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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시선집 『허물벗기 연습』
자기 찾기와 의식의 유동성
蔡 洙 永(시인. 문학평론가. 전 신흥대학교 교수)
1. 들어가면서
시는 자기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방랑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또 이런 되풀이가 도로(徒勞)에 끝나는 운명적인 예감을 확인하면서도 기어히 길을 떠나는 속성을 가진 인간 삶의 표정을 반영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살아있다는 인간의 표정은 변화 많은 시대의 기류에 부침의 역사를 구성하는 인자(因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의미의 뗏목에 무작정 실려 가는 자기 없는 운명을 건사해야하는 존재의 희망‥‥때로는 주연 같은 따뚝거림의 화려함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참담한 실망의 짐을 짊어지고 좌표도 없이 길에 선 자의 운명‥‥시인의 노래는 이런 인간의 철학에 심각한 표정을 만든다.
그러나 어느 것도 확실성이라는 단안을 예비하지 못한 궁극의 나그네라는 처지를 자각하면서 오늘의 노래에 내일의 여백을 심으려 한다. 시인은 오늘의 고달픔에서 탈출하여 내일을 열망하는 함량의 노래를 만들지만, 이 또한 불명확한 자화상에 또 다른 슬픔을 만나는 경우는 허다하다.
1983년,『심상』으로 등단한 김송배는 1986년에『서울허수아비의 手話』(모모)의 첫 시집을 시발로 하여 1988년,『안개여, 안개꽃이여』(거목)와『백지였으면 좋겠다』(혜화당. 1990).『黃江』(한강. 1992),『혼자 춤추는 異邦人』(1994. 문단) 등 5권의 시집을 정력적으로 상재했다. 본고에서는 1994년 지금까지의 시집에서 발췌한 선집『허물벗기 연습』(경원)에 소재한 80편을 검토의 대상을 점검한다.
김송배의 정신적인 흔적은 정적(靜的)인 공간에서 동적(動的)인 공간을 열망하는 발상으로 시의 행로를 재촉한다. 아울러 자기를 확인하고 찾아야 하는 숙명적인 모티프를 전면에 놓고 미감(美感)의 옷을 입히려는 노력을 시의 중심적인 의무로 생각한다. 물론 이런 작업은 불안한 시대의 강을 건너야하는 인간의 숙명적인 아픔이 따라붙고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 존재의 방편을 유심히 관찰하는 천착의 열성을 바치는 태도를 눈여겨야 한다.
김송배의 시는 시의 위의(威儀)를 높이는 비유와 상징의 숲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근원적인 바탕을 기준으로 하여 詩로 빚는 언어의 맥을 요리하는데서 안도감을 전달한다. 이런 기저 위에서 김송배의 시는 출발의 모색을 누적시키면서 어딘가의 목표에 배를 띄운다. 이제 그의 뱃길에 도파(道破) 소리를 들어야하는 길로 나간다.
2. 의식여행
가) 자기 찾기 혹은 여행
모든 예술은 나를 기점으로 출발을 마련하고 또 나를 만나서 허무를 확인하고 나를 떠나는 일로 의무를 삼는다. 결국 나는 우주공간의 중심이고 나의 확인은 우주의 숨소리를 탐색하려는 존재의 구체적인 암시를 갖기 때문에 시의 출발은 나의 확인이라는 절차를 외면하지 않는다. 물론 예술의 시발은 '나'의 확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확고한 기반 위에서 '너'라는 또 다른 공간을 지향할 수 있다는 원리야말로 '우리'라는 객관성을 확대할 수 있는 첩경일 것이다.
詩는 나를 떠나서 우리에 도달하는 지표를 갖지만 나를 떠난 우리는 공허한 미사려구를 희롱하는 일이기에 감동의 파도를 대동하지 못하는 불행을 갖게 된다면 김송배의 시적 고민은 가장 합리적인 길을 찾아가는 체험의 축적을 주요 함량으로 하고 있다. 이런 발상의 문제를 중요시하는 것은 출발의 왜곡은 시와 심장을 놓치면서 본말이 전도되는, 하등에 중요하지 않는 외곽을 헤매는 일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에 가장 위험한 일들이 진부한 외곽에 시인의 정열을 헌사하는 현상이다.
