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選擇)은 미래(未來)에 있을 행위의 가치(價値)가 아니라 전적(全的)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논의를 더욱 심오하게 반복하고 더욱 상세하게 추구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6)라고 전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 모든 사람이 상속권(相續權)으로 복(福)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그것의 계승이 일어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논의의 기원은
유대 백성의 교만과 거짓된 허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라는 이름이 그들 자신을 지칭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의 뜻에 의지해서 복음을 믿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황주의자(敎皇主義者)들은 이러한 잘못된 구실을 내세워
하나님의 자리에 기꺼이 그들 자신을 세우고자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언약으로 인하여 거룩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바깥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들이 적자(嫡子)의 자리에서 서자(庶子)의 자리로 강등된
상태에 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고, 그들을 다스리며,
유일하게 그의 자녀 삼으심을 확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경건(敬虔)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소망 가운데 세워진 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반역 때문에 배척되었다고 한다면,
바울이 그의 독자들을 줄곧 들어 올려
은밀(隱密)한 선택(選擇)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매우 어리석고 불합리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자신 밖에서는
그 원인이 드러나지도 않고 찾아지지도 않는다.
만약 그 뜻이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녀가
참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면(참조, 롬 9:10, 12; 창 25:21, 23)
모든 사람의 처지가
그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한낱 헛된 상상이 되고 말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서 바울은 이 사안을 더 진행시킨다.
왜냐하면
비록 두 사람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들로서
그들의 어머니의 태중에 함께 있었지만
맏아들의 영예가 야곱에게 옮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變化)는
한 사람의 선택(選擇)과 다른 사람의 유기(遺棄)를 증언한
전조(前兆)와 같은 것이었다고 바울은 주장한다.
만약
그 기원과 원인에 대한 질문이 누군가에 의해서 던져진다면,
예지(豫知)의 교사들은
사람들의 덕성과 악행을 답으로 제시하려고 들 것이다.
그들의 요지(要旨)는 그저 편의를 좇을 따름이니,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사람을 통하여서는
자기의 은혜를 받을 가치(價値)가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데 반해서
에서라는 사람을 통하여서는
자기가 무가치(無價値)하다고 예견하시는 사람들은 배척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무모(無謀)하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전하고 있는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참조, 창 25:23; 말 1:2-3).
만약 예지(豫知)가 이 형제들 사이를 구별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여기에 나타나는 '때'에 대한 언급이 분명 부적절할 것이다.
설혹
야곱이 장차 있을 자기의 덕성(德性)에서 나오게 될 가치(價値)를 지녔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인정한다 치자.
그렇다면 왜 바울은 경솔하게도
야곱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라고 전했으며
아직 선을 행하지 않았을 때라고 덧붙였는가?
이에 대한 답은 궁하지 않으니,
하나님께는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으므로
그의 앞에 야곱의 경건도 현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행위로 은혜를 얻게 된다면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은 이미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그가 성장한 이후와 다를 바 없이, 정해져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발 더 나아가,
야곱을 자녀 삼으심이
행위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가르친다.
행위에 대해 다루면서
그는 미래나 과거의 '때'를 문제 삼지 않고
행위를 하나님의 부르심과 결정적으로 대립시킨다.
그는 마치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셨는지 묻는 데 있지
무엇이 사람들 자신으로부터 초래되었는지 묻는 데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끝으로,
위의 본문에 나오는 "택하심"과 "뜻”(롬 9:11)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밖에서 고안해 내는 모든 원인은
이 원인과는 동떨어져 있음이 확실하다.
- 칼빈의 예정론(존 칼빈, 기독교강요(3권 22장 4)-라틴어 최종판 직역, 생명의 말씀사, 문병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