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에르코마이’는 ‘오고 가다’는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 ‘나타나다’의 뜻이다.
2)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만 계시며, 밖의 시, 공간인 세상에는 계실 수도 다스릴 수도 없다.
3) 나타난 것은 조건 지어 나타났기 때문에 모두 변하는 반면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신다.
나. 본론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이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번역한 문장이 오해를 가져온다.
(호스 카이에이폰, 안드레스 갈릴라이오이 , 티 헤스테카테 엠블레폰테스 에이스 톤 우리논? 후토스 호 예수스 호 아날레프데이스 아프 휘몬 에이스 톤 우리논 후토스엘류세타이 흔-프로폰 에데아사스데 아우톤 포류오메논 에이스 톤 우라논)
바른 번역은 “그리고 가로되 갈릴리들 사람들아 어찌하여(무엇을) 그 하늘 안(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서서 보느냐(관찰하다)? 이와 같이 너희들로부터 그 하늘 안(속)으로 올림을 받은 그 예수는 그 하늘 안(속)으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에르코마이 : 미래 중간디포넌트 동사)”
1) ‘에르코마이’는 ‘오고 가다’는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 ‘나타나다’의 뜻이다.
‘에르코마이’는 ‘오고 가다’가 동시에 일어난다, 나타나다, 다.
‘오시리라’로 번역한 ‘에르코마이’의 미래 중간디포넌트 동사인 ‘멜류세타이’는 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미래에 오시는 것이 아니다.
디포넌트 동사는 상태 동사, 존재 동사로 이름을 새로이 붙여 사용하고 있는데 ‘어떠한 상태로 있어지라’다. 그러니까 ‘가다 오다’가 동시에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순간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죽고(내 안에 십자가가 있다) 내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버지에게 가심과 동시에 내 안으로 오셔서 나와 하나로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개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을 얻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로 가심을’로 번역한 ‘포류오메논 에이스 톤 우라논’은 ‘그 하늘 안(속)으로 가심을’이다.
‘에이스’는 전치사로 ‘~안(속)으로 들어오다’의 뜻이다.
‘그 하늘(톤 우라논)’은 우리 마음 너머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된 성전을 지칭한다.
2)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만 계시며, 밖의 시, 공간인 세상에는 계실 수도 다스릴 수도 없다.
우리 안(속)에 하나님이 계시는 이 하늘이 있다. 이 하늘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 성전이 있으며 성전 안의 지성소에는 ‘베레쉬트(근본)’ 하나님이 계신다. 이곳에는 시간 공간 개념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집인 성전에만 계시며, 몸 밖의 시간 공간이 있는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시거나 다스리는 일이 없다.
3) 나타난 것은 조건 지어 나타났기 때문에 모두 변하는 반면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무소부재 하시다는 것은 오역된 내용이다. 나타난 것은 모두 조건 지어 나타났기 때문에 모두 변하는 반면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신다. 변하는 것은 모두 죄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사람도 태어나면 변하여 늙고 죽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변하는 사람 안(비유)에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면 몸과 마음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 몸과 마음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 지어져 나타난 것이므로 반드시 그 실상을 알아서 십자가에 달아 그 휘장을 찢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 공간이 개념이 없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나타난다. 이 개념을 잊지 않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