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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0강
지난번에는 지말무명인 육염과 근본무명을 끊어 가는 과정과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생멸하는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이번에는 염법과 정법이 서로 도와서 훈습(薰習)되는 양상에 대해서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제3절 염정상자(染淨相資)-물듦과 청정함이 서로 도움
* 염정사법(染淨四法)과 훈습(熏習)의 의미
復次有四種法熏習義故 染法淨法 起不斷絶 云何爲四
부차유사종법훈습의고 염법정법 기부단절 운하위사
一者淨法 名爲眞如 二者一切染因 名爲無明 三者妄心 名爲業識 四者妄境界 所謂六塵
일자정법 명위진여 이자일체염인 명위무명 삼자망심 명위업식 사자망경계 소위육진
熏習義者 如世間衣服 實無於香 若人以香而熏習 故則有香氣 此亦如是 眞如淨法 實無
훈습의자 여세간의복 실무어향 약인이향이훈습 고즉유향기 차역여시 진여정법 실무
於染 但以無明而熏習 故則有染相 無明染法實無淨業 但以眞如而熏習 故則有淨用
어염 단이무명이훈습 고즉유염상 무명염법실무정업 단이진여이훈습 고즉유정용
[번역] 다시 다음에 네 가지 법으로 훈습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염법과 정법이 일어나 단절하지 않는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정법으로 이름하여 진여(眞如)라고 한다.
두 번째는 일체 염법의 원인으로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세 번째는 망심(妄心)으로 이름하여 업식(業識)이라고 한다.
네 번째는 망경계(妄境界)로 이른바 육진(六塵)이다.
훈습(薰習)의 의미란 마치 세간의 의복과 같아서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만,
만약 사람이 향기로써 훈습한다면 그 때문에 곧 향기가 있게 된다.
이것도 또한 이와 같이 진여정법엔 실제로 염법이 없지만 단지 무명으로 해서 훈습하기 때문에 곧 염법의 양상이 있게 된다.
무명의 염법에는 실제로 정업(淨業)은 없지만 단지 진여로 해서 훈습하기 때문에 곧 정업의 작용이 있게 된다.
[해설] 여기서는 논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진여훈습과 무명훈습과 망심훈습과 망경계육진훈습의 네 가지 명칭을 나열하고, 다음에 훈습의 의미를 설명하였습니다. 즉,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에 훈습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서로 의지하고 일어나서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첫째로 정법을 일으켜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생멸문 가운데 진여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육염심과 삼세육추상의 근본종자인 원인인데 이를 무명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무명으로 일어나는 망심(妄心)인데 이를 업식과 분별사식의 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분별사식이 반연하는 망경계(妄境界)가 있는데, 이른바 육진훈습에 해당하겠습니다.
다음에 훈습(V sana, paribh vana, 어떤 기운이 다른 것에 영향을 남기는 것)의 의미는 비유하자면 의복의 향기가
훈습(薰習)되듯 염법과 정법이 서로서로 의지하여 훈습하며 서로가 원인이 되고 조연이 되는 법에 논리를 합치시켰습니다.
즉, 염법과 정법이 서로 의지하여 훈습한다는 뜻은 마치 세간의 의복에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만 가령 사람이 향기로써 의복을
쬐면 그 때문에 곧 의복에 향기가 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가 생선시장에 가면 옷에 생선 냄새가 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염법과 정법이 서로 의지하여 훈습하는
의미도 그러하여 진여정법엔 실제로는 염법이 없지만 단지 무명으로 진여정법을 훈습하기 때문에 곧 염법의 모습이 있게 됩니다.
무명의 염법엔 실제로 진여의 정업(淨業)은 없지만 단지 진여의 정업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곧 진여정업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이를 다시 말해보면 앞에서는 염법과 정법으로의 생멸이 일체법을 냄을 나타내었고,
여기에서는 염법과 정법이 서로가 훈습하는 것을 밝혀 일체의 정법이 일어나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앞에서 "아뢰야식이 일체법의 종자를 포섭할 수도 있고 일체법을 현행하여 상속으로 낼 수도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의 문장에선 염법과 정법이 생멸하는 모습만을 나타내어,
한결같이 생멸의 염법으로 현행하여 상속하는 의미인 능생일체법(能生一切法)하는 의미만 제시했지,
성인과 범부의 인과관계가 현행으로 상속하여 단절하지 않는 종자훈습의 의미인 능섭일체법(能攝一切法)하는 의미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특별히 진여정업과 망상의 염법이 서로 서로가 종자를 훈습하여 정법으로서의
성인과 염법으로서의 범부들의 인과관계가 현행으로 상속하는 데에 이르게 하여 오랜 겁이 지나도록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이와 반대로 진여정업으로써 무명염법을 훈습하여 모든 염법의 종자인 근본무명을 소멸시킨다면 진여의 정법작용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보살의 52위(位)의 정진수행을 이루어 상주불변하는 보리열반의 불과를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불가사의하게 습기가 종자를 훈습하고 아뢰야식에 훈습된 종자는 다시 전변하여 현행으로 상속하는 세력입니다. 이야말로 위대한 힘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 훈습하는 의미를 제시하고, 다음 문장에서는 우선적으로 염법의 훈습을 밝힘으로써 진여를 생멸문 가운데
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무명의 불각(不覺)이 진여의 본각(本覺)을 훈습하는 문제를 밝힙니다.
