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조 임숙영 선조님(호는 疎庵 자는 茂叔)께서는 1576년 선조 9년 9월 3일 나시어 천성적으로 일찍부터 영민한 면모를 보이시었으며 才氣가 뛰어나시어 10세에 벌써 古詩와 律詩를 잘 지으셨다 한다.
임진년 전란속에 잇따라 부모님을 여의시고 난리가 끝난 1601년 25세에 진사 회시에 응시하여 고시부문에서 우등을 차지하였으나 공을 시기하는 考官이 성적을 강등하여 곤궁하게 살다가 요절한다는 설이 있는 6등에 입격시켰다는 고약한 기록이 있으며,
이후 博覽强記(여러가지 책을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함)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을뿐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교유 범위를 넓히는 가운데도 악인을 미워하고 선인을 찬양하면서 사정없이 담론하고 비평을 하곤하여 공을 꺼리는 동료들도 많았다.
공의 지조(志操)는 아무도 따를 수가 없었다. 공이 인(仁)을 좋아하고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과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결정할 때에는 으레 옛사람이 행한 법도를 자신의 기준으로 삼곤 하였다. 데면데면하게 넘겨 버리는 구차한 행동이나 옛날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습관을 위시해서 세상에서 말하는 차선책(次善策) 같은 것들은 공의 마음속에 일절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친구나 학도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충고하고 권면했기 때문에, 공과 함께 지낼 적에는 항상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1610년 광해 2년에는 月沙 이공(李庭龜)의 추천으로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단지 글을 보내 겸손하게 사례할 따름이었다.
1611년 광해 3년 공의 나이 35세에 처음으로 전시에 응시하여 작성한 대책문이 조정에 분란을 야기하여 급제가 취소되기도 하였으나 영의정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 등의 상소로 회복되었다.
공께서는 기억력이 남보다 월등하셨다.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대해서 깊고 넓게 관통하였음은 물론, 잡서(雜書)와 소설(小說)에 나오는 인명(人名)이나 지명(地名) 같은 것도 한번 눈을 스치기만 하면 모두 머릿속에 간직해 두고는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나더라도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특히 사걸(四傑)의 사륙문(四六文)을 모아 놓은 문집은 대여섯 번 정도 읽고 나서 종신토록 기억하여 암송하였으며, 제자들에게 입으로 불러 주면서 옮겨 쓰게 할 적에도 글자 하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와 씨족(氏族)의 시말(始末)에서부터 국내 산천의 형세와 주ㆍ현(州縣)의 도리(道里)의 원근과 풍요(風謠)의 선악과 재부(財賦)의 다소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문을 구하여 익히 알고 있었다. 특히 천하의 여도(輿圖)에는 더욱 깊은 식견을 보여 주었는데,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토대로 하고 사전(史傳)의 자료를 증거로 해서 모두 직접 다녀온 것처럼 환히 알았다.
공께서는 또한 사륙문에 능하였는데, 차오산은 공의 소편(小篇)이 왕낙[王駱 당(唐) 나라 왕발(王勃)과 낙빈왕(駱賓王)의 병칭임]과 자웅을 겨룰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공이 지은 ‘통군정서문(統軍亭序文)’이 당시 청나라 조정에 흘러 들어가자, 한원(翰院)의 학사(學士)들이 우리나라 사신에게 말을 전하기를, “천 년 전에 이미 끊어진 가락이 해외(海外)에서 나오다니, 더욱 기이하기만 하다.”고 하였다.
공께서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선발된 뒤에 규례에 따라 승진하여 박사(博士)에 이르렀다가, 1615년 광해군 7년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
1623년 인조 1년에 박사로 복관(復官)되었다가 추천에 의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었으며,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자리를 옮긴 뒤에, 저작(著作)과 박사를 역임하고 수찬(修撰)과 지제교(知製敎)로 올랐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승진하였다.
