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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백운동 당시 공산당 비판에 앞장섰던 #장보쥔 이 우파로 몰려 군중으로부터 #공개비판 을 받고 있어요.
그린비출판사
통렬한 비판 의견으로 대중에게 환호를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 #저안평 과 장보쥔 이었어요. 저안평은 한 신문사의 편집장이었는데 '천하가 중국 공산당의 것인 양 당의 천하가 되고 있다'고 말했고, 교통부장이었던 장보쥔은 공산당 #일당 (一黨) #독재 를 그만두고 #양당제 (兩黨制)를 기본으로 하는 #정당정치체제 로 바꾸자'고 #주장 했어요.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민주당파는 수십만 명 규모의 #정치조직 으로 발전했지요.
쌍백운동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갔어요. 민주당파는 마오쩌둥을 '살인마'로, 인민 민주주의를 '무뢰한의 독재'로 부르며 #길거리시위 를 벌였어요. 그런가 하면 중부 후베이성에서는 1000여 명의 민주당파 학생이 공산당과 지방 정부를 습격하는 사건도 발생했어요. 쌍백운동을 적극 추진했던 마오쩌둥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요.
◇ 공산당의 반격, '반우파 투쟁'
1957년 6월 공산당은 기관지인 #인민일보 에 '민주당파는 #우파 (右派· #좌파 의 반댓말로 보통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단체 등을 말함) 분자 라고 하면서 이들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어요. 공산당의 반격, 반(反)우파 투쟁의 신호탄이었죠. 이로 인해 #사회주의 문화정책인 쌍백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부르주아 ( #자본가 ) 우파로 몰려 공격의 대상이 됐어요.
가장 먼저 공격받은 것은 유명 #여류작가 #딩링 (1904~1986) 이었어요. 딩링은 공산당에서 제명당했고,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되었지요. 이후 #우파분자 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도 불가능해졌어요. 직장에서 쫓겨나고 노동 교육을 강요받았으며, 농촌으로 추방되는 등 갖은 탄압을 받았지요.
▲ 1957년 #반우파투쟁 을 외치는 행렬 모습.
위키피디아
1958년 7월까지 1년여에 걸쳐 지속된 반우파투쟁의 결과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당원 작가, 예술가 등 7000여 명이 우파로 지목돼 당에서 쫓겨났어요. 당원들과 공산주의 청년단은 "우파가 전 인구의 5%쯤 된다"는 마오쩌둥의 말에 따라 모든 조직에서 5%의 인원을 뽑아내 추방하는 일을 벌였죠. 그 결과 55만여 명이 우파로 낙인찍혔어요.
당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서슴없이 공산당 비판에 나섰던 사람들은 #반체제 (反體制)인사를 #색출 해내는 #유인책 에 걸려들었다며 통탄했어요. 이들은 #덩샤오핑 (1904~1997)이 집권하는 1970년대 복권(復權·한 번 상실한 권세를 다시 찾음)될 때까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죠.
이후 중국인들은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공산당이 주도하는 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시작했어요. 이는 중국의 정치 발전이 늦어지는 걸림돌이 되었죠. 더불어 권력자들은 정권에 대한 비판을 허용했을 때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역풍이 불어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어요.
유머 동영상 앱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폐쇄까지 한 걸 보면 아직 중국의 정치적 자유만큼은 60년 전 마오쩌둥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인류역사 는 모든 #대중 에게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의 #자유 를 #보장 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지요. 중국 정부는 과연 언제까지 이러한 역사의 보편적 흐름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 백화제방·백가쟁명 (百花齊放 百家爭鳴)
춘추전국시대에는 10여 개의 제후국이 저마다 #부국강병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함)을 외치며 널리 인재를 등용했어요. 수많은 #사상가 와 #학자 가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고 (백화제방), #유가 #법가 #도가 등 다양한 #학파 가 #논쟁 을 벌이기도 했어요(백가쟁명). 이를 두고 ‘온갖 꽃이 피고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주장을 편다’는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지요.
출처: 프리미엄조선|[공명진]숭문중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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