염법훈습(染法熏習)-염법의 훈습
云何熏習起染法不斷 所謂以依眞如法故 有於無明 以有無明染法因故
운하훈습기염법부단 소위이의진여법고 유어무명 이유무명염법인고
卽熏習眞如 以熏習故則有妄心 以有妄心 卽熏習無明 不了眞如法故 不覺念起
즉훈습진여 이훈습고즉유망심 이유망심 즉훈습무명 불요진여법고 불각념기
現妄境界 以有妄境界染法緣故 卽熏習妄心 令其念著造種種業 受於一切身心等苦
현망경계 이유망경계염법연고 즉훈습망심 영기념착조종종업 수어일체신심등고
[번역]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을 일으키어 단절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른바 진여법을 의지하기 때문에 저 무명이 있고, 무명의 염법인 원인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한다.
훈습하기 때문에 곧 허망한 마음이 있게 되고, 허망한 마음이 있음으로 해서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망념을 일으켜 망념의 경계를 나타낸다. 허망한 경계의 염법의 반연(攀緣)이 있기 때문에
곧 허망한 마음을 훈습하여 그것을 생각하여 집착해서 갖가지 업을 짓고 일체의 몸과 마음 등의 고통을 받는다.
[강의] 여기에서는 진여가 염법에 훈습되는 과정을 따져 묻고 밝혔습니다.
훈습의 의미를 요약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습훈(習熏)이고, 두
번째는 자훈(資熏)입니다.
습훈(習熏)이란 근본무명이 일심진여를 염법과 정법의 종자로 훈습하여 염법과 정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무명의 습기가 진여를 물들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훈(資熏)은 근본무명으로 이루어진 무명의 생멸하는 업식이 반대로 근본무명을 다시 훈습하여 일심진여의 이치를
더욱 밝게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는 생멸업식의 허망한 마음과 허망한 경계로 현행하는 것과 현행하는 허망한 경계에서 허망한
마음의 분별을 일으키는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이 서로서로 의지하여 훈습한다는 의미에서 자훈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진여의 일심법을 의지하기 때문에 근본무명이 있습니다.
즉, 근본무명이 진여를 의지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무명염법의 종자인 원인이 바로 근본무명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합니다. 그러므로 진여가 원인이 되고 무명이 반연이 되기 때문에 무명의 습기가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게 됩니다.
그래서 근본무명이 진여를 훈습하기 때문에 곧 허망한 업식심(業識心)이 있게 되고, 허망한 업식심이 있으면 곧 근본무명을 훈습합니다. 그리하여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진여를 생멸하는 아뢰야식으로 변하게 합니다. 근본무명이 있기 때문에 무명에 있는
습기의 세력이 진여를 훈습하여 생멸하는 업식심을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근본무명이 곧 업식의 허망한 마음을 의지합니다.
그러기에 이 업식이 곧 근본무명을 훈습하여 일심의 진여법을 더욱 밝게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로 인해서 일심의 진여법을 밝게 알지 못하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인 불각이 허망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일심의 진여는 본래 허망한 생각이 없었는데,
진여를 의지하여 일어난 무명이 다시 그 자체인 진여를 훈습하여 더욱 밝게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불각이 분별하는 허망한 생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근본무명이
바로 진여인 인(因)의 연(緣)이 되어 진여를 훈습하여
삼세(三細)와 육추(六 )의 양상으로 나고 소멸하면서 상속하는 염법이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무명(無明)으로 말해 본다면 진여법과 하나인 일심을 밝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홀연히 무명불각의 망념을 일으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진여(眞如)의 원명(圓明)함의 반대 의미인 무명(無明)이라고 하였습니다.
{능가경}에서 말하길, "이 무명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를 의지하여 일어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무명인 불각에서 일으킨 하나의 망념훈습의 세력이 본래 밝은 본각진여의 지혜를 장애하고 가려 버립니다.
그 때문에 진여의 밝음을 잃고 그로 인해 진여가 변하여 생멸하는 업식이 되며, 따라서 이것을 허망한 업식심인 망심(妄心)이
되어버립니다. 이 업식심이 일어난 곳은 알기 어려워, 그 망심의 진행이 가장 극도로 미세합니다.
그런 이유로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다시 구상(九相)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대체로 일념무명이 삼세육추를 내는 종자가 됩니다.
진여는 그 망념의 훈습을 당하여 이미 무명업식심으로 변하였다면 이 무명일념이 업식의 의지처가 되어
업식이 반대로 무명일념을 훈습함으로써 진여일심법을 더욱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이 이루어져 삼세상(三細相)으로 환하게 나타나 망심의 분별과 망경계가
이로 인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무명불각이 망념을 일으켜 허망한 경계상으로 나타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허망한 경계상이 나타나면 곧 그 경계를 연으로 의지하고 일심진여의 바다를 훈습하여
전칠식(前七識)인 지상(智相)과 상속상(相續相)의 무명이란 파랑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입니다.
