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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대황궁 관광)에서_1 |
방콕(부처님 기도)에서_2 |
태국에서 시작된 여행
태국은 역시 ‘배낭여행의 천국’이라 불릴 만큼 여행의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었다. 싼 물가, 편리한 시설, 환상적인 해변, 흥미 있는 관광 상품 등 모든 것이 여행자를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세계의 배낭족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특히 많은 이들이 주변의 험한 여정으로부터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방콕의 ‘카오산 로드’는 여행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여행자의 메카’ 로서 동남아 여행의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곳에는 ‘홍익인간’, ‘만남의 광장’등 현지교포가 운영하는 여행사겸 숙소(식당 겸업)가 있어 초보여행자에게 특히 큰 도움을 준다.
여기에는 또한 ‘최종한.오은주’부부가 운영하는 ‘동대문’이란 식당 겸 카페가 있는데 대인스님과의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이 분들의 도움은 나의 태국 여행을 더욱 낭만적이고 윤택하게 만들어 줬다. 밤마다 2층 카페에서 서구 배낭여행자들과 어울려 수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지구촌의 일원이 되었다는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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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캄퐁솜 해변에서 |
태국 방샬레이 해변에서 |
방샬레이에서 맞은 2001년 새해
태국 남부의 관광도시 파타야 부근의 해변 마을 방샬레이에는 ‘달이’란 애칭을 가진 김영석씨와 장수진 부부가 운영하는 ;홍익 비치하우스‘가 있다. 대인스님의 오랜 지우이며 배낭여행의 대가인 달이씨는 내게 배낭여행의 요령과 진수를 알려 주었다.
이곳에서 가졌던 2000년 송년의 밤은 영원히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젊은 배낭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귀를 뚫은 날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고정관념에서 깨어나 내 생각의 로드맵을 새롭게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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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무앙싱 어린이들과 |
라오스(루앙푸라방)에서 |
메콩강을 따라 라오스를 느끼다
순박하고 가난한 나라 라오스 여행은 내게 자연의 위대함과 더불어 배낭여행의 묘미를 가르쳐줬다. 그 중에서도 2박3일간 슬로우 보트를 타고 20여명의 서구 배낭족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메콩 강 단체 크루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라오스의 젖줄인 메콩강을 따라 남으로 넘어오며 접한 다체롭고 환상적인 분위기와 자연에 순응하는 순수한 삶의 방식은 아직까지도 나의 뇌리 속에 깊은 경이로움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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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시엠립 앙코르와트에서 |
캄보디아 시엠립 앙코르 톰스에서 |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비운의 나라 캄보디아는 삶의 허무성에 대한 깊은 충격을 남겨줬다. 천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되돌아간 앙코르와트 유적의 불가사의는 논외로 하고 프놈펜에서 만난 ‘킬링필드’의 참상은 잔혹성과 나약함을 함께 지닌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끝없는 분노와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반면에 때묻지 않은 항구도시 ‘시아누크빌’ 해변의 휴식은 이 나라에 대한 무거운 느낌을 가라앉히고 자연의 순수함에 대한 고마움과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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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랑땅 트랙킹(코사인 쿤도) |
히말라야 랑땅 트랙킹(콥테) |
네팔의 사람들 그리고 히말라야 트레킹
신과 산과 인간이공존하고 있는 나라, 네팔은 내게 여행에 대한 애정을 확실하게 심어준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 나는 자연에 대한 외경과 더불어 인간 삶의 심오함과 낭만성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었다. 수도 카투만두에 들어서는 순간 공해와 무질서의 극치에 질식할 것 같지만 얼마안가 성스럽고 인간미 넘치는 이 나라의 매력에 푹 빠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우연히 ‘서울 아리랑(카투만두에 있는 우리나라 식당 겸 여행사)’ 이신석 사장의 팀에끼어 4,600미터 고지의 설산을 넘은 일주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내 평생 가장 소중한 체험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고산병 증세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고비를 넘기며 마치 신의 모습 같은 히말라야의 영봉들을 마주하던 순간들은 그 어떤 말로도 적절히 표현할 수 없다.
한편 척박한 산악지대의 농촌생활을 영위하는 네팔인들의 가난한 삶의 모습은 연민의 정을 뛰어넘어 인간 삶의 불가해성에 대해 한없이 빠져들게 했다.
지금은 카투만두에서 ‘피크닉’이란 한국식당을 운영하는 시인과 작가 ‘김홍성.정명경’ 부부와 네팔의 민속주 ‘락시’를 마시며 밤을 새던 일과 우리나라 여행자들과 만나 여행정보를 교환하던 타멜 거리의 김밥집 ‘짱’도 잊을 수 없다.
‘페와 호수’에 비친 성산 ‘마차푸차레’의 장엄한 모습에 취해 떠나고 싶지 않았던 명상의 도시 ‘포카라’엔 내 마음의 한 조각을 남겨두고 왔다. 또한 네팔을 떠나기 전 우리나라의 절 ‘대성석가사’에서 일주일간을 머물며 법신스님과 함께 참선에 잠겼던 석가모니의 고향 룸비니는 내 생애에서 가장 자유롭고 평화스런 순간들을 느끼게 해준 곳이다.
