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師弟 간에 맺어진 學問의 사랑과 淵源
都命基 / 화학과
나라 없는 설음 속에 1937년(丁丑), 와룡산(299.6m) 자락 다랑이 논밭 곁에 새로 지은 초가집에서 낙음공(諱 都慶兪) 12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諱 炳洪)와 어머니(朴連伊) 품 안에서 2남 3녀의 차남으로 추운 겨울에 태어나, 일제시대란 혹독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만난 선생님
해방은 되었으나 일제시대의 규정 아래, 1945년 4월 1일에 성서보통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운동장에는 일본 병정이 말 구루마에 병기와 군량미를 싣고, 성주 김천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때는 어린나이였지만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말에는 쌀밥을 주는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 우리들은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처절한 상황이라, 눈시울을 적시기는 생각이 떠올라, “우리들은 왜 저 말보다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나?”
일제시대를 거쳐 오면서 가정환경과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하여 해방은 되었지만, 초등학교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다행히도 부모님의 열정으로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행운의 기회를 받게 되었을 때, 1948년(76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女 선생님(양계출 선생님)에게 받은 사랑은 저의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었다.
10월 경인데 교실 앞 화단 뜰에서 선생님과 대화 속에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사랑이 담긴 저의 이름을 부르면서, “命基 군 공부 재미는 어떠냐?” 하시면서,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소양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들려주셨던 말씀은, 항상 가슴속에 담아 두었는데, 졸업을 하고 어느 때 예식장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동창 친구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선생님은 저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옛날의 생각을 떠올리시며, “都 敎授는 훌륭한 자리에 있게 되어 대단히 반갑네요!” 하셨다. 그 옛날 사랑이 담긴 말씀으로 저를 지도하였던 스승의 도리를 다하였던 분이라, 철없던 어린 나이에 일이라 평생 가슴속에 잊지 않고, 선생님의 그 한마디 말씀을 오래오래 기억하며, 숨 쉬고 살아왔던 일은 오늘의 자리에 있게 된 초석으로 다짐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중학교 시절에 만난 선생님
6·25사변 중에 대륜중학교(1951~53)를 다녔는데, 고향(西村)에서 왕복 통학 30km를 걸어서 서문시장, 청라언덕, 반월당, 대구향교를 지나 대봉동 교장 사택의 가교사까지 걸어 다녔다. 비가 오면 교실 바닥에 물이 들어와 철벅철벅 하였던 일은 잊을 수가 없었지만, 전쟁 중에 학교를 다닌다는 자부심을 살려 열심히 공부하였던 일은, 道德 시간에 한문선생님(姑母夫 李逌雨)의 가르침, 즉 小學에 나오는 구절로 공부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고사에 나오는 ‘쇄소응대(灑掃應對)’의 실천을 강조하셨던 말씀을 귀담아듣게 되었던 공부로, 어릴 때는 감수성이 빠른 시절이라, 기본 한자를 배워두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선생님
대륜고등학교(1954~1956) 시절에 3학년 담임선생님(黃迪觀)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셨는데, 6·25사변 때 월남하시어, 화학을 가르치셨다. 그때는 북한이 우리(70불)보다도 GDP가 높다고 하시면서, 나라 경제가 발전하려면 과학 기술이 선행이라 강조하시어, 화학에 대하여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말씀은 깊은 사랑이 담겨있었던 지도라 생각하고, 어려운 당시의 가정 사정에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는 인내심과 근면성을 가진 자신에게 화학에 관심을 두게 하시었던 분으로,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주신 은사님이라 오랫동안 사랑이 담긴 親交를 두텁게 가지게 되었다.
특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고비는 고등학교 시절이라, 저 자신의 걸어온 길에서는 고등학교 시절에 선생님들의 가르침으로, 대륜학교 교훈인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남을 사랑하자”라는 가르침에 스스로 실천하고, 오늘날까지도 마음속에는 저의 座右銘으로 가슴에 담아 살아오게 된 것은 대륜중·고등학교 은사님들의 가르침이 아니였던가 생각된다.
