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가다가 새끼곰을 봤다면 주변 어딘가에서 엄마곰이 당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땅바닥에 과일이 떨어져 있다면 주변 어딘가에 과일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길에 떨어진 지갑을 발견했다면 누군가가 지갑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는 연결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무엇이든 이것과 저것의 연결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릇 안다는 것은 구조를 아는 것이다. 구조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언어가 주어와 술어의 연결로 이루어지듯 자명한 진실이다.
연결 없이는 존재가 불성립이다. 있다는 말은 곧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돌멩이가 가만 있어도 지구와 중력으로 연결되어 있다. 외마디 비명을 질러도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야 비로소 언어가 된다. 자기 자신이 들어도 들은 것이다. 반드시 연결된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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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하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의 세트로 존재하며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라디오와 방송국은 세트로 존재한다. 라디오는 있지만 방송국은 없다는 말은 불성립이다. 원인은 방송국 내부에 있다. 엄마와 아기는 세트로 존재하며 원인은 엄마의 자궁 내부에 있다. 그것은 자명한 것이다.
화살의 원인이 활에 있고 활의 원인이 궁수에 있다면 매개가 외부에 있다. 귀납추론은 둘을 연결하는 매개가 외부에 있으므로 자명하지 않다. 검증을 거쳐야 한다. 반대로 궁수의 결과는 활이고 활의 결과는 화살이다. 연역추론은 매개가 내부에 있으므로 자명하다. 저절로 검증이 되어 있다.
부분에서 전체로 가면 자명하지 않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면 자명하다. 만유는 연결되어 있으며 추론은 자명한 진실을 따라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매개에서 객체로 가고, 집합에서 원소로 가고,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야 한다. 사유는 자명한 진실을 따라가는 것이며 방향판단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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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무너지는 이유는 건물 내부의 부실에 있다. 물이 흐르는 원인은 물 내부의 수압에 있다. 바람이 부는 원인은 바람 내부의 기압에 있다. 인간이 행동하는 원인은 집단 내부의 스트레스에 있다. 화장실에 가는 원인은 뱃속의 트러블에 있다. 반드시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그 내부를 포함하는 외부다.
강체가 있다면 어딘가에 유체가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매개가 있다. 만유는 어떤 둘의 연결로 되어 있고 그 연결고리를 붙잡아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더 높은 차원에 있다. 새끼곰이 일차원이면 엄마곰은 이차원이다. 새끼곰이 혼자 점으로 존재하지만 엄마곰은 새끼곰과 연결된 선으로 존재한다.
개인의 동기는 집단의 권력 속에 있다. 입자는 계에 속해 있고, 물질은 에너지에 붙잡혀 있고, 삼차원 강체는 사차원 유체에 의존하여 있다. 같은 차원에서는 붙잡을 수 없다. 매개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 수직으로 잡을 수 있으나 수평으로는 잡을 수 없다. 과일은 과일을 붙잡지 못하고 개인은 개인을 붙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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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것과 저것의 연결이다. 그것은 한 단어로 지목할 수 없다. 한 단어로 객체를 지목하여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문장은 전제와 진술의 구조로 의미를 붙잡는다. 이것과 저것의 연결이 아니면 안 된다. 둘을 통일하는 하나가 아니면 안 된다. 메커니즘이 아니면 안 된다. 메커니즘에 에너지를 태워 에너지의 방향성을 유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이것과 저것의 연결이 없다. 무엇이 붙잡는지, 붙잡는 에너지를 어떻게 조달하는지, 에너지의 방향성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메커니즘을 말하지 않았다. 내부 의사결정구조를 말하지 않았다. 창조설이 거짓말인 이유는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명하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이것과 저것이 연결된 계와, 계 내부의 압력과, 압력의 밸런스와, 밸런스의 축이 이동하는 방향과 순서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갖추어짐이다. 갖추어짐은 완전성이다. 완전성은 복제 가능성이다. 갖추어지면 복제하고 복제된 것은 패턴이며 인간은 패턴에서 원본과 복제본의 관계를 직관하여 깨닫는다. 자명한 진실에서 지식이 유도된다.
