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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화하는 걸 되게 좋아합니다. 말이 많다는 거죠. 근데 이게 되게 좋은 일이에요. 대화가 많은 게 왜냐하면 대화만 많아도 해결될 일이 거의 대부분의 일이 해결이 돼요. 당연히 저와 아내도 다른 부부들보다는 아마 말이 훨씬 더 많은 편일 거예요. 저도 말이 많고 아내들이랑 저랑 오래 살아서 덩달아 말이 많아졌겠죠.
대화가 중요한 건 대화만 해도 웬만한 문제들은 다 해결이 된다는 거예요. 가족 간의 오해도 또 친구 간의 오해도, 성도 간 또 목회자와 성도 간의 오해들도 오해가 아니라도 어떤 잘못들도 대화만 하면 충분히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집단 간의 갈등도 대부분은 대화가 부족해서 생깁니다.
그렇다면 대화만 하면 될까요?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대화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대화의 단점인 거예요. 세상 사람들도 대화의 단점이잖아요. 성도들에게 있어서 대화의 단점. 성도들이 대화가 많다 보면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하나님께 내 문제를 아뢰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내 문제를 알려는 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자꾸 사람들만 대화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기도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전화를 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주변에 연락을 하고 자녀들에게 아니면 부모들에게 친척들에게 전화를 하는 습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즉시 약속을 잡고 그리고 문제에 대한 조언을 듣습니다. 함께 식사도 합니다. 심지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나기도 해요. 저도 그런 적이 많습니다. 물론 대화가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과의 대화는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이지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마음이 시원해지는 거예요. 그것도 좋긴 해요. 그러나 문제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는 마음이 시원해지기보다 오히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찝찝하기도 합니다. 대화가 필요하지만 대화를 맹신해서는 안 돼요. 믿음의 크기는 대화의 크기가 아니라 이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신속하게 하나님께 가느냐 이게 믿음의 크기를 좌우합니다.
문제 해결의 역사는 내가 얼마나 말이 많은 사람이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문제를 빨리 하나님께 가지고 가느냐가 문제 해결의 기회가 되는 겁니다. 이런저런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그 문제로 인해서 내가 여전히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은 아직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속도는 믿음의 크기예요. 내 삶에 일어난 문제들, 내 내면에 일어난 문제들, 여러분 잘못된 생각이 나를 장악할 수도 있잖아요. 이 문제들을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께 빨리 나가느냐는 이게 믿음의 크기고 믿음의 불량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속도가 빠르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속도가 느려요.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죄에 대해서는 속도가 느리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속도가 빠른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오늘은 성경 이야기가 좀 길게 나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주 막 이름을 잘 헷갈리기도 하고 또 잘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좀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앗수르 왕 산헵립이 유다를 침공했어요.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헬립이 랍사계를 통해서 자기에게 보낸 협박 편지를 받게 됩니다.
근데 협박 편지를 받자마자 이 편지를 가지고 성전으로 올라가고 거기에서 편지를 펴놓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고민하는 찰나가 시간이 없어요. 그냥 편지를 보고 아마 뜯어봤죠. 뜯어보고 난 즉시 그 편지를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가져가서 피워놓고 만약에 두루마리겠죠. 두루마리를 쫙 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긴 했어도 저는 이 편지 같은 시각적인 걸 들고 하나님께 가져간 적이 없어요. 내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께 알렸지만 이렇게 히스기야처럼 정말 실감 있게 하나님께 문제를 가져간 적은 크게 없던 것 같아요. 있다면 기도 수첩은 가지고 갔죠? 기도 수첩을 항상 이렇게 앞에 두고 기도했던 적이 있으니까 수첩은 가져가도 인생의 문제를 정말 고스란히 그분께 가져간 어떤 그런 행위나 형태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게 하나님 입장에서는 엄청난 거였던 것 같아요. 그냥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보다 문제의 실체와 실체인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펴놓고 기도하는 이 히스기야에 대해서 하나님은 신속하게 응답하십니다.
히스기야가 어떻게 신속하게 하나님께 문제를 가져갈 수 있었는지 알려면 히스기야에 대한 좀 공부를 잠깐 해야 돼요. 히스기야는 유다의 13대 왕이고요. 그리고 요시아 그리고 여호사바과 더불어 3대 성군에 해당이 돼요. 믿음의 왕 선왕에 해당이 됩니다. 열왕기상 18장 3절에 보면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시작.
히스기야가 대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히스기야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다윗을 추정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 왕과 같은 사람이에요. 어마어마한 왕인 거죠. 다윗을 추종하는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윗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있어요. 왜 다윗 같은 성군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그런 메시아 사상이 이 유대인들에게 있었어요. 그 메시아 사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히스기야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였다는 거예요.
