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조가 벼슬길에 나아가지 전 부인과의 애달픈 사연이 담겨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어느 봄 날, 청명한 날이었다. 김경조는 모처럼 성 밖을 나가서 꽃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공부하는 학생의 신분이었고 미혼이었다. 꽃피고 새가우는 시절, 청년 김경조는 술을 마시고 곳곳을 구경하던 중 목이 마르자 어느 집 문 앞으로 다가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조금 후 16-7세 정도의 아리따운 낭자가 대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어디 사시는 뉘시온지요?”낭자가 묻는 말에 김경조가 대답했다. “나는 성내에 사는 깅경조라고 합니다. 꽃구경을 나왔다가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고자 합니다.”“아 그러세요. 그럼 안으로 들어오셔서 연못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계세요. 곧 마실 것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김경조가 의자가 앉아 연못의 고기들이 노니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낭자가 백자 찻종에 향기로운 엽차를 갖고와서 두 손으로 정중히 올렸다. 엽차를 마시면서 바라보니 낭자의 자태는 때마침 연못가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복사꽃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한창 나이인 김경조는 황홀감에 도취되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아아, 내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아름다운 낭자를 본 일이 없소. 이런 산골에 이렇게 아름다운 낭자가 살다니, 흡사 선녀 같구려”이 말을 들은 낭자는 수줍음에 얼굴이 발그스레 물들면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쌩긋 웃는다. 낭자는 너무나 귀여웠다. 모처럼 술도 마신 데다가 열정이 끓어오르는 김경조는 자신도 모르게 낭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낭자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나, 나는 첫눈에 낭자에게 반하였소. 내가 벼슬길에 나간 후 청혼을 하고 싶소. 낭자의 이름은 무엇이오?”
낭자 : 저는 양도화(楊桃花)예요. 이 말을 하고 낭자는 조용히 손을 빼면서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김경조는 한없이 아쉬운 마음으로 그집 대문 밖을 나와서 걷다가 다시 뒤돌아보았다. 낭자가 대문 밖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다가 눈길이 마주치자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온 후 김경조는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아름다운 낭자가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공부를 하여 벼슬길에 나가야 한다. 그것이 부모님과 나라에 보답하는 길이다.”라며 마음을 다졌다. 김경조는 애써 낭자의 환영을 떨치면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였다. 세월은 흘러 다시 봄이 찾아왔다. 김경조는 새삼스럽게 작년에 만났던 낭자가 무척 보고 싶었다. 청명날이 되자 모처럼 작년의 기억을 더듬어 그 낭자의 집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도 나오지를 않았다. ‘무슨 일일까? 행여 낭자가 그 사이에 시집이라도 간 것일까?’김경조는 한숨을 쉬고 탄식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자신의 심경을 시로 적어서 대문에 다음과 같이 붙여 놓고 힘없이 돌아섰다.
지난해 오늘 이 문 안에는, 사람 얼굴과 복숭아꽃이 고움을 다투었는데
애달파라! 다시 찾아왔건만 사람은 다시 보이지 않고
복사꽃만 외로이 웃고 있구나!
굳게 닫혀져 있는 대문을 힘없이 돌아서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집으로 돌아 왔다. “왜 집안에 아무도 없을까? 이사를 갔을까? 혼인을 했을까?”집으로 돌아와서도 온갖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아, 이러다가 내가 상사병에 걸리겠구나.” 김경조는 밥맛도 잃고 한동안 고민하다가 드디어 감기 비슷한 증세로 앓아누었다. 열흘 가까이 앓아누워 생각하던 중 다시 직접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김경조가 그 집으로 다시 찾아가니 대문은 열려 있는데 난데없이 곡성이 들려왔다. “아아, 누가 죽었나? 행여 그 낭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김경조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렇게 물었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그때 곡소리가 그치더니 어떤 노인이 문을 열고 내다보면서 물었다. “거기 뉘시오? 무슨 일로 오셨소?” 김경조: 예, 저는 김경조라는 사람입니다. 작년에 이댁 낭자님을 본 후로 마음의 병을 앓다 못해 이렇게 찾아오게........“ 그때 노인이 맨발로 다가와서 손을 덥석 잡으며 방으로 이끌면서 말했다.
”아이고, 이사람아 진작 오시지....... 지금 우리 아이가 상사병으로 앓다가 숨이 방금 멎었다네.“ 김경조: 예에? 그게 정말입니까?”노인이 김경조에게 말했다. 노인: 나는 젊어서 장사한다고 떠돌다가 늦게사 장가들어 저 아이를 낳았다오. 저 아이 어미는 산후 후유증으로 곧 세상을 떠났소. 나는 저 아이를 애지중지 키우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소. 이런 처지에 어디 데릴사위라도 구할가 하고 수소문 하던 중이었는데 작년 봄부터 아이의 태도가 수상하였소. 공연히 한숨을 짓거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오. 나는 죽은 제 어미 생각나 그러려니 싶어 측은하게만 여겼지요. 그리고 아흐레 전 청명(이십사절기의 하나 4월 5일 무렵)에 딸아이를 데리고 제 어미 무덤에 다녀왔지요. 그런데 집의 대문에 이르니 편지 속에 시가 적혀 있었소. 나는 장사를 하여 생활에 다소 여유가 있었기에 딸아이에게 틈틈이 글을 가르쳐서 편지를 읽을 수 있었지요. 온갖 약을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조금전 숨이 멎었소.
김경조 : 듣고 보니 모든 것이 제 책임인 것 같습니다. 따님의 모습이나마 보고 싶습니다. 노인 : 그렇게 하오. 노인은 낭자가 누워있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낭자의 얼굴에 덮은 얇은 천을 걷어내자 창백한 모습이 드러났다. 김경조는 격한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와락 달려들어 낭자의 뺨에 얼굴을 부벼대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낭자, 내가 왔소. 나도 상사병을 앓다가 이렇게 찾아왔는데........ 제발 깨어나 주오. 안그러면 나도 낭자 뒤를 따라가리다! 김경조는 너무나 괴로워 낭자를 껴안고 몸부림쳤다. 그런데 낭자의 뺨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 김경조는 귀를 코에 가져다 내었다. 아!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실날보다 가느다란 숨결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김경조는 낭자의 수족을 계속 주물렀다. 기적처럼, 정말 기적처럼 낭자가 소생하는 기미가 보였다. 창백하던 얼굴, 뺨에 핏기가 돌고 백박이 가늘게 뛰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낭자는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그리고 “아아!”하는 소리를 내었다. 낭자는 김경조를 알아보았다. 김경조: 아아, 낭자 깨어났구려, 내가 왔소, 김경조가 왔소.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노인이 그 모습을 보고 급히 딸을 껴안아 일으켰다. 노인: 애야,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낭자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웃음까지 지었다. 아이고, 부처님, 하느님 감사합니다. 김경조: 낭자, 고맙소, 깨어나줘서 너무나 고맙소. 정말 기적 같은 소생이었다. 그후 김경조는 낭자와 혼인을 하여 꿈처럼 행복한 날을 보냈다. 김경조는 벼슬길이 열려, 평소에 존경하던 정몽주를 뫼시고 녹사직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녹사는 오늘날 관청의 서기나 비서와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존경하는 정몽주의 신변이 위험하고, 자신의 생명마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아 마침내 순사(殉死)한 것이다.
그의 부인 양도화는 남편이 살해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앞마당의 복숭아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당시 임신 6개월의 몸이었다. 어찌보면 기구한 운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만나고 헤어짐의 과정에서 너무나 애달픈 사연을 담고 있다. 참으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전생의 인연이란 말인가?
다음에 계속 이어짐