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는 세례 및 성찬을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표지라는 관점으로 이해하였다. 실체가 있고, 표지는 실체에 대한 외양적 표시를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유아세례는 지각이 없는 유아들의 신앙의 유무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아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선택의 표시로서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츠빙글리는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를 할례에서 찾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실 때 유아들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정의를 실현함에 있어서 츠빙글리는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에 부합은 하지만 가난하고 불행한 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를 완전하게 구현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재세례파는 국가도 교회와 같은 수준으로 개혁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국가의 교회화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을 놓고 볼 때, 재세례파의 주장은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이며 현실감이 떨어지는 성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분선 아래 조용석, 『츠빙글리, 개혁을 위해 말씀의 검을 들다』에서 양자의 논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시기 바란다.
츠빙글리는 재세례파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신학적 관점을 제시한다. 선택과 계약에 대한 그의 생각을 피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섭리의 관점으로 연결해 나간다. 그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데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선택하시고 이것의 표시로서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계약을 체결하셨다. 우리는 이에 따른 결과로서 신앙을 갖게 되며, 자신의 고귀한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외적 표시로서 세례를 받는 것일 뿐, 스스로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세례 그 자체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세례는 수세자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는 교회의 예식일 뿐이다. 오직 구원을 베푸는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유아세례는 왜 시행해야 하는가? 그것 또한 선택과 계약 관념을 통하여 해명한다. 하나님께서 유아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선택의 표시로서 유아세례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유아들까지도 할례에 포함시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그리스도인 부모의 신앙적 양육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그는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을 경멸하고 그 아이들의 매장을 거부한 가톨릭 신학자들을 비판하며 그들은 결코 유기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그는 부모가 신앙의 보증인, 또는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루터와 같이 유아들의 신앙을 전제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세례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에 의하면 세례는 참된 것(res vera)을 지시하는 외형적인 것(res externa)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유아세례는 유아의 신앙을 외형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판매자와 구매자의 거래 중에 악수를 하는 것은 판매물건의 양도(traditio rei)가 아니라 거래가 이루어졌음에 대한 가시적인 표지(visibile signum)에 불과하다는 것과 동일하다. 물세례인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성령세례의 가시적 표지라는 사실은 세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유아세례는 오래전에 유아들에게 구원이 약속되었음을, 또한 그것이 미래의 신앙의 표식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츠빙글리의 죄 이해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루터의 기본명제인 '의인이면서 죄인(simil justus. simul peccator)'에 반대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죄악은 매일매일 사라져야 하고 하나님은 위대해져야 한다(von tag zu tag minder und gott grösser)."
그러면서도 인간이 스스로 죄를 인식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매우 중요시했다. 예를 들어 유아는 죄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들처럼 죄의 고백과 세례를 권유할 수 없다. 이와 관련된 그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유아는 성인과 다르다.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 유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유아에게 신앙을 요구할 수 없다.(츠빙글리는 루터보다 세례 받고자 하는 유아들의 지적 무능력을 강조했다.)
- 세례는 하나님의 계약의 표시이다. 세례는 성찬처럼 의무의 표시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의무를 의미한다.