대학교 시절에 화학자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은 6·25사변을 거쳐 오면서,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앞으로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교사나 과학자가 되는 길이 국제화에 같은 배를 탈 수 있다고 생각되었고, 이북에서 월남하신 화학 선생님의 지도가, 저의 호기심과 창조성에 맞는 공유결합으로 작용하여, 더욱 활성화 시켜 주셔서, 화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스승의 말씀을 따르게 되었던 일은 많은 교훈으로 남아, 귀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대륜 중·고등학교 교사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강원도 양구 북방, 방산지역에서 대성산을 바라보며, 포병부대에서 1년 남진 군복무를 마치고, 경북대학교 화학과 교수님으로 재직하시면서, 총장님이셨던 金相悅 총장님의 추천을 받아, 모교 교사로 근무하게 된 행운의 길을 얻게 되었다.
이때 창조성 사고의 실천으로, 특별 활동시간에 모형 항공기반과 과학반을 담당하였던 일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 생각하고, 학생들과 함께 열심히 노력하여, 전국 대회에 나갈 때마다 전국 제패의 성과를 얻게 되었던 결과는 과학자의 창조성 사고의 지름길을 걷게 되었던 일로, 지금도 師弟간의 열정적인 사랑의 결실로 가끔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옛날 교사 시절을 회상하는 일은 행복의 씨앗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항상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일로 기억에 오래 남기도 하였지요.
특히 대륜중·고등학교에 교사(1963~1969)로 근무하였을 때,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사로서 창조성 사고의 혁신을 살려가며, 열심히 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는 것도 중요한 마음가짐이지만, 지구촌이 하나 되는 세상에 살면서 눈을 크게 뜨고, 燕雀安知 鴻鵠之志(연작안지 홍곡지지: 제비와 참새가 어찌 저 높은 하늘에 나는 고니와 황새의 뜻을 알리오, 즉 땅에서 날고 있는 참새와 제비도 꿈을 가지고, 실천하면 저 높은 하늘의 고니와 황새와 같이 날 수 있다)라는 성현의 말씀을 살려가며, 꿈을 가진 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거울삼아 노력하였더니, 모교 은사님은 대학원 진학을 허락해 주셨기에, 따뜻한 사랑이 없었다면, 나의 꿈은 좌절되어 부끄러운 선생으로 살아오게 되지 않았을까?
대륜중·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교사로 근무하면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노력하였더니, 사랑이 담아있는 ‘師弟同行’의 아름다운 길을 걷게 되어, 大人다운 스승으로, 부끄럽지 않은 弟子가 되기로 마음속에 깊이 다짐하며, 과학자다운 학문 연구에 불타오르는 마음을 달랠 수 없어, 교사로 재직 중, 1967년 대구대학(嶺南大學校 前身)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걷게 되었다.
학문의 길을 걸으면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皇甫漢 교수(현재는 미국에 계심)와 학생 간에 새로운 동행 관계를 맺고, 부끄러운 제자가 되지 않게 정열을 다하여 노력하였더니, 교수님으로부터 사랑의 지도를 받게 되어, 늦은 나이에도 더욱 연구에 재미를 느껴, 21세기의 첨단산업으로 부상할 혁신 나노기술(Nano Technology)을 개발하여, 비금속 자성재료(Barium-Ferrite)에 관심을 갖고, 무더운 여름 1300도C의 고온에서도 재미를 느껴 연구와 실험에 열중하였다.
열악한 연구 환경에서도 교수님과 함께 사랑의 師弟 관계를 맺게 된 것은 행운의 기회라 생각하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 1969년 2월 영남대학교(1967년 12월 27일 영남학원으로 통합) 대학원을 졸업하고, 3월부터 화학과가 창설되어, 대학 교수의 자리를 얻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꿈속에 가졌던 ‘연작안지 홍곡지지(燕雀安知 鴻鵠之志)’의 높은 희망을 어느 정도로 달성하여, 학문을 통한 우연한 기회가 참사랑으로 연결된 師弟간의 행복한 ‘유토피아’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외국 유학시절 맺어진 師弟 간의 두터운 사랑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화학과 교수 자리를 얻게 되었으나, 연구 환경이 열악하여 외국 유학을 결심하고,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창의력을 더욱 알차게 살리면서, 일본 문부성이 주관하는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동북대학 화학과에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영남대학교 교수자리에 있으면서, 동북대학 화학과에 유학생으로, 1972년 4월부터 1974년 9월까지 Junnosuke Fujita(藤田純之佑), Hiroshi Ogino(荻野博), Kazuo Saito(齊藤一夫) 교수의 세심한 공동지도로, 일본 도착 2개월 만에 일본 학생에게 주어진 과제가 두 번이나
성공을 하지 못하였던 과제를 지시 받아, 하루가 25시간이라는 생각을 머리에 담고,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성현의 말씀과 경사고(敬思考)의 실천으로 열심히 노력하였더니, 하늘도 감탄하였던지 연구 과제의 맥을 찾게 되어, 가을 학회에 발표할 요지를 작성하고, 대학 내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북해도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던 일은, 여가 선용을 아름답게 하게 되었고, 이러한 결과로 매학기 마다 연속 학회에서 발표하게 되었던 행운은, 하늘에서 내려받은 천운이라 기억된다.
