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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창작품의 자평 기준에 대해
전문수 본지 주간·창원대학고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어느 문학 강의에서 한 시인의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했다. 시인들 각자의 자작 작품 평가 기준에 대한 최우선 요소를 질문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최우선으로 검토해야 할 요소인가는 쉽게 말해서 작품이 완성된 뒤의 기본적인 중요 평가 요소들과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실은 이를 간단히 답할 수는 없기에 참 난해한 질문이었다. 특히 시(문학 작품)는 재료로 동원되는 모든 사물 현상들에 대한 언표들의 절묘한 미적 형상화 능력들이 함축성과 음악성 등 미세한 한 요소만 흔들려도 완전성이 문제가 되기에 최우선이란 기준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이 몇 가지만을 가장 중심 요소로 보아 참고하도록 답해 보았었다.
(새로운 어떤 미적 인식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이 시 왜 썼지?’이다.)
시 작품을 처음 접하는 순간 평자나 독자는 제일 먼저 선입견으로 우선되는 기본 요소가 있다. 남의 글을 처음 대할 때 제일차 관심은 이 시는 새로운 어떤 미적 인식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이 시 왜 썼지?’이다.
(‘지금까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점이 무엇인가?’ 굳이 지금 이런 내용을 말해야 하는 시대적 필요는 무엇인가?)
그다음 차례는 ‘지금까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점이 무엇인가?’ 굳이 지금 이런 내용을 말해야 하는 시대적 필요는 무엇인가? 같은 것이다. 예술이란 이름의 모든 창작품은 특성이 기본 요소이다. 이런 게 작자 자신이 충족 안 되는데도 그저 내 마음의 어느 순간 성정의 징조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던져 본 거라면 이는 전문가의 태도가 아닌 즉 아직 작가가 아닌 입문기 아마추어라 보면 된다.
(아직 누구도 생각한 적 없는 미적 인식, 즉 진선미의 도달점이라 보는 이데아적 융합적 인식 미학을 형상화해내는 기본 능력)
두 번째는 문학 작품은 천지만물에서 읽어낸 천문天文, 즉 아직 누구도 생각한 적 없는 미적 인식, 즉 진선미의 도달점이라 보는 이데아적 융합적 인식 미학을 형상화해내는 기본 능력이 받침이 돼 있어야 비로소 한 작품이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자는 문학 작품의 기본 기능을 잘 이해하고 평자도 독자에도 예술적 감동을 주어야 한다.
문학적 여러 사태가 최소한 이런 기본은 유지돼야 한다. 매우 유익한 사고 내용을 효과적인 문학적 사유 방식으로 전달하는 작품이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평가 기준이기도 하다. 이 깊은 내용 요소들은 전문적 이해자가 돼야 시인, 수필가, 소설가라는 전문가 대접을 받는다. 이런 수준에 어긋나는 것은 아직 수련 단계의 취미 정도로 봐야 한다. 좀 고급 독자 정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만사에 이름난 장인들은 좋은 재료 알아차리기, 그 재료마다 거기에 맞는 처리 기술력 등을 갖추는 자이다. 누구나 다 아는 평가 기준이다. 문학적 기술론을 다 따지려면 거의 무한의 시론이다. 우선 이 정도로 요약해보지만 특히 시라는 예술작품의 미학 정념 문제는 어떤 기술로 단칼에 가를지 기준은 매우 어렵다. 어떤 장르든 문학 작품은 설명성, 해설성, 해석성, 사상성, 목적성, 시대성 등을 개념적으로 풀이하는 방식이면 원칙적으로 예술 작품은 이미 아니기에 더욱 어렵다.
반드시 문학 작품은 여러 언어 표현들이 매우 효과적인 미적 정념이나 정서의 감정을 환기해내는 형상적 전달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압력 때문에 더 어렵다. 일반적 개념 전달의 관념 펼치기는 문학 작품이 예술에서 벗어나기에 참으로 예민하다.