본문에 보면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이런 거죠. 다윗이 행한 것을 그대로 행한 왕이었다는 거예요. 물론 이 히스기야에게도 흠이 있어요. 흠이 있지만 그가 산 삶을 하나님 앞에 산 삶을 다 훼손할 수는 없었어요.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다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다윗과 견딜 수 있는 존재였어요.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이런 삶을 살았으니까 문제를 신속하게 하나님께 가져갔던 겁니다.
두 번째로는 18장 5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유다 왕들 가운데 히스기야와 같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사람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는 거예요. 사울과 다윗은 통일 왕국이었잖아요. 그다음 세대부터 이게 분열왕국이에요. 남쪽과 북쪽으로 그러니까 분열왕국 세대 때 유다 왕 가운데 이 새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고 이 후에도 없을 거라는 거예요. 이렇게 살기 어렵다는 거예요. 이런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문제를 신속하게 하나님께 가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 히스기야가 도대체 어떤 일을 잘했기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히스기야를 성경의 저자가 칭찬하느냐? 첫 번째로는 히스기야는 철저하게 우상을 배격했습니다. 4개의 단어가 나와요. 제거하고 깨뜨리고 자르고 부수고 우상은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히스기야의 눈앞에 보이는 우상을 제거하고 깨뜨리고 자르고 부수고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마음에 든 거예요. 우상을 멀리하는 거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된 계명의 대부분의 내용은 십계명의 대부분의 내용은 우상배교예요. 우상숭배를 멀리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장 지름길은 우상을 없애는 거예요. 내 앞의 우상을 제거하는 거예요. 근데 히스기야가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우상을 제거하고 깨뜨리고 자르고 부쉈습니다. 우상을 미워한 만큼 하나님은 그를 높여줬고 왜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게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을 지키는 말씀을 지키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은 너무 기뻤던 거예요. 그래서 히스기야에게 이런 권세와 능력들을 허락해 주셨던 거예요.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기뻐해요. 봉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지키는 건 훨씬 더 중요해요.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지키는 건 훨씬 더 중요해요. 히스기야가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그에게 흠이 있어요. 흠을 가릴 만큼 우상을 철저히 배격하고 말씀을 지키는 삶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이게 철저했으면 히스기야에 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같다고 했을까요? 이전과 이후에 이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할까요? 그가 철저하게 우상을 배격하고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계속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니까 문제를 함께 가지고 갔던 거예요. 믿음이 없으면 계속 인간적으로 해결해요. 여러분 될까요? 되지만 인간의 방법으로 푼 것은 하나님이 영광 받지는 않으시더라고요. 삶의 인간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 수 있어요. 권력을 동원해서도 사람을 동원해서도 문제를 풀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걸 기뻐하지 않으셔요. 그리고 그것의 열매도 아름답지가 않아요. 당장은 성공처럼 보이고 당장로는 부자가 된 것처럼 보이고, 당장은 출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지막은 결코 아름답지가 않아요.
여러분 인생은 끝까지 가봐야 돼요. 지금의 내 신앙은 40이 되고 70이 되고 80이 되어봐야 아는 거예요. 지금 당장 반짝한다고 해서 그 신앙이 과연 다를 수 있을까요?
열왕기하 19장 1절에 보면 아수르 침공 앞에서 히스기야는 먼저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배를 두르고 성전에 들어갔고요. 그리고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에 문제가 생겼어요. 앗수르가 쳐들어왔어요. 이때 히스기야가 한 행동은 하나님의 전에 먼저 찾아가는 것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람을 보내는 거였어요.
이 당시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말씀으로 백성을 지도할 때였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를 통해서 임한 거예요. 성전에 간 거나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낸 거나 다 동일한 거예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겠다. 이 문제의 답은 오직 하나님께만 나온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이런 행동과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기아의 태도에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어요. 7절에 보면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실제로 산을 입은 신하들의 손에 죽어.
그러니까 교회 나라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자마자 하나님은 바로 답을 주셨어요. 앗수르의 왕인 산헬립이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 실제로 반역이 일어나서 돌아가게 되고 돌아가자마자 칼에 죽게 됩니다. 그것도 신하들에 의해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신속하게 유다의 대적인 산헬립의 운명을 알려주셨어요.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문제를 풀어놓자 하나님이 산헤립의 운명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구스왕 디르하가가 아스르왕 사립과 싸우려고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산헤립이 마음이 조급해진 거예요.
이번에는 편지를 써서 히스기야가 항복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게 이제 오늘 본문이죠. 이때도 히스기야는 이 편지를 들고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 그 편지를 펴놓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펼쳐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문제를 그리고 유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나라의 운명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민족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던 것이에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하나님께 아뢴다는 것 이게 물질이든 건강이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 해결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기도가 더 커지고 기도가 간절해진다는 것은 하나님밖에 그 문제 해결책 없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말하는 거예요. 고백하는 거예요.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교회를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도 같아요.