그리하여 육추상을 이루며, 나아가서는 기업상(起業相)인 삼업을 짓고 삼계에 나고 죽는 윤회의 괴로움을 받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 됩니다. 실로 이 때문에 삼계에 생사하는 원인인 혹(惑)과 업(業)과 결과인 고(苦) 즉 혹·업·고가
단절하지 않고 상속하게 됩니다. 이러한 육추 가운데서 처음 두 가지 지상(智相)과 상속상(相續相)이 염(念)이고,
다음의 두 가지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이 집착입니다.
그리하여 미혹을 일으키어 갖가지 업을 짓는 기업상(起業相)으로 업을 지어
일체 몸과 마음 등의 괴로움을 받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의 과보를 받습니다.
이상은 무명이 진여를 훈습함으로 해서 진여가 변하여 삼세육추의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을 총체적으로 밝혔다.
다음에서는 하나의 허망한 경계를 연(緣)으로 의지하고 허망한 업식심을 훈습하여 돕는 육추상을 이루므로
삼계생사가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로 구별해서 밝힌다.
此妄境界熏習義 則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增長念熏習 二者增長取熏習 妄心熏習義則有
차망경계훈습의 즉유이종 유하위이 일자증장념훈습 이자증장취훈습 망심훈습의즉유
二種 云何爲二 一者業識根本熏習 能受阿羅漢 支佛 一切菩薩生滅苦故 二者增長分別
이종 운하위이 일자업식근본훈습 능수아라한벽지불 일체보살생멸고고 이자증장분별
事識熏習 能受凡夫業繫苦故 無明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根本熏習 以能成就業識
사식훈습 능수범부업계고고 무명훈습의유이종 운하위이 일자근본훈습 이능성취업식
義故 二者所起見愛熏習 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
의고 이자소기견애훈습 이능성취분별사식의고
[번역] 이 허망한 경계의 훈습이란 의미에 즉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망념을 증장하는 훈습이다.
두 번째는 집착을 증장하는 훈습이다.
망심(妄心)이 훈습하는 의미에 즉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薰習)이다.
능이 아라한과 벽지불(벽 支佛)과 일체의 대승보살이 괴로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薰習)이다. 능히 범부가 업에 얽매어 괴로움을 받기 때문이다.
무명을 훈습하는 의미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근본훈습(根本薰習)이다. 업식으로 성취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薰習)이다. 분별사식을 성취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강의] 여기서는 허망한 경계의 훈습과 허망한 마음의 훈습과 무명의 훈습에 대한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허망한 경계의 훈습에 대한 의미입니다.
첫째는 허망한 경계를 반연하는 세력을 따라 현상의 인식 가운데서 지상(智相)과 상속상(相續相)의
법집(法執)에 대한 분별로망령된 생각을 증장하는 훈습인 증장념훈습(增長念薰習)이고,
두 번째는 분별하는 현상의 인식 가운데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에서
아(我)의 견(見)과 애(愛)라는 이혹(二惑)을 증장하는 증장취훈습(增長取薰習)입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증장념(增長念)이란 즉 업식의 무명망념입니다. 지금 이 무명망념이 경계상을 연(緣)으로 의지해서 업식을
훈습한 세력 때문에 의식(意識) 가운데 집취상과 계명자상을 더욱 자라나게 하는 인아(人我)의 견일처주지무명(見一處住地無明)인 견도혹(見道惑)과 삼애(三愛)인 수도혹(修道惑)의 번뇌입니다. 앞에서는 무명일념이 업식을 훈습하여 그 때문에 허망한 경계상(妄境界)이 나타난 것을 밝혔습니다. 다음에는 바로 이러한 허망한 경계를 연(緣)으로 의지하여 다시 업식의 훈습을 돕는 그 업식이 육추상 가운데 지상(智相)·상속상(相續相)·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으로 더욱 자라나게 하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다음은 허망한 마음의 훈습에 대한 의미입니다. 우리의 허망한 업식심이 연(緣)이 되어
근본무명을 도와서 훈습한다는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업식심이 연(緣)이 되어 근본무명을 훈습하여 실상무상(實相無相)인 진여를 미혹하고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을
일으켜 상속케 하는 것이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薰習)입니다. 왜냐하면 이 훈습의 의미 때문에 삼승인(三乘人)인 아라한과
벽지불(벽 支佛)과 일체의 대승보살이 분별사식(分別事識)에서 일어나는 범부의 분단생사(分段生死, 업에 의해서 나고 주는 것)는 벗어났으나, 그래도 아뢰야식 내에서 불가사의하게 변역하며 무명으로 진행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 원력에 의해서
나고 죽는 것)의 괴로움을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지식(智識)이 연(緣)이 되어 지말(枝末)로 일어나 현행(現行)하는 지말무명(枝末無明)을 훈습하여
이혹(二惑)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薰習)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훈습으로 인해 견사이혹(見思二惑)을 일으키고 심업(心業)과 신업(身業)·구업(口業)의
갖가지 업(業)을 지어 육도의 범부가 그 업에 얽매어 분단생사(分段生死)의 괴로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무명으로 훈습한다는 의미입니다.
근본무명을 연(緣)으로 의지하여 진여를 훈습하는 의미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근본무명불각이 진여를 훈습하는 근본훈습(根本薰習)입니다.
이는 근본무명불각의 훈습으로 진여를 요동시킴으로써 진여를 업식으로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업식에서 일으킨 지말무명인 견애이혹(見愛二惑)의 훈습인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薰習)입니다.