그래서 유학기간 중에 매학기 연속 3회에 연구결과 발표로, 1972년 10월에는 동경 근처 대학에 참가하게 되어 논문을 발표하였고, 1973년 4월에는 오사카대학에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74년 10월에는 구주대학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영광의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지도교수와 유학생 간의 따뜻한 사랑의 결실로, 맺어 이루어진 일이라 생각하고, 학회에 참가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점은 진정한 師弟간의 깊은 애정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항상 가슴속에 우러나는 깊은 사랑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교수들에게 찬사를 받게 되어 박사학위 논문을 1974년 7월에 발표하고, 심사를 통과하여 9월 26일에 귀국하게 되었으니, 師弟간에 믿음과 신뢰가 인정되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 아니었겠는가?
연구 생활 기간에도 한국에 두고 온 가족에게 향수병이 걸리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와 함께, 연구 생활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따듯한 사랑이 담긴 대화의 열정으로, 노력한 결과를 학회에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살려 주기도 하여, 일본 화학회의 봄, 가을 총회가 있을 때마다, 전국을 여행을 겸한 학회 참석과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기회로, 일본 전역을 여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여가 선용으로, 교수와 함께 조수가 운전하며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모리오까(盛岡)를 지나 태평양을 바라보는 삼륙해안(三陸海岸)을 돌아 12시간 동안 함께 여행하였던 일이나, 또한 연구실 연수로 전원이 자오(莊王) 산장과 장미원을 함께 하며, 여가 선용과 학문적 토론을 겸하였던 일은, 일본 유학 생활의 아름다움을 갖게 한 보람된 일로, 師弟 간의 더욱 두터운 알찬 사랑으로 남게 되었다.
특히 외국 유학의 목적은 학문적 성과를 얻으면서, 맺어진 師弟간에 사랑의 결실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고, 동북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어,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하였지만, 인간관계의 친교가 더욱 중요한 성과로 작용하여, 국제간 인간 교류의 활성화로 승화되었던 일은, 행복의 자리로 남기도 하였다.
그 이외에도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은 결과, 일본 학술진흥회(JSPS)의 초청으로 1979년 4월~1980년 1월까지 연구 교수 자격으로, 동북대학교 화학과에 조교수로 계시다가, 나고야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신 Junnosuke Fujita(藤田純之佑) 교수와 공동 연구를 하게 되었던 시절, 대학원 학생을 지도하였을 때, 학생의 연구 태도에 감탄하였던 일은 오랫동안 머리에 남아 있었다. 즉 대학원 학생의 연구지도 과정에서 졸업 시기는 가까워 오는데 결과는 나오지 않아, 한국식으로 논문 과제를 바꾸면 어떻겠느냐 하였더니 "주어진 연구 과제를 끝까지 해보는 것이 연구자의 자세가 아니냐! "하며, 계속 밤잠을 설쳐가며 실험한 결과 훌륭한 성과를 얻어, 학회에 발표할 수 있게 되었던 일은. 물론 외국학생 지도였지만 인간관계에서 師弟 간의 믿음과 사랑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2차로 일본 학술진흥회(JSPS) 초청으로, 1988년 4월부터 1989년 1월까지 동경공업대학 자원화학연구소에서, 노벨상 후보에 몇 번이나 올랐던 A.Yamamoto(山本一夫) 교수와 공동 연구할 기회를 얻어, 모르면 배워야 한다는 師弟 간의 관계를 사랑과 애정으로 유지하였을 때, 훌륭한 연구 성과를 얻게 되어, 미국화학회지에 발표하였던 일은, 전 세계 과학 도서관에 저의 이름을 남겨 두게 되었던 일로 과학자의 꿈은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된 것이 행복한 생활이 아니였던가?