시학의 지식과 이해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삼십 년 동안 시를 쓴 사람이 시학을 알고 쓴 일 년 경력자보다 아직 초보인 분야가 이 시 영역이다.
그래서 앞에서 요점으로 간주한 세 가지 문제를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다.
1. 시적(문학) 인식 내용 문제
단도직입적으로 이 시는 무엇을 독자에게 알려 주려고 쓴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바로 창조적 작품에 반드시 전제하는 문제다.
어느 장르의 문학 작품이든 언어라는 매우 복잡 미묘한 상징적 성질을 가진 재료를 불가피하게 창작 수단으로 하는 분야는 언표 방식이 핵심이다. 이 언어로 예술성의 기본은 지켜야 한다는 난제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일상의 이미 작자가 익히 아는 관념적 언어로 언표 작업을 그대로 한다면 그것은 이미 문학 작품은 아니고 일반 성명문인 논설이나 칼럼이나 해설문이 돼 버린다. 시 작품인 경우는 단어 하나 잘못 처리하면 좋은 작품 반열에서 사라진다. 그림이나 서예에 획 하나 잘못 찍은 것과 똑같다. 예술 작품은 기존 관념의 지식으로 새로운 창조를 할 수는 전혀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보다 언표로 예술 작품을 만들려면 더 어렵고 훈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이유는 기존 언어의 관념성을 조금이라도 피해야 새로운 창작이 되기 때문이다. 예술적 언어로 언표를 바꾸는 것은 기존 언어의 글말의 알맹이, 즉 언지言志를 들어내 버리고 새로운 예술적 인식을 언지로 넣어 만드는 작업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 예술적 글말의 알맹이 살림을 일단은 먼저 차릴 수 있어야 한다. 예술적 언지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기성에 대해 응시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예술적 언지를 감싸서 전달하고자 하는 언표의 전개 모양새에 따라서 굳이 그 숨은 뜻의 언지를 알게 하는 전문 기술이 문학 작품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다시 요약하면 새로움의 창조는 새로운 언표와 언지의 이 두 창조적 능력이 어떻게 잘 교집하여 있느냐가 핵심 기준이 될 것이다.
결국 좋은 내용과 좋은 표현이라 요약되는 꼴이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가 되고 마는데, 문제는 좀 더 혼돈을 방지하고자 새삼스럽게 확인해 본 것이다.
2. 언표와 언지의 생존 편향
좀 생소한 명제로 보일 것이다. 이와 같은 뜻의 기표와 기의의 기호학 용어로는 많이들 익혀 왔을 것이다. 굳이 이리 표현한 데는 표현이라는 말에 너무 타성이 심해서 이를 피해 보고자 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가장 뛰어난 영적 존재로 높이 평가를 하지만 실은 그 한계가 저 시적 존재들과는 너무 격차가 심하다. 가장 편향된 사고를 하는 모순적 영재이다. 이 문장의 행간을 잘 음미하는 노력을 하면 우리 인생은 사물들의 존재 행간을 비집고 사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동사적 존재 진행형이 본질임을 알 것이다. 이런 이론은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의 이론을 이해하면 유익할 것이다.
어떤 일상의 사태를 보는 자에 따라서 소위 다른 영적 기능으로 해석함으로써 시비가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신처럼 확실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이 생존의 편향이 불가피한 영적 존재라 그렇다.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돼 있는데 이 두 관계가 고정되지 않고 항상 서로 미끄러져 가기에 존재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왜 해체이론이 나오는지 알 것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전능한 신의 능력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신이 그래도 언어를 주었으니 다행이긴 하다. 문학은 이런 존재의 행간을 다루는 매우 고급 사유의 철학 영역이기에 단순한 감각의 기예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표와 언지의 관계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언어 행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면서 동물처럼 각자도생해야 한다.
