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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panasati sutta(出入息念經)
The Courage to Investigate (열린) 고찰에 대한 격려
현재 붓다가 가르친 명상 방법에 대해 몇 가지 논쟁이 있다.
어떤 수행처에서는 고정된 집중 선정 명상을 먼저 수행해야하고
위빠사나 명상 또는 순간 삼매(카니까 사마디) 수행으로 전환하기 전에 사선정[5]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수행처에서는 선정을 거치지 않고[6] 단지 위빠사나 명상[7]을 수행하거나
명상 수행 시작부터 바로 근접삼매(우빠짜라 사마디)를 계발해서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위빠사나” 또는 “위다사나”(둘 다 같은 의미임)라는 말은 경전에서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반면 선정(Jhana)이란 말은 수천 번이나 언급된다.
(이 선정의 의미는 평온-지혜 명상단계들을 말하고 고정된 집중삼매가 아니다.)
특히 붓다는 아나빠나사띠 경에서 선정과 지혜를 동시에 계발하는 한 가지 방식의 명상법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선정은 마음이 깨어 나아가는 수행 단계들을 의미하고 깊은 몰입이나 고정된 삼매[아빠나 사마디],
근접 삼매[우빠짜라 사마디] 또는 순간 삼매[카니까 사마디]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경전은 실제로 마음을 평온(tranquilize)하게 하는 방법과 함께
존재의 진실한 본성을 직접 봄으로써 지혜(wisdom)를 계발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은 연기의 원인-결과 관계를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써 무상[아니짜] 고[둑카] 무아[아나따]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동시에 사념처와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성취한다.
그래서 이 훌륭한 경전은 출세간적 열반을 체험하는 길을 분명하고 정확히 제시한다.
주석서와 복주석서는 명상을 ‘집중(사마타)’과 ‘위빠사나’라는 다른 형태로 구분하였다.
경전에는 이러한 ‘분리’가 보이지 않는다.
비록 ‘앙구따라 니까야’에서 수행의 첫 번째 부분은 ‘사마타’이고 두 번째 부분은 ‘위다사나’(지혜의 계발)이라고
언급한 부분도 두 가지 다른 형태의 명상 수행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수행은 하나의 형태이다.
맛지마 니까야의 111번 경에서 ‘그것들이 하나씩 차례로 일어나면서’ 의 경우처럼 때에 따라 다른 것들로 보여질 뿐이다.이 경전은 존경하는 사리뿟뜨라(사리불)가 아라한에 이르기 전까지의 명상 계발과 모든 선정들(명상단계들)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명상을 구별짓고 범주화한다면 매우 혼동스런 상황이 된다.
유명한 청정도론(위숫디막가)과 그것의 복주석서들에서 그렇게 구분 짓고 있다.
그 주석서들이 경전과 비교된다면 경전과 불일치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경전의 단지 한 줄 또는 한 부분만 인용하여 주석서가 경전과 일치한다고 확인한다.
그러나 경전 전체를 읽는다면 경전이 주석서와 전체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것은 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잘못된 주장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그들은 사물의 모습에 대한 더 전체적인 시각을 잃고 담마의 작은 세부사항이나 부분들을 편견에서 본다.
청정도론의 선정에 대한 묘사는 경전에 나타난 기술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대부분 매우 다르게 기술되었다.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선정의 의미는 명상의 대상이나 그 속에 몰입 또는 고정되는 것이고 그러한 집중은 수행의 장애(5蓋)를 억누르는 형태이다.)
예를 들어 청정도론에서는 선정 명상을 수행할 때(몰입 삼매, 근접 삼매, 또는 순간 삼매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
특정한 때 일어나는 니미따(표시 nimitta)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빨리어로 니미따를 말하고 이것은 빛 또는 영상화된 마음이 만든 그림들일 수 있다.)
이것은 ‘집중’ 형태의 명상 수행을 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보살일 때 붓다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으로 이러한 명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경전에는 마음에 일어나는 니미따에 대한 설명이 결코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하다면 경전에 여러 번 언급되었을 것이다.
붓다는 니미따(표시)를 일으키거나 만트라를 암송하는 집중 명상법을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이러한 힌두교식 수행법이 몇백년에 걸쳐 불교에 스며들었다.
그 영향은 이런 집중수행법, 티벳불교식 명상법, 그리고 청정도론 같은 유명한 주석서들에서 보여진다.
그래서 이런 “집중” 수행법은 경전에서 나타난 설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어떤 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사하고 그것을 경전과 확인해보아야 한다.
경전의 단지 부분만이 아닌 경전 전체와 비교하는 것이 최상이다.