초상화가 걸려 있다
나를 알아보는 목소리 들리고
옷깃을 여미는 아침이면
내가 퍼낸 눈물자국 위로
짹짹짹 참새Ep만 날아간다
--「거울 속에 않아서」중에서
'초상화'는 나를 바라보는 대상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객관성의 자기를 만나는 일이다. 즉 자기와 닮았다는 혹은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이치 때문에 등식은 무너지지 않는 의미를 갖지 않고 애착의 동행을 자청하게 된다. 이런 객관성의 자기를 마주한다는 것은 자기에 대한 애정과 증오 혹은 염증을 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언제나 있다. '나를 알아보는 목소리 들리고'의 나르시스적인 소리에 귀를 세움으로써 김송배는 '내가 퍼낸 눈물자국'의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는 실체와 함께 조우(遭遇)하는 이치를 만난다. 이리하여 풍경화를 만드는 '참새떼'의 동양화적인 아름다움을 대면하는 기회를 포착한다.
나를 바라보는 것은 즐거움보다는 후회라는 함량에 더 많은 비중을 두기 마련이다. 만약 자기에 도취하여 그 맹목의 함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그는 비극의 함정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한다. 김송배는 '어디선가 나를 꾸짖는'의 자기 내면에 엄정한 거리를 남김으로써 칙칙하지 않은 풍경을 보여주는 기교를 남긴다. 이런 단서는 시의 3연에 '어머니 원점에 다시 서렵니다'라는 간곡한 희망이 발동되지만 이를 실현하는 일이 어렵다는 이유를 잘 아는 시인의 고뇌가 '패배의 술잔'혹은 '신음'이라는 존재의 팍팍한 인상을 독자의 편으로 건네준다.
시는 의식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밑그림을 완성한 후에 채색의 순서가 있고 끝내기의 묘미가 감동을 창조하게 된다면, 이는 전적으로 언어의 재료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의식의 그림은 곧 시의 여백을 충족하는 길에서 가능한 일이다.
겨울 논 펄에 그냥 서 있습니다.
저녁놀만 쳐다보면
신열(身熱)로 일그러진
참새 한 마리
아직도 후여, 후여어‥‥
안개 속 날아간 마음을 찾습니다.
--- (중략) ---
고향 빈 들녘에서
풀풀 지푸라기 찬 바람에 섞이고
나는 마냥 부끄럽게
이 겨울을 서서 지냅니다.
--「허수아비 이후」 중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그 모습의 참담한 현상을 조감하는 모습이다. '겨울 논펄'이라는 처지는 인간의 감당에 호흡의 가파름을 느끼는 암시를 주고, 허무를 이고 있는 신열의 고통을 남기고, 궁극적으로 돌아 갈 아득한 공간의 미지수에 고달픈 인간의 연상을 허수아비에 대입시킨다. 이런 보여주는(Showing) 풍경의 묘미가 객관적 위치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두뇌의 정치성(精緻性)을 필요로 한다. 자기를 발견하는 일은 인간의 비극을 깨닫는 일이고 이는 곧 인간의 위대성으로 가는 첩경이라면 시인은 곧 자기를 알아야 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예언을 가능하게 한다.
'갈대는 누워서도 / 서럽게 울고 있었다'(「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2])와 '가량비가 내린다'(「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6」)의 젖음(wet)은 시인이 자기를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회한의 고백이지만 이는 곧 시의 풍경을 채색하는 정서의 유려함으로 되비친다.
나) 존재의 확인
인간은 길을 떠나는 존재이다. 이런 일의 객관성은 여행이고 주관적인 암시는 의식의 여행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단순한 보이지 않음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어딘가로 떠나는 길을 만드는 상징의 숲을 형성할 때, 독자의 뇌리는 고정된 의식을 벗어나려는 정서와 맞닥뜨린다. 가령 인간의 존재라는 본질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꾸 움직이는 수은과 같은 생동의 두리번거림을 필요로 하면서, 존재 자체는 일정한 용량으로 대표되는 형식을 갖는다. 김송배의 시엔 존재에 대한 확인은 일정량의 그릇을 마련하고 거기에 담겨지는 순수의 질을 거론하는 듯하다.