이런 편향적 사유 기반은 우리들 다양한 감각 기관의 기능 수용에 따라서 더욱 심화돼 간다. 그래서 근시적 사고와 원시적 사고라는 평판으로 사고의 수준을 평가하기도 한다, 사물의 겉만 보고 그 안쪽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오인으로 열등함을 따지기도 한다.
편향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 영적 존재라는 위대함 때문에 남과 다른 의도된 자기 편향을 불가피하게 갖는 독존의 위대한 존재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시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생존 편향이 아니라 한층 심도 높은 창조적 생존 지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창조적 생존 편향에서 잘못된 이해 문제가 일어나면 심각하다. 어떤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집착의 편향은 바로 창조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 표현의 껍질인 언표 때문에 진짜 알맹이 언지를 알아채지 못하면 예술성 무지가 된다. 원시를 못 가진 근시가 된다. 좀 심하게 말해서 무명이라고 혹평도 받는다.
그래서 문학 작품은 고뇌에 찬 탐구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창조품이라는 무게를 늘 생각해야 한다. 이 원칙에 어긋나면 어딘가 창조적 사유 편향이 개입돼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냥 대충 던져놓고 보자는 창작 태도는 아무 발전 없이 세월만 보내고 만다.
3. 언어의 환기성
따라서 문학적 언어의 환기성은 미적 정념과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핵심이다. 한 신전 벽에 걸린 부조나 그림들은 그 신전의 역사적 여러 사실을 환기喚起시켜 주는 기능의 언어들이다. 똑같이 문학적 언어들은 사실의 지식이나 도덕적 덕목들이 아니라 미적 감정들을 환기시켜 일상적인 사물의 인식을 새로운 존재로 재음미하도록 상징한다.
그래서 문학적 언어는 사물을 기존 지식으로 해설하거나 재해석하는 설명의 언표 장치로는 안 된다. 환기해 주는 언어는 그 언표가 바로 직설하지 않고 수단이 되어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대리 기능을 해야 한다. 가령 빨간 장미꽃이라는 언표가 나타났다고 하면 이는 아름다운 어떤 다른 대상의 미적 감정을 대신 환기하려는 수단과 방편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물론 작품 전체 언표가 이런 기능으로 잘 조화되어 있다는 것이 기본 바람이다.
앞의 논의에서 언표와 언지를 굳이 가른 이유가 이런 뜻이었음을 다시 되새기는 것이 좋겠다. 모든 사물은 다 예술적 상징의 언표라는 점을 깊이 사고해 보아야 한다.
결론하여 이런 문학적 언표의 환기성이 우수할 경우를 상정想定한다면 아마 자기 작품의 전체적 자평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아주 단편적으로는 작품이 평가되는 제일차 기준은 이 언표의 기술 수준이라 할 수도 있다. 만일 이 기술 수준이 합리적이고 설득력을 얻는 기준에 도달한 경우는 소위 전문가 또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단계까지의 도달이 미진하면 아직 습작 단계로 보아 작가라고 이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최소한 자신 작품의 이 지평을 짚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내가 창작한 작품이 타인에 의해 평가될 때도 이 정직한 알아차림에 대해 모두 자기 판단을 할 줄은 알아야 한다. 물론 완벽이란 본래 어느 영역에도 없다. 다만 최소한의 핵심 수준은 있어야 한다.
전문 농부는 자기 생산품이 경매 시장에서 몇 등급인 줄을 잘 안다. 작가도 자기 작품 평가에 대해 이와 같다.
무턱대고 내 나름대로라는 아마추어리즘으로 경매 시장에는 내놓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엄연한 이치를 어떤 변명으로 엄호할 수가 없다. 너 자신을 먼저 알라는 것은 겸손 이전이다. 이상과 같은 소의로 해서 문학적 언표와 언지에 대한 자평 기준에 대해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논의해 보고자 했다.
이상의 논의 결말에 한 번 더 폭탄선언을 하고 싶어진다.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모든 모습들이 실은 다 가짜이다.”