가정에 문제가 있어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가정에 우리 가정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아요.
자녀에게 문제가 있어요. 자녀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내 자녀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신속하게 응답하는 거 빨리 응답하신 거예요. 응답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술로 고백하는 것과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건 달라요. 입술로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물어 엎드리는 것은 달라요.
히스기야도 얼마든지 성전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기도할 수도 있겠죠. 그냥 속으로 그냥 중얼중얼 엎드릴 수도 있겠죠. 근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성전으로 갔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람을 보냈고 그리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행동은 운명이 유다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곧 고백이에요.
여러분이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는 그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느냐, 교회를 어떤 행동으로 섬기느냐 어떻게 기도하느냐는 고백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걸 보고 응답하시는 거죠. 내 입술의 말을 보고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동으로 내 삶으로 지금 어떤 고백하고 있느냐를 보시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거예요.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손이 유다를 지킬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행동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히스기야를 도왔던 겁니다. 시편 142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구제에 보면 다윗이 굴에 있을 때 지은 마스길 이게 교훈이라는 의미예요. 마스길 곧 기도 이렇게 돼 있어요. 학자들은 이 굴이 엔게디냐 아둘라이냐 이렇게 논쟁이 좀 있어요. 근데 좀 많은 수가 아둘랑 굴로 봐요. 그러니까 사골에게 쫓겨 아둘랑 굴에 있을 때 지은 시가 시편 142편이라는 겁니다. 2절입니다. 이 굴에 피한 이 다윗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한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다윗이 쫓겨다니는 자기의 신세를 사람에게 말한 게 아니라 누구에게 말했어요? 하나님께 말했다는 거예요. 아들랑 구에 있을 때는 다윗의 가족들이 왔고요. 사울의 핍박받는 사람이 왔어요. 그러니까 말하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에요. 사울의 실정에 대해서 사울을 비난하고 얼마나 대화하기 좋은 사람들이 왔어요. 다 사울을 피해 온 사람들이니까 다윗의 가족들은 당연히 사울을 피해서 온 것이고, 많은 장수들도 어떤 사울에게 모함을 받거나 어쨌든 해코지를 당할 위험이 있어서 온 사람들이잖아요.
여러분 대화하기가 얼마나 좋아요. 밤새 다윗 사울을 흉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했다고요? 너의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토로했다. 내 우한을 하나님 앞에 진술했다. 이게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말할 사람이 옆에 있는데 내 말을 옹호해 줄 사람이 옆에 있는데 하나님께 있던 거예요. 내가 말하면 옆에 앉아서 막 수다를 떨어주고 내 말 위로해 줄 사람이 내 주변에 널렸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토로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진술했다는 거예요. 사울의 정치를 비판하고 대항군을 만들어서 사울을 공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근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 자기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토해내고 자기의 모든 문제들을 진술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원통함을 쏟아내는 것 이게 믿음의 행위예요.
여러분 고백은 항상 행동과 같이 따라가야 돼요. 고백은 항상 행동이 붙어 있어야 돼요. 다윗이 고백을 하고 실제로 사람들을 모아서 대적하지 않았잖아요. 그 고백과 행동이 같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위대하게 보시고 그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강력함을 몰랐을까요? 아니요. 알았습니다.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찾아가 편지를 피워놓은 것은 하나님이 더 강하신 분이라는 것을 히스기야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유다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거예요. 이 나라의 진정한 통치자는 히스기야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가 나라의 문제를 신속하게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 그 앞에 엎드려 기도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유다의 왕이라고 믿었다면 자기가 해결하려고 했을 거예요. 사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자기가 해결하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히스기야는 내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하의 임무는 정확하게 임금에게 보고하는 거예요. 신하의 임무는 그러니까 이 시간은 신하잖아요. 그럼 하나님께 정확하게 보고해야죠. 여러분 편지를 가지고 그 앞에 펼쳐놓는 것보다 더 정확한 보고가 어디 있어요? 거기에는 산헤립의 협박문이 쓰여져 있는 거잖아요. 이보다 더 정확한 보고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이 진정한 지가 진정한 신하라는 것을 참 충성스러운 신앙인 것을 알게 되신 거예요. 그래서 그를 도우셨던 것입니다.
해결은 신하가 하는 게 아니라 왕이 해요. 교회의 문제는 신하인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거죠. 우리 가정의 문제도 신앙인 내가 아는 게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이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야 돼요. 입술이 아니라 몸으로 삶으로 가지고 나가야 돼 엎드리고 고백하고 외치고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수 여러분과 저의 실수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우리가 사람이나 사건 앞에 서는 거예요.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 우리가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실수입니다.