네가 불가마에서 달구어지듯
나도 신열(身熱)로 감싸인 채
그렇게 살아있음을 보았네
--- (중략) ---
잘 다듬어 구워진 사그릇을 만지면서
선채로 허수아비 된 삭막한 공간.
--「그릇, 몇 가지 실험」중에서
‘존재의 슬픔 확인’이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이다. 존재라는 형태는 결코 담을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는 무한량의 용량이지만 이를 구체화시키는 상징의 방도는 결코 언어의 힘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김송배는 존재의 확인을 위한 정열을 내면으로 축적하면서 외면으로 겸손한 자기 발견을 굳이 숨기려는 마음이 아닌 것 같다. 시는 자기를 진솔하게 노출함으로 미적 감수성을 얻을 수 있는 노출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포르노적인 노출이 아니라 미감을 대동하면서 지선(至善)을 지킬 줄 아는 아름다움을 규정하기란 용어의 한계를 갖게 되는 면도 있다. 여하튼 김송배는 존재의 문제를 숨기는 마음에서가 아닌 노출의 진솔함에서 본질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셈이다. 비록 그의 그릇에 담겨진 존재의 양상이 아름답거나 탐스럽다는 평가를 획득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만큼 상징을 솔직함으로 엮어내는 심성의 문제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태초에 흙으로 빚어진 육신
이제 내 밥주발만큼이나 낡았다
먹고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밥그릇 수만 계산해 온 우둔만 쌓인 채
더러는 잇발 빠진 질그릇이 되고
또다시 찌그러진 놋그릇이 되고
그래서 아아
이젠 정말로 한 움큼의 시혼도
챙겨 담을 수 없는, 그래서 아아
이제사
살아온 길 가끔 뒤돌아보는 맥빠진 시어(詩語)
그러나 지금쯤에서는
다시 사는 방법을 새로 찾을 수 없음이여
내가 간직한 그릇들은 모두 비워졌다.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 8」중에서
존재의 결말은 궁극적으로 비어있는 허망을 만나는 고백으로 끝을 예비한다. 이런 답안을 찾기까지는 무한의 방랑과 고통을 지불하는 절차를 겪어야 해답을 어렵사리 만나게 된다. '밥그릇 수만' 계산하면서 살아온 인생은 후회이면서, 삶에 대한 질의 문제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김 시인 의 정신적 방황은 어떻게 하면 그릇의 용량에 자기의 만족도를 충족할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하는 심려를 축적한다. 이런 발상에서 스스로를 '우둔한'으로 치부할 때, 결국은 새로운 갈등의 길이 맥 빠진 '시어'라는 정신적인 문제 쪽으로 집중되지만, 시는 시인의 삶을 응축한다는 점에서 시와 생활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는 상징성을 갖는다. '찌그러진'과 '잇발 빠진'의 그릇에 질 좋은 시를 담을 수 있을 것인가를 염려하는 것은 곧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요한다는 점에서 시의 행로는 곧 김송배의 정신적인 길의 이치를 느끼게 하면서 인간의 향기를 유추하는 아름다움을 부추긴다.
「서울허수아비」는 김송배의 초기 시에서 느끼는 허무적인 존재감을 생각하게 한다. 허무는 삶의 깊은 성찰에서 만나는 필연적인 것이고 이로부터 벌거벗은 자기의 모습에 새로운 의식의 옷을 입히는 것이기에 증폭되는 정신의 방황이 내포된다.
서울의 하늘이여
우중충한 가슴들만 무너지는데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나의 영혼
오오라, 행진을 시작하는
오늘은 허수아비여라
허수아비여라
파아란 하늘을 마시고 싶다
--「서울 허수아비」중에서
초기의 김 시인의 시는 자연현상과 시인과의 교감이 원만하지 못한 갈등을 시화(詩化)했고, 두 번째는 문명에 대한, 세 번째는 승화된 인간내면을,『黃江』에서는 고향에 대한 연민을 기록했다고 ‘나의 허물벗기 연습’에서 말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원형이 시작되는 곳이고 또 원형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곳이라는 점에서 생명의 진원이 된다. 이를 어떻게 내면으로 승화의 단계를 삼을 수 있는가는 시인의 정신적인 추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김송배는 시의 맑음과 인간의 깨끗함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하는 '깨끗하고 순수함'을 추구하는 쪽으로 진로를 잡고 있다. 이른바 환경이라는 문제가 존재의 파괴로 이어지고 이런 절망의 문제가 인간사의 쓸쓸함 혹은 허수아비의 허무와 연결되는 아픔을 감당하려는 절망과 만난다. 「허수아비 이후」나 「진단서」또는 「슬픈 황새여」 등은 앞에서 언급한 이미지 군들이다.
