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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5)
주님의 재림과 초림
요일 2:28~3:10
I. 서론
요한일서 강해 중간쯤 왔는데, 잘 따라오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요한일서가 생각보다 어렵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설교를 너무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리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해 드린대로, 요한일서는 요한복음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집필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집필되었습니다. 반면에 요한일서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영원히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지난 시간에는 적그리스도의 미혹에 속지 말고, 처음부터 들었던 복음인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내용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바로, 설교 제목은 “예수님의 재림과 초림”입니다. 2장 28절부터 3장 3절까지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하면,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3장 4절부터 9절까지가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을 알면,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죄를 짓도록 하는 마귀의 일을 멸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예수님의 재림>
28절,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지난 시간의 연장이자,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사도 요한은 먼저 그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바로 전 절인 27절에 나오는 주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들었던 복음인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만약 이 믿음 안에 거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끄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은 처음에 참 진리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미혹에 빠져 예수님을 단지 인간에 불과한 사람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들은 처음 들었던 복음이 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오실 주님은 온 세상의 심판주 즉,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말고, 참 진리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다시 재림하실 것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변할지라도 이 진리 안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9절,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여러분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참으로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의를 단순히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석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는 사람도 의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선한 일을 많이 행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만이 의를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을 무슨 의미일까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주권과 관계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은 (He is righteous)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옳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나오는 일관된 내용입니다. 몇 군데 읽어 보겠습니다. 한나의 기도입니다. 삼상 2:6~7, “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고 해도 아무도 그에 대해서 항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읽어 보겠습니다. 렘 18:1~4,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 터진다”는 것은 토기장이의 마음에 들지 않아 진흙을 다시 뭉개서 새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부수고 다른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항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현대인의 성경, “깨어진 질그릇의 한 조각에 불과한 자가 자기 창조자와 다툰다면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질그릇이 그것을 만든 자에게 너는 기술이 없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볼품없게 만들었냐고 다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남자 테니스 선수 중에 노박 조코비치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는 현재 세계 랭킹 1위로 세계에서 가장 테니스를 잘 하는 선수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세계 4대 테니스 대회 중 하나인 오스트레일리아 오픈이 시작되었습니다. 보통 4대 테니스 대회가 열릴 때면, 이번 대회에서는 누가 우승할 것인가라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코비치 선수가 대회에서 뛸 수 있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왜냐하면, 호주 정부에서는 코로나 백신을 맞은 사람만 입국을 할 수 있고, 대회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규정했는데, 조코비치는 백신을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코비치는 백신을 맞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백신을 맞지 않은 상태로 호주에 입국해서 대회에 참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조코비치 선수가 세계 1위라고 하더라도, 호주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똑 같은 기준으로 백신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세계 1위 선수이기 때문에 조코비치 선수는 예외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반면,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시고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의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친 것입니다. 3장 1절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3장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사랑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3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변화되어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모습을 우리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사도 요한이 중요한 말을 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기서 “깨끗하게 하다”는 단어의 어원은 “Hagios”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Holy”라는 의미로, “The Holy Spirit”에서 “Holy”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는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이고,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는 “구별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쉬운 말로 설명드리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는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지난 주에 어떤 권사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은퇴하시고 추운 겨울을 피해서 플로리다에 잠시 여행을 오신 분입니다. 이 분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에쿠아도르에 있는 아마존으로 선교 여행을 갈 예정으로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신이 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제 은퇴를 했으니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남은 여생을 주님을 위해 보낼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이생이 끝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생이 끝이고 우리의 존재가 소멸된다면, 이생에서 마음껏 즐기다가 죽으면 됩니다. 하지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영원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설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설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설교하는 것보다 사후 세계를 준비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하나 읽어 보기를 원합니다.