왜냐하면 많은 부분들 중에서 한두 줄을 택해 비교하는 것은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열린 고찰(open investigation)- 무엇이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인지 정직하게 질문함 -은
더 분명하게 보게 하고 의문에 대한 합리적인 해답을 구하게 할 것이다.
주석서와 복주석서는 경전의 뜻과 의미를 저자들이 해석한 것일 뿐이다.
선한 의도를 가진 불교승려는 이해를 넓힐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노력한다.
그래서 주석을 붙여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한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더 많은 승려들이 특정 주석의 문구를 상술하고
어떤 사소한 문구와 개인적인 주석에 대해 각기 다르고 미묘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것은 순수한 가르침을 희석하고 경전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와 이해에서 멀어지게 하여 많은 혼동스런 의문들이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면 순간삼매 수행에서 말하는 연기는 담마(실체)의 체계와 어떤 부분에서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수행은 연기의 가르침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의문이 있다.
경전에서 말하는 바른 노력은 마음에 열의, 기쁨이 가득한 흥미, 열중(chanda 칸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명상지도자가 말하는 바른 노력은 단지 “알아차림(noting)”을 의미한다.
또 어느 경전에서 순간삼매(카니까 사마디), 근접삼매(우빠짜라 사마디)
또는 몰입, 고정삼매(아빠나 사마디)를 설명했는지에 대한 혼동스런 의문이 있다.
그리고 어느 경전에서 ‘통찰지(Insight Knowledge)’를 언급하였고 ‘선정상태에 있는 동안 사띠가 없다’고 하였는가?
빠리닙바나 숫따(열반경)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른 문서들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항상 확인하라고 당부했다.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그저 따라하는 것을 그만둬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붓다의 근본가르침에 대해 열린 마음과 정직한 고찰이 없이 의심스런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을 그만둬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단지 권위가 있기 때문에 소문과 스승이 말한 것을 맹신하거나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붓다는 깔라마 경전에서 매우 지혜로운 몇 가지 조언을 주었다.
▪오랫동안 반복해서 말해져왔기 때문에 들은 것을 단순히 믿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오랫동안 그 같은 식으로 수행되어져 왔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전통을 따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소문이나 풍문을 듣거나 퍼뜨리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어떤 권위 있는 서적(특히 이것은 주석서와 복주석서를 의미한다)과 일치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절대적인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고찰하지 않고 어리석은 억측을 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깊이 고찰하지 않고 보고들은 것으로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단지 겉모습에 따라 판단하거나 기분 좋고 편하기 때문에 어떤 견해나 이념을 너무 단단히 붙잡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가르친 것에 대한 정직한 고찰이 없이)정신적인 스승에 대한 존경과 복종으로 무엇이든 확신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견해, 믿음, 독단적인 생각을 넘어서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수행하고 완성시키는 동안
더 많은 분노, 비판, 자만, 탐욕, 미혹으로 이끄는 모든 것을 바로 거부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수행하고 완성시키는 동안
조건 짓지 않는 사랑, 만족, 온화한 지혜로 이끄는 모든 것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유익한 것들은 행복, 평온, 평화로운 마음을 계발시킨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조건 짓지 않는 사랑(지금 이 순간을 자애롭게 받아들임),
평온, 만족, 온화한 지혜를 찬미하고 다른 이들이 이 유익한 자질들을 가능한 많이 수행하도록 격려한다.
열반경에서 비구들에게 말한 붓다의 조언은 매우 평이하고 정확하다.
붓다의 가르침(경전)에 따라 수행하고 수행을 올바르게 행하고 있는지 관찰하라고 가르쳤다.
오직 상세한 조사와 수행 후에 경험에 근거하여 권위 있는 글들이 옳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가르침들(경전)을 이용하고 또한 가르침이 담마와 계율에 의거하여 옳은지 확인하라’고 조언했다.
이것은 정보가 진실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다음은 모리스 왈쉬(Maurice Walsh)가 번역한 책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Thus Have I Heard)의 디가니까야의 경전16의 4.7 ~ 4.11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4.7]
보가나가라에서 붓다는 아난다 성지에 머물렀다.
여기서 붓다는 승려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너희에게 네 가지 기준을 가르칠 것이다.
경청하고 면밀하게 주목해라. 이제 말할 것이다.”
“예,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대답했다.
[4.8]
한 비구가
“벗이여, 나는 붓다의 말을 이렇게 듣고 이해했다.
이것이 담마이다.