다) 불안시대의 표정
불안은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 쪽으로 향하는 에너지이지만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영향으로 남는다. 불안은 인간을 성숙시키는 면이 있지만 여기서 굴복했을 때는 보잘 것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 돌아간다. 인류문화의 본질은 고난을 극복한사람들의 기록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안개 속에서도 항해는 할 수 있을까
영점이하로 낮아진 시력
--- (중략) ---
아아, 방향 감각이 없는 이 바다에서
나 또한 우리들......
--「안개꽃 시대 · 6」중에서
안개는 삶에 대한 불명확한 시계(視界)를 암시하면서 길을 가는데 따른 암담한 고통을 예상하게 한다. '항해'라는 목적지를 위해 길을 예상하면 벗어나야 하는 명제가 도사리고 있지만 가로막는 이 문제를 밝은 눈으로 벗어나야 하는 것이 운명적인 작심(作心)으로 역사는 가리킨다.
'있을까'라는 의문부호는 여전히 준비가 되지 않는 현실을 고백하는 말이지만 어느 누군들 삶의 앞을 불안으로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 것인가? 동서남북을 향하는 감각이 없다는 사실은 '나 또는 우리들'이라는 공통의 광장에서 만나는 공동의 이미지로 바뀌어질 때, 고통은 비단 시인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불안은 인간을 인간화시키는 자양이자 벗어날 수 없는 원소라는 점에서 공통의 관심이면서 각각 극복해야하는 장애물 일 것이다.
와와 밀리는 군중과
미로에 깔리는 안개 속으로
사그라진 영혼의 손짓들이 오늘도 아픔이야
시시비비 시시비비, 비비시시
작은 새들의 울음 소리.
--「위선의 겨울」중에서
김송배의 시에서 현실을 고발하는 함량은 많은 이미지를 내포하지는 않지만 더러 산견(散見)되는 얼굴로 나타난다. 「위선의 겨울」은 5, 6공화국의 살벌한 시대의 고통을 안개라는 시계불량의 현실을 깨우치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미로'혹은 '안개'의 이미지는 당시의 시비시비로 가름되는 숫자에 얽힌 고통의 시대를 뜻하면서 당시의 참담한 슬픔의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 '사그라진 영혼'과 상통하는 '작은 새들의 울음'에 담겨진 비비시시 혹은 시시비비라는 의성어는 곧 이 나라 선량한 백성들의 신음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고통의 중심에서 체험의 여과를 거쳐 시의 얼굴을 건져 올리는 역할이 역사 속에 곧 시인의 임무가 될 수 있다면 김송배는 이런 역할에 일정한 배역을 감당한 인상이다.
시대의 고통은 모순으로 시작하고 모순을 넘어가는 방도는 언제나 하나의 출구를 마련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의 모순에 접근하는 방도는 언제나 하나의 입구를 고집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밤은 아아
누군가의 신음으로 가득하다.
--「안개꽃 시대 · 7」중에서
서울은 한국이고 한국은 서울로 모든 의식이 집중되는 것이 현실이라면 서울의 신음은 민족의 신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누군가의 신음'은 모든 민족의 아픔으로 돌아간다. 이런 공동의 아픔을 괴로워하는 시인의 마음은 곧 일반 백성이 느끼기 전에 미리 느껴야하고 괴로워해야 한다.