이해 10월 3일에 경성 연방(蓮坊)의 우사(寓舍)에서 48세를 일기로 졸하시었다.
『공이 죽자 영의정인 완평공(完平公 이원익(李元翼)의 봉호(封號)임)이 먼저 빈소(殯所)에 나와서 곡을 하고 조문하였으며, 온 조정 백관들이 남보다 뒤질세라 달려와서 곡을 하고 부의를 하였다. 문생(門生)의 고제(高弟)들이 마치 골육의 상을 당한 것처럼 여겼음은 물론이요, 헌부(憲府)의 아전과 하례(下隷)들 역시 쌀을 모아 부의로 바치기까지 하였다. 아, 공은 한평생 빈궁하게 살다가 죽어서도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하였다. 이는 어쩌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어떤 존재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택당 이식 선생의 임소암 언행록에서 발췌>
19세조 임윤원 선조님 자는 士長 1645년 인조 23년 나시어 1712년 숙종 38년 7월 14일 68세를 일기로 졸하시었다.
공께서는 숙종조 경신환국(6년 1680), 갑술환국(20년 1694)을 통한 서인과 남인 정권이 서로 교체되던 시기에 숙종의 신임으로 공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임[본인의 遞職체직상소는 재임기간중 총 19회(숙종17년 시작으로 36년 7월12일까지), 三度呈辭삼도정사는 숙종 27년 2월 부터 서거하시는 전월(숙종38년 6월)까지 총 10회], 이후 서인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과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으로 분파됨.
22세조 임희교 선조님 자는 孺可 1719년 숙종45년 나시어 1785년 정조 9년 9월 8일 마지막 任地인 청송에서 67세를 일기로 졸하시었다. 당시 정조는 소론중 일부세력과 청남계 남인, 청명당계 노론 즉 준론에 해당하는 계열을 중용(준론 탕평책)하여 소북 계열인 공께서는 끝내 재상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에서 돌아 가심.[1733년 영조49년 대사헌 직 제수 받으신 이후 1784년 정조 8년 까지 11년을 같은 직에 머무시다 외직인 청송부사 부임 3개월만에 졸하심]
※ 소북가문 19姓 26家가 모여 결성한 '소북동일회'의 발기인은 34人이며 그 가운데 1인이 필자의 직계 13대조이신 諱숙영이시며, 여암 신경준의 증조부 형제 中 申濡는 소북 8문장 가운데 1인이며 필자 조모님의 직계 11대조가 되심.
※ 나주괘서사건 : 1755년(영조 31) 2월에 일어난 나주괘서사건은 이른바 을해옥사 일명 尹志의 난으로, 거병하여 조정의 간신을 제거할 것이라는 내용의 괘서가 나주 객사에 나붙는 사건으로 소론 강경파가 일망타진 되었다.
23세조 임의상 선조님께서는 후손을 남기지 못하시고 25세에 일찍 졸하시었으며, 승지공 계로파에서 입양되신 24세 임백완 선조님은 성균관 유생 명단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이후 근 현대사의 격변기 속에 몰락한 양반 가문의 끈을 잡고 25세 임석준 5대조님 26세 임명호 고조부님 27세 임익재 증조부님 28세 임봉순 조부님까지 고난의 시기를 살아내시며 명맥을 이어 오셨음.
과제) 당색이 소북인으로 분류가 확인되는 소암공과 치재공 그리고 8대조, 특히 諱 희교 선조님께서 활약하시던 18세기 중후반은 시대 흐름이 순수 성리학에서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나뉘게 되는데 과연 어느 방향으로 관심을 두셨을런지 ?
※ 중농학파 : 경기광주 지역으로 근기남인 중심에 일부 소북인 세력, 허목 유형원 이익 등 후에 중농우파인 안정복와 좌파인 정약용으로 대별됨.
※ 중상학파 : 서울 중심의 집권세력인 노론 주도의 북학파로 박지원 김정희 등이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