이것이 계율이다.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한다면
비구들이여, 그때 너희들은 그의 말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그의 말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의 말과 표현을 주의 깊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르침(경전)과 비교하고 계율에 비추어 세밀히 조사해야 한다.
만약 그런 비교와 검토에 근거해서 가르침(경전)과 계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확실히 이것은 붓다의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이 승려에 의해서 잘못 이해되어졌다.”고 결론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비교와 검토에 근거해서 가르침(경전)과 계율에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확실히 이것은 붓다의 말이다. 이것은 이 비구에 의해서 바르게 이해되어졌다.”라고 결론지어져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기준이다.
[4.9]
한 비구가
“이러이러한 곳에 뛰어난 스승들과 장로비구가 있는 무리(community)가 있다.
나는 그 무리로부터 이렇게 듣고 이해했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너희들은 그의 말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그의 말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의 말과 표현을 주의 깊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르침(경전)과 비교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세밀히 조사해야 한다.
만약 그런 비교와 검토에 근거해서 가르침(경전)과 계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확실히 이것은 붓다의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이 승려에 의해서 잘못 이해되어졌다.”고 결론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비교와 검토에 근거해서 가르침(경전)과 계율에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확실히 이것은 붓다의 말이다. 이것은 이 비구에 의해서 바르게 이해되어졌다.”라고 결론지어져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기준이다.
[4.10]
한 비구가
“이러이러한 곳에 학식 있고 담마와 계율과 종규를 알며 전통의 계승자인 많은 장로비구들(elders)이 있다.
나는 그 비구들로부터 이렇게 듣고 이해했다.
이것이 담마이다.
이것이 계율이다.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그의 말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그의 말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의 말과 표현을 주의 깊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르침(경전)과 비교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세밀히 조사해야 한다.
만약, 그런 비교와 검토에 근거해서 가르침(경전)과 계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확실히 이것은 붓다의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이 승려에 의해서 잘못 이해되어졌다.”고 결론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비교와 검토에 근거해서 가르침(경전)과 계율에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확실히 이것은 붓다의 말이다. 이것은 이 비구에 의해서 바르게 이해되어졌다.”라고 결론지어져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 기준이다.
[4.11]
한 비구가
“이러이러한 곳에, 많은 학식 있는 한 장로비구(elder)가 있다.
나는 그 비구로부터 이렇게 듣고 이해했다.
이것이 담마이다.
이것이 계율이다.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그의 말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그의 말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의 말과 표현을 주의 깊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르침(경전)과 비교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세밀히 조사해야 한다.
만약 그런 비교와 검토에 근거해서 가르침(경전)과 계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확실히 이것은 붓다의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이 승려에 의해서 잘못 이해되어졌다.”고 결론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비교와 검토에 근거해서 가르침(경전)과 계율에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확실히 이것은 붓다의 말이다. 이것은 이 비구에 의해서 바르게 이해되어졌다.”라고 결론지어져야 한다.
이것이 네 번째 기준이다.
붓다가 가르친 중도에 의거한 열린 조사와 고찰은 탐구하는 마음을 갖는 이에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먼저 경전에서 확인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자만과 집착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붙들려 있는 마음이 아니다[8]
때때로 어떤 수행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스승에게 매우 집착한다.
그래서 그것들이 경전에서 말하는 진정한 가르침인지 확인하지 않고 그들의 방법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경전을 직접 인용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몇몇 주석서와 복주석서에서 사실을 어떻게 혼동하여 잘못 표현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탐구하고 수행한다면 붓다의 가르침이 단순하고 분명하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특히 청정도론(위숫디막가) 같은 주석서에서 벗어날 때 이것을 잘 느낄 것이다.
비록 경전은 딱딱하고 반복적으로 보여도 깨어남을 돕고 즐겨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을 수행하고 동시에 총명한 지혜를 얻을 때 그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Footnotes(각주)
[5] 여기서 ‘선정’이라는 말은 몰입집중삼매(아빠나 사마디), 또는 근접집중삼매(우빠짜라 사마디)의 의미이다.
근접집중삼매는 마음이 명상의 대상 속에 몰입되기 바로 전 단계이다.
이 말은 현재 명상 지도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정의들이다.
[6] 이에 관련해서
그것은 단지 몰입집중삼매(아빠나 사마디)를 의미하고 근접집중삼매(우빠짜라 사마디)를 의미하지 않는다.
[7] 어떤 명상 지도자들은 이것을 순간집중삼매 또는 순간-순간 집중삼매(카니까 사마디)라고 부른다.
[8] ‘경전들’이라는 복수형의 의미는 여러 차례 일치하는 것을 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