눅 12:16-21,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세상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이 부자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소출이 많이 생기자, 곳간을 더 크게 지어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노후 준비를 잘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노후 준비는 잘했지만, 사후 준비를 잘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숙제를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여러분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힌트를 하나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에게는 재물을 많이 주셨을 것이고, 어떤 분에게는 재능을 많이 주셨을 것이고, 어떤 분에게는 시간을 많이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은퇴를 하셨기 때문에 직접 상관은 없지만, 제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목회할 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참고가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이 여러분의 물질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잘 읽어 보면, 하나님의 마음은 교회, 선교, 가난한 자들에게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수입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하고, 여러분 수입의 다른 십일조를 선교비로 헌금하고, 여러분 수입의 다른 십일조를 구제비로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십의 7조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살 수 있는 자동차의 등급을 하나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포르쉐를 살 수 있는 사람은 벤츠를 사고, 벤츠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아큐라를 사고, 아큐라를 살 수 있는 사람은 혼다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남은 돈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부유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목사님도 그렇게 사느냐고 질문하시는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나름대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는 교회에다가 십일조를 헌금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총 헌금액의 십일조를 선교비를 먼저 사용하고, 나머지 금액을 생활비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발생한 다음에 이상하게 그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저희 가정의 십일조를 교회에다가 헌금하지 말고, 교회 밖의 선교를 위해 헌금하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솔직히 예전에는 교회에다가 헌금을 해도 어차피 십일조를 선교비로 떼고 다시 돌려받을 헌금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담이 많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이후,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와 노회에서 받는 렌트비 그리고 저희 가정을 생각해서 후원해 주시는 선교비의 모든 십일조를 지난 1년 반 동안, 북한 선교 단체를 위해 매달 헌금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11월부터는 Presbyterian Mission을 통해서 정말 가난한 아프리카 지역을 위해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난 여름에 몇 군데에서 설교해 달라고 초청해 주셔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례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저희 가정이 이곳에서 생존해 있으며, 교회 문을 아직 닫지 않고,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여러분이 이미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개척교회를 떠날 때, 여러분은 아직까지 남아서 함께 예배드리고 있고, 부족한 종의 가정과 교회를 위해서 꾸준히 헌금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께 더 부유하게 사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
이제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4~9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내용을 살펴보기 이전에 그 구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본문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본문의 구조를 살펴 보면, 비슷한 내용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4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죄를 짓는 자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5절: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8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9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4절과 8절 상반절입니다. 4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최초의 범죄자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자신만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엡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어떤 목사님은 우리가 십계명을 어길 때, 그 틈으로 마귀가 들어온다는 말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거나 안식일 (주일)을 잘 지키지 않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이웃의 것을 탐내거나 하는 모든 것들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특히, 코로나 이후로 많은 분들이 교회를 가지 못하게 되어 신앙을 잃었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를 행하기 위해서는 마귀에게 틈을 주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1절)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고, (2~3절)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항상 순종해야 합니다.
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설명합니다. 5절,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분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지 않으시고, 죄가 없으신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 즉,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는 일을 멸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편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범죄하는 자는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는데, 어떻게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 마귀의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9절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9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씨가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씨는 무엇을 말할까요? 존 스토트 목사님은 세 가지로 그 씨를 설명합니다. “The divine nature, The Holy Spirit, The word of the gospel.” The divine nature 라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거듭난 새 자아를 말합니다.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The Holy Spirit 라는 것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를 돕는 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고 살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The word of the gospel 라는 것은 복음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청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한 자, 마귀를 이겼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거듭난 다음에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면, 죄를 더 이상 짓지 않고 살게 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 1:8~10,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헬라어 문법을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현재 동사로서 “계속 죄를 짓지 않는다. 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들을 변화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더 이상 남의 것을 속이거나 빼앗지 않았고,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하려 다녔습니다. 제가 아는 시드니에서 만난 어떤 분은 서울 법대 출신인데, 지금은 한국의 중견기업에서 CEO를 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대학을 다닐 때 술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예수님을 만난 후, 술을 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친구들과 술을 한번 더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 술 맛이 예전의 술 맛이 아니어서 더 이상 마시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예전과 똑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있음으로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지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삶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소망하고, 주님께서 이 땅에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