그 이외에도 미국 와싱톤 대학과 영남대학교간의 교환 프로그램에 의하여, 교환교수로 가게 되었을 때, 미국 교수들의 폭넓은 인간관계는 배울 점이 많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과학재단과 일본 학술진흥회 공동 초청으로, 북해도대학 화학과. Sasaki 교수 연구실을 방문하였을 때, 추운 겨울 온천에서 담소와 연구정보를 교환하였던 일은, 살아온 인생 과정에서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겨 두게 되어, 국제 교류의 아름다움을 누리기도 하였다.
영남대학교 화학과 제자들과 師弟 간의 사랑
1969년 3월 31일부터 영남대학 화학과가 창설되었는데, 김동수 교수님을 학과장으로 모시고 두터운 사랑을 받으면서, 교수로 재직하였던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교훈으로 삼고, 어려운 연구시설 사정으로 유리 비커 몇 개와 실험 약품 구입할 돈도 없는 상황에서, 들어온 학생들에게 사랑으로 맺어진 지도로, 학부와 대학원 학생 지도에서, 학생들이 열심히 연구한 결과, 화학과 조태섭 및 김석규 교수와 같이 근무하게 되었고, 애정 서린 師弟 간의 돈독한 정을 함께 나누면서 보내온 연구 생활은 가장 보람 있는 일로 남겨 두게 되었다.
그리고 ‘태초 먹거리 학교’를 설립해 자연식 건강법을 KBS에서 연속 방영하는 충남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 이계호 박사는 영남대학교 화학과 출신 교수로, 그 명성을 높이 하며 영남대학교 홍보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제자라 언제나 감사함을 갖기도 하게 되었지요.
특히 직접 대학원 석·박사과정 지도에서, 온전한 연구 시설 하나 갖추지 않는 상태였지만, 師弟 간의 두터운 믿음과 본인들의 인내와 창의력을 발휘하여 노력한 결과, 훌륭한 연구 성과를 얻어 지방 대학 출신으로, 중앙 무대 학생들과는 어려운 경쟁을 돌파하여, 진주 경상대학 화학교육과 교수로 김봉곤 박사, 경일대학교 공업화학과 교수로 이동진 박사, 경북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정맹준 박사, 영남이공대학 공업화학 교수로 김동엽 박사 등을 배출하여, 하나의 학맥을 형성하게 된 일은 학문의 연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일로, 제자들에게 감사한 정을 나누게 되었으니, 여기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공유결합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험난하고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앞만 보고 달려온 연구 생활에서, 1969년 3월부터 출발하여, 師弟 간의 동고동락하며, 40여 년간 대학교수로 생활하였던 일은 가장 보람된 삶이 아니였던가? 동시에 창조성을 함께 나누며, 인내로 참아온 연구 과정 속에 얻어진 보석 같은 연구결과와 올바른 사람다운 생활의 실천 결과로, 대구광역시 문화상(학술분야)을 받게 되었던 일은, 학술 분야에서 성과도 있었지만, 인간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師弟 간에 주고받는 공유결합과 두터운 사랑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받은 사랑을, 제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슴에 담아 두면서, 학문을 통한 깊은 淵源을 맺게 된 일은 미수(米壽)를 앞에 두고 회고하여 보았을 때, 師弟간에 두터운 믿음과 사랑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로, 오래오래 기억하며 살아오게 된 행복을 누려 왔던 일은, 제자들과 애정을 가지고, 사랑이 담긴 지도가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일이라 생각한다.(師弟同行 2024.06.16.)
|
첫댓글 도 교수님, 긴 시간을 차분히 돌아보아 주신 '귀중한 기억과 감사글' 정말 고맙습니다. 교수님 글은 꼭 '연작시를' 읽는 듯한 운율이 있습니다. "그때는 학교가 처음 시작되어서 실험실습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어요. 유학을 갈 수 있어서 그 시설들을 접할 수 있었고, 또 그걸 제자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었지"라고 하시던 말씀, 또 제자 교수가 "꼭 영남대학 출신이라고 소개하면서 강연을 시작해요." 하면서 자랑스러워 하시던 목소리가 이 운율에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많은 가르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