이 때문에 시인은 예언자의 자리에 설 수 있고 신음하는 시대의 온도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산에 달그림자 기울듯
암울한 몸짓들은
이 밤을 예감하는 울음이었나
서울의 하늘에는
안개비만 자욱하고
구겨진 신문지는 목이 메었다
--「안개꽃 시대 · 4」중에서
'암울한 몸짓들'이라는 시어에서 어둠으로 지칭되는 공간에 시인이 던지는 육성은 곧 민족사의 이미지에 연결될 수 있을 때 시인의 눈빛은 '안개비'라는 울음이 공동의 울음으로 바뀌면서 민족사의 어두운 페이지는 안개 숲을 헤쳐가야 할 명제로 대두된다. 이런 고통은 매일의 신문지에 '목이 메었다'라는 비유로 전달된다. 이는 시인만의 몫이 아니고 양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으로 인식되기에 슬픔의 농도는 암울한 정서를 일렁이게 한다. 결국 「안개꽃의 시대」가 아니라 어둠 속에 핀 아픔(꽃)의 이미지로써 민족이 울부짖으면서 살아온 고통을 바라보는 시인의 가슴은 망연한 감회로 다가온다.
라) 의식의 靜中動
1)靜
고요한 것은 靜이 있기 때문이고 靜은 動을 지향하는 보완적 관계에서 동양사상은 응집하는 논리로 돌아간다. 움직임은 정지를 소망하고 정지는 언제나 새로운 행동으로의 진입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주의 운행원리이자 이를 벗어나는 이치는 없다.
시는 자연의 원리‥‥순리라는 법칙을 일탈(逸脫)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삶의 원리도 자연의 원리와 손을 잡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파멸의 존재가 될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그릇은 인간을 담는 것이고, 여기에 인간의 감정을 담아야하기 때문에 우주의 원리에 붕어빵을 만들지 못하는 인간의 모형이란 거역의 논리가 된다. 인간이 자연의 원리를 거역하고 존재할 수 있는가? 이의 대답은 아니다라는 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김송배의 시는 정적인 특징에서 다음의 새로운 단계를 예비한다. 이는 순리의 법칙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설정한 목표를 뜻한다.
그냥 서 있기만 했다
흐느적이는 풀잎 틈새에서
함께 흔들릴 수 없는 자폐증
그 자포(自暴)의 중증을 앓고 있는 것일까
어디론지 몸 추스려 발걸음 옮겨야 하리라는 압박감
그 강한 바람으로 몸 흔들고
이젠 중심을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나무
--「靜中動-靜」중에서
시는 의미를 벗어나서는 언어의 생명력을 부지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비유라거나 상징의 옷을 입되 화려한 혹은 검소한 환경의 분위기에 따라 시의 토운은 각기 다른 얼굴로 분장된다. 김송배의 시적 에스프리는 중요한 감성을 부추기는 언어 조종의 기법으로 시의 구조‥‥의미의 숲을 찾아간다. 이런 기교는 시끄럽지 않은 방도이고 조용하게 대상을 시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인상이다.
'그냥 서 있기만 했다'의 그냥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절박한 인생사에 대입하면 '서 있기만'의 ‘그냥’과 ‘만’의 한정사에서 느끼는 조화는 시의 맛을 의미로 대입한다. 그리하여 '발걸음 옮겨야 하리라’는 절박한 심정은 움직임을 위한 필연의 생각으로 전환된다. 비록 연약한 나무로 형상화된 존재일지라도 새로운 공간을 향하는 열망은 인간이나 정지된 나무나 다를 바 없는 이미지에 맞닿는다. 이제 '서 있기만 했다‘의 나무의 정지태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2)中
소망은 인간이나 생물이 가진 존재의 확충을 뜻한다. 움직임을 위한 모색이 곧 내일을 위함이든 혹은 과거를 회상하는 열망이든 문제는 무엇을 어디로 끌고 가는 의식의 존재인가, 아니면 소비하는 모습인가를 구분하는 절차에서 나타난 현상이어야 한다. 김송배의 의식은 움직임을 위한 모색을 볼 수 있다.