이는 지말불각이 진여를 훈습하여 분별사식을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는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그 때문에
허망한 업식심 등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근본무명이 진여를 의지하고 일어나 삼세와 육추의 총체적인 모습을
이룬 측면에서 요약하여 말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업식심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무명이 이룬 차별의 측면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업식은 오의(五意)를 한꺼번에 개괄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오의(五意)를 성취한 것입니다.
일으킨 견애(見愛)는 근본무명업식을 의지해서 일어난 지말무명인데,
이 지말무명이 다시 허망한 근본무명업식심을 훈습하여 분별사식을 이룬 것입니다.
이를 다시 간략히 말씀드리면 앞에서는 "허망한 경계연(境界緣)을 의지하고 허망한 업식심을 훈습하여
육추상 가운데 지상(智相)·상속상(相續相)의 분별망념과 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의 집착을 이룬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근본무명이 진여를 훈습한다"라고 설명하였기 때문에 앞부분의 훈습하는 의미와 같지가 않다고
하겠습니다. 이상 여기까지는 염법의 훈습하는 측면이었고,
다음은 정법의 훈습하는 측면입니다.
정법훈습(淨法熏習)-정법의 훈습
云何熏習起淨法不斷 所謂以有眞如法故 能熏習無明 以熏習因緣力故 則令妄心厭生死
운하훈습기정법부단 소위이유진여법고 능훈습무명 이훈습인연력고 즉령망심염생사
苦 樂求涅槃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 卽熏習眞如 自信己性 知心妄動無前境界 修遠離
고 낙구열반 이차망심유염구인연고 즉훈습진여 자신기성 지심망동무전경계 수원리
法 以如實知無前境界故 種種方便起隨順行 不取不念 乃至久遠熏習力故 無明則滅 以
법 이여실지무전경계고 종종방편기수순행 불취불념 내지구원훈습력고 무명즉멸 이
無明滅故 心無有起 以無起故 境界隨滅 以因緣俱滅故 心相皆盡 名得涅槃 成自然業
무명멸고 심무유기 이무기고 경계수멸 이인연구멸고 심상개진 명득열반 성자연업
[번역] 어떻게 훈습이 정법을 일으켜 단절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이른바 진여법에 있기 때문에 무명을 훈습할 수 있고,
훈습하는 인(因)과 연(緣)의 세력이 있기 때문에 곧 허망한 식심(識心)으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괴로움을 싫어하여
열반을 즐겁게 구하게 한다. 이 허망한 마음에 싫어함과 구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한다.
스스로 자기의 성품을 믿어서 마음이 허망하게 요동하지만 목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멀리 여의는 법행(法行)을 닦는다.
여실(如實)하게 목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갖가지 방편에 수순하여 수행을 일으켜 취하지도 않고 망념을 내지도
않는다. 나아가 구원한 훈습의 세력 때문에 무명이 곧 사라진다. 그럼으로써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남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사라진다. 인(因)과 연(緣)이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심상(心相)이 모두 다한다.
이름하여 열반을 체득하여 자연업(自然業)를 이룬다고 한다.
[강의] 여기서 "무엇을 훈습으로 진여의 청정한 법을 일으켜 단절하지 않는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른바 진여법에 안으로 훈습하는 본훈(本熏)이 있기 때문에 무명을 훈습하여 정업(淨業)을 이룰 수 있고,
진여의 법에 내훈(內熏)의 훈습하는 인(因)인 진여법(眞如法)과
연(緣)인 무명(無明)의 세력이 있기 때문에 허망한 식심(識心)으로 하여금 두 가지 생사(生死)의 괴로움인
업계고상(業繫苦相)에 염증을 내고 열반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즐겁게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 망상의 식심은 생사에서 염증을 내고 열반을 구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본훈(本熏)에서 일어난
정업(淨業)의 작용인 신훈(新熏)이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여 정업의 세력을 더욱 증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는 진여가 안으로 무명을 정화하는 본래의 훈습에 의하여 나고 죽는 윤회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영원하고 즐겁고 참 나의 청정함인 열반을 구하려는 마음을 내어 발심하여 수행함으로 해서 진여의 청정한 행을 이루게 하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본래의 훈습입니다. 바로 이 본훈(本熏)의 작용인 정인(淨因)이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여 정업의 세력을 더욱 증가하게 하는데, 이를 새로운 훈습이라고 하여 신훈(新熏)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는 번뇌가 곧 열반이요, 무명이 곧 반야임을 자각하는 것은 상근대지자의 몫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내용은 매우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를 좀더 살펴보면 십신(十信)으로부터
그 이후의 정성(定性)인 십해(十解)인 십주(十住)는 식심(識心)이 허망하게 진여를 요동시킬 뿐,
실재하는 목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알며,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廻向)은 십해(十解)를 의지하여 이를 멀리 여의는 심사관(尋思觀)인
유식무진관(唯識無塵觀) 등의 법행(法行)을 닦습니다.
그리하여 십지의 초지(初地)인 환희지(歡喜地)에선 진여의 도를 깨달아
보고 목전의 경계가 유식(唯識)의 이치뿐임을 자각합니다.