원론
세상은 변화다. 존재는 변화다. 마음은 변화다. 언어는 변화다. 변화에는 동력이 있다. 동력에는 엔진이 있다. 엔진은 두 가지다. 자력엔진과 타력엔진이 있다. 어떤 엔진을 쓰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가는 길이 정해진다.
타력엔진을 쓰는 사람은 집단의 힘을 빼먹고 환경의 힘을 빼먹는다. 남의 것을 빼먹으므로 나눠먹지 못한다. 독점하려고 한다. 독점하려면 단절해야 한다. 한 번 단절로 방향이 정해지면 그 방향으로 계속 달려가게 된다.
자력엔진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 집단을 이루고 스스로 환경을 조직한다. 그러려면 많이 모여야 한다. 모으려면 널리 개방해야 한다. 사람이 모이면 내 몫이 줄어든다. 더 많이 모아야 하므로 그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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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변화다.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변하기 전을 볼 것인가, 변하고 난 다음을 볼 것인가? 날아오는 화살을 볼 것인가, 쏘는 활을 볼 것인가? 무대 위의 배우를 볼 것인가, 무대 뒤의 연출자를 볼 것인가? 사건의 원인 측을 볼 것인가, 결과 측을 볼 것인가?
곤란하다. 인간은 변화를 직접 볼 수 없다. 변화에 명명할 수 없고 변화를 언어로 전달할 수 없다. 변화가 끝나고 멈춘 것을 볼 뿐이다. 변화의 진행은 추론해야 한다. 인간은 세상의 절반을 보지 못한다. 특별히 훈련하여 변화를 보는 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구조로 봐야 한다. 구조는 관계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변화가 일어나기 전과 후를 포개서 보는 것이다. 포개면 차원이다. 차원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변화의 동력을 전달하는 것은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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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측법이 있다. 변화를 보는가, 불변을 보는가다. 변화를 봐야 한다. 그러나 보지 못한다. 인류에게는 변화를 보는 눈이 없다. 인류의 언어에는 변화를 나타내는 언어가 없다. 변화를 말해야 할 때는 얼버무리거나 거짓말을 지어낸다.
어둠은 빛의 변화를 설명하려고 꾸며낸 말이다. 빛은 입자가 존재하지만 어둠은 입자가 없다. 악은 선의 변화를 설명하고, 보수는 진보의 변화를 설명하고, 야만은 문명의 변화를 설명한다. 있는 것의 변화를 설명하려고 도입한 가상의 개념일 뿐 존재가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칭어는 전부 거짓이다. 높이는 있어도 낮이는 없다. 길이는 있어도 짧이는 없다. 크기는 있어도 작기는 없다. 대칭은 말로 전달하기 곤란한 변화를 나타내는 꼼수다. 우주 안에 둘씩 짝짓고 마주보는 것은 없다. 하나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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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엔진이 있다. 자체 동력이 있다. 변화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것과 저것을 붙잡아주는 매개가 있다. 매개는 더 높은 층위에 있으므로 차원이 있다. 차원에 따라 질서가 있다. 우선순위가 있다. 에너지의 전달경로가 있다. 내부에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에너지를 내장하면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은 세상을 불변으로 본다. 주체의 맞은 편 객체로 본다. 고립된 단위로 본다. 개별적 존재로 본다. 세상을 원자로 보면서 원자를 담아내는 그릇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체 동력이 없으므로 움직이는 범위가 제한된다. 전략을 쓸 수는 없고 되치기 전술만 쓸 수 있다. 연결은 할 수 없고 단절만 할 수 있다.
세상을 연결된 구조로 보느냐 아니면 단절된 객체로 보느냐다. 변화로 보느냐 아니면 불변으로 보느냐다. 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이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 변화의 전략은 외부의 연결에서 답을 찾고 불변의 전술은 내부의 맞섬에서 답을 찾는다. 한 번 방향이 정해지면 계속가게 된다.