아직 진짜는 이 세상 누구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진짜를 모르면서 아는 체하고 가상 삶을 사는 현실은 분명하다. 만일 이 세상에 진짜가 나타나는 것이 확인된다면 이 세상은 조금씩 무너져 사라져 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다는 것을 모르고 살다 죽어야 하는 순환으로 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천리를 가장 먼저 학습해야 했다.
4. 평가 기준 작품 예시
이제 다음 작품을 예시한다. 각자 자기 시와 비교해서 자기 시의 평가 기준을 세위보기 바란다. 우선 이 시의 언지 즉 중심 사상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고 시인의 사유에서 감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한다면 자기 평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본다.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강성은
잠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言〕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신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언어를 수단으로 문학적 표현을 감당해야 하는 모든 장르는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물들의 형태에 대한 언표와 이런 사물들을 통해서 창조적 인식의 감정과 정서를 환기시킨다. 비가시적 추상적 인식 정념들의 언표를 다루는 기술로 이루어진다.
문학 작품은 모든 언어를 미적 표현에 동원하는 경우 그 특정 언표들이 최선의 정념을 환기시켜내지 못하면 아무리 참신한 주제 의식이나 미적 관념이라도 실패다. 그래서 천지에 숨어 있는 놀라운 예술적 작품이 많아도 그 발견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캐내는 수단인 특정 언표 기술이 없으면 온전한 작품을 다듬어 내지 못한다.
문학 작품은 이 세상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물상들 속에서 오래 숙련된 언어 기술로 새롭게 조립해내는 것이다. 없는 것을 말로 만들어내는 것이 전혀 아니다. 특수한 방식의 언표로 새로운 발견을 해내는 것이다. 언표의 말 껍질에 숨어 있는 사물 속 알맹이 정념의 언지를 담아내는 것이다. 해설이 좀 현학적이라서 가장 일반적인 예 하나 들어 본다.
가령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속 미적 정념인 알맹이를 특정 언표 껍질로 담아내는 문장 기술을 부려야 할 때 꼭 굳이 이에 맞는 단 하나의 특정 언표인 흑장미 꽃봉오리로 대신해서 전달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흑장미 같은 얼굴’의 언표는 아름다운 얼굴에 대한 오직 그 사람에게만 적당한 미적 정서의 환기성을 발하는 것이다.
그 사물에는 오직 그 하나만의 언표가 적당하다는 저 유명한 플로베르의 일물일어一物一語설이 그것이다. 아니 이건 그 흔한 비유적 처리 기술 아닌가? 라고 하면 거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문제는 이 비유법이 문학의 언표에서 얼마나 중요한 핵심 키워드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문학적 표현의 언표는 특정한 일물일어의 발견과 선택이라는 무거운 지위를 가진다. 사물에 숨어 있는 미적 진실의 알맹이를 담아내려면 한 사물에 맞는 단 하나의 언어를 찾아내어야 최선의 미적 정념이 전달된다는 문학 철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즉 최선의 미적 정념을 환기시키기에 알맞은 것으로 선택된 비유 사물 강구講究이다.
이런 일물일어의 비유 사물을 최적의 짝으로 만들어 표현의 극치를 이루려면 작자가 언어를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서는 전혀 불가능하다, 오직 이 세상에 이미 나와 있는 사물 속에서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아마 쉽게 찾기 매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이런 노력에 지치면 기존의 상식적 사전적 언어로나 직접 설명으로 얼버무려 버리기 일쑤이다. 장인정신을 벗어난 변명을 찾는다.
기존 언어들을 아무리 다 동원해도 그것들은 사물들 사이에서는 일물일어인데 어찌 해결책이 되겠는가. 작품은 어떤 특수한 순간에 정념을 전달하는 미적 작업이기에 일반성을 갖는 언표로는 불가하다. 문학작품 창작에서 완벽주의는 그 작품 자체가 완벽해야 하기에 적당한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