츠빙글리의 입장은 취리히 교회의 국가교회적 특성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 국가교회의 대표자로서 국가와 교회가 결합된 사회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책임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1525년 이후 이와 같은 재세례파와의 논쟁을 거치면서 그의 성례전 이해는 변화되었다. 그는 성례전을 계약의 표지로 이해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과 체결하신 은총의 계약의 표지와 성례전을 결합시켰다. 아울러 여기에는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의 개념도 내포되어 있다. 재세례파는 국가관에서도 츠빙글리와 격렬하게 논쟁했다. 재세례파는 루터처럼 두 왕국론을 발전시켰는데 그들의 두 왕국론은 루터와는 전적으로 달랐다. 재세례파는, 하나님의 정의가 국가와 교회 안에서 유일한 원칙으로 효력을 발휘해야 하며, 국가는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처럼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급진적 견해는 국가 질서를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하여」(1523)라는 문건을 작성, 출판했다. 츠빙글리에 의하면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와 부합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를 완전하게 실현할 수는 없다. 인간의 정의는 일종의 가난하고 불행한 의이며 하나님의 의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를 따라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의무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에 의거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개혁조치들이 구체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곧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와 부합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완전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실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에 따라 그는 일종의 현대적인 사회복지국가처럼 취리히 복지정책을 기획했다. 매매, 십일조, 이자에 대한 규정, 고리대금업자에 반대하는 규정들은 이 사실을 증명한다. 츠빙글리의 사고에 따르면 사적 소유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재산을 관리할 뿐이다. 그는 원칙적으로 이자를 거부했지만 현실상 불가피한 것이었기 때문에 절제된 한도 내의 이자는 허락했다. 국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교회적 악습의 폐기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세례파 그룹은 츠빙글리의 생각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더 완벽하게 국가를 기독교화, 아니 국가의 관료를 그리스도의 제자화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 배신감은 루터에게 느끼는 것 이상이었다. 그들에게 츠빙글리는 기득권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을 향하여 비난할 때가 있다. 정치인들의 입장에서는 전체적인 국가 경영이 중요하기 때문에 서민을 위한 복지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을 중점적으로 추구하지 못하는 불가피한 주변적 여건이 존재한다. 하지만 서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율배반적 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재세례파와 츠빙글리의 관계도 이와 같이 이해하면 된다. 루터도 처음에는 농민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이후 그들을 비판한 것은 그의 종교개혁운동을 보호하고 지지해주는 제후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주변 상황만을 가지고 루터와 츠빙글리의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일 뿐이지 그들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신학적 입장을 결정했다고 경솔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객관적으로 양자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츠빙글리는 재세례파를 향하여 ‘다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재세례파는 츠빙글리에 대해 '우리는 당신(츠빙글리)보다 더 열정적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용석, 『츠빙글리, 개혁을 위해 말씀의 검을 들다』(서울: 익투스, 2014), pp.144~150.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유아세례를 카톨릭의 잔재로만 편향되게 파악하지 않고 구약 할례의 흐름을 잇는 미래 신앙의 표식으로 이해한 것은 보수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참신합니다.
네, 깊은 내용의 댓글에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조금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루터의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선언에서 성화의 노력과 죄에 대한 투쟁이 나올 수 있거든요. 츠빙글리 왈, "죄악은 매일 사라져야 하고"가 성화라는 부분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루터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루터의 공재설을 비판한 것은 합당하지만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을 반대했다면 (1차 자료는 못 보았지만 2차 자료가 사실이라면) 츠빙글리가 예민했던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을 똑같이 이해하지 않았을지라도 성화라는 부분에서 2 분의 유사성이 있을 것 깉습니다.
재세례파의 교회와 국가 관계의 설정은 의외로 카톨릭과 비슷합니다. 교회 또는 신앙공동체가 국가와 사회를 흡수하고 그 위에 서는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두 왕국론을 기반으로 분리되거나 혼합되지 않고 구분되어 긍정적 상호작용을 해 나아가야 합니다.
네, 공감합니다.
세속권력을 쥐락펴락 한 것은 카톨릭이지만, 재세례파는 큰 권력은 없었지만 마인드는 종교적 열광주의로 국가와 사회를 주도하려는 속성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시간 여유가 될 때 '루터의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을 루터의 1차 자료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 랑크에서 줄친 부분 중심으로 보면 시간이 줄어들 것입니다.
https://cafe.daum.net/1107/YrXT/210
다시 잘 읽어 보았습니다. 루터의 공재설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은 너무나 성경적, 복음적인 것 같습니다.
저도 또 읽어 보았네요. 매우 공감하며 은혜를 받습니다.
츠빙글리가 재세례파의 오류를 잘 정리하고 보수적 관점에서 주류 종교개혁자로 자리 매김 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네, 공감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222
저도 최근에 유아세례에 대한 쯔빙글리의 이해를 찾아 보았습니다.
위의 글에
"츠빙글리는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를 할례에서 찾았다"는 말이 있는데
쯔빙글리는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세례와 기능적으로 같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맞는 주장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할례와 관계있는 유대인의 관점이 아니라
할례와 관계없는 이방인의 관점으로 단순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쯔빙글리의 주장은 신약의 세례가 구약의 할례를 대체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세례가 시작된 후
기독교인들이 된 유대인들은 할례를 그만두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계속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쯔빙글리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잘 읽어 보았습니다. 인용된 원글 작성자의 나름 참신한 안목이 보입니다. 잘 모르던 부분이라서 일단 읽고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