그 때문에 제2지인 이구지(離垢地)에서 제9지인 선혜지(善彗地)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방편도로써
진여에 수순하는 수행을 일으켜 소취경(所取境)인 무상(無相)의 진여를 취하지도 않으며
능념(能念)인 망념을 내지도 않습니다. 나아가서 십지에 도달할 때까지 삼아승기겁의 구원한
오랜 세월동안 훈습하는 세력 때문에 이상은 진여의 청정한 작용으로 무명의 흐름을 진여의 불과위(佛果位)로
되돌아가는 수행인지(修行因地)의 차제를 밝힌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근본무명이 즉시 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서 불과위(佛果位)에서 무명을 끊어 가는 차제를 밝혔습니다.
근본무명은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허망한 무명업식심의 세 가지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이 일어나는 것이 없고,
업식심이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세 가지 상응염심(相應染心)인 허망한 경계가 마침내 사라집니다. 근본무명의 인(因)과
허망한 경계(境界)의 연(緣)이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육염(六染)의 심상(心相)이 모두 다한 것을 열반을 체득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열반인 본각의 지혜인 지정상(智淨相)의 자체에서 불가사의한 업의 작용인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좀더 말하자면 불과(佛果) 가운데 근본무명이 바로 업식(業識)과 전식(轉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상의 식심이 일어남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둘의 업식과 전식의 불상응염심이 진여를 훈습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육진경계가 따라서 사라집니다.
인(因)은 근본무명이요,
연(緣)은 허망한 마음의 경계인 육진(六塵)이며,
심상(心相)은 여섯 가지 물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근본무명이 사라지면 앞의 세 불상응염심이 다하고, 허망한 경계가 사라지면 뒤의 세 상응염심이 다합니다.
일체 허망한 마음의 모습은 여섯 가지 물든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다한다"고 하였습니다.
앞의 허망한 마음과 허망한 경계가 뒤집혔기 때문에 열반을 얻게 되고, 육염심이 모두 번뇌로 장애하기 때문에 앞의
근본무명을 뒤집어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성취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근본무명이 본각(本覺)의 실지(實智)를 장애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훈습을 통하여 정법으로 환원하는 인과를 총체적으로 밝혔고,
다음에는 진여의 이치를 관찰하고 수행하는 사람을 따로 밝힙니다.
* 망심훈습(妄心熏習)-허망한 마음의 훈습
妄心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分別事識熏習 依諸凡夫二乘人等 厭生死苦
망심훈습의유이종 운하위이 일자분별사식훈습 의제범부이승인등 염생사고
隨力所能 以漸趣向無上道故 二者意熏習 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
수력소능 이점취향무상도고 이자의훈습 위제보살발심용맹속취열반고
[번역] 망심을 훈습하는 의미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薰習)이다.
모든 범부와 이승인 등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능력을 따라
수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의지해서 위없는 도에 점차로 나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의훈습(意薰習)이다.
이른바 모든 보살이 발심하여 용맹하고 신속하게 열반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진여가 허망한 마음을 훈습하는 의미에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薰習)인데,
이는 허망한 경계가 유식(唯識)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십신(十信) 이전의
모든 범부와 칠식(七識)·팔식(八識)과 사식(事識)의 미세한 부분은 모르고 단지 아공관(我空觀)만을 닦은 이승인이 평등하게
삼계에 나고 죽는 윤회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고 능력을 따라 수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의지하여 위없는 보리의 도에 점차로
닦아 나아가는 의미에서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의훈습(意薰習)인데,
이는 허망한 경계가 유식(唯識)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한 십신(十信) 이상의 모든 보살이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마음을 발하여 용맹하게 수행을 하여 열반으로 신속하게 향해 나아가는 의미 때문에 단박에 닦아 버리는 의훈습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여가 망심인 삼세육추를 훈습하여 진여인 정법으로 환원하는 것을 따로 밝히고, 이를 수행하는 사람의 측면에서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즉, 진여가 망심을 훈습하면 망심의 염법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망심의 흐름을 돌이켜 정법의 수행을 이룬다고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본 논서에서도 망심훈습(妄心薰習)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진여가 망심을 훈습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러한 의미는 가장 은밀하여 마명보살의 오묘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진여훈습으로 정법(淨法)을 일으켜 단절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선 "진여가 망심을 훈습한다"라고 말한 것은 앞장에서 말하길,
"진여법이 있음으로 인해 무명을 훈습하는 인연력 때문에 망심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고 열반을 즐겨 구하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단지 안에서 진여를 인(因)으로 하였다는 것만을 밝혔을 뿐인데, 이는 본훈(本熏)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서 말하길, "이 망심에서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인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관찰수행에 해당하는 신훈(新熏)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던,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무명망심을 훈습한다"라고 한 망심(妄心)은 오의(五意)를 총체적으로 개괄하여 다섯 가지 의미를 훈습하는 것이 스스로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단지 망심을 훈습하여 진여정법으로 환원하는 시종(始終)의 인과(因果)관계만을 통설적으로 설명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은 돈수와 점수를 분별하는 데는 미치질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진여정법의 훈습을 받는 망심으로써 도리어 진여를 훈습한다면 이 진여를 대상으로 하여 훈습되는 것이,
훈습하는 주체인 훈습하는 것이 망심엔 저절로 육추와 삼세의
두 가지 능훈망심(能熏妄心)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진경계가 유식(唯識)일 뿐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삼세의 허망한 마음으로 법공관지(法空觀智)를 능훈수행하는 삼현십성(三賢十聖)의 돈수와
육진경계가 유식일 뿐임을 알지 못하고 아공관지(我空觀智)만을 닦는 이승인의 점수의 차별을 밝힌 것입니다.