이처럼 아름답고 심오한 추억을 내게 선사한 네팔은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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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뭄바이에서 |
네팔 대성 석가사에서 |
사람을 만나고 나를 느끼다
인도는 2개월이란 짧은 시간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거인이었다. 혼자서 이 거칠고 험한 나라를 2개월간이나 돌아다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연히 여행의 고수들을 만나 조언을 듣고 여행 스케줄을 짠 결과 거대하고 다양한 이 나라의 진수들을 고루 섭렵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들을 고르라면 우선 대인스님과의 만남을 들고 싶다. 북인도의 석가모니성지 쉬라바스티에 4천여평의 땅을 사서 ‘천축선원’이란 우리 절을 지은 스님을 현지에서 만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군데군데 형성된 수풀과 함께 논과 밭으로 끝없이 펼쳐진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서 스님과 함께 참선을 하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보낸 시간들은 더없이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인도 직원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하고 밤이면 마당구석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인도 곡차를 들며 밤늦게까지 정담을 나누고 우리 노래를 부르곤 했다.
석가모니의 성지와 뉴델리에 계신 지인들에게 나를 도와주도록 부탁하며 내 여행의 성공을 위해 온갖 정성을 베풀어주신 스님과의 우정은 지금도 내 생활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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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우랑가바드 (옐로라 동굴군) |
인도 고아 해변에서 |
가톨릭의 모습을 보여주는 고아
고아는 인도 서부의 아라비아 해에 면한 대표적 휴양지이다. 포르투갈의 점령하에 가톨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지역은 인도의 다른 주와는 종교와 관습등 에 있어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저렴한 비용으로 수영장과 정원이 딸린 쾌적한 숙소에서 머물며 맥주와 각종 요리들을 마음껒 맛보고 열대 식물이 끝없이 이어진 아름다운 백사장을 거닐며 보낸 시간들은 인도를 다시 가고 싶게 하는 유혹으로 남아있다.
또한 ‘프란시스꼬 사베리오’ 성인의 썩지 않는 시신이 안치된 성 바실리카 성당을 포함하여 400년 이상 묵은 올드 고아의 성당들은 가톨릭 신자인 나에게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한없는 감동을 선사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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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그라 타즈마할(왕비 무덤)을 바라보며 |
인도 함피 (술레바자르) |
왕조의 초라한 흔적만 남은 함피
인도 중부내륙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함피는 한때 전통적이고 부유했던 힌두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폐허로 변하여 일부 사원과 궁전 터만이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이 곳이 매력은 이와 같은 유적과 더불어 마치 SF영화의 어느 행성에 들어온 것 같은 기괴하고 원시적인 자연 경관에 있다. 문명과 동떨어진 이 자그맣고 조용한 마을에서 낮에는 서구 여행자들과 자전거 트래킹을 하고, 저녁에는 단골식당의 젊은 인도 미망인 ‘바와니’와 우정을 쌓으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결혼할 때 여자는 지참금을 갖고 가야한다는 인도 특유의 관습 때문에 지참금없이 결혼할 수 있는 외삼촌에게 시집을 가야했던 바와니의 슬픈 운명은 지금도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언젠가 다시 돌아가면 오래도록 머물면서 본래의 내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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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함피(인도 식당에서) |
인도 카주라호 미투나상앞에서 |
열린 마음을 갖고 떠나는 여행
이밖에 힌두 최대의 성지인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에서 수없이 태워져 한줌의 재로 쓸려 내려가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참으로 담담하게 돼새겨 봤던 순간들과 ‘해변의 사원’으로 유명한 인도 동남부의 자그만 해변 마을, 마말라뿌람에서 조용히 보낸 명상의 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이렇듯 내 인생의 기로에서 무모하리만치 모험을 감행한 배낭여행은 꺼져가는 내 영혼에 회생의 빛을 밝혀주었다. 인생을 더욱 겸허하게 바라보게 되었고 두려움과 부러움에 쉽게 흔들리는 일도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 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배낭여행 성공의 원동력은 ‘신과 자연과 인간과 예술을 사랑’하는 내 인간적인 순수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30년 전의 젊은이로 되돌아 왔다. 내 마음의 눈이 그렇게 열렸다는 뜻이다. 배낭여행은 젊은이나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열린 마음과 순수성을 간직하면 누구나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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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경찰과 함께 |
마말라쁘람 축제에서 |
바라나시(강가)에서 |
앙코르와트 일몰직전 |
나는 또다시 드넓은 세상으로 떠날 것이다. 신이 주신 남은 인생을 더욱 가치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저는 국방품질기술원, 한국세무사회 사무국장,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내다 지금은 은퇴하여 아내의 일을 도와주며 개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0년 12월초 국회의원 정책보좌관을 그만두고 인생의 전환점을 모색하기 위해 55세의 나이로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약 4개월에 걸쳐 5개국을 돌아본 경험은 기성세대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인식의 전환을, 젊은 세대에게는 인생선배로서의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렇게 글을 보냅니다.
고 금석(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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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애월금석님의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살아 있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_()_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 번에 다 못 읽고 나누어 읽었지만 읽어볼 때마다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_()_
15년이 지났지만 오늘쓰신 글처럼 다가옵니다.
며칠 전 등록을 하여 누군가 보지도 않을 댓글 달아봅니다.
정말 살아있는 글이군요
거사님의 멋진 여행기가 지금의 저에게 "떠남을 유혹"하는 여신의 손짓같이 느껴집니다.
오늘같이 가을비가 노오란 캠퍼스 잔디위에 추적거리는 날, 창가 너머를 응시하면서 마음이 덜썩거리네요.
오늘도 나에게 물어 봅니다. 언제쯤 떠날 수 있을 것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