우리는 사건이 생기면 사건 앞에 자꾸 등장해요.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데 사건 앞에 자꾸 서요. 사람과 갈등이 생기면 자꾸 사람 앞에 서요. 그 사람과 자꾸 뭔가를 해보려고 해요. 하나님 앞에 서는 게 정상이죠. 하나님이 왕이라고 믿는다면 신하는 보고하는 게 최고의 의미예요.
옛 이야기를 하는 거 싫어하시죠? 제가 군목일 때 저희는 특별 참모예요. 그래서 이제 연대장이나 여단장, 사단장의 특별참모 참모 중에 어쨌든 특별한 보직을 맡았다고 해서 이제 특별 참모예요. 보통 목회자들은 종교적인 일에 많이 이제 관여를 하죠. 저는 약간 열심히 목사로서도 사역을 하지만 그래도 이제 장교니까 장교로서 교회 부대의 여러 상황들을 잘 이렇게 제가 모시던 지휘관들에게 잘 이렇게 보고해 줬어요. 지휘관들은 가만히 앉아서도 부대의 모든 사항들을 다 듣고 있는 거예요. 저희는 전방이라서 소대 군종이 120명이 넘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사각 천제 때였기 때문에 그 많은 아이들이 매주마다 저한테 보고를 하고 저는 그 보고 중에 좀 간추려서 또 지휘관에 보고하고 놀라운 건 지휘관이 다 해요. 전 할 일이 없어요. 보고만 해주면 끝이에요. 근데 나를 칭찬해 나는 보고만 했는데 막 일 잘하는 목사라고 상도 주고 그분이 딴 데 갈 때는 막 남자인데 반지도 저한테 해주시고 그러셨어요.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려면 보고를 잘해야 됩니다. 하나님 지금 내 아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 지금 내 마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 교회 문제가 그러면 하나님이 충성스럽게 여긴다니까요 우리는 보고할 책임이 있는 것이지 그 조직과 교회나 우리 가정을 다스릴 책임이 내게 있는 게 아니에요.
가정의 주인은 누구예요? 하나님이신 거죠? 교회의 주인은 누구예요? 하나님이신 거죠? 우리가 하는 일은 열심히 보고해 주는 거예요. 그게 곧 기도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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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제발 귀를 기울여 달라고 제발 눈을 떠서 내 문제를 봐달라고 제발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문제를 펼쳐놓고 하나님 제발 눈 떠서 내 인생의 문제를 좀 봐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길을 열어서 저 많은 적군들의 소리를 좀 들어주십시오라고 귀를 기울여 달라고 내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외치고 있는 거예요.
이런 히스기야의 태도를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셨어요. 그래서 친히 친히 산헤립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19절에는 사내립의 손에서 구원해 달라고 외쳤고요. 20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어요. 들으셨다는 거죠. 보고를 하나님이 들으셨어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보고를 받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열심히 하나님께 보고하셔야죠. 하나님 오늘 직장생활 나 속 너무 상했어요. 근데 하나님 내일 내가 힘내서 다시 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들 딸들이 결혼이 안 되는데 하나님 오늘 보고합니다.
취직이 안 돼요. 하나님 보고합니다. 하나님 우리 부서에 부응이 안 돼요. 하나님 보고합니다. 보고하면 책임자는 누구예요? 하나님이시죠? 그리고 하나님은 보고한 우리를 충성되다 여기세요. 할렐루야 그거 열심히 하면 하나님 우리를 충성되다 여기는 거예요. 충성되다 멋지지 않나요? 복음 안 했는데 나를 충성스럽게 여겨요. 멋지죠.
하나님께 복음만 했는데 제가 군대 이야기했잖아요. 보고 열심히 했더니 좋은 목사라는 거예요. 이런 말하면 여러분이 또 미워할지 모르지만 제가 한 대대가 훈련장에 갔을 때 기립박수를 받은 적도 있어요. 그 한 500명 되는 병사들이 다 일어나서 저를 이렇게 기립박수를 쳐줬어요. 저는 그걸 아직도 못 잊어요. 저는 그 박수를 좀 천국에서 받고 싶긴 해요.
남의 일이라고 아멘도 안 해주시고 제가 천국에서 박수 좀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저의 병사는 누구예요? 여러분이죠. 군에서 병사들을 섬겼다면 지금 여기서는 저의 병사들은 여러분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가장 먼저 가지고 오는 문제를 받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두 번째 가지고 오는 응답은 늦게 가져오는 건 잘 안 들으셔요. 오늘 말씀을 기준으로 보면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가져오면 빨리 들으세요. 고민 너무 오래하지 않고 빨리 보고 가면 빨리 들으셔요. 너무 우왕좌왕하지 않고 빨리 말씀드리면 빨리 들으세요. 이게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시 이런 기도가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