만일 진여정법의 훈습을 받는 육추의 분별사식에서 발심하는 자는 그 때문에 이승인의 기틀을 이루며, 훈습을 받는 오의(五意)에서 발심하는 자는 삼현(三賢)과 십성(十聖)인 십지(十地)보살의 기틀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망심훈습(妄心薰習)이라고 나타낸 것은 이미 진여정법의 훈습을 받은, 그래서 다시 진여정법을 훈습하는 신훈수행(新熏修行)의 허망한 마음입니다. 지금은 진여에 대한 관찰수행을 일으켜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는 능훈의 허망한 마음임으로 근본무명의 훈습을 받는 허망한 마음이 아닌 그 뜻이 은밀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에서는 망심이 진여를 신훈(新熏)하는데 있어서 삼세와 육추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다음은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면서 자체와 그 작용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 진여(眞如)과 자체상(自體相)의 훈습(熏習)
眞如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自體相熏習 二者用熏習 自體相熏習者
진여훈습의유이종 운하위이 일자자체상훈습 이자용훈습 자체상훈습자
從無始世來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 作境界之性 依此二義 恒常熏習 以有力故
종무시세래구무루법 비유부사의업 작경계지성 의차이의 항상훈습 이유력고
能令衆生 厭生死苦 樂求涅槃 自信己身有眞如法 發心修行
능령중생 염생사고 낙구열반 자신기신유진여법 발심수행
[번역] 진여가 훈습하는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자체상훈습(自體相薰習)이며,
두 번째는 용훈습(用薰習)이다.
자체상훈습이란 비롯함이 없는 세대로부터 무루의 법을 갖추어서 불가사의한 업(業)과
경계를 짓는 성품을 갖추고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의지해서 항상 훈습하면서 그 세력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이 열반을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의 법이 있는 것을 믿어서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강의] 여기서는 진여가 훈습하는 의미에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인훈(因熏)인 진여의 자체상훈습(自體相薰習)이며,
두 번째는 연훈(緣熏)인 진여의 용훈습(用薰習)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체상훈습은 시작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여실불공(如實不空)의 본각(本覺)인 무루법을 갖추어 불가사의하고 그윽하게
훈습하는 진여자체상의 작용인 업지(業智)가 있어 망심을 훈습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는 시각(始覺)의 능관지(能觀智)를 이룰 뿐 아니라, 역시 능관지(能觀智)로 관찰할 대상의 경계인 본각(本覺)의 성품까지를 짓습니다.
이러한 본훈(本熏)과 신훈(新熏)인 이 두 공능의 의미를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면서
그 세력이 있으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에서 싫증을 내고 열반의 도를 즐겨 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의 몸에 진여의 법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問曰 若如是義者 一切衆生悉有眞如 等皆熏習 云何有信無信 無量前後差別 皆應一時
문왈 약여시의자 일체중생실유진여 등개훈습 운하유신무신 무량전후차별 개응일시
自知有眞如法 勤修方便 等入涅槃 答曰 眞如本一 而有無量無邊無明 從本已來 自性差
자지유진여법 근수방편 등입열반 답왈 진여본일 이유무량무변무명 종본이래 자성차
別 厚薄不同故 過恒沙等上煩惱 依無明起差別 我見愛染煩惱 依無明起差別 如是一切
별 후박부동고 과항사등상번뇌 의무명기차별 아견애염번뇌 의무명기차별 여시일체
煩惱 依於無明所起 前後無量差別 唯如來能知故
번뇌 의어무명소기 전후무량차별 유여래능지고
[번역] 묻기를, "만약 이와 같은 의미가 있다면 일체 중생이 다들 진여법이 있으므로 평등하게 모두 훈습을 한다.
무엇 때문에 믿음이 있는 중생과 믿음이 없는 중생이 있으며, 한량없이 차별하고 전후로 차이가 나는가?
모든 것은 응당 일시에 진여법이 있음을 스스로 알고 방편도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열반의 도를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야만
하리라." 답하길, "진여는 본래 하나다. 그런데도 중생에겐 한량없고 갓이 없는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해서 원래로부터 자성에서 차별한다. 두텁고 엷음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항하강 모래 수와 같은 상의 번뇌가 무명(無明)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켰다. 아견(我見)과 애염(愛染)의 번뇌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는 무명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다.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을 오직 여래만이 그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 여기서 묻는 것은 이처럼 진여의 자체상과 그 작용이 둘로 훈습하는 의미가 있다면 일체 중생이 다들 진여법이 있으므로
평등하게 모두 훈습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현재는 믿음이 있는 중생과 믿음이 없는 중생이 있으며, 공간적으로는
중생의 믿는 마음이 있고 없는 것이 한량없이 차별하고 시간적으로는 미래와의 전후로 차이가 나는가? 모든 중생들은 안으로
훈습하는 작용이 꼭 같으므로 응당 일시에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방편도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열반의
도를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들이 평등하게 진여법을 갖추었지만 발심하고 수행하고 열반을 증득함이 평등하지 않다는 질문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질문한 의도에 두 가지 차별을 포함하고 있어 평등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즉,
첫째의 의문은 "중생들이 이 진여법을 동일하게 타고나 한결같은 본각의 성품으로서 평등하다면 무엇 때문에
중생의 근기엔 영리함·둔함·사됨·올바름·믿음·불신 등의 한량없이 차별하여 평등하지 못함이 있는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두 번째의 의문은, "중생들이 동일하게 진여의 안으로 훈습하는 것에 의지하여 발심하였다면
의당 일시에 동일하게 믿고, 동일하게 수행하고, 동일하게 열반을 증득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선후지속의 평등하지 못한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다음에 이에 대해서 답을 합니다.
