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20
허영자 시인
김 송 배
-시를 읽자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자는 말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겠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다시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을 것 같은 시의 이야기, 꿈속의 이야기 같은 시가 어째서 우리 영혼의 자양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상처입은 우리 영혼을 위무해 주는 힘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이 참으로 우리들이 갈급해 마지않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우리들의 마음에 쌓여 있는 긴장을 해소시켜 유열의의 경지로 이끌어 낼 수 있는가. 그런 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위안을 얻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허영자(許英子) 시인이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시에 대한 지론이다. 어느 잡지 칼럼에서 옮겨온 글이지만 그는 항상 제자들이나 후학들에게 시에 관한 말문을 이렇게 열고 있다.
그와 만난 것은 심상해변시인학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열사의 해변에서 그는 박목월 시인의 애제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시와 바다의 낭만을 조곤조곤하게 들려주던 1970년대 후반의 조우(遭遇)였다.
그후 조병화, 성춘복 시인들이 ‘미래시(『월간문학』출신 시인들의 동인)’와 함께 하는 지방 문학기행에 동참하면서 가끔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더욱 그를 가깝게 한 일은 나의 딸(김은정)이 성신여자대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이다.
그곳에는 허영자, 장윤우, 이성교, 한영옥 시인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딸은 전공이 경영학이라 허영자 시인에게서 ‘교양국어’를 배우는 인연으로 연결되었을 뿐이다. 그는 강의실에 들어서마자 ‘여기에는 시인의 딸이 함께 공부하게 되었으니 영광이다’라는 말로 딸의 국어실력에 압박을 가했다.
그는 1938년 8월 31일, 경남 함양군 휴천면에서 출생해서 바로 부친의 임지를 따라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는 그곳 부산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다시 서울로 와서 경기여고 와 숙명여대,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때 곽종원, 김남조, 정한모, 조연현 선생의 지도를 받게 된다.
1961년『현대문학』에「도정연가(道程連歌)」「연가삼수(戀歌三首)」「사모곡(思母曲)」이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그는 한국문단사상 최초로 여성동인 [청미(靑眉)] 결성에 참여하여(김선영, 김숙자, 김혜숙, 김후란, 박영숙, 이경희, 임성숙, 추영수) 1998년까지 동인활동을 해오다가 35주년을 기념하여 『청미동인시지총집』을 간행하고 막을 내렸다.
그는 1966년에 첫 시집『가슴엔 듯 눈엦 듯』을 상재한 후 『친전(親展)』『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빈 들판을 걸어가면』『그 어둠과 빛의 사랑』『이별하는 길머리에』『꽃피는 날』『말의 향기』『아름다운을 위하여』『조용한 슬픔』『암청의 문신』『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목마른 꿈으로써』『은의 무게만큼』등 8권의 시집과 다수의 시섭집을 간행하였다. 그는 2008년에 대표시 100편을『얼음과 불꽃』에 묶어 옛날 방식의 활판 조판으로 발간(출판도시 활판공방)해서 영원한 소장본으로 배포한 바가 있다.
나는 그의 7시집『목마른 꿈으로써』에서「시(詩)」라는 작품 ‘어떤 / 요염한 / 유혹의 눈짓에도 / 홀려오지 않는다 // 심장의 피 / 간의 기쁨을 / 졸이고 태우는 // 그 처절하고 / 다함 없는 / 봉헌의 불꽃 속에 // 비로소 현신(現身)하는 / 한 점 / 빛나는 / 사리(舍利)’를 읽고 다음과 같이 서평을 써서『心象』에 게재한 적이 있다.
허영자 시인이 내린 시의 본령은 ‘비로소 현신하는 / 한 점 / 빛나는 사리’이다. 분명히 시인의 눈에 반추된 사물이나 관념은 지고지순의 서정으로 시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하듯이 시가 아니면 현실의 자질구레한 의문이나 나아가서 갈등에 이르기까지 화해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의식의 흐름을 감지하게 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 이는 시인의 천성이며 집념이다. 인간의 존재양식에 있어서 변형되고 굴절된 충격적인 요소는 반드시 갈등을 동반하는 현실을 접하게 되는데 허영자 시인은 이러한 사안들을 시라는 동일시된 인식으로 해법을 구가하는 특성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연유뿐만 아니라, 그가 ‘목월회(박목월 시인의 제자들 모임)’ 일원으로서『心象』출신 후배인 나에게 많은 관심을 베풀어주고 있었다. 그가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재임할 때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기 위해 애를 쓴적이 있었다. 내가 정관기초위원으로 위촉했던 일도 같은 맥락의 정분이라고 여겨진다.
그는『한 송이 꽃도 단신의 뜻으로』등을 비롯한 많은 산문집과 다수의 수필선집을 발간하였고 지난 1998년에는 허영자문학의 결집체인 『허영자 全詩集』과『허영자 選隨筆』을 발간하여 그의 문학을 일차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또한 그는 한국시협상(1972)과 월탄문학상(1986), 편운문학상(1992), 민족문학상(1998)과 가장 영예로운 제1회 ‘목월문학상’(2008)을 수상하였다. 중요한 일은 상금 5천만원을 목월문학포럼과 한국시협 등 문학단체에 기부해서 많은 갈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제 성신여대 교수직과 한국여성문학인화장,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퇴임하고 홀가분하게 지내면서도 문학 강연과 문학 심사로 전국에서 초청받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항상 조용하며 차분하다. 크게 떠들거나 꾸짖는 일도 없다. 다만 문학에서만은 단호하다. 성춤복 시인의 말을 빌리면 ‘활활 타오르는, 그리고 영원히 꺼지지 않아 허불길로’ 애칭을 붙였던 것도 이러한 예리하면서도 단호한 성품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영자 시가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장점은 그의 시가 날카로운 절제와 극기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에 뜨거운 정열과 차거운 허무가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그러한 모순성. 양면성을 초극하고자 노력하는데서 그의 시의 핵심(김재홍의 평론)’으로 현현되는 것들이 그러하다.
또한 그가 말하듯이 ‘돌아다보면 육체적으로 겪은 고통과 정신적으로 아프게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많은 고민들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여 나는 퍽 기쁘게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단 한 번뿐인 이 인생을 기쁘게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음에 대하여 무한한 감가의 마음을 가진다’는 그의 진솔한 내면의 정감은 큰누님 같은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그와는 근래에도 자주 만나는 편이다. 함평 국화축제로 고창 미당문학제로, 경주 무슨 행사로 해서 동행하면 그는 문학 강연을 하고 나와 일행들은 시낭송을 한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벌어지는 삶의 여백에는 해학(諧謔)이 끊이질 않아서 웃음꽃이 만발한다.
--어이, 김 선생, 얼굴이 맑아졌어요.
--예, 선생님, 40년 넘게 피운 담배를 끊었더니, 체중이 늘었어요.
--백해무익 그 담배. 잘 했어요.
어찌보면 그와의 만남은 문학적으로나 인생적으로 행운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