조금씩 걷고 싶었다
처음부터 헛딛는 발걸음을 예비하면서
그래도 이 세상은 걸어가 볼만한 것일까
어지럽다 문득 그대여
--「靜中動-中」중에서
'조금씩'이라는 작음의 함량은 원소의 출발이지만 여기서 시작되는 작은 의미는 목표를 확대하는 길을 만들게 된다. 이리하여 '걷고 싶었다'라는 소망의 발단은 시인의 정신 속에 희망의 빛을 켜는 의지로 작용되는 느낌을 준다. 아울러 처음부터 실패의 '헛딛는'의 좌절을 만날 때, 이를 극복하는 '연습'의 각오를 전면에 배치하고 '걸어가 볼만한'것일 것인가를 예상하는 긍정의 태도는 김송배의 정신에 들어있는 밝은 눈을 느끼게 한다. 물론 이 시에서 '조금씩 걷고 싶었다'의 ‘었’의 과거완료는 시의 맛을 반감하는 어휘이지만 돌아보는 눈에 칙칙한 어둠으로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시의 구조는 흔히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는 출구를 지향하는 문법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없는 게 아니다. 생물은 빛을 추구하는 속성 때문에 시의 경우도 순리의 길을 찾아가는 어둠에서 빛으로의 지향점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에 김송배의「中」- 모색은 그의 행동강령에 논리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런 단서의 일단은「迷路實驗」에서 나가는 문을 찾고 있는 시인의 진지한 모습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3)動
움직임은 존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면서 목표를 추구하는 존재자의 확증이다. 이런 움직임은 어딘가의 길을 연상하는 그림으로 연상된다.
무작정 걸었다.
서 있음과 걸어감의 중간지점에서
너무 오랜 사유(思惟)가 필요했을까
더러는 서서 되뇌이는 삶의 의미가 있었다지만
걸어가는 삶의 촉각은 희미하다
아, 황막한 벌판에서
어떻게 걸어갈까, 이미 지워진 지도 한 장
어느 날 좌초된 허수아비의 촉각은 마비된 채
한 점 불빛을 따라 막연하게 걸어보는
나의 움직임은 아픔이다
--「靜中動-動」중에서
‘무작정'의 시어는 動의 의미를 약화하는 이유가 되지만 삶에 어디 일정한 목표에 향하는 법칙이 있는가. 가다보면 길은 인간을 위해 화해의 정감을 준다. '걸었다'라는 의지의 발길로 서있음과 걸어감의 중간에서 시인의 의지는 '삶의 촉각’을 헤아린다. 이런 의미의 길은 곧 고통의 늪을 벗어날 길이 없고, 이런 가정은 '황막한 벌판'에 홀로 선 존재자의 우수를 감지할 수밖에 없다. 가령 산다는 일이 어디 지도 속에 그려있는 길처럼 확실한 이정표가 될 수 있는가는 부정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김송배는 불빛을 좌표로 하여 막연하게 걸어가는 행진을 계속함으로 자기의 의미를 투영하는 느낌이다.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는 전혀 시인 자신의 몫으로 독자는 기대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면 된다. 지금 김송배의 움직임은 '아픔이다'라는 고백을 들어야하는 정서 감염의 끄덕임을 남기면서......
3. 마무리
시는 언제나 인간적인 표정을 바라보는 그림이다. 인간의 표정이 각기 다르듯 인간의 개성 또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시에는 개성을 어떻게 객관화의 방도로 전환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기준 자(尺)에서 판별이 결정된다.
김송배의 관심사는 곧 그가 살아온 경험의 총체적인 감수성을 압축한 시어의 결합이 안온하고 언어의 생동감이 안으로 스며드는 특징을 소유하는 바, 이런 면은 시인의 성품과 시의 표정과 상관이 있다.
김송배의 시는 존재의 관심이 광범한 이미지군을 대동하고 체험의 확인을 거치고 난 후에 시의 행보를 조종하는 절차를 갖는다. 이 때문에 안정감을 독자의 뇌리에 심어주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자기 찾기라는 성실성으로 나타나는 시감의 모양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부단한 눈빛을 두리번거리는 모색의 행인이기를 자처하는 특징이 있어 깊이를 보탠다. 존재를 어거지로 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순리의 발상으로 먼 길을 찾아가는 보폭에 불빛을 상정하는 그림을 연상한다.
불안시대를 괴로워하는 현실에 신음을 언어의 포장으로 맵거나 시지않는 방도로 현실을 위장하는 안개꽃의 이미지는 현실을 분해하고 바라본 완전한 이해의 바탕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
김송배의 의식은 찾음과 모색과 행동이라는 조심스러운 靜中動의 행보에서 시적인 여백을 의미로 채우면서 내일의 여로를 읊조리는 시인이다.('94.11.『순수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