진여정법은 성인과 범부가 동일하여 자체로서 평등하며 둘이 없는 본래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중생에겐 한량없고 끝이 없는
근본무명주지(根本無明住地)가 있으므로 해서 원래는 평등했던 자성에서 차별이 생겨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마음이
두터운 중생과 믿음은 있으나 마음이 엷은 중생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부연하여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미진(微塵)을 능가하는 근본무명증상(根本無明增上)의 지말무명의 번뇌는
근본무명을 의지하여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塵沙惑]의 차별을 일으켰습니다.
근본무명에서 일으킨 사주번뇌장(四住煩惱障)인 아견(我見)과 아애(我愛)로 물든 번뇌가 근본무명을 의지하여 한량없고
끝이 없는 차별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체의 번뇌인 소지장과 번뇌장은 근본무명을 의지하여 일어난
경계입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전후가 한결같지 않고 차별이 한량없어서 전후를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일하게 오직 여래만이 그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답변한 의도도 두 가지 평등하지 않은 차별을 두었습니다.
첫째는 "중생은 원래 진여의 한결같은 성품을 동일하게 타고났다. 그러나 단지 근본무명이 안으로 훈습하는 후박(厚薄)의 정도가 평등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초기에는 영리하고 우둔함, 삿되고 올바름, 믿음과 불신 등등의 차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였고,
두 번째로 "중생들은 한결같이 근본무명이 안으로 진여를 훈습하여, 훈습으로 성취된 번뇌인 삼세와 육추의
정도가 평등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수행과 증오에 있어서 더디고 신속한 차별이 있을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항하사와 평등한……번뇌"는 삼계의 사법(事法)에 무지(無知)한 소지장(所知障)입니다. 이 법집(法執)은 미세하여
끊기 어렵기 때문에 증오를 취함이 더디다는 것입니다. 또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의 염법은 번뇌장입니다. 이 아집의 번뇌는
인지(認知)하기 쉬운 추분별( 分別)이므로 끊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오함이 신속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신심과 불신, 영리함과 우둔함, 더디고 신속한 차별이
근본무명에서 일어난 이혹(二惑)과 육염심(六染心)의 허물일지언정 진여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무명을 훈습함이 한결같지 않은 측면에서 요약하였고,
다음에서는 진여외연(外緣)의 훈습이 한결같지 않은 측면에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又諸佛法 有因有緣 因緣具足 乃得成瓣 如木中火性 是火正因
우제불법 유인유연 인연구족 내득성변 여목중화성 시화정인
若無人知 不假方便 能自燒木 無有是處 衆生亦爾 雖有正因熏習之力
약무인지 불가방편 능자소목 무유시처 중생역이 수유정인훈습지력
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 以之爲緣 能自斷煩惱入涅槃者 則無有是處
약불우제불보살선지식등 이지위연 능자단번뇌입열반자 즉무유시처
若雖有外緣之力 而內淨法 未有熏習力者 亦不能究竟 厭生死苦 樂求涅槃
약수유외연지력 이내정법 미유훈습력자 역불능구경 염생사고 약구열반
若因緣具足者 所謂自有熏習之力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 故能起厭苦之心
약인연구족자 소위자유훈습지력 우위제불보살등자비원호 고능기염고지심
信有涅槃 修習善根 以修善根成熟故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 乃能進趣向涅槃道
신유열반 수습선근 이수선근성숙고 즉치제불보살시교이희 내능진취향열반도
[번역] 또 모든 불법이 정인(正因)이 있고, 연훈(緣熏)이 있다. 인연이 구족해야만 나아가 판별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나무 속 불의 성품이 불이 붙는 정인이긴 하지만, 만일 사람이 알지 못하고 방편을 빌리지 않는다면 저절로
나무를 태운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해 줄 곳이 없는 것과도 같다. 중생 또한 그러하다. 비록 정인으로 훈습하는 세력이
있다해도 만약 제불보살과 선지식 등을 만남으로서 그것으로써 연인을 삼지 않고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가는 자는
곧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
만약 비록 외연의 세력이 있다 해도 안으로 정법(淨法)을 훈습하는 세력이 아직 있지 않은 자는 역시 구경에 생사의
괴로움에서 염증을 내고, 열반도를 즐겨 구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인연을 갖춘 자라면 이른바 저절로 훈습의 세력이 있고,
또 제불보살 등의 자비의 원력과 보호가 된다. 그러므로 능히 생사의 고통에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다는 것을 믿어 선근을 수습할 수 있다. 선근을 수습하여 성숙하기 때문에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제시한
교법(敎法)의 이익에 희열을 만난다. 나아가서 승진(勝進)하여 열반의 도로 취향할 수 있다.
