줄 수 있어?"라고 물으니,
민아는 "그건 내 거라서 내가 베고 자야 해요"라며 마치 자기 베개를 채민이 줘야 하는 상황이 온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맞아 민아 베개는 민아가 베고 자야지. 그럼 채민이 베개는 하나밖에 없는데 누가 베고 자야 할까?"라고 묻자, 민아는
"그럼 저는 오늘은 꽃 그림 베개를 베고 잘게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놀라운 민아의 반응에 안심하면서도 마음이 짠했다. 우리 손녀도 고모네 집에 가서 놀 때면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 하는 일이 많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채민이는 베개를 베고 자고, 이불과 요는 같은 그림으로 두 개가 있어 나눠 덮고 자라고 했더니, 손녀도 흔쾌히 이불 하나를 민아에게 내줬다. 이로써 둘은 평정을 되찾고 다시 사이좋게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서로가 나를 자기 옆에 누우라고 해서 내가 가운데 눕자, 우리 손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가운데 있어서 민아 언니 옆에 못 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두 아이를 붙여 놓고, 그 사이에서 조금 내려와 엎드려 '섬 마을 아기' 노래를 불러주며 누가 먼저 자는지 보겠다고 했다. 노래를 듣던 손녀가 불쑥
"할머니! 노래를 예쁘게 불러야지..."라고 해서 순간 당황했지만, 괜히 웃음이 나왔다. 평소 음치라 스트레스를 받는데, 손녀까지 내 노래가 예쁘지 않다고 하니, 듣는 귀는 애나 어른이나 똑같은가 보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두 녀석은 새근새근 고른 숨을 쉬며 잠이 들었다.
며칠간 함께 지낸 손녀가 처음에는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서 "다섯 밤 자고 엄마가 데리러 오라"고 영상 통화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손가락 두 개만 펴서 "두 밤만 자고 데리러 오라"고 했다. 아직 엄마 품이 그리운 나이라 그런 것 같다.
비록 딸 부부는 명절 동안 바빠서 손녀와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 덕분에 손녀와 특별한 다섯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파마를 하고 공주가 된 듯 기뻐하던 모습, 작은 다툼 속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화해하던 모습, 특히 노래를 예쁘게 불러야 한다고 했던 말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첫댓글 손녀 봐주기가 힘들긴 해도 절로 미소짓게하는 이쁘 아가들이네유
사돈네가서 노는 것보다 오롯이 외할머니 사랑 독차지하니 잘했네~~
글 중간 쯤에 10개월 밖에로 정정 오타났으요^^
잽싸게 수정 ~~^^
손주 봐준 일도 이렇게 재미있는 글이 되니 참 대단하세요
이번 명절은 추석 전에 토요일 끼고 (3일이) ( 빨간 날이) 이어져......(수정)
4살 5살 나이 차이는 한살 실제로는 10개월박에 차이 나지 않았고.....뭔가 어색하죠?
네살 ,다섯살이지만 실제로는 10개월 차이라서 둘은 아기때부터.... 이렇게 어때요?
오~네살 다섯살을 왜 생각 못했을가요 ~~~ 고마워요 능소화님 수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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