자력엔진 타력엔진
발자국을 보고 도둑이 다녀간 사실을 안다. 부분을 보고 전체를 안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알면 추론할 수 있다. 부분은 전체에 동력을 의존한다. 인간은 직관력이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직관할 뿐 의식적으로 직관하지 못한다. 깨달음은 직관의 각성이다.
숨바꼭질하는 꼬마는 머리만 감추고 아빠가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모른다. 술래가 단서를 잡고 추론한다는 것을 모른다. 처음으로 추론을 경험하고 전율하면서 직관력이 격발된다. 꼬마가 숨바꼭질 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다.
이것을 보고 저것을 안다. 이것과 저것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 원본과 복제본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동력원이다. 이것과 저것을 통일하는 메커니즘에 에너지를 연결하면 변화의 방향과 순서를 결정하는 시스템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직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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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객석의 관객이다. 보이는 것은 보는데 보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무대 뒤의 연출자를 보지 못한다. 복제본 입장에서 사유할 뿐 원본 입장에서 사유하지 못한다. 보이는 것은 하나씩 단위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전시된 것이고 전시하는 자를 봐야 한다.
과일은 하나씩 단위를 이루고 매달려 있지만 나무는 밸런스로 과일이 매달리게 한다. 분할된 단위로 보는 것은 관객의 눈이고 합쳐서 밸런스로 보는 것은 연출자의 눈이다. 밸런스는 내부에서 압력을 조절하여 객체를 통제한다. 자연은 단위가 아니라 밸런스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다. 우리는 받는 사람 포지션에서 반대편을 보지 못한다. 자연이 부르면 응답한다. 인간은 응답자 위치를 지키며 호출자를 보지 못한다. 자연이 간섭하면 방어한다. 방어자의 언어에 갇혀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게 인간이 좌절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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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보려면 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동력을 외부 환경에 의존하는 복제본 차원에서 자체 동력을 사용하는 원본 차원으로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원본은 자체 엔진에서 뽑아낸 관성력을 사용하고 복제본은 외부 작용에 맞서며 반작용을 사용한다. 동력의 차원에 연동되어 이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보려면 만나야 하고 만나려면 둘을 잡아주는 매개가 필요하다. 인간은 지식의 매개를 외부 환경에서 조달하므로 본질을 보지 못한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만 수동적으로 볼 수 있고 객체 내부로 쳐들어가서 능동적으로 보지 못한다. 상대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맞대응 하며 방어자 포지션에 갇히고 만다.
힘은 둘이다. 자체 힘을 사용하는 관성력과 외부 힘에 맞서는 반동력이 있다. 공격은 자기 힘을 사용하고 방어는 상대 힘을 역이용한다. 사유의 엔진도 둘이다. 능동적 사고와 수동적 사고다. 80억 인류가 모두 두 번째 엔진만 사용한다면 위태롭다. 진짜 힘은 관성력 뿐이고 진짜 사유는 직관력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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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은 전장을 선택하고 전투가 시작되는 시점을 결정할 수 있다. 방어는 상대가 정해주는 때와 장소에서 싸워야 한다. 직관은 자체 엔진에서 동력이 나오므로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 자체 동력이 없으면 전술적 대응만 가능하므로 편향된 사고를 하게 된다.
관성력을 사용하려면 둘을 연결하여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 연결될수록 좋으므로 열린사회를 지향한다. 반동력을 사용하면 단절될수록 좋으므로 닫힌사회를 지향한다. 어미는 자녀가 많을수록 좋고 자녀는 형제가 많으면 돌아오는 몫이 적어서 불리하다.
진짜 힘은 하나다. 두번째 힘은 첫번째 힘의 복제다. 진짜 생각은 하나다. 직관이 진짜고 다른 생각은 간섭에 의해 오염된 것이다. 일원론이 원론이고 이원과 다원은 원론이 아니라 이차설, 다양설이다. 인류는 제대로 된 원론을 갖지 못했다. 사유의 엔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