[강의] 위의 문장은 쉽게 비유를 든 것입니다.
또 모든 불법이 내훈의 정인(正因)이 있고,
진여자체의 작용인 연훈(緣熏)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훈의 정인과 자체상의 작용인 연훈이 빠짐없이 만족해야만 불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나무 속 불의 성품이 불이 붙는 정인이긴 하지만, 만일 그 정인을 아는 사람이 없어
방편을 빌리지 않는다면 저절로 불이 생겨나서 나무를 태운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해 줄 곳이 없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연훈(緣熏)까지를 갖추었느냐 빠뜨렸느냐 하는 측면에서 요약하여 중생들이 불법을 이룸이
전과 후로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불성(佛性, buddhata , buddhadhaq tu, tathagatagarbha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정인(正因)과 연훈인 연인(緣因)과 불법을 이루는 요인(了因)입니다.
진여는 중생들이 본래 지녔으므로 불법을 이루는 근본종자인 정인불성이고,
선지식이 본래 지닌 정인을 도와 발심(發心)하게 하는 것은 연인이며,
이와 같은 정인과 연인이 빠짐없이 만족하여 불성을 개오(開悟)하는 것은 요인입니다.
이는 마치 나무에서 불을 내는 나무 속의 불의 정인과 나무를 비비는 연인이 갖추어져야만
그 결과인 불을 취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즉,
나무 속에 있는 불은 중생불성의 정인에 비유하였고, 사람의 힘으로 나무를 비벼서 불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연인에 비유하였으며, 불이 붙어 나무를 태우는 것은 번뇌를 끊고 열반도를 증득하는 요인에 비유하였습니다.
위의 나무의 비유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합니다. 비록 나무의 불의 성품과 같은 불성(佛性)의 바른 요인의 훈습하는 세력이 있다해도 나무의 불의 성품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제불보살과 선지식 등을 만나 그들의 자비(慈悲)와 원력으로 구하여 보호하는 것으로서 도와주는 조건을 삼지 않고 나무가 저절로 불이 붙어 타지 않듯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로 깨달아 들어가는 자는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이 자비스런 원력과 보호해주는 바깥의 훈습하는 세력이 있다고 해도 무명(無明)이 무겁고
두터운 부류의 중생들은 본각(本覺)으로 내훈한다고 하지만 안으로 본각(本覺)의 정법(淨法)을 훈습하는 세력이 아직 있지 않은 자는 역시 생사의 괴로움에서 염증을 내고, 열반도를 즐겨 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불법이 좋고 잘 가르쳐 주더라도 업장이 두텁고 망상번뇌로 뒤얽힌 중생은 깨달아 열반으로 가는 것에서 멀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여래성)이 정인(正因)이고, 제불보살과 선지식의 설법인 진여에서 유출한 자비원호(慈悲願護)의 교법(敎法)이 외연인 연인(緣因)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안으로는 정인의 본훈(本熏)과 외연인 연훈(緣熏)이 교대로 진여정법을 훈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혹(二惑)을 끊고 진여를 증득하기란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이 두 인과 연 가운데서 어느 한쪽이라도 빠뜨린다면 중생들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보살과 선지식은 올바른 의지처이고 믿음의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안으로 본각의 내훈인 정인(正因)과 밖으로 제불보살 선지식 등의 연인(緣因)을 빠짐없이 갖춘 자라면 이른바 스스로에겐 정인훈습의 세력이 있고, 다시 제불보살 등의 자비(慈悲)와 사홍서원(四弘誓願)·호념(護念)의 연인훈습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생사의 고통에서 싫증을 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의 도가 있다는 것을 믿어 선근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수습하여 선근이 성숙하기 때문에 곧바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제시한 대승법의 의미에 대한 이해(解)와 교법(敎法)의 실천과 대승법의 이익을 얻고, 해(解)와 행(行)을 갖추었기 때문에 법의 희열을 만나게 됩니다. 이리하여 십신위(十信位)에서 십해(十解)·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으로 승진(勝進)하여 더욱 나아가서 마침내 십지(十地)에서 불과(佛果)인 열반의 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인(正因)과 연인(緣因)을 빠짐없이 만족했기 때문에 불과인 열반의 도를 쉽게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즉, 수행자는 안으론 진여의 승인(勝因)으로 훈습하는 세력을 의지하고,
밖으로는 제불보살의 뛰어나고 훌륭한 도움을 믿고 의지하여 불성의 탁월한 정인(正因)을 돕고 발기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으로 신속하게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가르침을 열어 보여 주심에 이익을 얻어
환희하는 마음을 내는 의미입니다. 이는 조연(助緣)의 탁월함입니다.
이상에서는 자성에서 훈습하는 작용을 밝혔고, 다음엔 진여로 훈습하는 작용을 밝힙니다. 불교는 어렵다고 합니다.
불교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만약 불자들이 학교에서 공부했던
노력의 반만 첨가한다면 불교공부의 성취는 곧바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쉼 없는 꾸준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불교공부는 하다가 멈추면 물러나 버립니다.
굳은 결심과 믿음으로 완벽한 깨달음을 완성할 때까지 불퇴전(不退轉)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